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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이준(李埈) 1560년(명종 15)∼1635년(인조 13). 상주 유천
시호: 문간(文簡) 道德博聞曰文。一德不懈曰簡。고종 8년(1871) 증시
도와 덕이 높고 견문이 넓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덕을 오로지 하여 게을리 하지 아니함을 간(簡)이라 한다.
시장: 좌의정 낙파(洛坡) 류후조(柳厚祚) 찬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
수인(壽人)의 아들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1582년(선조 15) 생원시를 거쳐 159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민과 함께 안령에서 적에게 항거하려 하였으나 습격을 받아 패하였으며, 그뒤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의병 몇천명을 모집하여 고모담(姑姆潭)에서 외적과 싸웠으나 또다시 패하였다.
1594년 의병을 모아 싸운 공으로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듬해 경상도도사가 되었으며, 이때 중국 역대 왕들의 덕행과 신하들의 정사(正邪)를 밝힌 《중흥귀감(中興龜鑑)》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세력을 키워 많은 사람들을 주위에 모았으나 가담하지 않았다.
1597년 지평이 되었으나 류성룡(柳成龍)의 국정운영에서의 잘못 등으로 인하여 공격을 받을 때 함께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같은해 가을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군비를 정비하는 등 방어사(防禦使)와 협력하여 일하였다. 이어 예조정랑‧단양군수 등을 거쳐, 1603년 수찬으로 불려들어와 형조와 공조의 정랑을 거쳤다.
1604년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 때 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쳐, 교리로 재직중 대북파의 전횡이 심해지고, 특히 1611년(광해군 3) 정인홍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를 비난하자 그에 맞서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바뀌자 다시 교리로 등용되었다. 인조 초년 이귀(李貴) 등 반정공신을 비롯한 서인 집권세력이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廢世子)를 죽일 때, 은혜를 베풀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다가 철원부사로 밀려났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아 의승군(義勝軍)이라 이름하였으며, 그뒤 부응교‧응교‧집의‧전한‧사간 등 삼사의 관직을 각각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이즈음 왕권에 위협이 된다 하여 집권 서인세력이 선조의 아들인 인성군(仁城君) 공(珙)을 죽이려 하자 남인의 일원으로서 반대의견을 주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였고, 조도사(調度使)에 임명되어 곡식을 모았으나 화약이 맺어지자 수집한 1만여섬의 군량을 관에 인계하였다. 이 공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628년 승지가 되고 1634년 대사간을 거쳐, 이듬해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선조대에서 인조대에 이르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국방과 외교를 비롯한 국정에 대하여 많은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하였으며, 정경세와 더불어 유성룡의 학통을 이어받아 당시의 학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남인세력을 결집하고, 그 여론을 주도하는 중요한 소임을 하였다. 상주의 옥성서원(玉城書院)과 풍기의 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창석집》을 남겼으며, 《형제급난지도(兄弟急難之圖)》를 편찬하였다.
이 학사 형제의 급난도에 제하다[題李學士兄弟急難圖] -계곡 장유
왜노(倭奴)가 난리를 일으켜 악독한 칼날을 마구 휘두르는 바람에 천 리의 강역(疆域)이 온통 피바다가 되었는데, 그들이 남의 아들을 고아로 만들고 남의 아내를 과부로 만들고 남의 형제를 해친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 변란을 당하여 아들이 되어서도 혹 아비를 제대로 구제하지 못하고 지어미가 되어서도 혹 지아비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 채 통분함과 한스러움을 안고서 마음만 썩이다가 땅속으로 들어간 이들의 숫자가 어찌 한이 있겠는가. 그런데 숙재(叔載)씨는 병들고 잔약한 일개 서생(書生)으로서 그야말로 기운을 내어 죽을 각오를 하고 위급한 환란의 와중에서 골육(骨肉)을 온전히 보전시켰다. 이는 대체로 그 정성이 지극했기 때문에 뜻이 전일(專一)하게 되었고 뜻이 전일하기 때문에 기운이 완전하게 되었던 것으로서, 그렇기 때문에 신명(神明)을 감동시켜 그 보호를 받으면서 날뛰는 흉적(兇賊)들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오직 처음부터 혼자만 살려는 계책을 세우지 않았던 까닭에 끝내는 둘 다 모두 온전하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되었으니, 이 일이야말로 천고(千古)의 이사(異事)가 아니겠는가. 이 시강(李侍講)이 이 첩(帖)을 나에게 보여 주기에, 내가 무릎을 치고 상탄(賞歎)을 하며 자그마한 시를 적어 주었다.
