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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전통차와 음악에 관한 자료를 보냅니다.
1.성철스님 재세시의 어느 날, 아침 공양 후 백련암 좌선실에서 잠깐 쉬고 있을 때
스님께서 오시어 시자들에게 '영산회상곡'에 관해서 아는지 질문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2. 어느 해 정월 초하루, 신년 종정예하 신년 대담차 법정스님이 오시어 긴 시간의 대담이 있었고
끝날 즈음에, 우리 국민들을 위한 덕담 한말씀을 부탁드리자, 성설스님께서 "차나 한 잔 드시게"라는
말씀을 주셨고, 법정스님께서 '조주스님 가풍[喫茶去]과 같군요'하니, 누구나 차는 즐겨 마시지 않나,
불교안 믿는 사람도 차는 다들 좋아하거든' ---
차 한 잔 드시고, 컴퓨터애서 영산회상 찾아서 감상해 보십시오!
분당에서 혜원 문 창 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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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을 잘 모른다는 당신, 『영산회상(靈山會上)』만 알아도---
남화정 방송작가
한류와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
물론 아직은 그 수가 많지 않으니까 화제도 되는 거겠지만, 우리가 “한국 음식에는 비빔밥도 있고, 불고기도 있고---”하면서 돈까지 써가며 광고를 했던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다. 이제 스스로 공부하기 시작한 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템플스테이를 하다가 “저기요, 저 사천왕상 손에 있는 저 악기는 이름이 뭔가요?”, “근데 한국불교에는 스님 염불(念佛) 말고는 전통 음악이 없나요?” 이런 걸 묻기 시작한다면, “저 악기는 비파인데요, 비파에는 향비파가 있고 당비파가 있는데, 저건 당비파구요, 기타처럼 생겼잖아요? 소리도 기타랑 비슷해요.”라거나 “범패(梵唄)라는게 있는데, 절에서 큰 의식을 할 때는 범패(梵唄)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스님들이 노래해요. 무척 장중하고 신비한 느낌을 주는 노래인데, 글쎄 역사가 1000년도 넘었대요.” 뭐 이런 얘기를 술술 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그러나 30년 가까이 국악프로그램 작가로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보면, 국악 전공자와 소수의 애호가를 제외하면, 가야금, 거문고조차도 제대로 구분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아마도 다들 “거 봐, 나만 모르는 게 아니잖아.”하고 있는 듯하다.
뒤늦게 국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분들이 자주 하는 말이 “나도 이제 나이가 드나 봐, 국악이 좋아지네.” 인데, “어? 이거 좋네” 했다가도 금방 다시 뒷전에 두게 되는 건, 국악도 나름 복잡하고 다얀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어느 날 갑자기 불교가 좋아져서 책을 펼친 사람이 낯설고 어려운 용어가 나올 때마다 좌절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하지만, 불교에 이미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안심해도 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음악 가운데는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100개 가운데 하나도 모르면 시작점도 못 찾지만, 그중 하나라도 아는 것이 있다면, 이미 반쯤은 다 아는 마음이 돼서 기고만장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오늘은 일단 영산회상(靈山會上) 이야기부터 해 보자.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왕사성(王舍城) 기사굴산(耆闍崛山) 가운데서 큰 비구 대중 1만 2천 인과 함께 계셨다. 『법화경(法華經)』은 이런 구절로 시작한다. 경전을 좀 더 보면 1만 2천 명은 모두 아라한(阿羅漢)만을 가리킨 것이고, 그 외에도 아직 배우는 과정에 있는 이,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 등등 수만의 존재가 더 있었다고 한다. 도대체 산중에 얼마나 넓은 광장이 있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나 싶지만, 실제 가 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기사굴산은 그리 큰 산은 아니라고 한다. 설법했던 장소는 옹기종기 모여 앉아 봐야 100명도 수용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면 경전에서 얘기한 저 수만 명의 대중이란 그저 부처님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허풍일까, 그럴 리가, 기사굴산에서 설해진 부처님의 말씀은 집대성되어 세상으로 퍼져 나갔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경전에서 얘기한 수만의 대중이란 바로 지금 『법화경』을 읽는 당신까지도 포함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기사굴산(耆闍崛山)은 영취산(靈鷲山) 또는 영산(靈山)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때 부처님과 여러 대중들의 모임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바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다. 주로 대웅전 석가모니 뒤편에 모셔지거나 괘불(掛佛)로 제작되어 절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마당에 걸린다. 부처님을 중심에 두고, 저마다의 역량에 따라 크고 작은 존재들이 구석구석 빼곡히 화면을 채우고 있는데, 저기 저 구름 속에 있는 저 사람이 바로 당신일 수도 있다.
