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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호]
자기해방과 민중구제의 노정
-중국현대문학의 불교 표현
강경구
중국은 근대기획의 두 축이라 할 과학과 민주에 대한 지향으로 추동되어 왔다. 대체적으로 당시의 중국인들에게 그것은 서구화와 같은 의미로 이해되었다. 다만 이를 위해 완전한 서구화〔全盤西化〕의 길을 걸을 것인지, 서양의 것을 응용하되 중국의 중심을 유지하는〔中國本位〕 길을 걸을 것인지를 두고 다양한 논의와 실천들이 있었다. 이러한 서구 지향의 현대화 노정에 기독교와 맑시즘을 비롯한 다양한 외래 철학사상이 뚜렷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런데 불교로 돌아오면 상당히 흥미로운 복잡성이 발견된다. 우선 그것은 유교, 도교와 함께 낡은 중국의 상징이었다. 특히 명대 이후 미신화의 경향이 뚜렷해진 불교는 극복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불교는 유교의 주류문화에 상대되는 뚜렷한 비주류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유교의 봉건예교封建禮敎에 반대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서학西學을 수용한 이들이나 불학佛學을 견지한 이들의 입장이 같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불교적 사유방식에 바탕하여 근대화를 지향하고자 하였던 문학가들은 국수파國粹派나 서학파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개척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현대문학의 초입에 승려문인 소만수蘇曼殊와 이숙동李淑同을 만나는 의미는 심대하다. 이들의 영향으로 많은 문학가들이 새로운 안목으로 불교를 이해하고 그 문학화에 힘쓰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문학사적으로 볼 때 무수한 작가들이 불교적 색채가 농후한 작품을 썼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작가들을 들어 보자면 노신魯迅, 주작인周作人, 파금巴金, 노사老舍, 빙심氷心, 허지산許地山, 풍자개豊子慨, 곽말약郭沫若, 욱달부郁達夫, 모순茅盾, 애청艾靑, 서지마徐志摩, 대망서戴望舒, 주자청朱自清, 임어당林語堂, 폐명廢名, 장애령張愛玲, 노은盧隱, 소건蕭乾, 종백화宗白華, 하개존夏沔尊, 풍지馮至, 시칩존施蟄存, 장자평張資平, 하기방何其芳, 김용金庸 등이 있고, 가까이로는 200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고행건高行健이 있다.
이들을 일일이 살펴본다는 것은 장편의 중국현대불교문학사를 기술하겠다는 의미가 될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소만수蘇曼殊, 허지산許地山, 심종문沈從文, 김용金庸, 그리고 고행건高行健 문학의 불교적 특징을 살펴보는 것으로 그 흐름을 짐작하는 자료로 삼고자 한다. 이들의 문학활동을 불교적으로 요약하자면 ‘자기해방과 민중구제’가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이숙동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현대 문화계에 끼친 그의 불교적 영향력이 워낙 남다르기 때문이다. 홍일법사弘一法師 이숙동은 문화예술계와 불교계의 위인이었다. 또한 중국 불교에 남산율종南山律宗을 부활시킨 대종사였다. 그는 당대 문학인들의 친구이자 스승으로서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 활동의 종교, 음악, 미술, 출판 등에 걸쳐 극히 다양하며 업적 또한 찬란하다. 다만 문학작품의 경우 그 양과 질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미치지 못하는 감이 있다. 따라서 몇 줄의 소개로 이를 대신하고 위에 언급한 구체적 작가와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소만수蘇曼殊 -깨트림과 심미의 삶
최근 중국에 소만수蘇曼殊(1884~1918)의 바람이 분 일이 있다. 100년 전의 소만수가 다시 부각된 데는 오늘날의 개혁개방의 상황이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유사하다는 점, 또 개성해방의 추구에 상통하는 바가 있다는 점 등이 주된 이유로 작용하였다고 이해된다.
소만수는 중국현대문학의 초입에 서 있던 승려문학가였다. 그는 시와 소설에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번역활동에 힘써 엄복嚴復(1853~1921), 임서林紓(1852~1924)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3대 번역가의 한 사람으로 통한다. 그의 대표작 『외로운 기러기의 생〔斷鴻零雁記〕』은 중국의 현대 자전체 소설의 선구로 꼽힌다. 그는 3번 출가에 3번의 속퇴를 거듭하였지만 항상 스스로를 승려로 자처하였다. 학교생활을 하면서도 삭발, 가사에 염불을 즐겨하여, 친구들은 그를 소화상蘇和尙이라 불렀다. 귀국하여 문예계에 종사하는 동안 사람들은 그 파격적 기행에 주목하여 그를 기승奇僧, 괴승怪僧으로 부르거나, 술과 여자에 거리낌이 없다 하여 정승情僧, 풍류화상風流和尙이라 불렀고, 또 손문의 혁명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하여 혁명화상革命和尙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절에 산 적이 거의 없고, 도첩도 받은 적이 없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승려라 할 수 없다. 특히 그는 불교의 계율과 거리가 멀었다. 12살에 처음 출가하였다가 사회로 나오게 된 이유부터 그렇다. 그가 사찰의 거친 채식을 견딜 수 없어, 몰래 비둘기를 잡아 요리해 먹다가 계율을 어긴 죄로 쫓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의 전말은 그의 소설에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불살생계를 범한 이후 그의 생활은 불교의 계율을 깨뜨리는 것으로 점철된다. 무엇보다 기루를 즐겨 출입하여 불음주계와 불사음계를 지키지 못하였다. 「잡기雜記」에 보면 그가 만났던 기녀들의 이름이 빽빽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 이로 인해 친구에게 ‘승려로서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다’는 힐난을 당하고 곡을 한 일도 있다. 이에 대해 스스로 한탄한 시가 있다.
가사에 점점의 얼룩, 앵두 꽃잎인가?(袈裟點點疑櫻瓣)
반은 연지 자국, 반은 눈물 자국!(半是脂臙半淚痕)
하늘 여인, 그 입술의 이슬 몰래 맛보고(偸嘗天女脣中露)
몇 번이었던가, 바람 앞에 눈물 훔친 일(幾度臨風拭漏痕) —소만수, 「회고〔本事詩〕」
가사를 걸치고 술집을 출입한 것은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이다. 불투도계 역시 그의 심미적 낭만행각 앞에 힘을 쓸 수 없었다. 답답한 상해를 벗어나 홍콩으로 가기 위해 친구 장사쇠張士釗의 돈을 훔쳤는가 하면, 사형의 도첩度牒을 훔쳐 승려신분의 근거로 삼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정으로 한 곳에 머물지 않는 운수납자雲水衲子의 삶을 살았고, 티끌세상의 행주좌와에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도리를 확인하던 구도자로 인정받았다. 그가 종교, 문학, 정치적 관점에 있어서는 물론 사회적 삶에 있어서 무아無我의 실천에 철저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짧은 생애 동안 일본과 홍콩, 싱가폴은 물론 중국 각지를 유랑하듯 돌아다닌 일, 신해혁명이 성공한 뒤 손문이 제안한 직책을 거절한 일,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일, 오로지 오늘에 집중하여 살아간 일 등은 그의 선사禪師적 기질을 잘 드러내어 보여주는 예들이 된다. 여기 유명한 이야기들이 있다.