自倭奴搆難。毒鋒所及。千里漂血。其孤人之子。寡人之妻。殘人兄弟。不可勝數。當其變者。子或不能濟其父。婦或不能存其夫。含痛茹恨。腐心而沒地者何限。叔載甫一
病孱措大。乃能出氣拚死。全骨肉於急難之際。蓋其誠至故志壹。志壹故氣完。是足以感神明之護持。却兇賊之炰勃。惟其初不爲獨全計。故能竟至于兩全也。茲非千古異事哉。李侍講以是帖見示。擊節嗟賞。係以小詩
천지에 온통 칼날이 번득일 때 / 兵戈滿天地
원습을 막론하고 그 비참함 말로 하랴 / 原隰足傷悲
서로 먼저 죽으려 함은 예로부터의 미담(美談)이나 / 爭死古稱美
둘 다 온전함 얻은 것은 참으로 특이한 일 / 雙全良獨奇
기러기 날아가듯 항상 붙어 다니면서 / 雁行無斷絶
꽃봉오리 활짝 피듯 형제 모두 영진(榮進)했네 / 花蕚重榮滋
인륜(人倫)이 이로써 중하게 되었나니 / 解使民彝重
이 화폭에 전해질 시 또 얼마나 많겠는가 / 新圖幾首詩
이장 숙평에 대한 만사[挽李丈叔平]-계곡 장유
몸속엔 온통 천진 덩어리 / 滿腔都是貯天眞
소탈한 풍모에 재학(才學) 심후하셨어라 / 山野風姿席上珍
학문은 고정의 의리 충만하였고 / 文學考亭渾義理
시문은 장경보다 혼이 담겨 있었도다 / 詩傳長慶更精神
청조의 기대에 부응한 뛰어난 자질 / 論才不負淸朝望
지기로 맺은 만년의 친분 어찌 잊을 수 있으리까 / 知己寧忘晚契親
아직도 궤에 남아 있는 유묵 보면서 / 遺墨尙看留篋笥
백발에 만사 지으려니 눈물만 흐릅니다 / 白頭題挽爲沾巾
증 가선대부 이조 참판 행 통정대부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창석 선생 이공 신도비명〔贈嘉善大夫吏曹參判行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蒼石先生李公神道碑銘〕
나는 일전에 창석(蒼石) 선생 이공(李公)의 유문(遺文)을 읽어 보고는 탄식을 내뱉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공은 당대의 제일가는 인물로서 그분이 했던 말들은 모두 당대의 제일가는 도리였다. 광해는 혼용무도(昏庸無道)한 군주였으므로 그분이 추구한 도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분이 한 말이 뜻에 부합하지 않았던 것은 애당초 이상하게 여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유독 인조가 용덕(龍德)을 가지고 대위(大位)에 올라 만물이 다 우러러보는 시대가 도래하였음에도, 국가의 치란과 관계된 참되고 바른 대의리(大義理)와 대의론(大議論)이 번번이 훈귀(勳貴)의 권모술수와 서로 어긋나서, 세상에 포부를 크게 펼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그 은택을 누리도록 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후학(後學)들이 흠모하고 우러를 것은 그저 종이 위에 기록된 말에 지나지 않게 되었으니, 도를 실현하지 못한 것이 어찌 다만 이분의 운명일 뿐이겠는가. 그것은 실로 천하 국가의 한(恨)인 것이다.”
