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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七十五回 孫武子演陣斬美姬 蔡昭侯納質乞吳師
제75회: 손무자가 진법을 훈련하여 미희를 참하고, 채소후가 인질을 바쳐 오나라에 군사를 청하다.
話說,慶忌臨死,誡左右勿殺要離,以成其名。左右欲釋放要離。要離不肯行,謂左右曰:「吾有三不容於世,雖公子有命,吾敢偷生乎?」眾問曰:「何謂三不容於世?」要離曰:「殺吾妻子而求事吾君,非仁也﹔為新君而殺故君之子,非義也﹔欲成人之事,而不免於殘身滅家,非智也。有此三惡,何面目立於世哉!」言訖,遂投身於江。舟人撈救出水,要離曰:「汝撈我何意?」舟人曰:「君返國,必有爵祿,何不俟之?」要離笑曰:「吾不愛室家性命,況於爵祿?汝等以吾屍歸,可取重賞。」於是奪從人佩劍,自斷其足,復刎喉而死。
한편, 경기가 죽을 때 좌우 군사에게 경계하기를, 요리를 죽이지 말고 그 이름을 이루게 하라고 했다. 경기의 좌우 군사가 요리를 석방하려고 하였으나, 요리가 가려고 하지 않고 좌우 군사에게 말하기를, “나는 세상에 용납될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 비록 공자가 명령했지만 내가 감히 구차스럽게 살기를 바라겠는가?” 했다. 군사들이 묻기를, “세상에 용납될 수 없는 세 가지란 무엇인가?” 하니, 요리가 말하기를, “내가 아내와 자식을 죽여 군주의 뜻을 받들고자 했으니, 어질지 못한 짓이다. 새 임금을 위하여 옛 임금의 아들을 죽였으니 의롭지 못한 일이다. 남의 일을 성취하려고 자기 몸을 해치고 집안을 멸했으니, 이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이 세 가지 악행이 있으니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에서 살겠는가?” 하고, 말을 마치자 마침내 몸을 강물에 던졌다. 뱃사람들이 물 밖으로 건져내자 요리가 말하기를, “나를 건져 올린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뱃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대가 오나라에 돌아가면 반드시 관직과 녹봉을 받게 될 텐데 왜 기다리지 않는가?” 했다. 요리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집안 식구들의 목숨도 아끼지 않았는데 하물며 관직과 녹봉이겠는가? 그대들이 나의 주검을 들고 오나라에 가서 중상을 받으시오.” 했다. 이에 요리가 옆에 있던 무사의 칼을 빼앗아 스스로 제 다리를 자르고 목을 찔러서 죽었다.
史臣有讚云:「古人一死,其輕如羽﹔不惟自輕,并輕妻子。闔門畢命,以殉一人﹔一人既死,吾志已伸。專諸雖死,尚存其胤﹔傷哉要離,死無形影!豈不自愛?遂人之功﹔功遂名立,雖死猶榮!擊劍死俠,釀成風俗﹔至今吳人,趨義如鵠。」又有詩單道慶忌力敵萬人,死於殘疾匹夫之手,世人以勇力恃者可戒矣。詩云:「慶忌驍雄天下少,匹夫一臂須臾了。世人休得逞強梁,牛角傷殘鼷鼠飽。」眾人收要離肢體,并載慶忌之屍,來投吳王闔閭。闔閭大悅,重賞降卒,收於行伍。以上卿之禮,葬要離於閶門城下,曰:「藉子之勇,為吾守門。」追贈其妻子。
사관이 찬양하여 이르기를, “옛사람들은 한번 죽는 것을, 새털같이 가볍게 생각했다. 단지 자기의 목숨뿐만 아니라, 처자의 목숨까지도 가볍게 생각했다. 합려의 왕위를 위해서, 한 사람이 목숨을 바쳤다. 그리고 한 사람을 죽여서, 제 뜻을 펼쳤다. 전제가 비록 죽었으나, 그 후손은 전해지는데, 슬프게도 요리는, 죽어서 남긴 것이 없구나! 어찌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으리오? 다른 사람의 공을 세우게 하고, 공을 이루어 이름도 세웠으니, 비록 죽었으나 영화롭게 되었도다! 칼로 치고 의협심으로 죽는 것이, 풍속이 되었으니, 오늘도 오나라 사람들은, 정의를 추구하여 목을 늘여 바란다.”라고 했다. 또 시를 지어, “경기는 힘이 만인을 대적할만했지만, 외팔이 필부의 손에 죽임을 당했으니, 세상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을 믿는 것을 경계했다. 시에 이르기를, “경기는 천하의 보기 드문 용맹한 영웅이었는데, 외팔이 필부에게 눈 깜짝할 사이에 죽임을 당했다. 세상 사람들아, 힘세다고 자랑하지 말아라. 힘센 황소들도 다치면 들쥐의 밥이 된다.”라고 했다. 군사들이 요리의 지체를 거두어 경기의 시체와 함께 수레에 싣고 오왕 합려에게 투항했다. 합려가 크게 기뻐하여 항복한 군사들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오나라의 군사에 편입시켰다. 오왕 합려가 요리를 상경의 예로써 도성의 창문(閶門) 성 아래에 장사지내며 말하기를, “그대의 용기를 빌려 우리의 성문을 지켜 주시오.” 했다. 요리의 아내와 자식에게도 벼슬을 추증했다.
與專諸同立廟,歲時祭祀。以公子之禮,葬慶忌於王僚之墓側。大宴群臣。伍員泣奏曰:「王之禍患皆除,但臣之仇何日可復?」伯嚭亦垂淚請兵伐楚。闔閭曰:「俟明旦當謀之。」次早,伍員同伯嚭復見闔閭於宮中。闔閭曰:「寡人欲為二卿出兵,誰人為將?」員嚭齊聲曰:「惟王所用,敢不效命!」闔閭心念:「二子皆楚人,但報己仇,未必為吳盡力。」乃嘿然不言,向南風而嘯,頃之,復長嘆。伍員已窺其意,復進曰:「王慮楚之兵多將廣乎?」闔閭曰:「然。」員曰:「臣舉一人,可保必勝。」
전제와 요리의 사당을 함께 짓고 때마다 제사를 지내게 했다. 경기를 공자의 예로 왕료의 무덤 옆에 장사지냈다. 여러 신하에게 크게 잔치를 베푸니, 오원이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대왕의 근심거리는 모두 없어졌지만, 다만 신의 원수는 어느 날에 갚을 수 있겠습니까?” 했다. 백비도 역시 눈물을 흘리며 군사를 동원하여 초나라를 칠 것을 청했다. 합려가 말하기를, “내일 아침에 의논하기로 합시다.” 했다. 다음 날 아침 오원이 백비와 함께 궁중에서 합려를 다시 뵈니, 합려가 말하기를, “과인이 두 경을 위해 출병하고자 하는데 누구를 장수로 삼아야 하겠습니까?” 했다. 오원과 백비가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오직 대왕께서 쓰시겠다고 하는데 누가 감히 목숨을 바치지 않겠습니까!” 했다. 합려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두 사람이 모두 초나라 사람이니 다만 자기들의 원수를 갚으면 틀림없이 오나라를 위해서 힘을 다하지 않을 것이다.” 했다. 그래서 합려는 아무 말도 없이 남풍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고 한참 후 다시 길게 탄식했다. 오원이 이미 그 뜻을 짐작하고 다시 나아가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초나라 병사와 장수가 많아서 걱정이십니까?” 하니, 합려가 말하기를, “그렇소!”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신이 한 사람을 천거하겠습니다. 그 사람이라면 가히 필승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했다.