만성 위장병으로 입원하였을 때의 일이다. 치료를 마치고 퇴원을 할 때가 되었지만 입고 나갈 옷이 없었다. 그것을 딱하게 여긴 한 친구가 돈을 마련하여 주었는데, 소만수는 그것으로 수입 장난감을 사서 가지고 놀다가 그마저도 문병 온 다른 친구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그리고는 다시 옷이 없어 퇴원을 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여색을 좋아하는 일도 기행에 가까워 평생 많은 여성들과 사귀고 헤어지기를 반복하였다. 그에게는 분명 호색한의 기질이 있었다. 담뱃불이 가사에 떨어져 타고 있는데도 그것이 미녀의 담뱃재라 하여 그대로 둔 일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일에 대한 불이不二적 집중에 가까웠다. 그는 수많은 여인과 만나면서도 결혼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그의 깊은 속을 아는 주변의 친구들은 그가 여인을 끼고 있으나 색을 초월하였다고 이해하기도 하였다. 소만수는 또 탐식으로도 유명하여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면 병이 날 정도로 먹기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사탕과 과자를 좋아하여 ‘사탕을 좋아하는 중(糖僧)’—당승唐僧과 발음이 같아 당 현장玄獎을 떠올리게 된다—으로 자칭하였다. 사탕을 먹기 위해 이빨에 씌운 금니를 뽑아 사탕을 사 먹은 적도 있었고, 인도네시아에서 교사로 생활하면서 모은 상당한 금액을 귀국하면서 사탕과 과자를 사먹는 일에 모두 써버린 일도 있다. 그는 결국 폭식으로 얻은 위장병이 악화되어 35살의 젊은 나이에 죽게 되는데 죽은 뒤에도 베게 밑에 구운 단밤이 숨겨져 있었다는 얘기가 남아 있다.
이러한 기행과 전기적 삶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었다. 근대 초서의 성인으로 불리는 우우임于右任은 그를 평하여 ‘기루에서 선정에 들었다(記得紅樓入定時)’ 하였고, 공산혁명의 선구자 진독수陳獨秀는 ‘출로를 찾을 수 없는 세상에서 그가 자살정책으로 무절제한 음주와 폭식의 길을 택했다’고 보았다. 혹은 그 생애와 문학에 나타난 추구와 절망에 주목하여 그를 굴원屈原에 비유하는 관점도 있었다. 특히 손문孫文은 그가 당대 최고의 선승 태허太虛를 크게 능가하는 진실한 승려였다고 평가하였으며, 보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혜능慧能의 화신으로 보았다. 한국인의 눈으로 보자면 그의 무애행은 원효元曉에 비견될 만하고, 그의 문학적 업적은 김시습金時習에 가깝다.
개성해방은 현대 중국의 풀리지 않는 숙제이다. 그런데 소만수와 같은 불교 문인들은 무주無住, 무상無相을 핵심으로 하는 혜능의 중국선中國禪에서 개성해방의 그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소만수의 삶과 문학은 바로 이 혜능의 선禪에 통한다. 소만수는 선적 해방의 세계를 부정〔遮〕과 긍정〔照〕의 동시성을 통해 구현한다.
짚신에 깨진 밥그릇 알아보는 이 없는데(芒鞋破鉢無人識)
벚꽃 밟으며 지나온 길 이게 몇 번째 다리였더라?(踏過櫻花第幾橋)—「회고〔本事詩〕」
짚신과 깨진 발우, 아무도 나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 부정은 철저하다. 낭만작가 욱달부郁達夫는 이러한 상황에서 자살을 꿈꾸었다. 그런데 소만수는 이 상황에서 버림과 추구, 혹은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실천한다. 알아보는 이 없는 세계(부정)에서 벚꽃의 화려한 낙화(긍정)에 취해 오로지 지금·여기에 실존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반된 요소의 공존은 소만수에게서 두루 발견된다. 얼핏 모순으로 보이는 그것은 사실 불이 중도의 실천에 가깝다. 자전 소설 『외로운 기러기의 생〔斷鴻零雁記〕』에도 애정의 추구와 달관이 한 문단에 공존한다. 예컨대 나〔余〕의 출가동기가 그렇다.
속으로 생각해보니 오직 출가하여 붓다와 진리와 승가에 귀의함으로써 사랑을 구하는 그녀의 마음을 포기하도록 하여 행복한 가정을 누리도록 하는 길밖에 없었다.—『외로운 기러기의 생』
출가의 동기가 두 가지이다. 자기희생이 그 하나이고, 보다 완전한 애정을 구하는 마음이 또 다른 하나이다. 이 소설은 전체적 구조에 있어서 명확한 기승전결의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상반된 요소의 불이적 공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외로운 기러기의 생』은 시작과 결말의 공간이 동일하다. 즉 소설이 시작될 때 떠났던 공간으로 ‘나’가 되돌아오면서 소설이 끝나는 것이다. 추구하는 바가 있어 지금·여기를 떠나지만 결국 되돌아오는 것이 인생이라는 깨달음, ‘형상은 불변하는 본질을 갖고 있지 않지만〔色卽是空〕, 그렇게 보는 관점 또한 실체가 없다〔空亦無有〕’고 입버릇처럼 외고 다녔던 소만수의 관점이 구현되어 있다.