음악에도 『영산회상(靈山會上)』이 있다.
우리 전통 음악 중에도 『영산회상(靈山會上)』이 있다. 사실은 참 많은 『영산회상』이 있다. 『영산회상』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전통음악의 갈래를 대충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통음악은 크게 정악(正樂)과 민속악(民俗樂)으로 구분한다. 바를 정(正) 자를 쓰는 정악(正樂)은 왕실과 양반들을 위한 음악이다. 여기에는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처럼 궁중의식에서 연주하던 음악에서부터 수제천(壽齊天)이나 여민락(與民樂)처럼 궁중 행사에서 연주하던 음악, 그리고 선비들이 한가롭게 즐기던 풍류음악(風流音樂) 등이 포함된다. 어쩌다 들은 전통음악이 ‘역시 느리고 지루하다’라고 느껴졌다면, 아마도 정악(正樂)을 들었을 확률이 높다. 정악(正樂)은 ‘낙이불란(樂而不難) 애이불비(哀而不悲)’를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즐겁지만 난잡하지는 않고, 슬퍼도 비통하지는 않다는 거다. 그래서 늘 평정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음악도 감정을 절제하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에 국악을 들으면서 “역시 우리는 흥의 민족이야.” 또는 “한이 느껴져!”라고 한다면, 그건 민속악일 확률이 높다. 민속악은 짐작하는 것처럼 백성들의 음악이다. 나라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던 백성들은 양반들처럼 느리고 잔잔한 음악을 들으면서 그 속에 담긴 깊은 맛을 찾을 여유가 없다. 명절이나 생일 잔치처럼 어쩌다 하루 마음껏 놀 수 있을 때, 속에 담긴 흥(興)과 한(恨)을 다 발산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민속악은 대체로 슬픈 건 더욱 슬프게, 즐거운 건 더 흥이 나도록 감정을 극대화시킨다.
영산회상(靈山會上)은 정악(正樂)에 속한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조선 성종 대에 편찬된, 당대(當代) 음악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악학궤범(樂學軌範)』이라는 책에서 찾을 수 있다.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說)’이라는 궁중무용을 정리한 항목인데,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은 현재는 학춤을 추다가 학이 무대에 설치된 연꽃봉오리를 쪼면 봉오리 안에서 무용수가 나와서 춤을 추는 연화대무(蓮花臺舞)가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전승되어 온 처용무(處容舞)가 어우러지는 매우 규모가 크고 화려한 춤이다.
시용향악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영산회상만(靈山會上慢)』을 연주하면, 여기(女妓)와 악공(樂工)들이 다 함께 소리를 맞추어 ‘영산회상불보살(靈山會上佛菩薩)’을 노래하면서 들어와 왼쪽으로 세 번 돌고 [‘악학궤범’ 중 <학연화대무합설 회무도(回舞圖)]와 같이 선다. 박(拍)과 대고(大鼓)를 치면 영산회상령(靈山會上令)을 연주하는데, 음악이 점차 빨라지면서 오방(五方) 처용(處容)이 신명나게 춤을 추면 여기(女妓)와 악공(樂工), 의물을 든 사람들, 가면 무동(假面 舞童)까지 모두 몸을 흔들며 즐겁게 노닌 뒤 음악을 그친다.