闔閭欣然問曰:「卿所舉何人?其能若何?」員對曰:「姓孫名武,吳人也。」闔閭聞說是吳人,便有喜色。員復奏曰:「此人精通韜略,有鬼神不測之機,天地包藏之妙,自著《兵法》十三篇,世人莫知其能,隱於羅浮山之東。誠得此人為軍師,雖天下莫敵,何論楚哉?」闔閭曰:「卿試為寡人召之。」員對曰:「此人不輕仕進,非尋常之比,必須以禮聘之,方纔肯就。」闔閭從之。乃取黃金十鎰,白璧一雙,使員駕駟馬,往羅浮山取聘孫武。員見武,備道吳王相慕之意。乃相隨出山,同見闔閭。闔閭降階而迎,賜坐,問以兵法。
합려가 기뻐하며 묻기를, “경이 추천하고자 하는 사람이 누구이며 그의 능력은 어떠하오?” 하니, 오원이 대답하기를, “성은 손(孫)이며 이름은 무(武)이고 오나라 사람입니다.” 했다. 합려는 그가 오나라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문득 얼굴에 기쁜 빛을 띠었다. 오원이 다시 아뢰기를, “이 사람은 육도삼략(六韜三略)에 정통하고 귀신도 짐작하지 못할 기지를 갖고 있으며 하늘과 땅의 절묘한 이치를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병법 13편을 지었으나 세상 사람들이 그의 능력을 알아주지 않아서, 나부산(羅浮山) 동쪽에 은거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사람을 얻어 군사(軍師)로 삼는다면 천하에 맞설 나라가 없을 것인데, 어찌 초나라를 논하겠습니까?” 했다. 합려가 말하기를, “경이 과인을 위해 시험 삼아 불러 보시오.” 하니, 오원이 대답하기를, “그 사람은 가볍게 벼슬에 나올 사람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에 비할 수 없으니 반드시 예를 갖추어 초빙해야 비로소 겨우 나올 것입니다.” 했다. 합려가 그 말에 따라 즉시 황금 십 일(鎰은 스무 냥)과 흰 벽옥(璧玉) 한 쌍을 내주며 오원으로 하여금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몰고 나부산에 가서, 손무를 초빙해 오도록 했다. 오원이 손무를 찾아가 오왕이 사모하는 뜻을 갖추어 말하자, 손무는 오원을 따라 나부산을 나와서 합려를 접견했다. 합려가 계단을 내려가서 맞이하고 자리를 권하고 병법을 물었다.
孫武將所著十三篇,次第進上。闔閭令伍員從頭朗誦一遍,每終一篇,讚不容已。那十三篇:一曰《始計》篇,二曰《作戰》篇,三曰《謀攻》篇,四曰《軍形》篇,五曰《兵勢》篇,六曰《虛實》篇,七曰《軍爭》篇,八曰《九變》篇,九曰《行軍》篇,十曰《地形》篇,十一曰《就地》篇,十二曰《火攻》篇,十三曰《用間》篇。闔閭顧伍員曰:「觀此《兵法》,真通天徹地之才也。但恨寡人國小兵微,如何而可?」孫武對曰:「臣之《兵法》,不但可施於卒伍,雖婦人女子,奉吾軍令,亦可驅而用之。」
손무가 자신이 지은 <병법> 13편을 차례로 합려에게 바쳤다. 합려가 오원에게 명하여 처음부터 쭉 낭송하게 했다. 매번 한 편이 끝날 때마다 합려는 찬탄해 마지않았다. 그 <병법> 13편은, 제1편 시계편(始計篇), 제2편 작전편(作戰篇), 제3편 모공편(謀攻篇), 제4편 군형편(軍形篇), 제5편 병세편(兵勢篇), 제6편 허실편(虛實篇), 제7편 군쟁편(軍爭篇), 제8편 구변편(九變篇), 제9편 행군편(行軍篇), 제10편 지형편(地形篇), 제11편 취지편(就地篇), 제12편 화공편(火攻篇), 제13편 용간편(用間篇)이었다. 합려가 오원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병법>을 보니 손무 선생은 진실로 하늘과 땅의 이치를 통달한 재사요. 다만 과인의 나라가 작고 군사가 미약한 것이 한스러우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니, 손무가 대답하기를, “신의 <병법>은 대오를 갖춘 군사에게 시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비록 부녀자일지라도 제가 군령으로 다스린다면 또한 대열을 지어 군사로 쓸 수 있습니다.” 했다.
闔閭鼓掌而笑曰:「先生之言,何迂闊也!天下豈有婦人女子,可使其操戈習戰者?」孫武曰:「王如以臣言為迂,請將後宮女侍,與臣試之。令如不行,臣甘欺罔之罪。」闔閭即召宮女三百,令孫武操演。孫武曰:「得大王寵姬二人,以為隊長,然後號令方有所統。」闔閭又宣寵姬二人,名曰右姬左姬至前,謂武曰:「此寡人所愛,可充隊長乎?」孫武曰:「可矣。然軍旅之事,先嚴號令,次行賞罰,雖小試,不可廢也。請立一人為執法,二人為軍吏,主傳諭之事﹔二人值鼓﹔力士數人,充為牙將,執斧鑕刀戟,列於壇上,以壯軍容。」
합려가 손뼉을 치며 웃고 말하기를, “선생의 말씀은 너무 현실에 맞지 않습니다. 천하에 어찌 부녀자에게 무기를 주어 훈련을 시키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니, 손무가 말하기를, “대왕께서 신의 말이 현실에 맞지 않다고 하시니, 청컨대 후궁과 시녀들을 내어 주신다면 제가 시험해 보이겠습니다. 만약에 군령을 내려도 시행이 안 되면 신이 대왕을 기만한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했다. 합려가 즉시 그의 궁녀 300명을 불러, 손무에게 훈련을 시키라고 했다. 손무가 말하기를, “대왕의 사랑하는 궁녀 두 사람을 대장으로 삼아 군령을 내리게 하여 통솔하고자 합니다.” 하니, 합려가 또 사랑하는 두 궁녀인 우희(右姬)와 좌희(左姬)를 앞으로 나오게 하고, 손무에게 말하기를, “이들은 과인이 사랑하는 여인들인데 대장으로 삼을 만합니까?” 하니, 손무가 말하기를, “가능합니다. 군사의 일이란 먼저 명령이 엄하게 서야 하며, 그다음에는 상벌에 달려 있습니다. 비록 작은 훈련이지만 이 두 가지를 폐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한 사람의 집법관(執法官)과 두 사람의 군리(軍吏)를 세워 장수의 명령을 군사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맡기겠습니다. 또 두 사람은 북을 치고, 장사 몇 사람을 아장(牙將)으로 삼아 도끼와 칼과 극(戟)을 들고 단상에 벌여 세워서 군진의 위용을 갖추도록 해야 합니다.” 했다.
闔閭許於中軍選用。孫武吩咐宮女,分為左右二隊,右姬管轄右隊,左姬管轄左隊,各披掛持兵,示以軍法:一不許混亂行伍,二不許言語喧嘩,三不許故違約束。明日五鼓,皆集教場聽操。王登臺而觀之。次日五鼓,宮女二隊,俱到教場,一個個身披甲冑,頭戴兜鍪,右手操劍,左手握盾。二姬頂盔束甲,充做將官,分立兩邊,伺候孫武升帳。武親自區畫繩墨,布成陣勢。使傳諭官將黃旗二面,分授二姬,令執之為前導﹔眾女跟隨隊長之後,五人為伍,十人為總,各要步跡相繼,隨鼓進退,左右迴旋,寸步不亂。
합려는 중군에서 (집법관, 군리, 고수, 아장 등을) 골라 쓰도록 허락했다. 손무가 궁녀들에게 분부하여 좌우 두 대열로 나누고, 우희는 오른쪽 대열을 관할하고 좌희는 왼쪽 대열을 관할하게 했으며, 각기 군장을 갖추고 무기를 들게 한 다음 군법을 밝히기를, 첫째, 행과 오가 어지러우면 안 된다. 둘째, 시끄럽게 떠들면 안 된다. 셋째, 일부러 약속을 어기면 안 된다. 라고 했다. 다음 날 새벽 오경(4시쯤)에 손무는 궁녀들을 모두 교련장에 모아 훈련하기로 하고, 합려는 망운대(望雲臺)에 올라가 손무가 여인들을 훈련시키는 것을 구경하기로 했다. 다음날 오경이 되자 궁녀들이 두 대열로 나뉘어 훈련장에 모두 모였다. 궁녀들은 모두 몸에는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투구를 썼으며, 오른손에는 칼을 잡고, 왼손에는 방패를 들었다. 두 궁녀도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대장이 되어, 양쪽에 나누어 서서 손무가 지휘대에 오르기를 기다렸다. 손무가 친히 먹줄로 구획하여 진세를 펼쳤다. 전령관을 시켜 노란색 깃발 두 개를 두 대장 궁녀에게 나누어주고 그 깃발을 손에 들고 앞에서 인도하게 했다. 여러 궁녀가 뒤에 따라 섰다. 다섯 사람을 오(伍)라 하고 열 사람을 총(總)으로 하여, 각기 그 뒤를 따라 행군하다가 북소리에 따라 진퇴하고, 좌우로 선회하며 한 발자국도 흐트러지면 안 된다고 했다.