소만수의 삶과 문학에 관철되고 있는 선불교적 사유는 생래적 DNA에 가깝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유가의 질식할 것 같은 형식주의를 무너뜨리는 개인을 해방으로 이끄는 참신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선적 사유가 갖고 있는 철저한 부정과 낙관적 현실집중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만수의 삶과 문학이 중국의 근대기획을 재점검하고자 하는 지금의 중국에서 집중적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허지산許地山 —불교 낯설게 하기
문학작품에 담긴 불교적 요소의 순도를 따진다면 그 가장 중요한 자리에 허지산許地山(1893~1941)을 앉혀야 마땅하다. 그는 독실한 불교신자인 어머니와 선승이었던 외삼촌의 영향을 받아 불교적 체질을 형성하였다. 또 20살이 되어서는 미얀마 양곤에서 2년간 교편을 잡으며 남방불교의 분위기를 깊이 체험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의 학력과 연구경력 또한 불교와 관련이 깊다. 그는 연경燕京 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한 뒤 콜럼비아 대학에서 종교사와 비교종교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다시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범어를 전공한 드문 경력의 소유자였다. 나아가 불교사상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 수차 인도를 방문한 바 있고, 이러한 연구와 체험을 바탕으로 북경대학 등에서 불교 및 종교학을 강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중국불교에 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풍부한 불교체험은 그 문학작품의 기조를 형성하게 된다. 그의 작품에 불교용어나 불교적 이미지, 불교적 사유 등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산문집 『영혼의 비 빈산에 내리고〔空山靈雨〕』에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불법이 무어냐구요? 색色,성聲, 향香, 미味, 촉觸, 행위, 사유가 모두 불법이예요. 하지만 향기를 맡기를 좋아하는 애착은 불법이 아니랍니다. —「향香」
불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 속에 잠겨 있고, 모든 작용을 통해 드러난다는 불교적 표현법을 그대로 쓰고 있다. 나아가 거기에 시비, 호오의 분별이 일어나게 되면 진정한 불법을 볼 수 없다는 불교적 사유의 핵심을 짚는 일을 잊지 않는다. 이러한 선적 번뜩임은 짧은 산문형식의 문장에 활기를 부여한다. 그것은 보다 쉬운 삶의 지혜로 펼쳐지기도 한다.
원래 어두움을 저주하거나 밝음을 찬양할 필요는 없지요. 밝음이 우리를 이롭게 하는 것도 아니고, 어두움이 뭐 우리에게 해로움을 주는 건 아니니까요. 차별심을 낼 필요가 없는 거지요. 찬양할 거라면 아침에는 아침을 찬양하고, 낮에는 낮을, 황혼에는 황혼을, 그리고 긴긴 밤에는 또 그 밤을 찬양하면 되는 겁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에 과거, 현재, 미래의 그 시간들을 찬미해야 합니다. 저주할 거라면 또한 역시 이와 같구요(亦復如是). —「아침 해가 동녘에 뜨려 하니〔暾將出兮東方〕」
분별적 사유를 내려놓을 때 거기에 중도적 지혜가 일어난다는 불교의 교리를 일상의 가르침으로 풀어놓고 있다. 특히 ‘또한 역시 이와 같다(亦復如是)’는 경전의 관용어를 습관적으로 쓰고 있고, ‘개자씨에 수미산을 넣는다’는 등의 비유, ‘향기 나는 코끼리〔香象〕’ 등의 어휘, 『법원주림法苑珠林』 등의 불교고사가 도처에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 발견된다.
허지산의 불교문학은 그만의 특징을 갖고 있다. 일체개고一切皆苦의 강조, 불교 낯설게 하기, 기독교 등 다른 견해의 제시 등이 그것이다. 이는 그가 동서양의 다양한 문화에 익숙한 해외파라는 사실, 진지한 기독교도이자 당대 중국 최고의 종교학자였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의 문학을 주장하는 ‘문학연구회文學硏究會’의 주요 멤버였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 중에서도 불교 ‘낯설게 하기’는 불교를 새롭게 이해하고 이를 문학화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에 속한다. 허지산은 기존의 불교를 미얀마 불교, 기독교, 힌두교 등에 비교하거나 융합함으로써 그 ‘낯설게 하기’에 도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소설 『운명의 새〔命命鳥〕』는 허지산 불교문학의 특징이 종합적으로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소설은 미얀마 양곤 근교에 사는 소녀 민명敏明과 소년 가릉加陵의 사랑과 염세와 깨달음의 이야기이다. 소녀 민명은 비몽사몽간에 신비하면서도 무서운 환상의 세계를 경험한다. 민명은 환상 속에서 저 언덕의 청춘 남녀가 벌이는 특이한 사랑놀이를 목격하게 된다. 모든 소녀들은 소년들은 차례로 찾아다니며 ‘너는 나의 운명의 새’라는 말을 반복하고, 소년들은 찾아오는 소녀들에게 한 글자도 바꾸지 않고 ‘너만을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러다가 애정의 꽃잎이 떨어져 날아가 버리고 나면 서로 물고 뜯는 관계가 된다. 이러한 환상세계의 체험을 통해 애정의 불완전함을 깨닫게 된 민명은 애정과 집착에서 비롯되는 윤회를 벗어나고자 자살을 결심하는데, 그 결심을 들은 가릉加陵 또한 그녀와 함께 호수 속으로 들어간다.
전체적으로 슬픈 이야기지만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안타까움, 사랑과 삶의 허무함 등에 동감을 느끼게 되는 소설이다. 여기에 미얀마의 풍경, 아난을 사랑했던 마등가의 이야기, 꽃의 나라 이야기 등이 교착되면서 별세계의 풍경을 구현한다. 기괴한 문학적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운명의 새』는 미얀마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 독자계의 색다른 관심을 받았다. 쉐다곤 불탑의 환상적 모습은 스토리의 전환이 일어날 때마다 반복적으로 묘사되고, 일상의 삶은 불교 수행과 뒤섞여 있다. 그것은 중국의 불교와 전혀 다른 풍경이다. 이를 통해 익숙하던 불교가 낯선 자리로 멀어지게 된다. 한편 불교적 교리의 진술에 상반되는 견해가 동시에 나타나 익숙하게 미끄러지던 것을 다시 보게 하기도 한다. 자살을 앞두고 있는 청춘 남녀의 다음과 같은 말을 보자.
민명敏明: 여제자 민명은 삼세제불 앞에 조아립니다. 저는 만겁 이래 본래의 지혜본성에 어두워 윤회에 떨어져 여자의 몸이 되었습니다. 이제 대자비로 저에게 삼생의 인과를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깨닫고 참회하여 다시는 천인이나 인간이 되기를 선망하여 끝없는 고초를 받지 않고자 서원합니다. 원컨대(願) 저는 오늘 밤 모든 장애를 버리고 극락국에 태어나고자 합니다.
가릉加陵: 나는 세상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야. 너 때문이지. 나는 너와 함께 가기를 바라는 거지. 나는 너와 갈라질 수 없어. 네가 가는 곳이면 나도 갈 거야. ……우리는 생명의 여행자, 이제 저 신세계로 가려 해. 나는 너무나 기뻐. —『운명의 새』
민명이 인간의 몸을 벗기로 한 것은 남녀 간의 사랑이 서로 물고 뜯는 갈등의 시작임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릉은 여전히 민명과 함께 하는 운명의 새로 남고자 한다. 이 상반되는 남녀의 생각은 서로 공존할 뿐, 어느 쪽이 다른 한 쪽을 설득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제삼의 다름이 제시된다.
