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子曰 士志於道 而恥惡衣惡食者 未足與議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선비가 도에 뜻을 두고도,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면, 더불어 의논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라고 하셨다. 心欲求道, 而以口體之奉不若人爲恥, 其識趣之卑陋甚矣, 何足與議於道哉? 마음으로 도를 구하고자 하면서도, 입과 몸의 봉양이 남과 같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면(부끄러움으로 삼는다면), 그 식견과 취향의 비루함이 대단히 심한 것이니, 어찌 더불어 도를 의논하기에 족하겠는가? |
2 | ○ 程子曰: “志於道而心役乎外, 何足與議也?” 정자가 말하길, “도에 뜻을 두었으면서도 마음이 외물에 부림을 당한다면, 어찌 더불어 의논하기에 족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華陽范氏曰 志於道者 重內而忘外 恥惡衣惡食者 未能忘外也 徇其外而無得於內矣 夫豈足與議哉 화양범씨가 말하길, “도에 뜻을 둔 사람은 안을 중하게 여기고, 밖을 잊는 법이다.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아직 밖을 잊지 못한 것이다. 그 밖을 따르면서 안에서는 터득함이 없는 것이니, 무릇 어찌 더불어 논하기에 족하겠는가?”라고 하였다. 問志道如何尙恥惡衣惡食 朱子曰 有這般半上落下底人也 志得不力只名爲志道 及外物來誘 則又遷變了 누군가 묻기를, “도에 뜻을 두었으면서도 어떻게 아직도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부끄러워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이렇게 절반쯤 오르다 내려가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뜻을 둠에 힘을 쓰지 못하고, 그저 명목상으로만 도에 뜻을 두는 것이니, 외물이 와서 유혹함에 이르면, 다시 옮겨가서 변해버리고 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志於仁 則能無惡 志於道乃猶有此病 何也 曰 仁是最切身底道理 志於仁大段是親切做工夫 所以必無惡 志於道 則說得來闊 凡人有志於學 皆是也 若志得來汎而不切 則未必無恥惡衣食之事 누군가 묻기를, “仁에 뜻을 둔다면, 惡이 없을 수 있지만, 道에 뜻을 두는 것에는 곧 오히려 이런 병폐가 있으니,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仁은 내 몸에 제일 절실한 道理이니, 仁에 뜻을 두었다면 대단히 친밀하고 간절하게 공부를 할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악이 없는 것이다. 道에 뜻을 두는 것이라면, 말하기에 그 범위가 넓은 것이니, 무릇 사람들이 배움에 뜻을 두는 것도 모두 이것이다. 만약 뜻을 둠에 있어 汎汎(겉돌음, 피상적)하여 간절하지 못하다면, 나쁜 옷과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일이 전혀 없다고 장담(必)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求安與飽者 猶以適乎口體之實也 此則非以其不可衣且食也 特以其不美於觀聽而自恧焉 若謝氏所謂食前方丈 則對客泰然 䟽食菜羹 則不能出諸其戶者 蓋其識致卑凡 又在求飽與安者下矣 기거의 편안함과 식사의 배부름을 구하는 것은 여전히 이로써 입과 몸을 채우는 것에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곧 그러한 옷을 입거나 음식을 먹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살펴보고 들음에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이를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만약 사씨가 말한 이른바 食前方丈(사방 한 장이나 되는 잘 차린 밥상)이라면 손님을 대함에 태연하고, 거친 밥과 나물국이라면 그것을 제 집 대문 밖으로 내놓지 못한다는 사람은, 대체로 그 식견은 지극히 낮고 평범할 것이니, 또한 배부름과 편안함을 구하는 자의 아래에 있는 것이다. 陳氏曰 志方求而未眞有得 安保其無外役以分之 진씨가 말하길, “뜻을 두고서 바야흐로 구했지만, 아직 진짜로 터득함이 있지 않다면, 어찌 외물에 부림을 당해 (뜻이) 나뉘어짐이 없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西山眞氏曰 志於道者 心存於義理也 恥衣食之惡者 心存於物欲也 理之與欲不能兩立 故聖人以此爲戒也 學者必須於此分別得明白 然後可以進道 不然則亦徒說而已 顔子一簞食一瓢飮 不改其樂 此是不恥惡食 子路衣敝褐袍與衣狐貉者立而不恥者 此是不恥惡衣 前輩有云 咬得菜根 何事不可爲 是亦此意 서산진씨가 말하길, “道에 뜻을 둔 사람은 그 마음이 義理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고, 옷과 음식의 나쁨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물욕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이치는 물욕과 더불어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성인께서는 이로써 경계를 삼으신 것이다. 배우는 자는 반드시 여기에서 명백히 분별한 연후에 도에 나아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한 부질없이 말하는 것일 뿐이다. 안자는 대광주리에 밥을 담아 먹고 표주박에 물을 떠 마시면서도,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았는데, 이것은 바로 나쁜 음식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이다. 자로는 해진 갈포를 입고서, 여우와 담비가죽을 입은 자와 더불어 서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바로 나쁜 옷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이다. 선배들이 한 말 중에 ‘채소 뿌리를 씹어 먹을 줄 안다면, 무슨 일을 하지 못하겠는가?’라는 말이 있는데, 이 역시 바로 이 뜻이다.”라고 하였다. 葉氏曰 心一而已 役於物 則害於道 篤於道 則忘於物 天理人欲消長之機 聖人之所深辨 而學者之所當加察也 섭씨가 말하길, “마음은 하나일 뿐이니, 외물에 부림을 당하면, 道에 해가 된다. 道에 돈독하면, 외물을 잊어버릴 것이다. 天理와 人欲이 사라지거나 자라는 기틀은 성인께서 깊이 변별하시는 바이지만, 배우는 자도 마땅히 더욱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바이다.”라고 하였다. 王氏曰 未字見聖人待人寬厚處 兩何足字是先儒鞭迫緊切處 왕씨가 말하길, “未자(未足與議也)에서 성인께서 남을 대함이 관대하고 후중하셨던 부분을 알 수 있고, 2번의 ‘何足’이란 글자는 선배 유생(주자와 정자)이 급박하게 편달함이 긴요하고 간절했던 부분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內重而見外之輕 得深而見誘之小 斯人也 與之議道 則識高明而論精微 今云學道而尙羞惡衣食 則與不學無識之俗人何異 其內不重得不深 可知矣 言此以厲爲士而識趣卑陋者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안을 중하게 여겨서 밖을 보는 것이 가볍고, 깊이 터득하여 유혹당함이 작은 이러한 사람은 그와 더불어 도를 의논한다면, 식견이 고명하고 논리가 정미할 것이다. 지금 도를 배운다고 말하면서도, 도리어 나쁜 옷과 음식을 부끄러워한다면, 배우지 않아서 식견이 없는 속인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가 안을 중하게 여기지 않고 터득함이 깊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말함으로써 선비가 되어서 식견과 취향이 비루한 자를 면려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