傳諭已畢,令二隊皆伏地聽令。少頃,下令曰:「聞鼓聲一通,兩隊齊起﹔聞鼓聲二通,左隊右旋,右隊左旋﹔聞鼓聲三通,各挺劍為爭戰之勢。聽鳴金,然後歛隊而退。」眾宮女皆掩口嬉笑。鼓吏稟:「鳴鼓一通。」宮女或起或坐,參差不齊。孫武離席而起曰:「約束不明,申令不信,將之罪也!」使軍吏再申前令。鼓吏復鳴鼓﹔宮女咸起立,傾斜相接,其笑如故。孫武乃揎起雙袖,親操枹以擊鼓,又申前令﹔二姬及宮女無不笑者。孫武大怒,兩目忽張,髮上衝冠,遽喚「執法何在?」執法者前跪。
명령 전달이 끝나자 두 대열이 모두 땅에 엎드려 군령을 받들도록 했다. 잠시 후에 손무가 군령을 내리기를, “북소리가 한 번 울리면 두 대열은 일제히 일어난다. 다시 북소리가 두 번 울리면 왼쪽 대열은 오른쪽으로 돌고, 오른쪽 대열은 왼쪽으로 돈다. 북소리가 세 번 울리면 각각 칼을 들고 전투태세를 갖춘다. 징소리가 울린 뒤에는 본래 대열로 돌아가 물러난다.” 하니, 궁녀들은 모두가 입을 가리고 시시덕거렸다. 북을 치는 군사가 손무에게 보고하기를, “북을 한번 울렸습니다.” 했다. 궁녀들은 혹 일어나고 혹 앉으며 들쭉날쭉 고르지 않았다. 손무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하기를, “약속이 분명하지 않거나 명령이 믿을 만하지 않은 것은 장수의 잘못이다.” 하고 다시 전령관을 시켜 앞의 명령을 전달했다. 북을 치는 군사가 다시 북을 치니 궁녀들이 모두 일어나서 비스듬히 서로 기대어 웃음소리가 여전했다. 손무가 즉시 두 팔을 걷어붙이고 친히 북채를 잡고 북을 치면서 다시 앞의 명령을 알렸다. 그러나 두 대장과 궁녀들은 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손무가 대로하여 갑자기 두 눈을 치켜뜨며 머리칼이 관을 찔러 급히 소리치기를, “집법관은 어디에 있는가?” 하니, 집법관이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孫武曰:「約束不明,申令不信,將之罪也﹔既已約束再三,而士不用命,士之罪矣!於軍法當如何?」執法曰:「當斬!」孫武曰:「士難盡誅,罪在隊長。」顧左右:「可將女隊長斬訖示眾!」左右見孫武發怒之狀,不敢違令,便將左右二姬綁縛。闔閭在望雲臺上看孫武操演,忽見綁其二姬,急使伯嚭持節馳救之,令曰:「寡人已知將軍用兵之能,但此二姬侍寡人巾櫛,甚適寡人之意,寡人非此二姬,食不甘味,請將軍赦之!」孫武曰:「軍中無戲言。臣已受命為將,將在軍,雖君命不得受。若徇君命而釋有罪,何以服眾?」
손무가 말하기를, “약속이 분명하지 않거나 명령이 믿을 만하지 않은 것은 장수의 잘못이다. 그러나 이미 약속을 세 번이나 했음에도 군사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음은 이것은 군사들의 잘못이다. 군법에는 마땅히 어떠한가?” 하니, 집법관이 말하기를, “마땅히 참수해야 합니다.” 했다. 손무가 말하기를, “군사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으니, 잘못은 대장에게 있다.” 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여대장을 끌고 와서 참수하여 군사졸에게 보여라!” 했다. 좌우의 무사들이 손무의 화낸 모습을 보고 감히 명령을 어길 수 없어 곧 좌우 두 여대장을 결박했다. 합려가 망운대에서 손무가 훈련하는 것을 보다가 갑자기 두 총애하는 궁녀를 결박하는 것을 보고, 급히 백비를 시켜 왕의 신표를 갖고 그들을 구하게 했다. 그 명령에 이르기를, “과인이 이미 장군의 용병하는 능력을 알았소. 다만 이 두 총애하는 궁녀는 과인의 침식과 의관을 수발하여 과인의 뜻을 잘 맞추고, 과인도 두 궁녀가 없으면 음식을 먹어도 그 맛을 느낄 수가 없으니 청컨대 장군은 그들을 용서하시오!” 하니, 손무가 말하기를, “군대에는 농담이 없습니다. 신은 이미 명을 받들어 장군이 되었고, 장군은 군중에 있을 때 비록 군주의 명이라 할지라도 받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군주의 명을 따라 죄 있는 자를 풀어 준다면 어떻게 여러 군사를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했다.
喝令左右「速斬二姬!」梟其首於軍前。於是二隊宮女,無不股慄失色,不敢仰視。孫武於隊中再取二人,為左右隊長。再申令擊鼓:一鼓起立,二鼓旋行,三鼓合戰,鳴金收軍。左右進退,回旋往來,皆中繩墨,毫髮不差,自始至終,寂然無聲。乃使執法往報吳王曰:「兵已整齊,願王觀之,惟王所用。雖使赴湯蹈火,亦不敢退避矣。」髯翁有詩詠孫武試兵之事云:「強兵爭霸業,試武耀軍容。盡出嬌娥輩,猶如戰鬥雄。戈揮羅袖捲,甲映粉顏紅。掩笑分旗下,含羞立隊中。聞聲趨必肅,違令法難通。已借妖姬首,方知上將風。驅馳赴湯火,百戰保成功。」
손무가 좌우의 무사들에게 소리쳐서, “빨리 두 궁녀를 참수하라!” 하니, 무사들이 그들을 참수하여 수급을 군막 앞에 매달았다. 이에 두 대열의 궁녀들이 모두 다리를 떨며 얼굴색이 변하여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손무가 다시 대오 중에서 두 궁녀를 취하여 좌우 대열의 대장으로 삼고, 명령을 밝히고 북을 울리니, 북소리 한 번에 모두 일어서고, 두 번에 돌아서고, 세 번에 전투태세를 갖추고, 징소리를 울려 대열을 본래 자리로 수습했다. 앞으로 나가고 뒤로 물러나며 좌우로 돌며 행군을 하는데 모두가 손무가 그어 놓은 먹줄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어 추호도 어긋남이 없게 되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윽고 손무가 집법관을 오왕 합려에게 보내 보고하기를, “병사들이 이미 정돈되었으니 왕께서 보시고 쓰기 바랍니다. 비록 끓는 물이나 불을 밟게 하더라도 감히 후퇴하거나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염옹이 시를 지어 손무가 궁녀들을 조련한 일을 읊기를, “강한 군대가 패업을 다투는데, 병법을 시험하여 군사의 위용을 빛냈다. 나온 군사들은 모두 아름다운 궁녀들이었으나, 싸우는 용사들과 다름이 없었다. 비단 소매를 걷어붙이고 과를 휘두르니, 분 바른 어여쁜 얼굴 갑옷에 비치는구나! 웃음을 참으며 군기 아래 나누어 서고, 부끄러움을 머금고 대열을 이루며, 북소리가 들리면 엄숙히 움직였으나, 명령을 위반하면 군법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미 요염한 두 궁녀의 목을 베니, 비로소 장수의 위세를 알게 되었다. 끓는 물이나 불 속에도 뛰어들 수 있으니, 백 번 싸우더라도 성공을 보장하리라.” 했다.