지금과는 달리, 그 시절에는 악기를 든 악사(樂士)들까지 둥그렇게 서서 춤을 추었던 것 같다. 이때 연주하던 음악이 바로 『연산회상』인데, ‘영산회상만(靈山會上慢)’은 대체로 느린 음악, ‘영산회상령(靈山會上令)’은 매우 빠른 음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궁중무용을 정재(呈才)라고 하는데, 정재(呈才)에는 ‘창사(唱詞)’라고 하는 노래가 포함되는 것이 기본이다. 보통은 국가와 왕실의 안녕,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내용을 노래하는데,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을 출 때만큼은 숭유억불(崇儒抑佛)을 주장하던 조선의 궁중에서 ‘영산회상불보살(靈山會上佛菩薩)’을 노래했다는 것이 신기하게도 느껴진다.
천변만화하는 영산회상(靈山會上)
현재 연주되는 영산회상은 하나의 악곡(樂曲)이 아니라 9개의 작은 악곡들로 구성된 모음곡이다. <상령산> <중령산><세령산><가락덤이> <상현도드리><하현도드리><염불도드리><타령><군악>인데, 이 중에 가장 기본이 되는 음악은 <상령산>이다. 『악학궤범』 당시 연주되던 영산회상을 모체로 다양한 변주곡이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원래의 영산회상은 <상령산>이 되고, <중령산> <세령산>, 그리고 <상령산> 가락을 덜어냈다는 뜻의 <가락덤이>로 이어지며 민간에서 연주되던 악곡들까지 받아들이면서 각각의 곡마다 나름의 특징을 가진 모음곡이 된 것이다. 첫 곡인 <상령산>은 느리고 장중하지만, 뒤로 갈수록 점차 속도도 빨라지고 흥청거리는 느낌이 된다.
『연산회상』은 가야금, 거문고, 대금, 해금, 피리, 장구 등이 각각 하나씩 구성되서 연주한다. 사랑방 같은 좁은 공간에서 연주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소규모 실내 음악을 풍류음악(風流音樂)이라 하는데, 여유가 되다면 단소나 양금 같은 악기를 더하기도 하고, 좁으면 하나나 둘만 모여서 연주해도 된다. 서양음악은 작곡의 순간부터 악기 구성이 정해져 있지만, 우리 풍류 음악은 악기 구성이 자유롭고 구성에 따라 색다른 음색의 조화를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앞에서 영산회상이 참 많다고 했는데, 이 풍류음악으로 연주하는 영산회상이 기본이다. 거문고가 중심이 되기 때문에 <거문고회상>이라고도 하고, <현악 영산회상>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몇 곡을 덜어내거나 <도드리>나 <천년만세>를 같은 곳에 더해서 연주하기도 하는데, 이런 음악은 별스러운 영산회상이라고 해서 <별곡(別曲)>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역마다 말이 다르고 노래가 다른 것처럼 영산회상의 가락도 조금씩 달라지는 데, 지방에서 연주하는 영산회상은 <향제 줄풍류>라고 한다.
<현악 영산회상>을 궁궐 마당처럼 넓은 공간에서 연주하도록 대규모 합주곡으로 편곡한 음악도 있다. 각각의 악기들이 여러 명씩 구성되고, 풍류음악에서는 현악기를 보좌하기 위해 소리를 죽여내야 했던 피리는 악기까지 바꿔 웅장한 소리를 내고, 북 같은 것도 추가된다. 이런 음악을 <유초신지곡(柳初新之曲)>이라고 한다. 이렇게 편곡된 음악을 다시 실내악으로 연주할 때는 <취태평지곡(醉太平之曲)>이라고 한다.
그리고 관악기가 중심이 되는 <관악 영산회상>도 있다. <표정만방지곡(表正萬方之曲)>이라고도 하는데, 현악기는 아예 빼버리고 대규모로 연주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피리 둘에 대금, 해금, 장구, 북 이렇게 여섯 명이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악기 구성을 삼현육각(三絃六角)이라고 한다. 해금이나 아쟁은 현악기 아닌가 생각하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해금, 아쟁처럼 줄을 문질러 소리 내는 악기는 관악기로 취급했다.