공의 휘(諱)는 준(埈), 자는 숙평(叔平)이며, 계보(系譜)는 흥양(興陽)에서 출발하였다. 고려 때 양승(陽升)이란 분이 거란(契丹)을 상대로 힘껏 싸우다 전사한 일이 있는데 사서(史書)에서 “장군 이양승(李陽升)이 죽었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며, 이분은 공에게 12대조가 된다. 성조(聖朝)에 들어와서는 서원(舒原)이란 분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냈고, 이분이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은(垠)을 낳았다. 은의 아들은 언(堰)으로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지냈는데, 광묘(光廟 세조)가 손수 적은 어찰(御札)을 내려 그의 청렴결백함을 칭찬하였다. 그의 아들은 사헌부 집의를 지낸 수천(壽川)으로, 이분은 공의 4대조가 된다. 증조는 조년(兆年)으로 판관을 지냈고, 조부는 탁(琢)이다. 부친은 수인(守仁)으로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선비(先妣)는 고령 신씨(高靈申氏)로 신수경(申守涇)의 따님이며 숙부인(淑夫人)에 증직되었다. 가정(嘉靖) 경신년(1560, 명종15)에 상주(尙州)에 있는 고향 사저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장성한 뒤에 서애(西厓) 유 선생(柳先生)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뜻하는 바가 공명(功名)과 이욕(利慾)에 있지 않았다.
임오년(1582, 선조15)에 국자감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신묘년(1591)에 문과에 급제한 뒤 교서관(校書館)으로 낮추어 분관(分館)되었는데, 이는 대개 당로자(當路者)가 시기해서 그런 것이었다.
임진년(1592)에 왜구들이 영남 지방을 크게 유린하였다. 공은 이 당시 서울에 있다가 걸어서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도착해서는 부모님의 소재를 알지 못하여 연일 울부짖으며 찾아다니다가 효곡산(孝谷山)에서 해후하였으니, 사람들은 효성이 감응한 결과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수천 명에 이르는 피난민들을 취합하여 안령(鞍嶺)을 근거지로 삼고서 왜적을 막았는데, 왜적이 습격해 오자 죽은 이들의 시체가 서로 뒤엉켜 쌓일 정도로 많이 생겨났고, 공 역시 이때 부모를 잃는 몹시 참혹한 일을 당해 피눈물을 흘렸다. 그런 와중에서 공은 의병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고 이에 무리들은 공과 우복(愚伏) 정공(鄭公)을 추대하여 의병을 모집하는 일을 나누어 주관하도록 하였다. 그러고 오래지 않아 모집한 의병의 수가 수천 명에 달하자 충정과 절의로 서로를 북돋고 고무하여 많은 수의 적을 참수하고 생포하였다.
계사년(1593) 봄이 되자 왜적들이 대대적인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여 의병이 궤멸 상태에 빠졌다. 공 역시 이때 도피하던 중 갑자기 현기증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거의 탈출하지 못할 뻔하다가 큰형인 월간공(月澗公)이 등에 업고 달아나 준 덕분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후 다른 지방으로 몸을 옮겨 방백(方伯) 홍공 이상(洪公履祥)을 만나 보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현 상황에 대해 말하자, 방백이 “공에게 만약 둔전(屯田)을 경영할 만한 역량이 있다면 일이 해결될 것입니다.”라고 하므로 공이 마침내 풀을 베고 토지를 개간하여 내줄 곡식의 규모를 계산한 뒤 백성들의 굶주림을 구휼하는 한편, 그렇게 하고 남은 것은 모두 군대로 귀속하였다. 이때는 갑오년(1594)으로, 조정에서는 의병을 일으킨 공로가 있다는 이유로 공을 전적(典籍)의 지위로 올려 주었으나 복상(服喪) 기간이 끝나지 않아 부임하지 않았다. 9월에는 예조와 형조의 좌랑에 제수되었다.
을미년(1595)에 경상 도사(慶尙都事)가 되어 조량(調糧)과 어염(魚鹽) 등의 업무를 겸관(兼管)하였다. 이때 조정에서 유신(儒臣)들로 하여금 전대(前代)의 흥망(興亡)에 관해 서술해 올리도록 하였는데, 공은 이보다 앞서 《중흥귀감(中興龜鑑)》을 편찬하여 하(夏)나라 소강(少康)에서부터 송(宋)나라 고종(高宗)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맨 먼저 군덕(君德)의 득실에 대해 논하고 그다음에 신하들의 사정(邪正)에 관해 언급하면서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듯 명백한 서술을 펼친 바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 글을 바치자, 상이 친히 쓴 교서를 내리며 포상해 주었다.