闔閭痛此二姬,乃厚葬之於橫山,立祠祭之,名曰愛姬祠。因思念愛姬,遂有不用孫武之意。伍員進曰:「臣聞『兵者,凶器也。』不可虛談。誅殺不果,軍令不行。大王欲征楚而伯天下,思得良將,夫將以果毅為能,非孫武之將,誰能涉淮踰泗,越千里而戰者乎?夫美色易得,良將難求,若因二姬而棄一賢將,何異愛莠草而棄嘉禾哉!」闔閭始悟。乃封孫武為上將軍,號為軍師,責成以伐楚之事。伍員問孫武曰:「兵從何方而進?」孫武曰:「大凡行兵之法,先除內患,然後方可外征。吾聞王僚之弟掩餘在徐,燭庸在鐘吾,二人俱懷報怨之心。今日進兵,宜先除二公子,然後南伐。」
합려는 두 궁녀를 애통하게 여겨 곧 횡산(橫山)에 장사를 지내고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며, 사당의 이름을 애희사(愛姬祠)라고 불렀다. 합려는 사랑하던 궁녀들을 생각하여 마침내 손무를 쓰지 않으려고 생각했다. 오원이 나아가 말하기를, “신이 듣기에 ‘군대는 흉기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헛말이 아닙니다. 죽이는 것이 과감하지 않으면 군령이 행해지지 않습니다. 대왕께서 초나라를 정벌하여 천하를 제패하려면 훌륭한 장수를 얻어야 하는데 무릇 장수란 과감하고 엄해야 합니다. 손무가 아니라면 누가 능히 회수(淮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천 리 먼 곳에 가서 싸우겠습니까? 미색은 얻기 쉬워도 훌륭한 장수는 구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만약 두 궁녀로 인하여 한 사람의 훌륭한 장수를 버리신다면, 이것은 가라지 풀을 아껴서 벼를 뽑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했다. 합려가 비로소 깨달아, 즉시 손무를 상장군에 임명하고 군사(軍師)라 부르게 하고, 초나라를 정벌하는 임무를 맡겼다. 오원이 손무에게 묻기를, “군사들을 어느 방면으로 진군시킬 계획이십니까?” 하니, 손무가 말하기를, “대저 군사를 움직이는 법은 먼저 나라 안의 화근부터 없앤 후에 바야흐로 나라 밖으로 원정을 나갈 수 있습니다. 내가 들으니 왕료의 동생인 엄여는 서(徐)나라에 있고, 촉용은 종오(鍾吾)에 있는데, 두 사람이 모두 원수를 갚으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오늘 군사를 진격시켜 먼저 두 공자를 제거하고 난 뒤에 남쪽 초나라를 정벌해야 합니다.” 했다.
伍員然之。奏過吳王,王曰:「徐與鐘吾皆小國,遣使往索逋臣,彼不敢不從。」乃發二使,一往徐國取掩餘,一往鐘吾取燭庸。徐子章羽不忍掩餘之死,私使人告之,掩餘逃去。路逢燭庸亦逃出,遂相與商議,往奔楚國。楚昭王喜曰:「二公子怨吳必深,宜乘其窮而厚結之。」乃居於舒城,使之練兵以禦吳。闔閭怒二國之違命,令孫武將兵伐徐,滅之。徐子章羽奔楚。遂伐鐘吾,執其君以歸。復襲破舒城,殺掩餘燭庸。闔閭便欲乘勝入郢。孫武曰:「民勞未可驟用也。」遂班師。
오원은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오왕 합려에게 아뢰었다. 오왕 합려가 말하기를, “서나라와 종오는 모두 작은 나라이니, 사자를 보내 두 사람을 잡아서 보내라고 한다면 그들이 감히 거절하지 못할 것이오.” 하고, 즉시 두 사신을 보내 한 사람은 서나라에서 엄여를 취하고, 한 사람은 종오에서 촉용을 붙잡아 오게 하였다. 서(徐)나라 군주 장우(章羽)가 차마 엄여를 죽이지 못하고 몰래 사람을 보내 알려주니, 엄여가 도망쳤다. 엄여가 길에서 촉용을 만나 함께 도망쳤다. 마침내 상의하여 초나라로 달아났다. 초나라 소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두 공자가 오나라에 깊은 원한을 갖고 있으니, 마땅히 그 궁함을 이용하여 후하게 맺어두어야겠다.” 하고, 이에 서성(舒城)에서 살게 하고, 군사들을 조련하여 오나라의 침입을 막게 했다. 합려가 서나라와 종오가 자기의 명령을 어긴 것에 노하여, 손무를 시켜 군사들을 이끌고 가서 서나라를 정벌하여 멸하게 했다. 서나라 군주 장우가 초나라로 달아났다. 손무는 마침내 종오를 정벌하여 그 군주를 사로잡아서 오나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손무는 다시 서성을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엄여와 촉용을 죽였다. 합려가 문득 승세를 타고 초나라 영성으로 진격하려고 하자, 손무가 말하기를, “백성들이 피곤하여 갑자기 더 싸우게 할 수 없습니다.” 하고, 마침내 회군했다.
於是伍員獻謀曰:「凡以寡勝眾,以弱勝強者,必先明於勞逸之數。晉悼公三分四軍,以敝楚師,卒收蕭魚之績,惟自逸而以勞予人也。楚執政皆貪庸之輩,莫肯任患,請為三師以擾楚。我出一師,彼必皆出,彼出則我歸,彼歸則我復出,使彼力疲而卒惰,然後猝然乘之,無不勝矣。」闔閭以為然。乃三分其軍,迭出以擾楚境,楚遣將來救,吳兵即歸,楚人苦之。吳王有愛女名勝玉,因內宴,庖人進蒸魚,王食其半,而以其餘賜女,女怒曰:「王乃以剩魚辱我,我何用生為?」退而自殺。
이에 오원이 계책을 올려 말하기를, “무릇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이기거나 약한 군사로 강한 군사를 이기려면 반드시 먼저 적은 피로하고 아군은 편안한 방법을 써야 합니다. 진도공(晉悼公)이 4군을 세 부대로 나누어 교대로 출병하여 초나라의 군사들을 피로하게 하여 마침내 소어(蕭魚)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오직 스스로는 편하면서 상대방은 피로하게 한 때문이었습니다. 초나라에서 정권을 잡은 자들은 모두 탐욕스럽고 용렬한 자들이니 기꺼이 나라의 난국을 타개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청컨대 우리의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누어 초나라를 괴롭혀야 합니다. 우리가 한 부대를 출병시키면 저들은 틀림없이 모든 군사를 출병시킬 것입니다. 그들이 출병하면 우리는 돌아오고, 저들이 돌아가면 우리가 다시 나갑니다. 저들의 힘이 쇠진하여 마침내 게으르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 갑자기 그것을 틈타 공격하면 이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합려가 옳다고 여겨, 즉시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누어 번갈아 출동시켜 초나라 변경을 어지럽혔다. 초나라가 장수를 보내 구원하자 오나라 군사는 즉시 돌아왔고, 초나라 군사들은 고통스러워졌다. 오왕 합려에게는 승옥(勝玉)이라는 사랑하는 딸이 있었다. 궁궐 안 잔치에서 요리사가 찐 생선을 바치자 오왕 합려가 그 절반을 먹고 나머지를 딸에게 주었다. 딸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 “왕이 먹다 남은 생선으로 나를 욕보이는데 내가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하고, 물러나 자살했다.
闔閭悲之,厚為殮具,營葬於國西閶門之外。鑿池積土,所鑿之處,遂成太湖,今女墳湖是也。又斲文石以為槨,金鼎、玉杯、銀尊、珠襦之寶,府庫幾傾其半,又取「磐郢」名劍,皆以送女。乃舞白鶴於吳市之中,令萬民隨而觀之,因令觀者皆入隧門送葬。隧道內設有伏機,男女既入,遂發其機,門閉,實之以土,男女死者萬人。闔閭曰:「使吾女得萬人為殉,庶不寂寞也。」至今吳俗殯事,喪亭上製有白鶴,乃其遺風。殺生送死,闔閭之無道極矣!史臣有詩云:「三良殉葬共非秦,鶴市何當殺萬人?不待夫差方暴骨,闔閭今日已無民!」
합려가 슬퍼하며 시신을 거두어 도성의 서쪽 창문(閶門) 밖에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못을 파고 흙을 쌓았다. 못을 판 자리가 마침내 큰 호수가 되었는데 오늘날 여분호(女墳湖)가 그것이다. 또 무늬 있는 돌을 쪼아 곽(겉 널)을 만들고, 금 솥, 옥배, 은 술 단지, 구슬 저고리 등, 오나라 부고에 있던 재화의 거의 절반과 또한 명검 반영(磐郢)을 모두 같이 묻어서 딸을 보냈다. 다시 오나라 거리에서 백학(白鶴)을 춤추게 하고, 백성 만 명이 그것을 따르면서 보게 했다. 그리고 구경한 백성들을 모두 굴속으로 들어가서 장례를 전송하게 했다. 지하도 안에 장치를 설치하여, 남녀 백성들이 그 속에 들어가자 즉시 그 장치가 발동하여 문이 닫히고 흙으로 그 굴을 막으니, 남녀 백성들 만 명이 죽었다. 합려가 말하기를, “내 딸을 위해 만 명의 백성들을 같이 묻어 주었으니 저승에 가서라도 쓸쓸하지는 않을 것이다.” 했다. 지금도 오나라에는 장사 지낼 때 초상집의 정자 위에 백학을 만들어 두는 것이 풍속이다. 사람을 죽여 딸의 죽음을 전송했으니 합려의 무도함이 극악했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삼량을 순장했을 때 모두 진목공을 비난했는데, 거리에서 학춤으로 만 명을 유인하여 죽였으니 웬 말인가? 부차가 들판에 뼈를 버리기도 전에, 합려가 그날 이미 백성들을 잃어버렸다.” 했다.