<관악 영산회상>은 무용 반주 음악으로 많이 연주된다. 특히 궁중무용에서 <관악 영산회상> 중 <상령산>을 연주할 때는 <황당교주>라고 하고, <삼현 도드리>부터 뒷부분을 연주할 때는 <함령지곡>이라고도 한다. 춤의 흐름에 따라 가락이나 박자가 자유로워지는 특징이 있다.
대체적으로 구분한 것인데,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영산(靈山)에 모인 수많은 불보살처럼 다양한 가락과 장단, 분위기를 가진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전통음악 『영산회상(靈山會上)』이다. 그래서 국악인들도 영산회상으로 음악을 시작해서 마지막까지 평생 영산회상을 갈고 닦는 경우가 많다.
“국악에 관심 좀 가져볼까 하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이 모든 음악을 다 듣고 알아야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구부을 모르면 좀 알아보려 하다가도 “아, 국악은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어.” 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저 “영산회상은 종류가 많다”라는 정도만 알아 두었다가 가끔 인터넷으로 영산회상을 검색해 들어보면서, 그날 그날 나의 컨디션과 어울리는 영산회상을 찾아보는 것도 우리 음악을 즐기는 방법이 될 수 있겠다. <끝>
*남화정-방송작가. 국악방송<노래가 좋다> KBS World<얼쑤 우리가락>등을 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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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과 차(茶)의 결합으로 탄생한 선원차(禪院茶)
정종섭 한국국학진흥원장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를 이해하는 데는 일본 차(茶) 문화의 역사도 알 필요가 있다. 일제 강점 시기에 일본식 다도(茶道)가 행해진 적이 있고, 요즘에는 일본차도 많이 마시고, 특히 일본 다법(茶法)에 따라 말차(抹茶)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일본의 차는 헤이안 시대 초기에 그 역사가 시작된다.
중국 절강성 천태현에 있는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로 유학을 가 천태종(天台宗)을 배우고 805년에 귀국한 일본 천태종의 시조 사이초(最澄, 767~822) 대사가 사가현 오우미(近江)의 사카모토(板本)에 있는 히요시신사(日吉神社)에 차 씨를 심고, 806년 일본 진언종(眞言宗)의 시조 구카이(空海, 774~835) 대사가 당나라에서 차 씨를 가지고 들어와 히젠(肥前)의 나카사키(長崎)에 심은 것에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일본 차의 역사
『일본후기(日本後記)』에는 30여년 동안 중국에서 수행하고 805년에 귀국한 에이추(永忠, 743~816) 화상이 815년에 사가천황(嵯峨天皇, 786~842)에게 오우미의 범석사(梵釋寺)에서 차를 달여 바친 후, 천황이 교토 인근 지역에 차나무를 심어 차를 공납(貢納)하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견당사(遣唐使) 파견이 중단된 후로는 차를 마시는 문화도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차 씨를 가져와 일본에 차를 재배하면서 본격적으로 다도(茶道)를 시작한 사람은 일본 선종(禪宗) 임제종(臨濟宗) 황룡파(黃龍派)를 개창한 에사이(明菴榮西, 1141~1215) 선사이다. 그래서 그를 일본 다도(茶道)와 사원차(寺院茶)의 시조라고 한다. 황룡파는 북송 때 임제종의 황룡혜남(黃龍慧南, 1002~1069)이 개창한 일파이다. 예사이는 일본 천태종의 시발지인 교토의 히에이산(比叡山) 연력사(延曆寺)에서 천태밀교(天台密敎)를 공부한 후 송나라 때인 1168년과 1187년에 걸쳐 천태산 만년사(萬年寺), 천동산(天童山) 경덕선사(慶德禪寺) 등에 유학을 다녀왔다.
천태산(天台山)은 차 산지로 유명했고, 선종 사찰에서는 끽다례(喫茶禮)가 성행하였다. 1191년에 귀국하면서 천태산 운무차(雲霧茶)의 씨와 송나라 선원(禪院)의 다법(茶法)을 도입하였다. 차 씨는 히라도(江戶) 천광사(千光寺)와 사가(佐賀) 배진산 영선사(靈仙寺)에 심은 다음에 다시 하카다(搏多)의 성복사(聖福寺)에 옮겨 심었다고도 전한다.