이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영해 부사(寧海府使)로 있었는데 사대부들 가운데 그를 추종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공은 홀로 “그자는 간사한 사람이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길을 가다 영해부(寧海府)를 지나게 되었을 때, 정인홍이 길에 나와 공을 맞이하였으나 공은 마치 아무것도 못 본 양 호창(呼唱)하게 하면서 그곳을 지나쳐 버렸고, 이에 정인홍은 몹시 분해하였으나 공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임기가 만료되자 체찰사(體察使) 이공 원익(李公元翼)이 공의 직임을 계속 유지시켜 달라고 조정에 요청하였으니, 이는 조량과 어염에 관한 일 처리가 시의적절하였기 때문이다.
정유년(1597)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이해 가을 왜적이 다시 준동하자 대가(大駕)가 파천(播遷)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은 소모관(召募官)의 직임을 받고 소장(疏狀)을 올려, 조령(鳥嶺)의 어류성(御留城)에 대가를 잠시 머무르게 한 뒤에 삼군(三軍)을 친히 통솔함으로써 군사들을 용기백배하게 만들어 적을 이기기를 도모하자고 청원하였다. 상은 그 말을 가상히 여겼으나 끝내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하였다. 공이 명을 받들고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는 길에 체찰사가 공을 곽공 재우(郭公再祐)에게 소속시키자 마침내 석문(石門)으로 들어가 성과 해자를 수선하고 군량미를 비축하였는데, 이를 통해 무리들은 모두 성은 둘러싸 지킬 만하며 죽는 것은 즐거울 만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근거 없는 의론에 선동되어 직임을 파한다는 명이 내려졌고, 이에 공은 통한해하며 “하늘이 실로 이렇게 만든 것이니 말해 본들 어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후 검찰사(檢察使) 성영(成泳)이 자벽(自辟)하여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무술년(1598)에 직위를 옮겨 총리사(摠理使) 이공 원익을 보좌하게 되자, 이공은 공에게 모든 업무를 맡겼다. 얼마 뒤에 예천 군수(醴泉郡守)에 제수되었는데 총리사가 “관할하고 있는 일은 이모(李某)가 아니면 아무도 해낼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어 상이 직임을 계속 유지하도록 하였다.
기해년(1599)에 단양 군수(丹陽郡守)에 제수되었다. 당시는 천자의 군대가 대규모로 집결해 있으면서 수령들을 욕보이고 날마다 사람들을 겁탈하던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공이 임지에 도착하여서는 공손한 예법을 보이고 올바른 말을 하면서 “부모로서 제 자식을 구하는데 침탈하고 포악하게 굴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눈물로 고하였다. 이에 유격장군(遊擊將軍) 모국기(茅國器)가 가시(歌詩)를 지어 사과하고 군졸들의 횡포를 멈추도록 하니, 백성들이 그제야 평안을 되찾았다. 이렇게 5년을 있는 동안 관찰사가 치적(治積)이 가장 뛰어나다고 상부에 아뢰었다.
계묘년(1603)에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자 백성들이 수레를 부여잡고 차마 떠나보내지 못하면서 노래하기를,
단양의 산은 수려하고도 기이하며 / 丹山秀且奇
단양의 물은 깊고도 맑건만 / 丹水深而淸
공을 머물게 하지 못하고 / 不能使公留
그저 공의 이름만을 머물게 하였네 / 但得留公名
하였다.
이에 앞서 애옹(厓翁)이 소인배들로부터 배척을 당해 초야에 은거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이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여 글의 뜻을 계기 삼아 아뢰기를 “당(唐)나라 덕종(德宗)이 처음 행한 정치가 청명(淸明)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의심과 살핌이 너무 지나쳐 종국에는 파천(播遷)이라는 치욕을 초래하였고, 육지(陸贄)란 한 사람이 있었으나 그마저도 마치 물건을 버리듯이 내팽개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유성룡을 대하는 것이 불행히도 이와 유사합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이 말을 듣고 불쾌해하며 경연을 파해 버렸는데, 그 뒤 며칠이 지나 오봉(五峯) 이공 호민(李公好閔)이 상에게 “요즘 부드러운 태도로 아첨하는 것이 풍조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유독 이준(李埈)만큼은 감히 남들이 꺼내기 어려운 말을 하였습니다. 이는 포상할 만한 일이지 노여워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상은 묵묵부답하다가, 공을 형조와 공조의 정랑, 상례 겸 실록랑(相禮兼實錄郞)으로 좌천시켰다.