話分兩頭。卻說,楚昭王臥於宮中,既醒,見枕畔有寒光,視之,得一寶劍。及旦,召相劍者風胡子入宮,以劍示之。風胡子觀劍大驚曰:「君王何從得此?」昭王曰:「寡人臥覺,得之於枕畔,不知此劍何名?」風胡子曰:「此名『湛盧』之劍,乃吳中劍師歐冶子所鑄。昔越王鑄名劍五口,吳王壽夢聞而求之,越王乃獻其三,曰『魚腸』、『磐郢』、『湛盧』。『魚腸』以刺王僚﹔『磐郢』以送亡女﹔惟『湛盧』之劍在焉。臣聞此劍乃五金之英,太陽之精,出之有神,服之有威。然人君行逆理之事,其劍即出。此劍所在之國,其國祚必綿遠昌熾。今吳王弒王僚自立,又坑殺萬人,以葬其女,吳人悲怨,故『湛盧』之劍,去無道而就有道也。」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초소왕이 궁중에서 누워 자다가 잠이 깨어, 침상 곁에서 싸늘한 빛이 나는 것을 보고, 자세히 살펴보니 한 자루의 보검이었다. 아침이 되어 검에 조예가 깊은 풍호자(風胡子)를 불러 그 보검을 보여 주었다. 풍호자가 그 검을 살펴보더니 크게 놀라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이 칼을 어떻게 얻으셨습니까?” 하니, 초소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잠을 자다가 깨어 보니 침상 곁에 놓여 있었다. 이 검의 이름을 알 수 있겠는가?” 했다. 풍호자가 말하기를, “이 칼의 이름은 담로(湛盧)라 합니다. 오나라 장인 구야자(歐冶子)가 주조한 것입니다. 옛날 월나라 왕이 구야자를 불러 명검 다섯을 만들었습니다. 오왕 수몽이 소문을 듣고 구하자, 월왕 윤상이 세 자루를 바쳤는데, 이름이 각각 ‘어장(魚腸)’ ‘반영(磐郢)’ ‘담로(湛盧)’라 했습니다. 어장은 왕료를 찌를 때 사용하였고, 반영은 합려가 죽은 딸을 보낼 때 묻었습니다. 오직 담로만이 남아 있습니다. 신이 듣기에 이 검은 곧 다섯 가지 금속의 뛰어난 기운과 태양의 정령이 깃들어서 칼집에서 뽑으면 신령하고 허리에 차면 위엄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칼의 주인이 도리에 어긋난 짓을 하면 검은 저절로 주인을 떠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검이 있는 나라는 그 사직이 복을 받아 오랫동안 번창했다고 했습니다. 요즈음에 오왕 합려가 왕료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또한 만 명의 백성을 생매장하여 그의 딸을 장사지내니 오나라 백성들은 슬퍼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래서 보검 담로가 무도한 주인을 떠나 유덕한 주인을 찾아온 것입니다.” 했다.
昭王大悅,即佩於身,以為至寶,宣示國人,以為天瑞。闔閭失劍,使人訪求之,有人報:「此劍歸於楚國。」闔閭怒曰:「此必楚王賂吾左右而盜吾劍也!」殺左右數十人。遂使孫武、伍員、伯嚭率師伐楚。復遣使徵兵於越。越王允常未與楚絕,不肯發兵。孫武等拔楚六潛二邑,因後兵不繼,遂班師。闔閭怒越之不同於伐楚,復謀伐越。孫武諫曰:「今年歲星在越,伐之不利。」闔閭不聽,遂伐越,敗越兵於檇李,大掠而還。孫武私謂伍員曰:「四十年之後,越強而吳盡矣!」伍員默記其言。此闔閭五年事也。
초소왕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담로검을 허리에 차고 다니며, 귀중한 보물로 생각하여 백성들에게 자랑하고 하늘의 상서로움이라고 여겼다. 한편, 합려는 담로검을 잃고 사람을 시켜 찾도록 했다. 어떤 사람이 와서 보고하기를, “그 칼은 초나라로 갔다고 합니다.” 했다. 합려가 노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틀림없이 초소왕이 나의 측근에게 뇌물을 주어, 내 칼을 도둑질해간 것이다.” 하고, 좌우의 시종 수십 명을 죽였다. 마침내 합려는 손무, 오원, 백비(伯嚭) 등을 시켜 군사를 인솔하여 초나라를 정벌하도록 했다. 또 사자를 월나라에 보내 군사를 모으게 했다. 월왕 윤상(允常)은 초나라와 수호 관계를 끊지 않았기 때문에 군사를 동원하려고 하지 않았다. 손무 등은 초나라 육(六)과 잠(潛) 두 고을을 점령하였으나, 증원군이 뒤따르지 않자 곧 군사를 물렸다. 합려는 초나라를 정벌하는 데 월나라가 함께하지 않자 노하여 다시 월나라를 정벌하려고 모의하였다. 손무가 간하기를, “금년에는 세성(歲星 ; 목성)이 월나라 쪽에 있어 공격하면 불리합니다.” 했다. 합려가 듣지 않고 마침내 월나라를 쳐서, 월나라 군사를 취리(檇李)에서 패배시키고 크게 노략질한 후에 돌아왔다. 손무가 가만히 오원에게 말하기를, “40년 뒤에는 월나라가 강대해져서 오나라를 멸망시킬 것이오!” 하니, 오원이 말없이 그 말을 기억해 두었다. 이것은 오왕 합려 5년의 일이었다.
其明年,楚令尹囊瓦率舟師伐吳,以報潛六之役。闔閭使孫武伍員擊之,敗楚師於巢,獲其將羋繁以歸。闔閭曰:「不入郢都,雖敗楚兵,猶無功也。」員對曰:「臣豈須臾忘郢都哉!顧楚國天下莫強,未可輕敵。囊瓦雖不得民心,而諸侯未惡。聞其索賂無厭,不久諸侯有變,乃可乘矣。」遂使孫武演習水軍於江口。伍員終日使人探聽楚事。忽一日,報:「有唐蔡二國遣使臣通好,已在郊外。」伍員喜曰:「唐蔡皆楚屬國,無故遣使遠來,必然與楚有怨,天使吾破楚入郢也。」
그다음 해, 초나라 영윤 낭와가 수군을 거느리고, 지난해 육(六)과 잠(潛) 두 고을을 빼앗은 오나라를 보복하려고 공격했다. 합려가 손무와 오원을 시켜 초나라 군사를 쳐서 소(巢) 땅에서 파하고 초나라 장수 미번(羋繁)을 사로잡아서 돌아왔다. 합려가 말하기를, “영도를 점령하지 못하고서야 비록 초나라 군사를 물리쳤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공이 없는 것이오.” 하니, 오원이 대답하기를, “신이 어찌 잠시라도 영도를 잊었겠습니까! 그러나 초나라는 천하에 막강한 나라이니 가볍게 대적할 수 없습니다. 낭와가 비록 민심을 얻지 못했다고 하지만 제후들이 아직 미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들으니 그가 뇌물을 몹시 좋아하여, 머지않아 제후들과 틈이 벌어질 것이니 그 틈을 탈 수 있습니다.” 했다. 마침내 합려는 손무에게 강구(江口)에서 수군을 조련하게 하였다. 오원은 사람을 시켜 초나라를 정탐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보고하기를, “당(唐)과 채(蔡) 두 나라의 사신이 성문 밖에 도착하여 우리 오나라와 수호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했다. 오원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당나라와 채나라는 모두 초나라의 속국인데 아무런 까닭도 없이 먼 길에 사신을 보냈으니, 틀림없이 초나라에 원한이 있어서 일 것이다. 하늘이 나를 시켜 초나라를 깨뜨리고 영도에 입성하라는 것이다.” 했다.
