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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호패. 마패 제도 | |
고려시대 역참제(驛站制)와 파발제(擺撥制)에 의한 통신의 중요한 수단으로 말을 사용하게 되면서 그 규제를 위하여 마패제(馬牌制)가 실시되었다. 이 제도는 그대로 조선시대에 계승되어 1435년(세종 17)에는 새로 마패를 만들어 왕족 ·관찰사 ·절제사 ·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 ·개성유수 등에게 발급하고 구패는 회수하였다. 이 신패는 조선 후기까지 똑같은 형태로 유지되고 주조(鑄造)만 거듭되었다. | |
지름이 10 cm 정도되는 구리쇠로 만든 둥근 패에 연호 ·연월일과 ‘상서원인(尙書院印)’이라 새기고, 한 쪽 면에는 말을 새겼는데, 말의 수가 1마리부터 10마리까지 여러 종류가 있어 급마규정(給馬規定)에 따라 지급하였다. 또한 암행어사에게 지급된 마패는 어사가 인장 대용으로 사용하였고 어사출두 때는 역졸이 손에 들고 ‘암행어사 출두’라고 크게 외쳤다. | |
조선 후기 상하이[上海]에서 김옥균(金玉均)을 살해하고 돌아온 자객(刺客) 홍종우(洪鍾宇)가 전북 순창에서 의병장 최익현(崔益鉉)의 마패를 훔쳐 서울까지 도망쳤던 일은 마패에 얽힌 최후의 사건이다. | |
● 암행어사 박문수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시호는 충헌(忠憲).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급제, 사관(史官)이 되었다. 24년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올랐다가 노론(老論)이 집권하자 삭직당했다. 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少論)이 득세하자 사서(司書)에 등용되어 영남 암행어사로 나가 부정관리들을 적발했다.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는 종사관(從事官)으로 출전,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발탁되고,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되어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30년 호서어사(湖西御史)로 기민(飢民) 구제에 힘썼으며, 34년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38년 다시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앞서 안동서원(安東書院)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부사(豊德府使)로 좌천되었다. 41년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이어 함경도 진휼사(賑恤使)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다가 기민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그 후 병조판서를 지내고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 49년 호조판서가 되어 양역(良役)의 폐해를 논하다가 다시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좌천되었다. 그 뒤 영남균세사(嶺南均稅使) 등을 거쳐 세손사부(世孫師傅)를 지내고, 52년 왕세손(王世孫:?이 죽자 약방제조(藥房提調)로서 책임을 추궁당해 제주(濟州)에 안치, 이듬해 풀려나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군정(軍政)과 세정(稅政)에 밝았으며, 암행어사 때의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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