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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URITIUS COMMAND by Patrick O'Brian (배경: 1809년 인도양) ------------
"꼭 그런 건 아니라네." 잭이 말했다. "희망곶은 저 고물 뒤쪽으로 지나갔어. 그걸 못봤다니 안됐네. 자네가 바쁜 사이에 아주 근접한 상태로 지나쳤는데 말이지. 하지만 그 전에 테이블 산은 보지 않았나 ? 내가 전령을 자네에게 보냈었는데 말일세."
"그래, 그래, 그 점 아주 고마왔네, 비록 부른 시간이 아주 크리스천답지 않은 (unchristian) 시간이었지만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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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대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저 '크리스천답지 않은' 이라는 단어입니다. 한참 잠들어있을 한밤중에 전령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던 등장인물 스티븐은 이 단어를 마치 '비정상적인' 내지는 '말도 안되는' 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크리스천답다라는 표현은 '이성적이고 정상적이다'라는 표현과 동일시 하고 있는 것이지요. 실제로 당시 사람들은 그런 뜻으로 '크리스천답다'라는 표현을 많이 썼습니다.
사실 한발짝 더 나아가면 크리스천답다는 표현은 그냥 유럽식이라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17~19세기 사람들의 대화에서는 가령 '크리스천다운 옷을 입은' 이라든가 '크리스천 방식으로 일을 처리한다'라든가 심지어 '크리스천답게 커피를 마시겠다'라는 표현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십자군 시절, 이슬람군과 싸워 패배한 기사들은 종종 '상대가 크리스천답게 싸우지 않았다'라고 변명을 하곤 했습니다. 이는 '상대방이 유럽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싸워서 당해낼 수가 없었다'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진 것은 이슬람놈들이 비겁하게 이슬람식으로 싸웠기 때문이다 !!???)
하지만 이걸 한번 더 꼬아서 생각하면 '비겁하게 싸웠다'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크리스천답지 않다'라는 표현은 기독교가 아닌 사람들을 비이성적이고 괴이하며 몰양심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 포르투갈 사람들이 인도를 찾아갔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사실 별 것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달았습니다. 항해 도중에 배에 태운 아라비아 뱃길 안내원에게 나침반이나 육분의같은 항해 도구들을 자랑스럽게 보여줬더니 코웃음만 치질 않나, 인도 군주에게 선물로 내민 모직물이나 혁대, 검 같은 것들은 인도인들로부터 대놓고 '보잘 것 없다'라는 핀잔을 받아야 했습니다. 오로지 대포만이 그럴싸한 물건이었습니다. 즉, 유럽인들은 그전에도 아시아를 여러차례 휩쓸었던, 문화적으로는 뒤떨어지고 오직 무력만 강한 유목민 취급을 받았습니다.
(말타고 와서 활을 쏘나, 배타고 와서 대포를 쏘나, 결론은 야만인)
하지만 유럽인들은 그래도 정신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는데 반해, 아시아인들은 가짜 신을 섬기는 이교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종적으로 아시아인들을 무시하고 괄시한 것은 어느 정도 아시아의 식민지화가 진행된 다음의 이야기였습니다. 나중에는 다윈의 진화론이 '적자생존'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사상을 유럽인들 머리 속에 주입한 결과, 백인들이 유색인종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퍼져서, 인종 차별주의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초기에는, 비유럽인들을 멸시하여 부를 때 주로 'heathen' 즉 이교도라는 종교적 차별성을 강조한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이 책이 히틀러의 사상에도 영향을 줬다고 ?)
