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산기지 둘레길 걷기(부군당 산책길)
서울의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음에도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없는 '용산미군기지 -. 서울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군사주둔지였던 용산미군기지는 지난 120여년간 민간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지만, 우리의 역사와 자원이 켜켜이 쌓여있는 비밀의 화원 같은 공간이다.
용산미군기지는 물리적으로는 단절되어 있지만, 우리는 미군기지를 둘러싼 수많은 관계들과 분명히 함께하고 있다. 용산미군기지 안과 밖에서도 우리의 삶은 존재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용산기지 담벼락을 둘러싸고, 다양한 관계가 맺어지고 사라진다.
이러한 용산미군기지가 용산공원이 되어 우리의 품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다. 여의도 크기에 버금가는 300만㎡ 크기의 거대한 용산미군기지가 용산공원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많은 시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서울시는 용산기지 둘레길 산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용산기지 둘레길 산책은 용산기지 13km 담벼락을 따라 다음과 같이 8개 코스로 구성하였다.
① 독립의지의 길, ② 과거 전환의 길, ③ 부군당 산책길, ④ 녹사평 산책길, ⑤ 한강로 산책길, ⑥ 이촌동 산책길, ⑦ 철도 명암의 길, ⑧ 일제흔적의 길이다.
용산기지 둘레길 산책 프로그램은 2021년 4월부터 6월까지 매주 목요일과 토요일 10:00~12:30에 진행되었다. 산책길 코스마다 진행 일시와 출발 장소가 다르다. 용산기지 둘레길 산책 예약 사이트에서 관련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용산미군기지 담벼락을 따라 함께 걸으며, 용산기지 일대에 펼쳐진 다양한 삶의 모습과 그 안에 담긴 역사, 문화를 느끼고 장소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부군당 산책길은 용산기지 동남쪽 일대를 걷는 산책길로, 세 개의 부군당을 중심으로 용산기지 동남쪽 일대를 걸으며, 용산에 숨겨져 있는 전통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산책이다.
◇ 녹사평 용산공원 플랫폼 : 용산구 녹사평대로 지하 195
- 용산미군기지 주변지역 워킹 투어의 출발점
녹사평 용산공원 플랫폼은 용산미군기지와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인 6호선 녹사평역 내에 조성된 용산공원 시민소통공간이다. 2019년, ➀ 지하 예술정원 조성과 함께 용산미군기지 주변지역 워킹 투어의 출발점으로 운영을 시작했다. 이어서 2020년 7월에 1층 ➁ 기획전시공간과 문화 체험공간, 지하 4층 ➂ 소통공간인 대회의실을 확대 조성하여 총 3개 공간이 운영되고 있다.
◇ 이태원 부군당 : 용산구 녹사평대로 40다길 33
조선시대부터 이태원 마을을 수호하던 제당
부군당(府君堂)은 조선시대 지방 관아나 또는 서울지역과 한강 유역의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제당이다. 이태원 부군당을 건립한 시기는 조선시대인 1619년(광해군 11)으로 전해진다.
이태원 부군당은 할아버지 신을 모시는 제당으로 원래 외인주택 삼거리에 위치하였으나 일제가 이곳에 군사훈련소를 세우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오게 되었다. 초기에는 목조 1간 규모의 건물이었으나 1967년에 개축하여 5백여 평 대지에 16평의 단청 전각으로 지어졌다.
◇ 옛 유엔군사령부 부지 : 용산구 이태원동 22-34 일대
용산 미군기지로 이전하여 반환된 주한 유엔군사령부 부지
이 부지는 주한 유엔군사령부(UNC)가 있었던 곳으로 용산미군기지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2006년 유엔군사령부가 용산미군기지 내부로 철수함에 따라 이듬해 부지가 반환되었다. 현재는 국방부에서 미군에게 공여된 부지를 반환받아 민간 건설사에게 매각하여 개발을 앞두고 있다.