다만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호수의 물은 그들 여행자의 비밀을 지켜줄 생각이 없다. 기회만 생기면 그들의 껍데기를 밖으로 돌려보내게 되리라. —『운명의 새』
이 기묘한 공존이야말로 바로 허지산 문학의 주제였다. 굳이 서로 다른 것들을 통합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다. 수필 「발원〔願〕」에는 한 쌍의 부부가 종교적 헌신과 희생을 기원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여기에도 서로 다른 견해가 같은 무게로 제시된다. 아내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이 ‘보배 우산〔寶華蓋〕’, ‘맑고 밝은 구슬〔淨明珠〕’, ‘금강저金剛杵’, ‘보배 우란분〔多寶于蘭盆〕’이 되어 중생을 제도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존재가 되기를 기원한다. 반면 남편은 ‘소금〔精鹽〕’이 모든 음식에 스며들되 자신의 형체를 드러내지 않고 맛을 돕는 것처럼 자신도 그와 같은 작용을 하게 되기를 기원한다. 아내와 남편의 지향은 드러남과 사라짐, 본질과 작용, 불교와 기독교의 상호 반대되는 개념에 상응한다. 허지산의 문학은 이러한 모순의 공존을 통해 독특한 자신만의 문학적 세계를 확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그는 불교에 아첨〔佞佛〕하지 않았고, 상대되는 자리에 기독교를 세워 그것을 대체하고자 하지도 않았다. 교리적 입장에서 보자면 그의 문학에는 불교와 기독교가 상호 격의格意되어 있다. 불교는 기독교에 의해 보다 깊게 이해되고, 기독교는 불교에 의해 쉽게 수용되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다채롭게 살아 움직이는 그는 ‘인간의 삶’을 담은 문학을 창작할 수 있었다고 이해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독특한 불교적 문학론에도 잘 나타나 있는 바이다.
창작의 삼보는 불법승이 아니라 그것과 범주를 같이하는 지혜, 인생, 아름다움이다. ……불교에 四사의依, 즉 네 가지 의지처가 있다.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않는다.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 지혜에 의지하고 식견에 의지하지 않는다. 구경의 깨달음을 담은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지 소승의 불료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않는다. 감상가의 사의四依도 같은 이치이다. 큰 뜻을 취하고 언어를 따지지 말며〔의의依義〕, 개인감정이 아니라 창작의 원리에 의지하여야 한다〔의법依法〕. 작품을 가볍게 버리거나 소홀히 다루지 말고 그 의의를 발견하고 깨닫기 위해 마음을 써야 하며〔의지依智〕, 작품을 깊이 이해한 뒤 평을 하여야 한다〔의료의依了義〕. —「창작의 삼보三寶와 감상의 사의四依〔創作底三寶和鑑賞底四依〕」
심종문沈從文—불교 이야기 방식의 차감
중국현대문학사에 있어서 심종문沈從文(1902~1988)의 위치는 독특하다. 동시대의 작가들이 서양의 사상과 문예조류에 경도되어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갈급해하고 있을 때, 심종문은 중국의 궁벽한 벽지에 남아있는 진정한 생명의 향연을 작품에 담고자 하였다. 심종문은 물질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삶에 대해 부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유토피아적 꿈을 수용하는 것도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차별성을 시골사람〔鄕下人〕이라는 말로 표현하곤 하였다. 거기에는 도시문명과 구별되는 무엇, 유토피아적 몽상과 구별되는 무엇이 담겨 있다. 당연히 그것은 유가의 도덕주의적, 반생명적 삶과 구별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심종문은 숭고한 신성과 풍부한 인성의 통일이 상서湘西 지역 묘족苗族의 삶에 구현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들이 격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한 순간도 제자리에 머물지 않는 영원한 신생의 삶을 살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심종문은 서구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았던 중국작가의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는 노벨상 수상에 가장 가까이 닿아있던 작가의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얘기된다. 특히 스웨덴 한림원의 맘퀴스트(Goran Malmquist)는 소박하면서도 생명의 본질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심종문의 문학을 높이 평가하여 그 작품을 직접 번역하는 동시에, 그를 수상후보로 적극 추천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심종문은 동시대의 작가들이 홀시하고 넘어간 중국의 숨겨진 세계를 천착하였고, 이로 인해 중국현대문학사는 물론 세계 문단에 보기 드문 독특한 문학세계를 구축해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많은 연구자들이 이러한 심종문의 문학이 항상 머무는 일〔不住〕 없이 ‘모르는 자리’로 새롭게 나아가는 선불교의 사유방식과 구조적으로 서로 통한다는 점에 관심을 보여왔다. 그리하여 심종문의 문학을 불교적 사유방식으로 설명하는 학설들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심종문은 소년 시절 상서의 유명한 군벌 진거진陳渠珍의 서기로 일할 때 이모부 엽인덕聶仁德을 만나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받았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청소년 시기에 불교를 만나면서 그 초월의 세계와 활기찬 사유구조에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심종문의 소설에는 소수민족의 야성野性과 불교의 영성靈性이 동시에 구현된다. 심종문의 문학창작에 있어서 그의 불교체험은 혹은 배경으로, 혹은 소재로, 혹은 재창작의 원천으로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우선 여성형상들의 외형적 아름다움과 내면적 성숙을 관음보살에 비유하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눈에 띈다. 관음보살의 비유는 그의 전체 작품에 수시로 나타나고 있거니와 특히 『변방의 마을〔邊城〕』의 취취翠翠, 「아흑 이야기〔阿黑小史〕」의 아흑阿黑, 「어머니〔一個母親〕」 중의 대매大妹는 그 아름다움과 성숙함이 구원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관음보살에 비유된다.
오명五明은 늘 아흑阿黑이 관음보살을 닮았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것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찬할 다른 말을 찾지 못해서였다. 자신이 진정으로 머리 숙여 투항하고자 한다는 의미였다. 지금 오명은 정말 아흑이 관음보살처럼 느껴졌다. 자비, 청아, 온유함에 있어서 관음보살이라 해도 그녀보다 더 고상하고 인정이 많을 리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아흑 이야기」
이처럼 심종문은 육체적 욕망과 정신적 갈등을 해소시켜 주는 여성의 사랑을 구원의 관음보살에 비유하곤 한다. 남성이 이를 통해 생명의 환희와 구원을 얻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종문은 바로 ‘여성들은 붓다의 일을 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심종문의 문학에 대한 불교의 영향을 언급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불교의 고사를 재창작한 소설집 『달빛 아래〔月下小景〕』 수록 8편의 소설과 산문집 『일곱색깔의 악몽〔七色魘〕』 수록 7편의 산문이다. 『달빛 아래』는 불교고사를 100개의 소설로 재창작하여 『데카메론』과 같은 소설 모음집을 내겠다는 창작프로젝트의 첫 결과물이었다. ‘시간과 정력’의 부족으로 이 계획은 완수되지 못했지만 『달빛 아래』만 가지고도 그 문학적 지향의 핵심을 볼 수 있다.