그래서 19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인들은 자신들과 비유럽인을 구분할 때 백인이라는 말보다는 기독교인인가 아닌가를 따졌습니다. 일단 사실 백인이라는 구분 자체가 좀 애매모호한 것입니다. 가령 스페인 남부 사람들과 북아프리카 모로코인들의 외견상 차이는, 스페인 사람들과 스웨덴 사람들 사이의 차이보다 뭐 꼭 크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또 인종 구분이 좀 아리송한 소아시아 쪽의 아르메니아 사람들이나 투르크 사람들과는 더욱 인종으로 구분하기가 곤란했습니다. (저는 인종에 대한 UN 선언이 참 명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종간의 차이는 개인 간의 차이보다 더 크지 않다.") 생각해보면 이 시대 유럽인들, 혹은 친유럽파 비유럽인들(가령 아르메니아인들이나 이집트의 콥트교인들)은 거의 예외없이 크리스천이었으므로, 크리스천의 이익이 곧 유럽의 이익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실제로 크리스천은 국적에 상관없이 보호받아야 하는 형제들이다 라는 생각도 실제로 강했습니다. 이는 물론 이슬람과의 오랜 투쟁 결과 생긴 개념이겠지요. 가령, 영국이 19세기 초까지도 북아프리카 쪽에 많았던 백인 노예들을 구출하기 위한 노력을 펼칠 때, 그들은 굳이 '영국인 노예'를 구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백인 노예'를 구하려고 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며, '크리스천 노예'들을 구한다는 목표로 일했습니다. 이때의 이야기는 가일즈 밀턴의 '화이트 골드'라는 책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나름 재미있는 책입니다. (이미지 사진이 없어서 영문판 사진을 올렸습니다만, 국내에도 한글판 나와있습니다. 저도 도서관에서 한글판 빌려 읽었습니다.)
그래서 과연 유럽인들은 기독교 정신으로 아시아인들을 대했을까요 ? 뭐... 별로... 썩... 그렇지는 않았다는 것은 이미 다들 잘 알고 계시리라 봅니다. 사실 모든 종교가 그렇습니다만, 종교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인의 수련에 따른 해탈을 중요시하는 고대 인도 종교인 불교가, 어느덧 우리나라에서는 자식 대학 합격을 기원하는 숭배의 대상으로 부처님을 내세우게 된 것도 저는 비슷한 경우라고 봅니다. 아무튼 기독교도 별로 '크리스천답지 않은' 행동을 많이 했습니다.
Sharpe's Triumph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02년 인도) -----------------------
"너를 체포하겠다, 샤피 !" 헤익스윌 중사가 으르렁거렸다. "체포라고 ! 군법회의에 회부감이야. 틀림없이 총살형을 받게 될 걸." 헤익스윌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탕탕, 넌 이제 죽었어. 좀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말이야, 샤피, 이제 복수를 한 셈이 되는거야. 넌 이제 끝장이야, 끝장이라고. 성경에도 그렇게 씌여있어 !"
"그런 건 씌여있지 않네, 중사 !" 맥캔들리스 중령은 말 안장에서 휙 돌아서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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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저씨가 헤익스윌 중사로 나왔는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시죠 ?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그 변호사...)
저 위에 등장하는 헤익스윌 중사는 샤프 시리즈 내내 주인공 사프의 철천지 원수로 나오는 캐릭터입니다만, 저 친구의 말버릇 중 하나가 바로 저 '성경에도 그렇게 씌여있어 (Says so in the scriptures)' 라는 것입니다. 터무니없는 짓거리를 하면서도 항상 '성경에도 그렇게 씌여있어'라며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지요.
아시아 및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했던 유럽인들의 행동도, 저 헤익스윌 중사가 '성경에도 그렇게 씌여있어'라고 중얼거린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 중에 '야만의 역사 (원제 exterminate all the brutes, 스벤 린드크비스트 작)'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는 조셉 콘래드의 '어둠의 심장'이 영화 '현대묵시록'의 원작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용이 그런 내용인지는 몰랐습니다. 사실 아직도 안 읽어보았으니 아직도 그 내용은 모르고 있긴 합니다. 아무튼, 2천년 전 예수께서, 자신의 이름을 따르는 사람들이 나중에 저런 행동을 한다는 걸 아신다면, 정말 저 시대 영국인들이 하던 욕지꺼리대로 'Jesus wept' 하셨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