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자기 합리화’라고 답할 것이
다. 모든 실패를 피할 수는 없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종종 실패할 수 있고, 실패에서 더 큰 교훈을
배울 수 있다. 그 실패에서 제대로 배우면 오히려 더 큰 성공을 기약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합리화는
실패의 반복을 부를 뿐이다. 경제정책에서는 더욱 그렇다.
정책당국자가 ‘환율 상승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기회복의 동력으로 작용했다’거나 ‘수출기업의 경영
수지를 획기적으로 개선시켰다’는 따위로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을 보노라면 우리 경제의 장래를 심각
하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위와 같은 자기 합리화가 끝내 정당화된다면 지난해 말과 같은 심각한 경
기후퇴를 앞으로 또 다시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다음에는 더 심각한 경제파국이 닥
칠지도 모를 일이다. 장차 경제파국이 닥치지 않더라도, 자기 합리화의 폐해는 이미 눈덩이 구르듯이
커지고 있다. 지금부터 그 내막을 살펴보도록 하자.
올해 초부터 3월 위기설이 극성을 부리면서 환율은 2월 중순부터 1,400원대로 상승했고, 2월 말에는
1,500원대까지 올랐으며, 3월 2일에는 1,570원까지 뛰었다. 지난해 11월 24일에 기록했던 1,513원을
훌쩍 넘어섰던 것이다. 다행히 지난해 하반기와는 다르게 올해는 환율 상승의 기간이 비교적 짧았고 3
월 초순부터는 곧바로 하락으로 돌아섬으로써, 지난해 4/4분기에 나타났던 극심한 경기후퇴는 일어나
지 않았다. 다른 경제적 타격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정책당국의 자기합리화가 다른 심각한 피
해를 낳고 말았다. ‘높은 환율이 수출을 증가시키고 수출기업의 이익을 늘릴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환율 하락을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정책을 펼친 것이다. 이것은 책상머리의 정책일 따름이다. 현장에
서는 환율이 오르면 해외 바이어가 가격 인하를 요구하고, 불경기에는 이런 요구가 쉽게 받아들여지
곤 하기 때문이다.
3월 하순 환율이 1,300원대로 떨어진 때부터 정책당국은 환율방어에 나섰다. 실제로 3월의 외환보유
고는 48억 달러가 증가했다. 참고로, 3월의 종합수지(경상수지+자본수지)는 39억 달러인데, 이것보다
9억 달러나 더 많은 외환을 시장에서 사들인 것이다. 그렇지만 환율 하락은 막아내지 못하여 월말에는
1,384원으로 떨어졌다.
4월에도 정책당국이 외환보유고를 61억 달러나 증가시켰지만, 환율은 월말에 1,282원으로 하락하여
한 달 사이에 100원 이상 떨어졌다. 5월에는 환율이 초순부터 1,250원 아래로 떨어지자 정책당국은 더
강력하게 환율 방어에 나섰다. 한 달 동안에 외환보유고를 무려 143억 달러나 증가시켰는데, 이것은
예년의 연간 증가액과 비슷할 정도로 대규모의 시장개입이었다. 또한 이것은 종합수지 흑자보다도 38
억 달러나 더 큰 규모였다.
이런 강력한 시장개입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6월 이후에는 시장에서 직접 외환을 사들인 규모는
줄었으나, 역외시장의 NDF 거래를 통해 환율을 방어한 것으로 추정된다. NDF 거래는 투기적 성격, 아
니 도박적 성격이 너무 강해서 자칫 엄청난 손실을 입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책당국이 이런 무모한
일을 감행한 것이다. 그 덕에 환율 하락의 속도가 크게 줄었다. 6월말에는 5월말보다 오히려 더 올랐
고, 7월 말에는 1,229원까지 떨어졌다가 8월에 1,249원까지 오르기도 했으며, 9월 중순까지는 1,200원
대를 지켜냈다.
외환보유고의 증가액(억 달러), 월말 환율(원/달러), 종합수지(억 달러)
구분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증가액 |
48.0 |
61.4 |
142.9 |
49.7 |
57.8 |
79.5 |
87.9 |
환율 |
1,384 |
1,282 |
1,255 |
1,274 |
1,229 |
1,249 |
1,178 |
종합수지 |
39.4 |
64.1 |
105.2 |
51.4 |
67.8 |
71.0 |
? |
자료 : 한국은행
그러나 이번에도 환율방어는 성공하지 못했다. 9월 하순 이후에는 1,100원대로 떨어졌던 것이다. 그러
자 정책당국은 국내 선물시장에서 소위 ‘알 박기’까지 감행했다. 예를 들어, 환율 1,175원쯤에서 3천 내
지 4천의 계약을 미리 매수주문을 내놓았던 것이다. 보통의 경우에는 수십 계약, 기껏해야 100계약 정
도의 주문이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외환거래자들에게 더 이상 매도하지 말라는 적신호를 정책당국
이 보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강력한 환율방어조차 시장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10월 15일에는 1,155원까지 떨어
지고 말았다. 경상수지가 흑자를 기록하는 한, 환율은 아무리 강력하게 방어하더라도 결국은 떨어지
고 만다는 진리를 또 한 번 확인시켜준 셈이다. 한 마디로, 정책당국은 불필요한 일을 한 셈이었다.
그럼 그 손익계산은 어떻게 나타날까? 두 말할 것도 없이, 환율방어를 위해 정책당국이 지불한 금액보
다는 보유 중인 외환보유고의 평가액이 훨씬 더 낮다. 그동안 환율이 지속적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럼 그 손해 규모는 얼마나 될까? 월말 환율로 환율 방어를 했다고 가정하고, 10월 15일의 환율로 그
손실을 추정해보도록 하자. 우선, 외환당국이 외환을 매입한 금액은 총 66.2조원에 이른다. 이것을 현
재의 환율인 1,155원으로 환산하면 60.9조원이다. 정책당국은 무려 5.3조원을 헛되게 날려버린 셈이
다. 이것마저 최소의 손실일 따름이다. 외환을 매입한 가격은 위의 계산보다 더 높기 때문이다. 또한 N
DF 거래나 선물 거래에서 발생한 손실은 제외되었다. 그럼 실제로 발생한 손실은 얼마나 될까? 정확
한 규모는 정책당국만이 알 일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위와 같은 엄청난 손실이 앞으로 계속 커질 수밖에 없다는 데에 있다. 만약 환율이
1,000원으로 떨어진다면 그 손실은 최소 13.5조원에 이르게 된다. 만약 900원까지 떨어진다면 최소 1
8.7조원에 이르게 된다. 최소의 손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럼, 이런 손실은 누가 책임져야 할까? 설령
환율 방어가 필수적이라고 하더라도 1,200원부터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위와 같은
손실을 훨씬 더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판단 실수의 책임은 또 누가 져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