原來楚昭王為得了「湛盧」之劍,諸侯畢賀,唐成公與蔡昭侯亦來朝楚。蔡侯有羊脂白玉佩一雙,銀貂鼠裘二副,以一裘一佩獻於楚昭王,以為賀禮,自己佩服其一。囊瓦見而愛之,使人求之於蔡侯。蔡侯愛此裘佩,不與囊瓦。唐侯有名馬二匹,名曰「肅霜」。「肅霜」乃雁名,其羽如練之白,高首而長頸,馬之形色似之,故以為名。後人復加馬傍曰驌驦,乃天下希有之馬也。唐侯以此馬駕車來楚,其行速而穩。囊瓦又愛之,使人求之於唐侯。唐侯亦不與。二君朝禮既畢,囊瓦即譖於昭王曰:「唐蔡私通吳國,若放歸,必導吳伐楚,不如留之。」乃拘二君於館驛。各以千人守之,名為護衛,實則監押。
전날 초소왕이 담로검을 얻었을 때 제후들이 축하했다. 당성공(唐成公)과 채소후(蔡昭侯)도 역시 초나라에 왔다. 채소후는 양지백옥패(羊脂白玉佩) 한 쌍과 은초서구(銀貂鼠裘) 두 벌이 있었는데, 그중 양지백옥패 한 개와 은초서구 한 벌을 초소왕에게 바치고 하례를 했으며, 남은 한 개의 패옥과 초구 한 벌은 자기가 차고 입었다. 낭와가 보고 욕심이 나서 사람을 채후에게 보내어 남은 패옥과 초구를 자기에게 달라고 청했다. 채후도 역시 패옥과 초구를 매우 아꼈기 때문에 낭와에게 주지 않았다. 한편, 당성공도 역시 명마 두 필을 갖고 있었는데 이름을 숙상(肅霜)이라 했다. 숙상이란 원래 기러기를 칭하던 말인데 그 말의 털이 마치 비단처럼 희고, 키가 크고 목이 길어 말 모양이 기러기와 비슷하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었다. 후에 사람들이 다시 숙상이라는 글자 곁에다 말 마(馬) 변을 더하여 숙상(驌驦)이라 하였는데 참으로 천하에 희귀한 명마였다. 당성공이 초나라에 올 때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탔는데 그 속도가 매우 빨랐음에도 안온했다. 낭와가 또 그 말을 탐내어 사람을 시켜 당성공에게 그 말을 요구했으나, 당성공은 주지 않았다. 두 나라 군주가 조례를 끝내자, 낭와가 즉시 초소왕에게 참소하기를, “당나라와 채나라 군주가 몰래 오나라와 내통하고 있는데, 만약 그들을 놓아주어 되돌아가게 하면 반드시 오나라를 인도하여 초나라를 칠 것이니, 잡아 두는 게 낫습니다.” 하니, 초소왕이 즉시 두 나라 군주를 역관에 가두고 각각 천명의 군사로 지켰다. 핑계는 호위한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감금한 것이었다.
其時昭王年幼,國政皆出於囊瓦。二君一住三年,思歸甚切,不得起身。唐世子不見唐侯歸國,使大夫公孫哲至楚省視,知其見拘之故。奏曰:「二馬與一國孰重?君何不獻馬以求歸?」唐侯曰:「此馬希世之寶,寡人惜之!且不肯獻於楚王,況令尹乎?且其人貪而無厭,以威劫寡人,寡人寧死,決不從之。」公孫哲私謂從者曰:「吾主不忍一馬,而久淹於楚,何其重畜而輕國哉。我等不如私盜驌驦,獻於令尹。倘得主公歸唐,吾輩雖坐盜馬之罪,亦何所恨!」從者然之,乃以酒灌醉圉人,私盜二馬獻於囊瓦曰:「吾主以令尹德尊望重,故令某等獻上良馬,以備驅馳之用。」囊瓦大喜,受其所獻。
그때는 초소왕이 나이가 어려서 영윤 낭와가 초나라 국정을 도맡아 처리했다. 두 나라 군주가 초나라에 감금된 지 3년이 되어 귀국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어쩌는 수가 없었다. 당나라 세자가 부친인 군주의 귀국하지 못함을 보고 대부 공손철(公孫哲)을 초나라에 보내 사정을 살펴보니 부친이 초나라에 구금된 까닭을 알게 되었다. 공손철이 당나라 군주에게 아뢰기를, “말 두 마리와 한 나라가 어느 것이 중합니까? 주군께서는 어찌하여 말을 바치고 귀국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당성공이 말하기를, “그 말은 세상의 보기 드문 보물이라 내가 아끼는 것이다. 초왕에게 기꺼이 바칠 수도 없는데 하물며 영윤에게 바치겠는가? 또한 그 사람이 욕심이 끝이 없어 과인을 위협하여 빼앗으려고 하는데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결단코 그 요구에 따르지 않을 것이다.” 했다. 공손철이 몰래 종자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주군이 말 한 마리를 아껴서 오랫동안 초나라에 억류된 것은 가축을 중히 여기고 나라를 가벼이 여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몰래 숙상을 훔쳐서 영윤에게 바치는 것이 낫겠다. 만일 우리 주군이 당나라에 돌아갈 수 있다면 우리가 비록 말을 훔친 도적의 죄에 연좌된다 한들 또한 어찌 억울하겠는가?” 하니, 종자도 그렇게 여겨, 이에 마부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에 몰래 두 마리 말을 훔쳐 낭와에게 바치면서 말하기를, “우리 주군이 영윤의 높은 덕을 우러러보고, 저희들을 시켜 좋은 말을 바쳐서 영윤께서 타고 다니시도록 하셨습니다.” 했다. 낭와가 크게 기뻐하여 두 마리 명마를 받았다.
次日,入告昭王曰:「唐侯地褊兵微,諒不足以成大事,可赦之歸國。」昭王遂放唐成公出城。唐侯既歸,公孫哲與眾從者,皆自繫於殿前待罪。唐侯曰:「微諸卿獻馬於貪夫,寡人不能返國,此寡人之罪,二三子勿怨寡人足矣。」各厚賞之。今德安府隨州城北,有驌驦陂,因馬過此得名也。唐胡曾先生有詩云:「行行西至一荒陂,因笑唐公不見機。莫惜驌驦輸令尹,漢東宮闕早時歸。」又髯仙有詩云:「三年拘繫辱難堪,只為名駒未售貪﹔不是便宜私竊馬,君侯安得離荊南?」蔡侯聞唐侯獻馬得歸,亦解裘佩以獻瓦。瓦復告昭王曰:「唐蔡一體,唐侯既歸,蔡不可獨留也。」昭王從之。
다음 날, 낭와가 조당에 나가 초소왕에게 고하기를, “당나라는 나라가 협소하고 군사가 적어 큰일을 이루기는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당나라 군주를 용서하여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초소왕이 즉시 당성공을 석방하여 성 밖으로 내보냈다. 당성공이 귀국하자 공손철과 많은 종자가 모두 스스로 결박하여 대전 앞에서 죄를 기다렸다. 당성공이 말하기를, “그대들이 탐욕스러운 낭와에게 말을 바치지 않았다면 과인은 귀국할 수 없었소. 이것은 과인의 잘못이니, 그대들은 과인을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하고, 각각 후하게 상을 주었다. 오늘날 덕안부(德安府) 수주성(隨州城) 북쪽에 숙상피(驌驦陂)가 있는데, 숙상이 이곳을 지나갔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후대 당나라 호증(胡曾) 선생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서쪽으로 내달려서 황량한 숙상피에 이르러서, 당성공의 어리석음을 비웃노라! 숙상 말을 아까워하지 않고 영윤에게 바쳤다면, 한수 동쪽 당나라 궁궐에 빨리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라.” 했다. 또 염선(髥仙)도 시를 지어 이르기를, “3년 동안 잡혀 있었으니 그 수모가 견디기 어려웠는데, 그것은 단지 명마를 욕심 많은 자에게 주지 않아서였다. 편의대로 몰래 말을 훔쳐서 바치지 않았다면, 당성공이 어찌 초나라 땅을 벗어났겠는가?” 했다. 채소후도 당성공이 명마를 바치고 풀려나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초구와 패옥을 낭와에게 바쳤다. 낭와가 다시 소왕에게 고하기를, “당나라와 채나라는 처지가 같습니다. 당성공을 이미 돌려보냈으니 채소후만 홀로 붙들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하니, 초소왕이 낭와의 말을 따랐다.