『달빛 아래』에서 재창작된 불교고사들은 인간과 신,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과거와 현재, 이곳과 저곳을 걸림없이 넘나드는 신화적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준다. 또한 거기에는 원시적 생명력이 넘치고 있다. 그런데 이 『달빛 아래』를 원래의 텍스트인 『법원주림法苑珠琳』과 비교해보면 그 문학적 지향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원래의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확대하고, 생략하고, 비틀고, 쪼개고, 합하여 새로운 소설로 재창작한다. 원래 『법원주림』의 인도 이야기들은 중국소설의 생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기괴한 이야기의 세계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이야기를 건강하지 못하게 생각하던 중국인들의 상상력을 풀어놓는 계기가 된 바 있다. 이에 힘입어 중국에 소설의 장르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심종문의 현대소설 실험에서 다시 일어난 것이다. 그 역시 옛 중국인들이 그러했듯 그 이야기의 기괴함에 끌렸다. 그 속에 담긴 새로움이야말로 정해진 도덕적 울타리를 넘지 못하는 중국인들의 허약한 생명력에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는 처방이 될 수 있다 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달빛 아래』의 불교소설들이 금기의 영역에 갇혀 있던 죽음과 육체적 사랑을 삶의 현장에 불러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창끝은 중국의 전통적 도덕과 상식을 겨냥하고 있었다.
예컨대 『쟁 타는 사람의 사랑〔彈箏者的愛〕』의 이야기가 그렇다. 남편을 잃은 뒤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절세미녀의 과부 앞에 쟁箏을 타는 악사가 나타난다. 그 악사는 가진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추루하기 짝이 없는 용모를 한 남자였다. 그런데 개가할 생각없이 살아가던 이 미녀 과부는 그 음악을 듣다가 그만 악사를 사랑하게 된다. 하루는 우물에서 물을 푸면서 악사의 음악을 듣다가 업고 있던 아이를 두레박인 줄 알고 우물에 빠뜨리고 만다. 아이가 죽은 그날 저녁 여인은 잠옷을 입고 악사를 찾아가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악사는 그것이 마귀의 짓이라 겁을 내어 달아나고, 여인은 사랑의 좌절에 절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원래의 불교이야기는 이를 통해 애욕의 무서움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었지만 심종문은 이를 통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사랑의 힘을 확인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악사의 용기없음을 비웃는다. 그런데 이렇게 주제의식이 거의 상반되는 재창작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관념에 머물지 않는〔不住〕 불교정신의 기본구조와 그 힘은 그대로 살아남는다. 특히 그것은 죽음조차 불사하는 극단적 버림과 추구로 인해 형성되곤 한다.
원래 심종문과 같은 반문명의 추구는 합리에 바탕한 것이 아니기는 하다. 그것은 오히려 꿈과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아야 옳다. 그런데 심종문은 그 원시회복의 꿈이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고, 문학적으로 불교설화를 빌려 그 가능태를 형상화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액자 틀의 바깥현실보다 액자 안의 이야기에 더 큰 리얼리티를 부여하였다. 기괴하고, 신비하며, 맑고 투명한 이야기들은 심종문 자신의 꿈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장주였으되 꿈의 저쪽, 나비의 세계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그것은 불교고사의 액자를 다루는 방식과 반대되는 것이기도 하다. 원래 불교의 이야기는 발화자가 액자 안의 이야기를 빌려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도록 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부 연구자들은 심종문에게 상당한 맹목이 발견된다는 비판적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문학이 꿈꾸기를 멈출 때 그것은 과연 무엇이 될까. 어쨌든 이로 인해 심종문은 그 성취에 있어서나 한계에 있어서 이래저래 특별한 작가가 아닐 수 없다.
김용金庸—무협소설의 힘, 불교의 힘
김용金庸(1924~ )은 중국의 무협소설을 새로운 차원으로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신세대 무협작가로 불린다. 그는 1955년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을 발표한 뒤, 연이어 전체 14편의 무협소설을 내놓는다. 그 소설들의 앞 글자를 딴 ‘비설연천사백록飛雪連天射白鹿, 소서신협의벽원書神俠倚碧鴛’의 7언 2구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는 것은 김용의 소설이 누리고 있는 인기의 증좌가 된다. 그의 소설은 중국의 빈곤층에서 최고의 정치 지도자와 당대의 석학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들이 가장 즐겨 읽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김용 스스로도 감개무량하게 회고한 적이 있지만, 1981년 등소평鄧小平이 일부러 그를 만나 작품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바 있기도 하다. 이후 엄가염嚴家炎, 전리군錢理群, 유재복劉再復 등 석학들의 선도적 연구를 계기로 김용 연구바람이 일어나 ‘김용학〔金學〕’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어쨌든 그의 작품이 읽히고 연구된 역사를 보면 그것은 이미 『수호지』와 같은 고전의 반열에 오른 감이 있다. 그래서 일부 평론가들은 김용을 ‘자신의 작품이 고전이 되는 것을 직접 목도한 역사상 최초의 인물’이라 평하기도 한다.
그의 소설은 무예를 통해 인물을 묘사하는데 능하다. 무예와 사람됨이 통일되어 있으므로, 무예의 완성과 인격의 완성이 궤를 같이 하게 된다. 무공을 외공外功과 내공內功을 나누고 내공에 더 큰 무게를 두는 전통적 무술관은 김용에 이르러 더욱 짙은 철리성을 확보하게 된다. 인격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는 무예의 수련이라는 중심주제는 이후 곽정郭靖과 같은 유가 협객〔儒俠〕, 장무기張無記와 같은 도가 협객〔道俠〕, 단예段譽나 허죽虛竹과 같은 불교 협객〔佛俠〕의 인물형상을 통해 깊이 있게 천착된다. 그 중심에 불교가 있었다. 불교에 대한 김용의 관심은 거의 학문연구의 수준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삶의 본질을 깨달아 일체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문학과 불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정리한 바 있다.