그가 사찰에서 시작한 음다(飮茶) 또는 끽다(喫茶)는 승려들의 수행에서 수면 억제와 마음의 안정, 소화 촉진에 효능이 있어 이를 행하였다. 그가 수용한 남송(南宋)의 『선원청규(禪院淸規)』에서 정한 다법(茶法)과 남송의 제다법(製茶法)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증청녹차(蒸靑綠茶)의 제다법으로 연차(碾茶)의 방식으로 만들고, 이를 맷돌인 연(碾)으로 갈아 만든 말차(抹茶)를 다완(茶碗)에 넣고 끓인 물을 부어 찻솔인 차선(茶筅)으로 거품을 내어 진한 말차로 마시는 점다법(點茶法)으로 음다(飮茶)를 행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이를 오차(め茶) 또는 다도(茶道)라고도 했다.
1202년 겸창막부(鎌倉幕府 1185~1333) 2대 쇼군(將軍)인 미나모토 요리이에(源賴家 1182~1204)의 지원을 받아 그가 교토에 건인사(建仁寺)를 창건할 때 도가노(栂尾) 고산사(高山寺)에 주석하고 있던 그의 제자 고벤 묘에(高弁明惠 1173~1232) 화상에게 차 씨를 보내 산에 심게 하면서 본격적으로 차 재배가 시작되었다. 일본에서는 이 도가노의 차를 ‘본차(本茶)’라고 하며 높게 평가하고 나머지를 ‘비차(非茶)’라 했다. 오늘날에도 건인사(建仁寺) 방장(方丈)에서는 에사이의 생일에 끽다의례(喫茶儀禮)인 ‘사두다례(四頭茶禮)’를 행하고 있다.
일본 화엄종 묘에(明惠) 화상은 무가(武家) 집안 출신으로 9살에 신호사(神護寺)의 동자승으로 들어가 숙부인 상각 화상, 문각 화상에 의하여 불문에 귀의하고 동대사(東大寺)에서 수계를 받은 후 동대사의 학두직(學頭職)을 맡기도 하고, 에사이에게 선(禪)을 배우기도 했다. 고토바상황(後鳥羽上皇(1180~1239)으로부터 화엄학의 터전으로 도가노의 땅을 하사받아 고산사(高山寺)를 세웠다. 고산사에는 고토바상황이 사액한 『日出先照高山寺(일출선조고산사)』라는 현판과 에사이화상이 송나라에서 가져와 묘에화상에게 차 씨를 담아 준 흑유(黑釉) 차항아리(漢柿蒂)가 남아 있다.
묘에화상은 고산사에서 주석하다가 입적하였는데, 그의 목조 좌상이 봉안되어 있는 개산당과 사당인 어묘(御廟)가 있다. 묘에화상은 신라 화엄종의 고승인 원효(元曉 617~686)대사와 의상(義湘 625~702)대사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원효와 의상의 일대기를 두루마리 그림[繪卷-회권]으로 조성하는 불사를 주도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그림의 진본은 모두 교토국립박물관에 있다.
건인사(建仁寺)에서 주석하던 에사이화상은 현재 교토 은각사(銀閣寺) 구역에 있는 서원(書院) 건물인 동구당(東求堂) 동인재(同仁齋)에서 처음으로 송나라 다법(茶法)에 따른 다도(茶道)를 시행하였다. 1486년 건립시(建立時)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동구당(東丘堂)은 현존하는 일본 최고(最古)의 서원(書院) 다실 건물이고, 동인재(東仁齋) 다실은 다다미 3장 반 크기 다실(茶室)의 원형이다.
