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吉祥寺)는, 한국의 사찰이다. 행정주소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323번지
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송광사의 말사이다.
본래는 '대원각' 이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었으나 요정의 주인이었던
故 김영한(1916 ~ 1999, 법명 길상화)이 법정 스님에게 자신이 소유한 요정 부지를
시주하여 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김영한은 일제 시대의 시인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등장하는 나타샤로 알려져 있으며, 백석은
연인이었던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백석은 1929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백시박(白時璞)과 단양 이씨(丹陽李氏)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마친 후에 일본에서 1934 년
아오야마학원 전문부 영어사범과를 졸업하였다.1934년 5월 16일자 《조선일보》에
산문 〈이설(耳說) 귀ㅅ고리〉를 발표하는 것을 시작으로 작가와
번역가로서의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1월 20일에는 그간 《조선일보》와 《조광》(朝光)에 발표한 7편의 시에,
새로 선보이는 26편의 시를 보태어 시집 《사슴》을 당시 경성부 통의동(通義洞)에서
자비로 100권 출간했다. 이후 1948년 《학풍》(學風) 창간호(10월호)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내놓기까지 60여 편의 시를
여러 잡지와 신문, 시선집 등에 발표했으나 정작 시인 자신은 《사슴》 외에는 시집을
더 이상 출간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작품에 평안도 방언을 비롯하여 여러 지방의 사투리와 고어를 사용했으며
1948년 이후 많은 활동을 하지 못했다. 백석은 당시의 조선 땅(오늘날의 남북한)과
만주 일대를 유랑하며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시는 한민족의 공동체적 친근성에
기반을 두었고 작품의 도처에는 고향의 부재에 대한 상실감이 담겨 있다.
남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시인이라는 이유로 백석 시의 출판이
금지되었으나 1987년 월북작가 해금 조치 이후로 백석의 많은 작품들이 활발히
소개되고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주목받고 평가되고 있다. 평북 지방을 비롯한 여러
지방의 사투리와 사라져가는 옛것을 소재로 삼아 특유의 향토주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뚜렷한 자기 관조로 한국 모더니즘의 또다른
측면을 개척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64년경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한때 한국과 일본에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연구 결과 1996년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법정은 처음 1985년에 김영한으로부터 자신의 재산을 희사해 절을 짓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법정은 이를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김영한은 10년 가까이 법정을
찾아와 끈질기게 부탁하여 법정 또한 거절 못하고 받아들여,
1995년 6월 13일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하며
처음 사찰이 되었고, 초대 주지로 현문이 취임하였다.
1997년에 '맑고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 등록되었고 같은해 2월 14일에 초대 주지로
청학이 취임하였다.
김영한은 평생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에는 식사를 하지 않았고,
길상사에 기부된 김영한의 대원각 재산은 시가 천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김영한은
"천 억은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대답했다고 할 정도로
백석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1999년 11월 14일에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유해를 눈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길상사 경내의 길상헌 뒤쪽 언덕에는
김영한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사찰의 창건주였던 법정은 불문에 귀의한 김영한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주었고, 김영한 사후에도
길상사에서 정기법회를 열었으며,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78세(법랍 54세) 로 입적하였다.
또한 길상사의 개원법회가 열리던 1997년 12월 14일에 故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법회에 참석해 법정과 함께 나란히 축사를 했고 법정 또한 이에 답하여
1998년 2월 24일에 명동성당을 찾아 법문을 설법하였다.
길상사 경내에는 공덕주 김영한의 공덕비와 함께,
법정의 영정과 그 생전 유품들을 전시한
기념관도 함께 마련되어 있다.
행지실, 청향당, 길상헌 등의 요사가 존재한다.
2011년 이후 덕운이 주지로 취임하였으며,
불교 자선재단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으로써
여러 가지 사회사업을 펼치고 있다
(길상사의 주지가 맑고향기롭게의 이사장을 겸하고 있다).
또한 경내에 있는 관음보살 석상은 천주교 신자이자
가톨릭예술가인 최종태가 건립한 것으로,
같은 조각가가 혜화동성당에 건립한
성모 마리아 석상과 닮아 있다.
법정(法頂, 속명(본명) 박재철(朴在喆),
1932년 11월 5일(음력 10월 8일) ~ 2010년 3월 11일)은 대한민국의 불교 승려이자
수필가이다. 무소유(無所有)의 정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수십 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널리 전파해 왔다.
1954년 승려 효봉의 제자로 출가하였고
1970년대 후반에 송광사 뒷산에 손수 불일암(佛日庵)을
지어 지냈다.
2010년 3월 11일에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에 위치한 길상사에서
지병인 폐암으로 인해 세수 79세, 법랍 56세로 입적(入寂)하였다.
기일은 불교식 전통에 따라 매년 음력 1월 26일로 지낸다.
1932년 11월 5일(음력 10월 8일)에 전라남도 해남군 우수영(문내면)에서 태어나
우수영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당시 6년제 였던 목포상업중학교에 진학했고
이후 전남대 상대에 입학하여 3년을 수료하였다.