인생을 풍부하고 다채롭게 하는 것이 문학이라면, 불교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게 해준다. 두 가지 모두 인생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사실 무협지와 불교는 원래부터 심상치 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정통 무술의 산실인 소림사少林寺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협소설 작가로서 김용도 마찬가지였다. 불교는 그에게 거의 체질과도 같은 것이어서 그의 대부분의 소설에 불학의 자취가 농후하다. 예컨대 『협객행俠客行』은 무명무상무주(無名無相無住)의 불교철학이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작품인데, 작가 스스로도 불교를 본격적으로 접하기 전에 이러한 작품을 쓰게 된 것은 ‘불가사의한 인연에 의한 것’이라 회고한 바 있다. 작품의 주인공 석파천石破天은 이름이 없고, 그 출생의 비밀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그저 그를 납치해간 매방고梅芳姑가 자신을 부르던 ‘개잡종〔狗雜種〕’이라는 호칭이 본래 이름인 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름 때문에 고민하지 않는다. 이렇게 그는 다가오는 인연을 거절하지도 않고 추구하지도 않음으로써 절세의 신공을 얻게 된다. 특히 그는 협객도俠客島에서 절세무공의 비급을 관념으로 풀지 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선적 안목에 의해 천고의 무술을 얻게 된다. 이름〔名〕과 관념〔相〕에 대한 집착을 일시에 깨는 힘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천룡팔부天龍八部』는 김용의 대표작으로 그 문장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하였는데, 불교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힐 만하다. 천룡팔부는 원래 『법화경』 「제바달다품」등에 보이는 불법의 수호신이다. 여덟 존재의 대표가 천신과 용이므로 천룡팔부라 이름붙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몇몇 학자들은 소설의 인물들이 천룡팔부의 각 존재와 어떻게 대응되는지 연구한 바 있기도 하다. 그 타당성에 상관없이 소설의 인물들은 각자의 삶을 통해 불법이 갖고 있는 진리와 지혜의 길을 제시하고 증명한다. 그 중 천진함과 무심無心, 그리고 자비는 김용 소설에 담겨진 불법의 핵심을 이룬다. 그것은 단예段譽와 허죽虛竹의 경우에 잘 나타나 있다. 단예는 대리국의 왕자이지만 정직함과 천진함의 미덕을 갖춘 소년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과 남을 속이지 않았기 때문에 북명신공北冥神功을 얻을 수 있었다. 천진하였기 때문에 대리국大理國의 고수들이 지혜와 역량을 총집결하여도 풀지 못하던 육맥신검六脈神劍의 요체를 풀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무예를 탐욕스럽게 추구한 정춘추丁春秋나 구마지鳩摩智는 물론 분별적 사유와 이해를 바탕으로 수련에 임한 영고榮枯 등의 고수들로서는 상상하지 못한 길이었다. 한편 허죽虚竹은 무심과 자비심의 화신이다. 그가 소요파逍遙派의 후계자를 고르는 바둑시합에 참가한 것은 사람을 구하려는 자비심 때문이었다.
허죽에게 큰 자비심이 일어났다. 그는 단연경段延慶에게 닥친 마장을 해소하려면 바둑으로 푸는 길 밖에 없음을 알았다. 다만 바둑 실력이 높지 않은 그로서 더할 수 없이 복잡한 이 바둑의 숙제를 푼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단연경이 바둑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니 위기가 곧 닥칠 것 같았다. 그에게 갑자기 영감이 떠올랐다. ‘바둑의 숙제를 풀지는 못하겠지만 그것을 휘젓는 일은 쉬운 일이다. 그의 정신을 한번만 떼어놓으면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둑판이 없는데 승패를 따질 일이 없잖은가?’ 그리고는 말하였다.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허죽은 성큼 앞으로 나아가 바둑통에서 흰 돌을 꺼내 눈을 딱 감고 손가는 대로 바둑판 위에 내려놓았다. —『천룡팔부』
허죽의 자비심은 타인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의 호신부가 되기도 하다. 그는 자비심으로 인해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기연으로 바꾸곤 하였다. 단연경을 구하기 위해 바둑판에 뛰어드는 허죽에게는 자비심과 동시에 지혜로움까지 발견된다. 바둑판이 없으면 승패도 없다는 허죽의 생각은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불교의 가르침과 그대로 통하기 때문이다. 원래 허죽이 놓은 한 알의 바둑은 자신의 집을 허무는 자충수였다. 그런데 이로 인해 많은 바둑의 천재들이 풀지 못하던 숙제가 일시에 해결되고 만다. 비록 집은 허물어졌지만 이로 인해 바둑의 행로가 열리고 결국 전체적 승부에서 우세를 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허죽은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천하제일의 악인, 단연경을 회개시키는 한편 스승 현난玄難을 깨달음으로 인도할 수 있었다.
현난이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였다. ‘이 판은 원래 득실과 승패로 뒤얽혀 있어 풀기 어려운 것이었다. 허죽의 이 한 수는 승패는 물론 삶과 죽음에조차 묶여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삶과 죽음을 뛰어넘어 해탈에 이를 수 있었던 거구나.’ —『천룡팔부』
허죽은 이렇게 집착을 버림으로써 진정하게 되살아나 무예를 완성하고 주변 사람을 구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우연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진정한 깨달음과 보살행이 나타나는 것은 소림사의 ‘청소하는 노승〔掃地僧〕’의 경우이다. 이름 없는 이 늙은 환경미화원은 소림사의 72절기를 모두 익힌 소원산蕭遠山과 모용박慕容博, 구마지鳩摩智에게 불법의 수행과 무공의 수련이 함께 해야 하는 이치를 이렇게 설한다.
염화지拈花指, 다라엽지多羅葉指, 반야장般若掌과 같은 본 소림파의 상승무공은 자비로운 불법으로 조화를 기하고 해독하지 않으면 독한 기운이 장기와 폐부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것은 갈수록 깊어져 밖에서 침입하는 어떤 독보다도 백배나 끔찍하게 됩니다. ……불법은 세상구제를 추구하고, 무공은 살생을 지향하니 두 가지는 서로 상반된 길을 걸으며 서로 제약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훨씬 높은 불법과 더욱 강한 자비심이 있을 때 비로소 무공의 절기를 제대로 연마할 수 있습니다.—『천룡팔부』
과연 그는 구마지의 무상겁지無相劫指를 부드러움과 강경함을 함께 갖춘 기의 장벽으로 아무 일도 없는 듯 막아낸다. 나아가 구마지를 포함한 세 사람이 탐욕의 마음으로 소림무술을 연마한 결과 얻게 된 부작용 증세를 일일이 설명해 준다. 그런 뒤 더 큰 자비심을 일으켜 모용박과 소원산의 백회혈을 때려 그들을 죽인다. 이들을 깨닫게 하는 한편, 그 아들들이 다시 복수를 하는 악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였다. 중생을 위해 스스로 지옥문에 들어서는 보살행의 표현이다. 그리고는 죽어 있던 두 사람을 되살리는데 그것은 억지 수련으로 조성된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죽이고 살리는 것이 자재〔殺活自在〕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사람이 자신의 장애를 치료하려면 불구대천인 상대방을 구해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억지 수련의 결과 소원산은 양의 기운이 극성하고, 모용박은 음의 기운이 극성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무명승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기운을 상대방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음양의 조화를 회복하고 서로의 병을 치료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집착을 내려놓은 두 사람은 복수(소원산)와 왕조의 광복(모용박)을 꿈꾸며 지내온 30여년의 삶이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모용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백성들이 먼지라면 제왕 역시 먼지와 같습니다. 대연大燕이 광복되지 못하는 것도 공空이요, 광복되는 것도 공입니다. 노승이 하하! 웃으며 말하였다. 크게 깨달았군요. 장하고 장합니다. —『천룡팔부』
이 무명 노승의 인물형상은 김용의 소설에 몇 차례 나타난다. 예를 들어 장삼풍張三豊의 사부인 각원覺遠이 그 예이다. 그는 불법을 익히는 과정에 우연히 구양진경九陽眞經을 얻어 절세의 무공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 무술이란 임시로 받은 이 몸을 돌보는 수단일 뿐, 진정 중요한 것은 『능가경』 등이 담고 있는 불법의 지혜였다.