갑진년(1604)에 서장관(書狀官)으로 황경(皇京)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무신년(1608)에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가 즉위하자 수찬을 거쳐 정언에 제수되었다. 공은 광해가 선조의 덕을 끝까지 완수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잘못이 있을 때마다 늘 사전에 간쟁하여 바로잡았다. 재이(災異)가 발생하였을 때는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가까운 총신(寵臣)에 대해서는 치우쳐 얽매이는 잘못을 없애어 대공(大公)의 도량을 넓히지 않아서는 안 되며, 임금의 이목(耳目)을 막고 가리는 것에 대해서는 그 낌새를 살펴 미연에 그 시도를 환히 간파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원한을 품고 억울하게 죽어 오래도록 신원되지 못하고 있는 자를 향해 이미 ‘죄가 없다.’라고 하신 이상, 누명을 씻어 주는 일을 어찌 3년이나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였으며, 또 아뢰기를,
“대신에게 임무를 완수하도록 책임 지우는 것은 그저 통상적인 자질구레한 일들일 뿐이고, 현명한 자를 올려 쓰고 어리석은 자들을 내치는 등 국가의 안위(安危)와 관련한 일들에 대해서는 막연하여 관할하지 못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직위를 불안하게 여겨 잇따라 서로 면직을 청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였다. 대개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날 당시 유사(有司)가 임해군을 극형에 몰아넣으려고 하자 수상(首相) 완평공(完平公 이원익)이 형제간의 은의(恩義)를 보존할 것을 청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고 직무를 돌보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공이 그 일에 대해 할 말을 끝까지 다 하기를 이와 같이 한 것이다. 그러나 광해는 이 말을 채택하지 못하였다.
경연이 오래도록 폐해지고 있는 상황을 걱정하여 차자를 올리기를,
“임금을 모시고 받드는 시종 가운데 참소와 아첨을 일삼는 자들이 예(禮)가 아닌 곳으로 유도하고 의(義)가 아닌 데로 이끌어 자연히 도와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고, 토목공사가 자주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여 차자를 올리기를,
“궁궐 안이 비록 협소하고 누추하다고는 하나 그곳은 실로 선왕께서 정신을 집중하며 한가롭게 거처하던 곳입니다. 전하께서는 즉시 그곳에 머물고 그곳에서 주무시면서 기둥과 서까래를 올려다보고 전당(殿堂) 아래의 섬돌을 내려다보며 항상 선왕께서 실제로 그 위에 강림해 계신 듯이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는 진정 긍구(肯構)의 도(道)인데, 또다시 급하지도 않은 판국에 큰 공사를 일으키시니 이는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뜻이 아닙니다.”
하였다.
조사(弔使)가 도착하였을 당시 조정에서 예로부터 해 오던 관례대로 가짜 신주를 설치하고서 그들을 영접하려 하자, 차자를 올리기를,
“우리나라에서 종호(宗號)를 사용하는 것이 예(禮)는 아닙니다만, 오래도록 그것을 답습하면서 수백 년 동안 바꾸지 않았던 것은 대개 신자(臣子)가 군부(君父)를 높이는 정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만약 앞도 가리고 뒤도 막으면서 그 잘못을 감추려 든다면 이는 실례(失禮) 중에 또 실례입니다. 더구나 인군(人君)은 지극히 성실한 마음을 지니고서 털끝만큼의 사사로움과 거짓도 용납하지 않아야 합니다. 인국(隣國)과 교제하고 이적(夷狄)을 대하는 데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하물며 본조(本朝)에게 하늘처럼 존귀한 상국(上國)의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사신을 파견하여 치제하는 것이 얼마나 성대한 예인데, 지극히 경건하고 엄중한 자리에서 감히 거짓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연거십잠(燕居十箴)〉을 지어 올리자 광해가 초피(貂皮)를 하사하며 칭찬하고, 백사(白沙) 이공(李公 이항복)은 편지를 보내어 “잠설(箴說)이 정밀하고도 적절하니, 오늘날에 계상(溪上)의 말씀을 볼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소.”라고 하였다.