◇ 둔지미 부군당 : 용산구 장문로 15나길 6(보광동 420-2)
조선시대부터 둔지미 마을을 수호하던 제당
보광동 무후묘(武侯廟)로도 불리는 둔지미 부군당은 ‘아랫당’으로도 부른다. 현재는 보광사 사찰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무후(武侯)는 중국 촉한의 승상을 지낸 제갈공명을 일컫는다.
조선시대에 둔지산 아래(현 용산미군기지 ‘사우스 포스트’ 지역)에는 원래 둔지미 마을이 있었다. 이곳이 일본군에 의해 용산이 군용지로 수용되게 되면서 마을 주민들은 두 차례나 강제 이주를 당했다.
1906년에 1차 강제 이주 때는 지금의 용산가족공원 일대로 이주하였다가, 1917년 2차 강제 이주 때에는 지금의 용산구 보광동 일대로 이주하였다.
부군당 건물은 3칸짜리 목조 기와지붕으로 단청을 했으며, 내부 구조는 정면과 측면에 신상이 모셔져 있고 그 밑으로 제단이 있다. 구조는 대지 150평의 공유지에 3칸짜리 목조 기와지붕으로 단청을 하였으며, 서낭목으로 도토리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부군당은 옛날 중국 상인들이 수로를 이용하여 한강으로 올라와서 강변에 배를 댄 후에 이곳 언덕을 따라 도성으로 들어갔으므로 제갈공명을 부군당에 모시게 된 것도 이 때문이라고 전한다.
신상(神像)은 중앙에 제갈공명, 오른쪽 벽에는 홍장군(紅將軍)과 청장군(靑將軍), 그리고 왼쪽 벽에는 당할머니와 산신(山神)이 모셔져 있으며, 산신 뒤에는 시중을 드는 동자가 서 있다. 제갈공명은 붉은색 도포를 입고 앉아서 붓을 들고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홍장군과 청장군은 사당을 지키는 수호신인데 옷 색깔로 홍 · 청장군으로 구분한다.
당할머니는 연두색 원삼에 파랑색 치마를 입고 족두리를 썼으며, 산신은 맹호(猛虎)를 옆에 앉히고 붉은색 도포를 걸쳤으며, 수염을 만지고 있다. 이들 신상은 근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제사는 음력 10월 1일과 3월 1일 낮에 유교식으로 제사를 올리고, 굿은 하지 않는다. 제사 비용은 보광동의 100여 호 집이 추렴하여 마련한다. 제물은 통돼지 한 마리, 떡시루는 아홉 덩이를 준비하며, 제주(祭主)는 제일 나이가 많은 사람이 맡는다.
◇ 서빙고 터 : 용산구 서빙고로 245(서빙고동 199-3 : 현재 대원아파트 부근)
- 조선시대에 국가에 필요한 얼음을 저장하던 창고
서빙고 터에는 전일에 보안사 서빙고분실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얼음 저장 창고인 ‘빙고(氷庫)’는 지금의 용산구 서빙고, 동빙고동에 있었다. 이 당시 서빙고는 진흙으로 된 둔덕에 군데군데 땅을 파고, 벽을 회로 발라 바람이 통하지 않는 8채의 움막집 형태로 지어 얼음을 보관했다.
서빙고에는 8개의 저장고가 있어서 총 13만 4,974정(丁)의 얼음이 저장되었다. 이곳은 동빙고(東氷庫)의 12배, 내빙고(內氷庫)의 3배가 넘는 규모였다. 이곳을 관리하던 관원으로는 무록관(無祿官)인 별제(別制) 1인, 별검(別檢) 1인, 서원(書員) 1인, 군사 2인이 배정되어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서원과 군사가 각기 3인씩으로 늘어났다.
동빙고가 국가 제사용 얼음, 내빙고가 궁중 전용의 얼음을 저장한 데 비해, 서빙고는 궁중, 문무백관 및 환자나 죄수들에게 나누어 줄 얼음까지 저장하였다.