그는 당시에 일어난 한국 전쟁을 겪으며 인간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대학교 3학년때인 1954년에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오대산으로 떠나기로 했던
그는 눈길로 인해 차가 막혀 당시 서울 안국동에 있던 효봉 스님을 만나게 된다.
효봉 스님과 대화를 나눈 그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바로 다음 해에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1959년 3월에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으며,
1959년 4월에 해인사 전문 강원에서 명봉 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1997년 12월 14일에 서울 성북동의 길상사 개원법회에
한국 천주교 성직자인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자,
이에 대한 답례로 1998년 2월 24일에 명동 성당을 방문하여
특별 강연을 가져 종교간의 화합을 보여 주었다.
법정은 '사후에 책을 출간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그의 저서들은 모두 절판, 품절 되었다.
그 후 그가 쓴 책들의 수요가 늘어 일부 책들은
가격이 10만 원 가까이 치솟을 만큼, 품귀 현상이 빚어졌다.
저작권자가 절판 유언을 남겼더라도 출판권은 출판사에게 있기 때문에
더 출판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왔으나
3월 22일, 법정의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들은 그의 유언을 존중하여
모든 책을 절판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쓴 책들의 가격은 10만원 이상 가격이 오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혼란이 벌어지자, 법정의 저서에 대한 저작권을 양도받은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와 출판사 측은 2010년 말까지만 그
의 저서를 판매하기로 결정하였다.
세부적으로는 2010년 7월 30일까지 그의 저서를 서점에 보급하고,
이를 같은해 12월 31일까지만 판매토록 한 후에는
모두 수거하여 완전히 절판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출판가의 혼란은 다소 진정된 것으로 보인다.
대표 저서[편집]
《개식용반대론》
《무소유》 (ISBN 89-08-04131-1)
《영혼의 모음》 (ISBN 8946413409)
《서 있는 사람들》 (ISBN 9788946413238)
《산방한담》 (ISBN 8946413387)
《텅 빈 충만》 (ISBN 9788946413399)
《물 소리 바람 소리》 (ISBN 9788946413375)
《버리고 떠나기》 (ISBN 8946413360)
《인도 기행》 (ISBN 9788946415539)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ISBN 8946413417)
《그물에 걸지 않는 바람처럼》 (ISBN 9788946413450)
《산에는 꽃이 피네》(ISBN 9788995904992)
《오두막 편지》 (ISBN 9788957090930)
《아름다운 마무리》 (ISBN 9788995904961)
《홀로 사는 즐거움》(ISBN 9788946414709
《일기일회》 (ISBN 9788995904985)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사람을》 (ISBN 9788993838022)
이 글은 모두 "위키백과"에서 발췌한 것임 ,
나는 이글을 발췌해 올리면서 또, 내가 촬영한 사찰사진을 내가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보고 한마디씩 할 것을 생각 안한 것은 아니다.
지난번 “쌍용사”집회에선 절대 해설을 삼가 했으나 이번엔 성격이
다르고, 이미 故人이 되신 “김수환” 추기경께서도 “법정스님”과
복잡한 종교의 “이데올로기”를 과감히 뛰어넘어 화합을 추구한 진정한
사랑의 실천적 용기를 두 분을 통해 이미 배웠다.
오히려 “예수천당!” “불신자 지옥!”을 외치며
타 종교를 폄하하는 무리들이
더 부끄럽고 추해 보였다. 왜 ?
이렇게 밖에 전도를 할 수 없나?
길상사는 보잘 것 없는 “막달라 마리아”같은 “김영한” 이란 여인이 요정을 통해
시인 백석을 알게 되고, 사랑을 나누게 됐지만, 연인으로서 만 관계가 유지 됐을 뿐,
안타까운 부부 결합의 많은 고뇌와 안타까움을 뒤로 한 채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인해 그 마저 생사 확인도 안 되는 절망의 순간들이 긴 세월을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사라지지 않고 역경을 밟고 일어나
김영한 여인에게 “일천억”가까이 되는 전 재산의 값어치를
사랑하는 사람의 “시 한줄”값도 안 된다는 치부를 할 수 있게
만든것이 사랑의 힘인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날은 금식을 하며 기리는 마음은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자신에게 확신시켜 주며 , 연인에게 마음을 전하는 최면과 같은 것이 였으리라.....
그러나 세인(世人)들은 그 사랑의 힘에 대한 위력은 보지 않고
“일천억 ”재산 희사에 역점을 두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사실이 서글플 뿐이다.
아마도 “김영한”여인은 자신의 재산이 “요정”으로 그냥 남게 된다면, 필요에 따라
매매가 형성돼 자신과 “백석시인”과의 관계는 연기처럼 사라질 뿐.....
아무것도 그 누구도 그들의 사연을 기억하거나
존재 자체를 잊게 될 것이 우려돼 “법정스님”에게
간곡히 간청하여 “길상사”를 세우고 자신의 유골을 사찰 내에 뿌림으로 써,
영원히 사찰과 그녀의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을
백석시인에게 전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할수록
눈물 나는 “순애보”적 사랑 이야기라 절대 잊혀 지지 가 않으리라 .....
돌아 오는길 , 두눈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룩 " 흘러 내림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