책사(策士) 임숙영(任叔英)이 직언을 하다 과방(科榜)에서 삭제되자, 차자를 올리기를,
“임숙영이 군부(君父)를 헐뜯고 비방하였다는 이유로 명에 의해 과방에서 삭제되었는데, 이른바 ‘헐뜯고 비방하였다.’라는 것은 어떠한 일입니까? 설사 사실이 아닌 일로 명예를 탐했다면 끝내 성덕(聖德)에 무슨 손상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말한 것이 만일 거짓이 아니라면 더욱 마땅히 두려운 자세로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할 것이며 격식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내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한재(旱災)가 발생하여 응지 차자(應旨箚子)를 올리기를,
“외인(外人) 가운데 궁중과 서로 내통하는 자가 있고 내지(內旨 왕비의 명령) 중에 마음대로 관직을 제수해 주는 경우가 있으며, 하늘에 영원한 명을 기원하는 일은 그 근본이 덕을 수양하는 데에 있는데도 부정한 제사와 푸닥거리 등을 통해 귀신의 간악함을 열어 주는 자가 있고, 인재를 등용하고 각 부처의 장관을 세우는 일의 근본은 현인을 가리는 데에 있는데도 권귀(權貴)에게 선물을 보내어 작록(爵祿)을 꾀하려는 자가 있습니다. 지금 재변(災變)을 없앨 방법을 구하고자 하신다면 재변을 초래한 근본 원인을 바로잡는 것만 한 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비록 애달파하는 말이 입에서 끊이지 않는다 한들, 그것이 재변을 없애고 억제할 방도에 끝내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하였다.
부역(賦役)이 번다하고 과중하게 부과되고 있는 와중에 토목공사가 또 일어난 것을 걱정하여 차자를 통해 아뢰기를,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극하지 않은 경우가 없어서 자식이 병들면 약을 먹이고 배고프고 추워하면 옷을 입히고 밥을 먹이며, 이렇게 하는데도 혹 죽음에 이르면 도리어 감히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간호와 치료가 미진했음을 상심합니다. 그러니 어찌 백성의 부모 된 몸으로 이런 무익한 공사를 펼침으로써 거의 끊어져 가는 목숨을 다그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정인홍이 상소하여 회재(晦齋)와 퇴계(退溪) 두 현인을 비방하자, 소장을 올려 아뢰기를,
“두 분 유자(儒子)의 도덕이 성대하게 당대의 존숭을 받았으나 자기 스승의 학문은 두 분의 유자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였던 까닭에, 그가 시기하고 능멸하는 마음을 가지고 분한과 원망의 기운을 품은 채 온갖 말로 비방을 가한 것입니다. 이는 시비의 구분이 흑백처럼 분명하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으로, 비록 한 시대의 눈과 귀를 뒤바꿔 버리고자 하나 그리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이때 태학(太學)의 유생들이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해 버리자 광해가 노하여 유생들을 금고(禁錮)할 것을 명하였는데, 공이 상소하여 그 일에 대해 간쟁하였다. 그런데 광해가 “같은 쪽을 편들고 다른 쪽을 공격하면서 의리(義理)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라는 말로 꾸짖기에, 또다시 소장을 올리기를,
“전하께서 말씀하신 ‘의리’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도(道)’가 있는 곳이 바로 ‘이(理)’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 정도(正道)를 부지하고 사문(斯文)을 수호하는 것을 의리가 아니라고 하신다면, 기필코 정인홍의 주장에 의지해 그 파란을 더 요동치게 만들고 박여량(朴汝樑)의 논의를 좇아 그 세력을 조장하면서, 군부(君父)의 지나친 행위에 순순히 따르고 일시의 선비들을 금고하고 난 뒤에야 의리에 합당한 것입니까.”
하니, 광해가 이르기를,
“내가 우매하고 졸렬한 탓에 현자들로 하여금 자기 직위를 편히 여기지 못하게 만들었다. 모름지기 속히 직위로 나아가 나의 잘못을 덮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 세 사람의 흉인(凶人)이 ‘삼창(三昌)’이라고 불리면서 당여(黨與)를 심어 놓고 위복(威福)을 제멋대로 행사하자 공이 “물러나야 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떠나기에 앞서 소장을 올리기를,
“생각이 없는 나머지 광인(狂人)이 되어 욕심으로 법도를 무너뜨리고 방종으로 예를 무너뜨린다면, 비록 부자와 형제같이 더없이 가까운 관계일지라도 그 평소의 정을 보장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동시대의 어진 사대부들은 공이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오봉(五峯) 이공(李公)은 광해에게 아뢰기를,
“이모(李某)가 고고함과 정직함으로 인해 조정으로부터 용납되지 못하여 한 척의 배로 남쪽을 향해 돌아가 버렸으니, 안타깝습니다.”