얼음의 저장은 한강이 4치(12.12cm)의 두께로 어는 12월(양력 1월)에 시작되었고, 이듬해 3월부터는 빙고를 열고 얼음을 반출하기 시작하였다. 얼음을 처음 저장하거나 반출할 때는 얼음의 신(神)인 사한신(司寒神), 현명씨(玄冥氏)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 있었다. 그런데 서빙고의 얼음 저장과 시설 관리를 위해서 연간 쌀 1,000여석의 예산이 소요되었다
서빙고 부군당
◇ 서빙고동 부군당 (西氷庫洞府君堂) : 용산구 서빙고로 59길 3-6
(서울시 민속자료 제2호)
조선시대부터 서빙고동 마을을 수호하던 제당
서빙고 부군당은 반포대교 북쪽, 서빙고초등학교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부군당은 약 80여 평의 대지 위에 약 3평 내외의 맞배지붕으로 된 한옥으로 조선시대에 이 마을 주민들이 마을의 수호와 주민의 안녕을 위해 세운 제당(祭堂)이다. 이 부군당을 처음 세운 시기는 15세기 말 또는 16세기 초로 추정하고 있는데 1635년(인조 13)에 중수(重修)하였다.
이 부군당은 정면에 한 칸 규모의 본당이 있고, 왼쪽에는 ‘하주청’이라고 부르는 150평 정도의 제물청(祭物廳)이 있다. 주위는 돌담으로 둘러있고, 대문은 기와를 얹은 솟을대문 형태이며, 대문의 가운데에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다.
이 부군당의 주신은 태조 이성계이므로 조선 건국 이후에 부군당이 세워진 것은 확실하다. 제당 내에는 3점의 신상(神像)이 있다. 정면에는 주신(主神)인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신상이 있고, 왼쪽 벽에는 무속신의 삼불제석(三佛帝釋)이 모셔져 있다.
태조 이성계의 모습은 깃털이 달린 주립(朱笠)을 쓰고, 청색 도포를 입은 채, 호랑이 가죽 의자에 앉아 오른손에 큰 칼을 짚고, 왼손은 허리띠를 잡고 있으며, 등에는 화살 통을 메고 있다. 또한 신덕왕후 강씨 좌우에는 시녀가 한 명씩 서 있다. 그리고 오른쪽 귀퉁이에는 터줏대감을 위해 떡시루를 올려 놓을 수 있는 받침대가 있다.
왼쪽 벽의 삼불제석은 큰 연꽃 위에 흰 장삼에 긴 염주를 목에 두르고 손을 모아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며, 가운데 제석의 머리 뒤에는 파란색, 좌우 제석에는 빨간색, 그리고 주위에는 흰색으로 덮힌 광배가 보인다. 이 세개 신상의 크기는 가로 43cm, 세로 85cm로 모두 견본채색(絹本彩色)으로서, 무신도(巫神圖) 중에서 매우 뛰어난 것으로 보여 진다.
부군당에는 현재 현판 5개가 보존되어 있다. 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숭정 기원(崇禎紀元) 상지 십삼(上之十三) 을해 4월 18일 중건(乙亥四月十八日重建)」이라는 연대가 새겨진 중건기(重建記)가 있다. 이 연대는 1635년(인조 13)에 해당하므로 약 400년 전의 현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부군당이 세워져 동제가 시작된 것은 약 4~500년 전부터로 추정된다.
서빙고동 주민들은 이 부군당에서 음력 정월 초하루에 당제(堂祭)를 지내면서 마을의 안녕질서와 무사함을 빌며 주민들의 화목을 다진다. 제사 때는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앞에 돼지머리와 떡시루를 바치고, 삼불제석과 터줏대감 앞에는 떡시루만 올린다. 부군당 할머니라는 만신(萬神 : 女巫)이 참석하여 제사비용을 부담한 모든 집에 소지(燒紙)를 올리게 하며, 축원해 준다. 제사가 끝나면 ‘반기’라 하여 제물을 고루 나누어주는 음복(飮福)이 시작된다.
이 부군당은 전일에 특무대(국군 기무사령부)자리에 있었으나 1910년대에 일제가 군사훈련장을 만든다고 하여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이 부군당을 중심으로 마을의 수호와 주민의 안녕ㆍ질서ㆍ화목을 기원하며 살아왔던 옛 모습이 잔존해 오고 있어 토속신앙(土俗信仰) 연구에 도움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