1482년 무로마치막부 8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1436~1490)가 히가시야마(東山)에 동산전(東山殿)이라는 별장을 조성하고 그의 사후에 이를 사찰로 하여 자조사(慈照寺)라 하였다. 임제종 선찰(禪刹) 상국사(相國寺)의 탑두사원(塔頭寺院)인 녹원사(鹿園寺)의 사리전(舍利殿)이 황금색이어서‘금각(金閣)’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비하여, 자조사(慈照寺)의 관음전(觀音殿)을‘은각(銀閣)’이라고 부르면서 통상 은각사(銀閣寺)라고 부른다. 녹원사(鹿園寺)는 북산(北山) 문화를 주도한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1397년에 조성하였다. 동산(東山) 문화의 본산이 된 은각사 서원(書院) 양식의 별장 거실에서 거행된 ‘차노유(茶노湯)’의 다회(茶會)로 형성된 차문화가‘동산차(東山茶)’였고, 이러한 차문화를 일본에서는 서원차(書院茶)라고 하였다.
선종(禪宗)을 지원하던 가마쿠라시대 말기에서 무로마치시대로 넘어오면서 차문화는 더 확산되어 다회(茶會)에서 차와 물의 품질과 산지를 판별해 내는 투차(鬪茶=茗戰)도 행해졌다. 이런 투차(鬪茶)에서는 본차(本茶)와 비차(非茶)의 판별, 차의 향, 색, 맛을 겨루는 것이 중심이었는데, 이런 겨루기가 성행하면서 유흥과 사치, 도박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도가노의 고산사(高山寺)에는 묘에화상이 처음 차를 재배하고 가꾸었던 일본 최고(最古)의 도가노 다원(茶園)이 지금도 있다. 이 차가 나중에 우지(宇治)로 전파되어 우지차(宇治茶)로 발전하였다. 무로마치시대에 아시카가 장군가에서는 무라사키 시키부(973~1014?)의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주 무대이기도 한 우지(宇治)에 전용 다원인 우지칠원(宇治七園)을 조성하였다.
에사이화상은 남송에서 본 것과 중국의 문헌을 바탕으로 하여 차나무의 소개, 차의 약리적 효능과 양생, 찻잎을 따는 채다(採茶)의 시기와 방법, 차의 제조, 음다법 등에 중점을 두고 이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1211년에 쇼군에게 바치는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를 저술하여 남겼는데, 일본에서는 이것이 최초의 다서(茶書)이기에 중국 육우(陸羽)의 『다경(茶經)』과 비교하여‘일본의 다경(茶經)’으로 중시되어 왔다. 오늘날에 와서 보면, 소박한 내용이지만 차에 대하여 전혀 인식이 없던 그 당시에는 중요한 핵심 정보였다. 흔히 경(經)이라고 하면 종교의 경전(經典)을 연상하여 성스러운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어떤 것에 관한 지식을 종합하여 저술한 서물(書物)을 경(經)이라고 불렀다.
선원차(禪院茶)와 서원차(書院茶)
일본 사찰에서 에사이의 다도(茶道)는 선종(禪宗)과 결합하여 선원차(禪院차) 또는 서원차(書院茶)로 발전하였다. 사찰에서 행해진 선원차(禪院茶)의 다도는 송나라의 다법과 다례를 전한 난포 소묘(南浦紹明 1235~1308) 선사에 의해 본격적으로 잡아가게 된다.
일본 사원에서는 이런 선원차(禪院茶)가 다도로 형성되어 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차가 세속에도 확산되면서 남북조 시대(1336~1392)에 들어오면 쇼군이나 귀족들도 일상에서 즐기게 되었다. 이런 음다(飮茶) 유행은 중국에서와 같이 넓은 공간인 서원(書院)의 다실에 중국에서 들어온 물건[唐物]들로 장식해 놓고 차를 즐기는 이른바 서원차(書院茶)로 확산되기도 했다. 이때의 서원(書院)은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서원(書院)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고, 쇼군과 그 가족들이나 귀족들이 사찰에 와서 머물며 쉬는 별장과 같은 건물을 말한다. 교토 동산(東山)의 서원(書院) 다실인 동인재(同仁齎)에서도 이런 서원차(書院茶)가 행해졌다. 물론 쇼군이 일상 생활하는 공간에서도 행해졌다. 이런 다도문화가 점점 다이묘(大名)나 상급 무사(武士) 사회에도 확산되면서 화려하게 꾸민 공간에서 격식에 따라 성대하게 차회(茶會)를 하는 무가차(武家茶) 내지 ‘덴쭈노차(殿中의茶)’문화가 형성되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선원차(禪院茶)는 계속 발전하여 와비차를 창시한 무라타 주고(村田珠光 1423~1502)에서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선다도(禪茶道)가 본격화되었고, 다케노 조오(武野紹鷗 1502~1555)를 거쳐 센노 리큐(千利休1522~1591)에게서 완성되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의 화려한 황금다실의 문화에 대항하다가 그로부터 교토 대덕사(大德寺) 삼문(三門) 금모각(金毛閣) 앞에서 할복 자결할 것을 명받고 세상과 이별하였지만, 센노 리큐가 완성한 와비차 또는 초암차(草庵茶)는 그 이후 아들 센 도안(千道安)으로 계승되었고, 다시 후처의 아들인 센 쇼안(千少庵)과 그의 아들 센 소탄(千宗旦)으로 이어졌다.