자비심이 없으면 절세의 신공이 가공할 재앙이 되고, 마음이 바른 사람에게는 사파의 무공도 만민에게 혜택이 된다는 주제는 김용 무협지의 공통된 주제의식이다. 같은 물이라 해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는 불교의 비유와 상통한다. 예컨대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의 사손謝遜이 수련한 사자후獅子吼 신공이 그렇다. 사자후란 본래 붓다의 설법을 가리킨다. 사자의 포효가 군소 동물들을 단번에 제압하듯 붓다의 설법이 제반 논의들을 단번에 쉬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손이 복수심에 지배되는 동안 이 사자후는 무림인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후 불법에 귀의한 뒤, 삿된 무술의 마장에 빠진 장무기張無記에게 『금강경』 가리왕歌利王의 無相무상 법문을 읽어준다. 장무기는 그 법문을 듣고 바로 마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손이 진정한 사자후를 토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악인이 깨달으면 바로 새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불교적 주제는 김용 소설의 한 특징이 된다.
무협지는 성인의 동화이다. 김용의 소설에서 깨달음을 통해 악인도 새로 태어날 수 있다는 불교적 주제가 효과적으로 표현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동화로서의 특징 때문이다. 독자들은 김용의 이 성인 동화를 통해 상습적 자기비하에 빠지지 않고 향상일로向上一路의 꿈을 꿀 수 있었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나약함, 어리석음, 비천함, 비겁함, 부자유 등으로 스스로를 부정하거나 비하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우리는 그 부덕의 뒷면에 찬란한 미덕을 함께 선물 받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을 뿐이다. 바로 그 뒷면의 보배들을 들추어 보여주고, 따뜻하고 평온한 지혜를 향유하도록 하는 것이 김용 무협소설의 불교적 힘이라 하겠다.
高行健 —불교적 글쓰기와 불교적 사유
중국은 문학전통에 있어서나 국토와 인구에 있어서나 최장, 최대, 최다를 자랑하는 국가이지만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국가이기도 하였다. 그 국가적 아쉬움은 2000년 고행건高行健(1940~ )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가 중국의 억압적 정치·문화 행태를 견디지 못하고 프랑스로 망명한 작가였기 때문에 중국 정부와 관변단체의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2012년 막언莫言이 2번째 노벨문학상의 수상자가 된 현재까지도 중국문학을 대표하는 가장 중국적인 작가로 평가될 만하다. 그의 작품은 철리적 기술과 문학적 형상화의 균형을 통해 불법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특히 그의 대표작 『영산靈山』은 형식과 내용의 제반 측면에서 불교소설로 불려도 좋을 작품이다. 그 제목인 영산에서부터 붓다의 설법도량인 영취산을 상징한다. 그곳은 여행의 목적지이지만 어느 한 특정 지역에 있는 공간이 아니라 깨달음에 대한 비유이다. 이에 대해 고행건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당신은 그래서 그에게 영산靈山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우수尤水가 시작되는 곳이지요.” 우수가 어디 있는지 당신은 모른다. 그렇지만 다시 묻기도 뭐하다. 한참 후에야 당신은 다시 그곳에 가는 길을 묻는다. 어디에서 산을 오를 수 있느냐고 묻는다. “먼저 차로 오이진烏伊鎭이라는 작은 읍에 도착해서 다시 작은 배를 타고 우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됩니다.” —『영산』
여기에서 영산이라는 목적지는 우수尤水가 시작되는 곳이다. 우수의 우尤는 ‘있을 유有’와 발음이 같으며, 형상세계〔色〕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우수는 오이진烏伊鎭에서만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오이진의 오이烏伊는 하나조차 없다는 ‘무일無一’과 발음이 같아, 절대적 실체가 없는 공성空性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영산이라는 목적지를 향하는 여행은 이 세계의 어디에도 절대적 실체가 없다는 사실, 즉 그 공성을 체득하는 데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체득은 형상세계에서 다시 부단히 확인되어야 한다. 그래서 형상의 강, 즉 우수를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이 부정된다. 오이진을 버리고 떠나는 데에서 진정한 여행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영산』에서는 공을 체득하는 일을 영혼 여행의 출발로 보았다. 소설이 시작되자마자 오이진에 도착하였기 때문이다. 돈오頓悟 이후 진리를 찾는 여행이 시작된다는 전통적 불교의 수행관이 그대로 재현되는 대목이다. 이 여행은 누추하고, 힘들고, 때로는 방향조차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북경을 부정하고 변방을 돌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색공色空의 살아 움직이는 원리를 깨달아 돌아갈 여행의 마지막 도착지는 북경이 되어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이 끝나면서 북경에 돌아온 나는 차별의식에서 벗어나 다음과 같은 평등한 관찰에 이르게 된다.
창밖 눈밭에서 나는 아주 작은 청개구리 한 마리를 발견한다. 그것은 한 쪽 눈은 깜박거리고 다른 한쪽 눈은 둥그렇게 뜨고는 미동도 하지 않고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신임을 안다. 신은 그렇게 나의 앞에 나타나 내가 깨달았는지 보고 있을 뿐이다.