하였다. 이후 공은 시냇가에 정사(精舍)를 짓고는 단정히 앉아 《주역》을 읽으며 지내면서 침식을 잊어버리기까지 하곤 했는데, 우복(愚伏) 정공(鄭公)은 매일 찾아와 학문을 강론하고 토론하면서도 지칠 줄 몰라 하였다. 공은 늘 말하기를 “우복은 나의 형제이니, 오직 성만 다를 뿐이다.”라고 하였다.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외직으로 나가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보임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계축년(1613)에 풍기 군수(豐基郡守)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다스렸던 방법은 오직 백성들을 교화함으로써 좋은 풍속을 만드는 일에 힘쓰는 것이었다. 이 당시 영창대군(永昌大君)은 겨우 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흉악한 무리들이 “역모의 근원이 여기에 있다.”라고 하면서 그지없이 참혹하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공이 이 소식을 듣고는 크게 탄식하기를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만언(萬言)에 이르는 소장을 초하여 하고 싶은 말을 남김없이 다 쏟아 냈는데, 이때 마침 병조 판서 박승종(朴承宗)이 수졸(戍卒)이 거짓으로 꾸민 고소를 끌어다 붙여 공을 직위에서 파면시키자 결국 상소를 그만두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교리(校理)로 소환되었고, 얼마 뒤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집의로 이배되었다. 당초 상이 대위에 올랐을 적에 명을 내려 폐세자(廢世子) 이지(李祬)를 강화(江華)로 안치한 바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가 땅굴을 파고 탈출해 버리자 연평(延平) 이공 귀(李公貴)가 그를 극형에 몰아넣고자 하였는데 공의 의견은 그와 부합하지 않았다. 이에 우복공(愚伏公)이 당시 옥당(玉堂)에 재직하고 있으면서 공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이 사안에 대해 논자들은 이것이 화의 근원이 될까 걱정하는데 저 역시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보장을 못 하겠으며, 논자들이 또 ‘상께서도 후일의 염려가 없지 않을 것이므로 옥당이 결사적으로 이론(異論)을 제기함으로써 군부(君父)에게 비평이 돌아가도록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혹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
하였다. 공이 이에 답하기를,
“임금의 은혜로운 뜻을 받들어 따르고 시의(時議)에 구차스레 동조하지 않으려 한 것이 형의 처음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논자들이 군부에게 비평이 돌아가도록 하지 않고자 하는 것은 이치에 크게 해가 되는 일입니다. 충신은 도를 따르고 군주를 따르지 않으니, 군주의 뜻이 움직이느냐 움직이지 않느냐의 문제는 응당 논할 바가 아닐 듯합니다.”
하였다. 연평이 또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공께서는 기어이 서인(庶人)을 위해 절개를 세우려 하십니까?”라고 하자, 공은 “예로부터 어떤 일로 말미암아 기필코 군부에게 쟁론했던 일들이 모두 다 그 일을 위해 절개를 세우려 했던 것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런 뒤 마침내 계사(啓事)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강도(江都)에서 담을 뚫고 탈출한 변고는 비록 밝히기 어렵다고는 하나 그 정황만큼은 쉽게 알아볼 수 있으니, 토굴을 파낸 흔적이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향해 이어지므로 외부에서 지원한 이가 없음을 알 수 있고, 편지는 가짜로 쓴 것이며 진짜가 아니므로 외부에서 호응한 이가 없음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갇혀 있던 곳이 협소한 와중에 이런 무더운 철을 만났는데, 바람이 통하는 길은 사방으로 막혀 근심과 번민이 마침내 광증(狂症)이 되어 버렸고, 그로 인해 하늘과 햇빛을 보고 싶은 마음과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고 싶은 생각이 가슴속에 꽉 들어차 그것을 억누르지 못한 나머지 망녕되게도 갇힌 곳에서 탈출할 계획을 하여 스스로 왕명을 회피하는 죄를 불러들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정황을 깊이 따져 보자면 애처로운 일이니, 지금 법을 집행하는 자는 다만 법을 집행하되, 그 도망친 죄만을 다스려서 그전같이 구속해 가둬 두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폐조(廢朝) 십수 년 동안 골육(骨肉)을 해쳐서 종국에는 하늘의 강상(綱常)을 멸절하고 그 덕을 전복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이는 진정 오늘날에 깊이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하였다. 