화경청적(和·敬·淸·寂)을 핵심으로 한 센노 리큐의 다도정신은 『남방록(南防錄)』에 기록되어 세전(世傳)되어 왔다. ‘세천가(三 千家)’의 시조인 센 소탄에서 고신 소사(江芩宗佐)의 오모테센케(表千家), 센소 소시쓰(仙瘦宗室)의 우라센케(裏千家), 이치오 소슈(一翁宗守)의 무샤노코지센케(武者小路千家)의 ‘세 천가(三千家)’의 다도(茶道)로 분화되어 지금까지 일본 차노유(茶노湯) 다도(茶道)의 원형으로 내려오고 있다.
일본의 전다도(煎茶道)와 차노유(茶の湯)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덖는(炒-초) 방법으로 만든 찻잎을 차주전자(茶罐)에 넣고 뜨거운 물로 우려내어 찻잔으로 마시는 포다법(泡茶法)으로 차를 마시는 것을 일본에서는 ‘전다도(煎茶道)’라고 하고, 큰 찻사발에 말차(抹茶)를 넣고 물을 부어 찻솔로 저어 거품을 내어 마시는 차를 ‘차노유(茶の湯)’라고 구별한다.
일본에서 전다도(煎茶道)는 1654년 중국 명나라에서 은원(隱元) 선사가 일본으로 건너와 우지(宇治)에 만복사(萬福寺)를 창건하고 황벽종을 개창하면서 명나라 시대 문인들이 즐기던 방식으로 차를 마신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황벽종의 승려라고도 하는 바이사오(賣茶翁)은 만복사(萬福寺)에서 이런 다도(茶道)를 익힌 다음 전다도(煎茶道)를 널리 퍼뜨려 민간에 확산되었다.
이렇게 하여 일본의 다도문화는 발전하여 왔고, 오늘날에는 차노유(茶노湯)를 즐기기도 하고 전다도(煎茶道)로 차를 마시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차옥(茶屋), 차실(茶室), 차도구, 차의례, 행다(行茶)의 예법 등을 격조 높게 발전시켜 온 것이 일본 차문화의 특징이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전다도(煎茶道)를 즐기는 것 이외에 일본 차노유(茶の湯)의 다법에 따라 다도(茶道)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나라 차문화의 중흥조 초의선사
차의 발달사를 보면, 초의선사가 만든 차는 우리나라에서 나온 토종차를 솥에 넣어 덖은 다음, 밀실에서 잘 말리어 산차(散茶)로 만든 다음, 이를 가지고 나무틀로 찍어 병차(餠茶)를 만들기도하고, 단차(團茶)를 만들기도한 것으로 보인다. 초의선사의 제자인 범해화상의 <초의차(草衣茶)>라는 시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곡우초청일(穀雨初晴日) 곡우 맑은 첫날에도
황아엽미개(黃芽葉未開) 노란 차 잎은 아직 피지 않았다.
공당정초출(空鐺精炒出) 빈 솥에 정성을 다해 차를 덖고는
밀실호건래(密室好乾來) 밀실에서 잘 말린다.
백두방원인(栢斗方圓印) 잣나무 틀로 방원으로 찍어내고
죽피포리재(竹皮苞裏裁) 대나무 껍질로 잘 꾸려 포장을 한다.