蔡侯出了郢都,怒氣填胸,取白璧沉於漢水,誓曰:「寡人若不能伐楚,而再南渡者,有如大川!」及返國,次日,即以世子元為質於晉,借兵伐楚。晉定公為之訴告於周,周敬王命卿士劉卷,以王師會之。宋、齊、魯、衛、陳、鄭、許、曹、莒、邾、頓、胡、滕、薛、杞、小邾子連蔡,共是十七路諸侯,個個恨囊瓦之貪,皆以兵從。晉士鞅為大將,荀寅副之,諸軍畢集於召陵之地。荀寅自以為蔡興師,有功於蔡,欲得重貨,使人謂蔡侯曰:「聞君有裘佩以遺楚君臣,何獨敝邑而無之?吾等千里興師,專為君侯,不知何以犒師也?」
채소후가 영도에서 풀려나 귀국하던 중 한수를 건너다가 가슴에서 분노가 치밀어서 흰 벽옥을 강물에다 던지며 맹세하기를, “내가 만약 초나라를 정벌하지 못하고 다시 이 강물을 건넌다면 이 강물같이 되리라!” 하고, 귀국했다. 다음 날, 채소후가 즉시 세자 원(元)을 진(晉)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군사를 빌려 초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진정공(晉定公)이 주나라에 상소하니, 주경왕(周敬王)이 경사 유권(劉券)을 시켜 천자의 명으로 제후들의 군사들을 모이게 했다. 송(宋), 제(齊), 노(魯), 위(衛), 진(陳), 정(鄭), 허(許), 조(曹), 거(莒), 주(邾), 돈(頓), 호(胡), 등(滕), 설(薛), 기(杞), 소주(小邾)의 군주들과 채(蔡)나라까지 합쳐 모두 17국의 제후들이 각자 낭와의 탐욕을 원망하여 군사를 내어 따랐다. 진(晉)나라 사앙(士鞅 ;범앙)이 대장이 되고, 순인(荀寅)이 부장이 되어, 제후들의 군사가 소릉(召陵)의 땅에 모였다. 순인이 생각하기를, 채나라를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니 (초나라를 이기면) 채나라에 공이 있을 것이니 중한 재물을 얻으려고 사람을 시켜 채소후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채소후께서는 초나라의 임금과 신하에게 초구와 패옥을 바치고는 어찌하여 우리나라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습니까? 우리가 천 리 먼 길에 군사를 일으켜 오로지 군주님을 위해서 왔는데 무엇으로 군사들의 수고를 위로할지 모르겠습니다.” 했다.
蔡侯對曰:「孤以楚令尹瓦貪冒不仁,棄而投晉,惟大夫念盟主之義,滅強楚以扶弱小,則荊襄五千里,皆犒師之物也,利孰大焉。」荀寅聞之甚愧。其時周敬王十四年之春三月,偶然大雨連旬,劉卷患瘧,荀寅遂謂士鞅曰:「昔五伯莫盛於齊桓,然駐師召陵,未嘗少損於楚。先君文公僅一勝之,其後搆兵不已。自交見以後,晉楚無隙,自我開之不可。況水潦方降,疾瘧方興,恐進未必勝,退不楚乘,不可不慮。」士鞅亦是個貪夫,也思蔡侯酬謝,未遂其欲,託言雨水不利,難以進兵,遂卻蔡侯之質,傳令班師。各路諸侯見晉不做主,各散回本國。髯仙有詩云:「冠裳濟濟擁兵車,直擣荊襄力有餘﹔誰道中原無義士,也同囊瓦索苞苴。」
채소후가 대답하기를, “나는 초나라 영윤 낭와가 욕심이 많고 어질지 못해 초나라를 버리고 진(晉)나라에 의지했소. 오직 대부들이 생각하기를 맹주국의 의리로 강한 초나라를 멸하여 약소한 제후국들을 돕는다면 형양(荊襄) 5천 리가 모두 제후들의 군사를 위로할 재물이 될 것이오. 어느 것이 더 큰 이익이 되겠오?” 했다. 순인이 그 말을 듣고 심히 부끄러워하였다. 그때가 주경왕 14년 봄 삼월이었는데, 우연히 큰비가 열흘 넘게 내려서 유권(劉卷)이 학질에 걸렸다. 순인이 즉시 사앙(범앙)에게 말하기를, “옛날 다섯 패자(霸者) 중에 제환공이 제일 강했습니다. 그런데도 소릉에서 군사를 멈추고 초나라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선군이신 문공께서 겨우 한번 성복의 싸움에서 이긴 후 끊임없이 군사를 일으켰지만 이기지 못했습니다. 서로 만나 화친한 이후에 진(晉)나라와 초나라가 틈이 없어졌는데, 우리가 스스로 먼저 싸움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지금 큰비가 내려 군사들 사이에 학질이 창궐하고 있는데 만약 진격했다가 승리를 취하지 못하면, 퇴각하는 사이에 초나라가 우리를 추격하지 않을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사앙(범앙)도 역시 탐욕스러운 사내라 채소후로부터 사례를 생각하고 있다가 그 욕심을 이루지 못하자 큰비가 불리함을 핑계로 진격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마침내 채소후가 보낸 인질을 돌려주고 회군 명령을 내렸다. 각국의 제후들도 진(晉)나라가 맹주노릇을 하지 않자 각각 흩어져 본국으로 돌아갔다. 염선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위풍당당한 제후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곧바로 정벌할 힘이 넘쳐흘렀다. 중원에 의로운 선비가 없다고 누가 말했는가? 그들 역시 낭와와 같이 뇌물을 밝히는 자들이었다.” 했다.
蔡侯見諸軍解散,大失所望。歸過沈國,怪沈子嘉不從伐楚,使大夫公孫姓襲滅其國,虜其君殺之,以洩其憤。楚囊瓦大怒,興師伐蔡,圍其城。公孫姓進曰:「晉不足恃矣。不如東行求救於吳。子胥伯嚭諸臣,與楚有大仇,必能出力。」祭侯從之。即令公孫姓約會唐侯,共投吳國借兵,以其次子公子乾為質。伍員引見闔閭曰:「唐蔡以傷心之怨,願為先驅。夫救蔡顯名,破楚厚利。王欲入郢,此機不可失也。」闔閭乃受蔡侯之質,許以出兵,先遣公孫姓歸報。 闔閭正欲調兵,近臣報道:「今有軍師孫武自江口歸,有事求見。」闔閭召入,問其來意。
채소후가 제후들의 군사들이 흩어지는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하여, 본국으로 회군하던 중 심(沈)나라를 지나가게 되었다. 채소후는 심나라 군주가 초나라 정벌군에 참가하지 않은 것을 괘씸하게 생각하여, 대부 공손성(公孫姓)을 시켜 심나라를 습격하여 멸망시키고 심나라 군주를 사로잡아 죽여서, 초나라에 대한 분노를 달랬다. 초나라의 낭와가 대로하여 군사를 일으켜 채나라를 정벌하여 그 도성을 포위했다. 공손성이 나와 말하기를, “진(晉)나라는 믿을 수 없습니다. 동쪽의 오나라에 구원을 청하는 것이 낫습니다. 오자서와 백비 등 오나라의 여러 신하는 초나라에 큰 원한을 품고 있어 틀림없이 우리에게 원군을 보내줄 것입니다.” 했다. 채소후가 그 말을 따라 즉시 공손성에게 명령하여 당성공과 약속하여 함께 오나라에 의지하여 군사를 빌리기로 하고, 그의 둘째 아들 공자 건(公子乾)을 인질로 보냈다. 오원이 인솔하여 합려를 뵙고 말하기를, “당나라와 채나라가 초나라에 한을 품고 초나라를 정벌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채나라를 구원한다는 명분과 초나라를 무찌를 수 있는 실익도 있습니다. 대왕께서 초나라의 영도에 들어가고 싶으시다면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하니, 합려가 즉시 채소후의 인질을 받아들이고 출병을 허락하며, 공손성을 먼저 채나라에 돌려보내어 채소후에게 알리도록 했다. 합려가 군사를 이동하려 할 때 근신이 보고하기를, “지금 군사 손무가 강구(江口)에서 돌아와서 일이 있다고 접견을 청합니다.” 했다. 합려가 손무를 불러들여 온 까닭을 물었다.