나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한 양, 신은 원래부터 청개구리였던 양, 그 밝은 둥근 눈을 깜박이지 않고 있다고 여긴다. 신이 이 불쌍한 인간을 기꺼이 살펴보는 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인자한 것이다. —『영산』
『영산』은 이렇게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도리를 깨달아가는 노정을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은 특히 개인의 정신세계를 나, 당신, 그, 그녀로 인칭을 바꿔가며 풀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눈길을 끌었다. 소설창작의 새로운 기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산』의 이러한 형식과 구조가 『서유기』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영산을 목적지로 하고 있다는 점, 인간의 마음을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백마로 나누어 그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 점, 현상〔色〕과 공성〔空〕의 통일적 통찰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 전체가 81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 등 제반 측면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고행건의 문학이 중국불교와 중국문학의 전통에 온전히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증좌가 아닐 수 없다.
원래 고행건의 문학은 희곡에서 시작되었다. 『정거장〔車站〕』 등 그의 희곡작품들은 현대 희곡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 실험적 형식과 깊이 있는 내용이 그 유사한 예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의 희곡사적 위치를 조우曹禺에 비견하는 논의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그의 희곡작품 역시 신성과 초월의 추구를 주제로 하고 있는 것이 많은데 특히 주목할 것은 『팔월의 눈〔八月雪〕』이다. 『팔월의 눈』에서는 육조혜능의 생애와 깨달음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소설 『영산』이나 희곡 『피안彼岸』 등을 통해 시도한 바 있는 ‘선禪적 사유의 문학적 적용’이 집약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일부 평론가들은 이 작품의 출현을 기다려 그의 희곡작품에 ‘선극禪劇’이라는 명칭을 부여하기까지 하였다.
『팔월의 눈』은 갈등 중심의 전통적 희곡구조 대신 진망眞妄 병렬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진망 병렬의 구조란 진여眞如와 망상妄想이 동시적으로 병렬되고 있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세계를 둘로 나누어 이해하는 이원론적 사유방식과 혜능의 불이不二적 사유방식이 병렬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식의 문장 배치가 있다.
혜능:(노래) 해 떠서 해 지도록, 나무해서 져 나르네. 팔고 나면 또 나무하네.
무진장:(노래) 긴긴 밤, 누가 나의 춥고 따뜻함 알아주리오? —『팔월의 눈』
똑같은 일상이지만 무진장의 하루는 외로움과 번뇌의 연속이고, 나무꾼 혜능의 하루는 일행삼매一行三昧, 곧은 마음의 연속이다. 이 두 사람의 대사는 서로 대화가 되지 못하고 각각의 독백으로 따로 떨어져 계속된다. 독자나 관중은 혜능의 편을 들어 무진장이 혜능 식으로 바뀌기를 기대하게 되지만 이러한 병렬의 평행선은 결코 만나지 못하고 마지막 제3막 이전까지 일관되게 유지된다. 왜 그럴까?
고행건이 그린 무진장은 수행의지가 철저하여 세속과 벽을 쌓고 처절한 고행을 감내하는 인물이다. ‘인간 세상은 번뇌의 덩어리’라 외치고, 옴〔疥瘡〕 투성이가 되도록 두타행을 닦는다. 그럴수록 그녀는 세속에 집착하고, 자아를 사랑하게 된다. 세간과 출세간, 고행과 방일을 상대화시켜 그 중 한 쪽에 집착한 결과이다. 바로 그러한 의식적 수행이야말로 혜능의 ‘수행 없는 수행〔無修之修〕’과 만날 수 없는 길이었다. 고행건은 이러한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무진장과 혜능이 한 무대에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또한 어느 한 쪽에 편을 들고자 하는 관중과 독자의 망상적 기대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인물과 인물이 서로 병렬구조를 이루면서 서로 만나지 못한 결과 한 인물과 다른 인물들 간에 일즉다一卽多의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작가는 혜능과 하나이며, 신회神會, 인종印宗, 혜명慧明 또한 혜능과 하나가 된다. 불교적 관점에서 『서유기』의 세 제자와 백마가 현장과 하나이듯이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인물들, 즉 혜능과 무진장, 혜능과 신수, 혜능과 승려들도 한 몸으로 그것은 결국 우리 각자의 내면을 그린 것이다. 이로 인해 하나가 모두와 통하는 일즉다一卽多의 관계가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고행건에게 있어서 이러한 일즉다의 관계는 낯선 것이 아니다. 그는 일찍이 『영산』에서 인칭을 혼용하면서 그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이 긴 독백에 있어서 그대는 나의 얘기의 대상이다. 나에게 귀 기울이는 나 자신이다. 그대는 나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내가 나 자신에게 귀기울일 때 나는 그대가 그녀를 만들게 하였다. 그대도 외로움을 참을 수 없어 이야기 할 상대를 찾아야 했으니까. —『영산』 「후기」
이 관계의 가장 큰 특징은 공존과 뒤섞임이다. 그래서 고행건은 『팔월의 눈』의 마지막 제3막에서 과거와 현재, 무대와 객석, 속인과 선사가 구분 없이 뒤섞이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세계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혜능은 어린 신회와 뒤섞여 유희를 하고, 성聖을 추구하는 무진장은 속俗의 극치에서 노니는 가수〔歌妓〕와 뒤섞인다. 또 혜능의 시대는 작가를 매개로 하여 현대와 뒤섞인다. 이로 인해 깨달음(혜능)과 천진함(신회), 성스러움의 추구(무진장)와 세속의 유희(가기), 과거(혜능)와 현재(작가)의 구별이 없어진다. 고행건이 이해하고 문학창작의 영역에 적극 수용하고자 한 선적 사유의 특징이 바로 이것이다. 『팔월의 눈』에 반복되고 있는 바 ‘번뇌가 바로 보리〔煩惱卽菩提〕’라면 우리는 저쪽으로 건너갈 필요가 없다. 고행건이 말하는 새로운 개오방식이란 이런 것으로 신회에게서 혜능으로 건너갈 필요 없이 신회가 바로 혜능임을 보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작가의 시대에서 혜능의 시대로 건너갈 필요 없이 바로 지금이 완전한 시대임을 보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가기에게서 무진장으로 넘어갈 필요 없이 노래를 파는 가기의 몸과 마음이 바로 두타행을 불사하는 무진장의 몸과 마음임을 보는 일이다.
이상 간략히 살펴 보았지만 고행건은 중국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본격적인 방식으로 불교를 문학화한 문학가이다. 그에게 불교는 단순한 배경이나, 차감으로 끌어온 것이 아니었으며, 더더구나 불교적 교리의 선전도구로 문학을 동원한 것도 아니다. 그 문학의 형식과 내용은 선불교적 사유방식과 철저하게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말하자면 불교와 문학의 행복한 통일의 한 예를 고행건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강경구/ 저서 『한자이야기 365』 『한자에 담긴 하늘·땅·사람 이야기』 『 욱달부·심종문 소설의 연구』 외 다수. 동의대학교 인문대 중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