엄장방외기(嚴藏防外氣) 단단히 보관하여 바깥 공기를 차단하니
일완만향회(一椀滿香回) 찻잔 하나에 차향이 가득하다.
유불(儒佛)에 모두 정통했던 범해화상은 대흥사(大興寺)에서 차(茶)에 일가견을 가진 그의 스승 하의정지(荷衣正持 1779~1852) 화상, 호의시오(호衣始悟 1778~1868) 화상, 초의(草衣)선사와 함께 생활하며 그 역시 차에 관하여 조예가 깊었다. 대흥사에서도 선다일미(禪茶一味) 가풍이 있기도 했지만, 차는 절집에서 약으로 매우 소중한 것이기도 했다. 이질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가 차로 치료하여 나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차약설(茶藥說)>을 짓기도 했다. 다산선생이나 추사선생도 평시에는 마음을 다스리는 음다의 즐거움을 만끽하기도 했지만, 유배지에서 소화기 병을 치료하거나 건강을 유지하는데 있어 차가 효능이 있음을 경험하고 차 생활을 일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 차문화의 역사를 보면, 차문화가 쇠퇴해 가던 조선시대에 초의선사가 종래에 차에 관한 자료를 종합하여 체계화하고 이에 따라 차를 만들어 사찰에서 선다(禪茶)의 가풍을 살려내었다는 점에서 우리 차문화의 중흥조(中興祖)라 해도 지나진 말이 아니다. <중략>
많은 저작을 남긴 범해화상은 1873년, 오십을 넘긴 나이로 전국을 유람하던 중 제주 대정현도 둘러보며 지난날 스승 초의선사와 추사선생의 일을 회고하며 시 한 수를 지었다. <대정회고(大靜懷古)>라는 시다.
行過靜邑漫遲留(행과정음만지류) 대정읍 지나가다 할 일 없이 머물러
今昔回頭似水流(금석회두사수류) 돌아보니 예와 지금 흐르는 물은 같네
草老芳名傳野口(초로방명전야구) 초의선사 명성은 야인의 입에 전해오고
阮公神筆掛官樓(완공신필괘관루) 완당선생 신필은 관아 누각에 걸려 있네
徐生眞影千村月(서생진영천촌월) 서생의 진영은 많은 마을 비추는 달이고
朴士高蹤一片丘(박사고종일편구) 박 선비 높은 자취는 한 조각 언덕이라네
借問當年消息事(차문당년소식사) 묻노라, 당시의 일이 어떠하였는지를
東城荒地有空區(동성황지유공구) 동성 황량한 땅에 빈터만 남아 있네
주마등같이 지나가는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허허로운 풍경 속에 가슴이 먹먹했으리라. 어렵고 험난한 시대에 한세월 치열하게 살았던 다산선생, 추사선생, 초의선사, 범해화상이다. 이제는 모두 저세상으로 떠난지 오래되었다. 시간만 다를 뿐 우리도 모두 저세상으로 떠나게 된다. 처음 올 때처럼 빈손으로 말이다. 그래도 오직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 세상이 행복하고 바른 세상이 되기만을 기원하는 것일 뿐.
옛날 일지암(一枝庵)을 찾아 나선 초행길에는 길을 잘못 들어 찾지를 못했으나, 그 후 일지암(一枝庵)에 18년간 주석하기도 한 우리 시대의 다승(茶僧) 여연(如然1948~ ) 화상과 함께 찾아온 적이 있었고, 그다음에는 법학을 전공한 제자들과 남도기행을 하는 길에 발걸음이 이리로 닿기도 했다. 이제는 모두 법률 전문가들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역량을 발휘하며 활동하는 그들과 오랜만에 소요(逍遙)를 만끽하며 나눈 대화에서는 이제는 내가 배우는 것이 더 많았다. 일지암(一枝庵) 마루에 걸터앉아 시간과 공간을 함께하는 동안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을 실감하는 행복감을 느꼈다. 그들은 우리 사회를 훨씬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갈 것이다.<끝>
*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헌법학 원론』등 논저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