孫武曰:「楚所以難攻者,以屬國眾多,未易直達其境也。今晉侯一呼,而十八國群集,內中陳、許、頓、胡皆素附於楚,亦棄而從晉,人心怨楚,不獨唐蔡,此楚勢孤之時矣。」闔閭大悅。使被離專毅輔太子波居守。拜孫武為大將,伍員伯嚭副之,親弟公子夫概為先鋒,公子山專督糧餉。悉起吳兵六萬,號為十萬,從水路渡淮,直抵蔡國。囊瓦見吳兵勢大,解圍而走,又恐吳兵追趕,直渡漢水,方纔屯紮,連打急報至郢都告急。再說,蔡侯迎接吳王,泣訴楚君臣之惡。未幾唐侯亦到。二君願為左右翼,相從滅楚。臨行,孫武忽傳令軍士登陸,將戰艦盡留於淮水之曲。
손무가 말하기를, “초나라를 공략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그들이 데리고 있던 속국이 너무 많아서 바로 그 경내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진(晉)나라 군주가 한번 호령하니 18개 나라의 군주들이 모였고 그중에는 진(陳), 허(許), 돈(頓), 호(胡) 네 나라는 모두 오랫동안 초나라에 붙었으나 그들도 역시 초나라를 버리고 진(晉)나라를 따랐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초나라를 원망하는 것은 당나라와 채나라 두 나라만이 아닙니다. 이제 초나라의 형세가 고립되었습니다.” 하니, 합려가 크게 기뻐하였다. 피리와 전의(專毅)를 시켜 태자 파(波)를 보좌하여 오나라 도성을 지키게 하고, 손무를 대장으로 삼고, 오원과 백비를 부장으로 삼으며, 그의 친동생 부개(夫槪)를 선봉으로 삼고, 공자 산(公子山)에게 군량을 전담하도록 했다. 오나라 군사 6만을 모두 일으켜 십만 대군이라 하고, 수로를 통하여 회수를 건너 곧바로 채나라에 도착했다. 낭와가 오나라 군세가 큼을 보고 채나라 도성의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또 오나라의 군사들이 추격할까 두려워서 바로 한수를 건너 진영를 세우고, 계속해서 급보를 영도에 띄워 사태의 위급함을 알렸다. 한편 채소후가 오왕 합려를 영접하여 초나라 군신의 흉포한 짓을 울면서 호소했다. 오래지 않아 당성공도 역시 채나라에 도착했다. 두 나라의 군주가 좌우익을 맡아 초나라를 멸하는 데에 따르겠다고 했다. 출발에 임하여 갑자기 손무가 군사들에게 뭍에 오르고 전함은 모두 회수 유역에 남겨두라고 명했다.
伍員私問舍舟之故。孫武曰:「舟行水逆而遲,使楚得徐為備,不可破矣。」員服其言。大軍自江北陸路走章山,直趨漢陽。楚軍屯於漢水之南,吳兵屯於漢水之北。囊瓦日夜愁吳軍濟漢,聞其留舟於淮水,心中稍安。楚昭王聞吳兵大舉,自召諸臣問計。公子申曰:「子常非大將之才,速令左司馬沈尹戍領兵前往,勿使吳人渡漢。彼遠來無繼,必不能久。」昭王從其言。使沈尹戍率兵一萬五千,同令尹協力拒守。沈尹戍來至漢陽,囊瓦迎入大寨。戍問曰:「吳兵從何而來,如此之速?」瓦曰:「棄舟於淮汭,從陸路自豫章至此。」戍連笑數聲曰:「人言孫武用兵如神,以此觀之,真兒戲耳!」
오원이 손무에게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오르게 하는 이유를 조용히 물으니, 손무가 말하기를, “배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행군 속도가 늦게 되고, 그러면 초나라가 천천히 대비하여 깨트릴 수가 없습니다.” 하니, 오원이 그 말에 승복했다. 대군이 장강 북쪽에서 육로로 장산(章山)을 넘어 곧바로 한양으로 쫓아왔다. 초나라 군사는 한수 남쪽에 주둔하고, 오나라 군사는 한수 북쪽에 진을 쳤다. 낭와는 밤낮으로 오나라 군사들이 한수를 건널까 걱정하다가 오나라 군사가 그들의 배를 회수에 두고 왔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을 조금 놓게 되었다. 초소왕이 오나라 군사가 대거 쳐들어왔다는 보고를 듣고, 여러 신하를 소집하여 그 대책을 물었다. 공자 신이 말하기를, “자상(子常) 낭와는 대장의 재목이 아닙니다. 속히 좌사마 심윤수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오나라 군사들이 한수를 건너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저들은 멀리 와서 후속 부대가 없으므로 틀림없이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하니, 초소왕이 그 말을 따라 심윤수를 시켜 군사 1만 5천을 거느리고 영윤 낭와와 협력하여 막게 했다. 심윤수가 한양(漢陽)에 도착하니 낭와가 그를 맞아 대채에 들어갔다. 심윤수가 묻기를, “오나라가 어떤 길로 왔기에 이렇게 신속하게 왔습니까?” 하니, 낭와가 말하기를, “회수 연안에 배를 버리고 뭍에 올라 예장(豫章)에서 이곳에 이르렀소.” 했다. 심윤수가 몇 번 웃으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손무는 군사를 귀신같이 부린다고 하던데, 이것을 보니 참으로 어린아이 장난일 뿐이오!” 했다.
瓦曰:「何謂也?」戍曰:「吳人慣習舟楫,利於水戰,今乃舍舟從陸,但取便捷,萬一失利,更無歸路,吾所以笑之。」瓦曰:「彼兵見屯漢北,何計可破?」戍曰:「吾分兵五千與子,子沿漢列營,將船隻盡拘集於南岸,再令輕舟,旦夕往來於江之上下,使吳軍不得掠舟而渡。我率一軍從新息抄出淮汭,盡焚其舟,再將漢東隘道用木石磊斷。然後令尹引兵渡漢江,攻其大寨,我從後而擊之。彼水陸路絕,首尾受敵,吳君臣之命,皆喪於吾手矣。」囊瓦大喜曰:「司馬高見,吾不及也。」於是沈尹戍留大將武城黑統軍五千,相助囊瓦,自引一萬人望新息進發。
낭와가 말하기를, “무슨 말이오?” 하니, 심윤수가 말하기를, “오나라 사람은 배를 타고 노를 젓는 일에 익숙하여 수상전이 유리합니다. 그런데 지금 배를 버리고 뭍으로 와서 민첩함을 취했지만, 만일 그들이 싸움에 지면 돌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웃었습니다.” 했다. 낭와가 말하기를, “오나라의 군사들이 한수 북쪽에 진을 치고 있는데 그들을 파할 무슨 좋은 계책이라도 있소?” 하니, 심윤수가 말하기를, “제가 군사 5천을 떼어 영윤께 드리겠으니, 영윤께서는 한수 강변을 따라 군영을 세우십시오. 그런 다음 모든 배들을 끌어다 한수 남안에 모아 놓게 하시고 다시 빠른 배로 아침저녁으로 한수의 위아래 쪽을 순시하게 하여 오나라 군사가 배들을 빼앗아 건너는 것을 막으십시오. 내가 일군을 거느리고 신식(新息)에서 회수(淮水) 연안으로 진격하여 오나라 군사의 배들을 모두 불태운 후에 다시 한수 동쪽의 험로를 나무와 돌로 막아 그들의 퇴로를 끊겠습니다. 연후에 영윤께서는 군사를 이끌고 한수를 건너 오군의 대채(大寨)를 공격하십시오. 저는 그들의 배후에서 들이치겠습니다. 저들은 수륙 양로에서 길이 끊어지고 앞뒤에서 적을 맞으면 오나라 군신들의 목숨은 모두 우리 손에서 죽을 것입니다.” 했다. 낭와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사마의 높은 식견은 내가 미치지 못하겠소!” 했다. 이에 심윤수는 대장 무성흑(武城黑)에게 그곳에 남아 5천의 군사를 지휘하여 낭와를 돕게 하고 자기는 일만의 군사를 이끌고 신식을 향하여 출발했다.
不知後來勝敗如何,且看下回分解。
다음의 승패가 어찌 될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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