‘영월 창령사터 오백나한전’을 다녀오며/ 전 성훈
“구름이 달리지 하늘이 움직이는가? 배가 갈 뿐, 언덕은 가지 않는 것을, 본래는 아무것도 없는 것, 어디메서 기쁨과 슬픔 이는가” 편양언기(1581-1644), [東師列傳], ‘성속(聖俗)을 넘나드는 나한의 얼굴들’(1부)와, ‘일상 속 성찰의 나한’(2부)으로 나누어 전시한 국립중앙박물관 ‘영월, 창령사터 오백나한’전에 다녀왔다.
강원도 영월 창령사(蒼嶺寺)터 오백나한(伍百羅漢), 창원리 주민이 우연히 나한상을 발견하여 2001년~2년에 걸쳐 절터를 발굴하였다고 한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줄임말로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불교의 성자’를 뜻한다. <증일아함경>은 부처 입멸 뒤 그의 말씀을 경전으로 편찬하기 위해 모인 ‘가섭’을 비롯한 500명의 제자들을 오백나한이라고 전한다.
우리나라에 뿌리내린 나한사상은 통일신라시대 오백나한을 그려 모신 나한당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개인의 복을 빌고 국가와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는 나한제가 열리기도 했다고 한다.
(1부) ‘성속(聖俗)을 넘나드는 나한의 얼굴들’에서 전시기획자는 “나한은 내면의 고독과 정진으로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 인간으로서는 가장 높은 경지에 올랐습니다. 나한은 이처럼 성과 속의 경계에 머물며, 실은 나와 다르지 않은 높이에 있기에 누구나 편하게 다가 갈 수 있는 대상이 됩니다.”라고 설명했다. 폐사지 창령사터에서 발굴된 서로 다른 표정의 나한 32개를 자세히 바라볼 수 있도록 다양한 각도로 배치 전시하였다. 그 중에 가장 관심이 갔던 곳은 나한이 없는 33번째 좌대였다.
‘식욕과 색욕을 떠나지 못한 삼심삼천 세계’를 상징하는 듯, 33번째 좌대에 ‘당신 마음속의 나한을 보세요.’라는 팻말이 있어, 전시기획자의 의도가 크게 돋보이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부) ‘일상 속 성찰의 나한’에서 현대인의 질곡 속의 삶을 치유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라며, 전시기획자는 “빌딩 숲 현대인의 도시 일상, 복잡하게 얽힌 사람들의 일상, 그들의 수많은 이야기 그 속에 파묻혀 오랜 시간 잊고 지내온 나의 내면의 소리 가만히 귀 기울이면 소음은 잦아들고 조용히 떠오르는 내 마음의 소리, 깨달은 자, 나한과 같이 가만히 귀 기울여 보세요. 내 마음의 자리에서”라고 말했다. ‘오백나한’전을 관람 온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대로 나한을 바라보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당신 마음속의 나한을 보세요.’라는 팻말이 있는 곳은 그다지 사람들이 찾지 않았다.
몸통이 어딘가로 떨어져나가 온전한 모습이 아닌 얼굴만 있는 나한도 있었다. 씁쓸한 마음으로 성하지 못한 몰골의 나한을 보는데 문득 어떤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적폐의 원흉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창살 안에 갇힌 사람 그리고 삼지창을 들고 세상을 적폐몰이 놀이터로 휘몰아가는 일그러진 골목대장이 떠오른다. 칙칙하고 어둡고 답답하고 암담한 오늘의 현실 때문에 이런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사람들은 타인의 모습과 타인의 시선에 관심을 기울이며 자신의 내면의 모습에는 관심이 없거나 일부러 무관심한 것처럼 지내는 것 같다.
오백나한전을 보고 나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난감하다. 속세를 떠나 출세간의 삶을 사는 스님이 아닌 중생은 어차피 거친 파도가 출렁이는 사바세계에 온 몸으로 부딪치며 살 수밖에 없다. 서로 부대끼고 아옹다옹하며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고 그런가하면 불쑥 화도 내고 언성을 높이기도 하며 사는 게 평범한 인간의 삶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을 맞으며 빙그레 웃는 날, 여름철 폭우를 맞아 온 몸이 물에 빠진 생쥐처럼 볼썽사납게 지내는 날,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마음껏 웃으며 가슴을 활짝 펴고 힘차게 걷는 날, 차가운 겨울 눈바람을 맞으며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걸어야하는 날도 있다. 깨달음을 터득했는지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으로 험난하고 세찬 풍파 속을 걸어가는 나그네 삶이 구도의 길이요 깨달음의 길 아닐는지. (2019년 7월)
창령사터 오백나한
중생을 구제하려는 숭고한 마음으로
중생의 모습 그대로 나타난 오백나한
칠백년 기나긴 세월 창령사 터에서
무엇을 기다리며 묻혀 있었을까.
천진난만하게 웃는 아이 얼굴로
주름살투성이 할아버지 모습으로
살짝 삐친 소녀의 애틋한 표정으로
화난 듯 무표정한 이웃집 젊은이 얼굴로
눈꼬리를 위로 치뜬 여염집 아낙네 모습으로
부끄러운 듯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새색시 표정으로
살짝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과년한 누이 얼굴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한숨을 내쉬는 엄마 모습으로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행자의 해맑은 표정으로
가사적삼으로 온몸을 감싸안은 늙은 비구니 모습으로
버거운 등짐을 지고 헉헉 거친 숨을 내쉬며
거칠고 험한 사바세계 다리를 건너다가
잠시 숨을 고르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새털구름, 양떼구름, 뭉게구름이 흘러가고
구름 속엔 수많은 나한의 얼굴이 보인다,
무릇 그 안에 내 모습도 있으련만
구름 속 나한에게서 내 마음 찾을 길 없으니
말없이 빙그레 웃는 돌부처 마음을 너는 아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