연평이 이에 분노해 마지않고서 공을 외직으로 쫓아내 철원 부사(鐵原府使)에 제수하도록 하였는데, 이조 판서 신공 흠(申公欽)이 이 소식을 듣고는 크게 놀라 낭관(郎官)을 불러 묻기를 “이공이 산림에 묻혀 지낸 지 이미 십수 년인데, 지금 도리어 용납하지 못하고 또 물리쳐 버리는가?”라고 하였다. 몇 달이 지나 신공이 “이모(李某)가 외직에 오래 머무르는 것은 조정의 복이 아닙니다.”라고 계청(啓請)한 결과 사인(舍人)으로 소환되었다. 얼마 안 되어 모종의 일로 파직되자 대사간 정공 엽(鄭公曄)이 상에게 “이모는 문장과 덕의를 갖추고 있고 평소 일을 처리하면서 정도를 실천하고 정직을 견지하였으므로, 다른 여러 사람과 똑같이 취급하여 함께 파직시켜서는 안 됩니다.”라고 아뢰었고, 수상 완평공은 공이 반드시 머무르지 않을 것을 알고 편지를 보내어 만류하였다. 그러나 공은 “의리상 머무를 수 없다.”라고 하고는, 돌아갈 적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관서(關西)의 형세에 관해 자세하게 논하는 한편, 또 말하기를 “성을 지키는 제도 가운데 포루(砲樓)가 가장 긴요합니다. 그 제도는 선정신(先正臣) 유성룡이 찬록해 바친 〈병요(兵要)〉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서둘러 그것을 채택해 시행한 뒤 중외(中外)에 반포할 것을 명해 주소서.”라고 하였다. 당시는 청인(淸人)들이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을 점거하고 있던 상황으로, 공이 그 점을 깊이 우려하여 가장 먼저 그 일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상이 가납해 주었다.
갑자년(1624, 인조2)에 부원수(副元帥)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상이 공주(公州)로 파천하였다. 공은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모집하여 1000여 명을 확보한 뒤 ‘의승군(義勝軍)’이라고 불렀는데, 날을 정해 행재소로 달려가려 할 즈음 적들이 격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군대를 해산하였다. 그러고는 서울에 들어가서 뒤늦게 도착한 것에 대해 청죄(請罪)하고, 이어 소장을 통해 적변(賊變)이 발생한 이유와 백성들이 원망하는 상황을 아뢰었는데 상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집의를 거쳐 응교에 제수되고 사인(舍人)과 전한(典翰)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에 앞서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의 이름이 역적의 초사(招辭)에서 나오자 상이 불문에 부치라고 명한 바 있었는데, 그때 연평이 소장을 올려 양사(兩司)에서 이공을 논하지 않는 것을 논척하자, 공이 “이공이 이미 역적의 입에서 거론된 이상 내치지 않는다면 너무 과하게 돌봐 주는 것일 듯합니다. 일단 내치는 것도 왕자를 온전하게 보호하는 한 방법이니, 그렇게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따르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역적들이 또다시 이공을 끌어들이자 연평이 이공을 대궐 안에 두어 외부의 접근을 막자고 요청하였다. 이에 공은 연평에게 말하기를,
“공은 ‘보전(保全)’이란 것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그것은 듣기엔 좋으나 행하기엔 어렵습니다. 예로부터 신자(臣子) 가운데 군주를 위협했다는 혐의를 받는 처지에 지존(至尊)과 같은 곳에 살며 스스로를 보전했던 자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게다가 공이 대궐 안에 두고자 하는 것은 그를 의심해서입니다. 의심한다는 ‘의(疑)’ 한 글자를 내버리지 않는 한, 비록 성과 벽을 겹겹이 쌓아 올려 막는다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였다.
그런 뒤 시강(侍講)하는 자리에서 상이 묻기를,
“시사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이공이 역적의 입에서 제기된 것이 한두 번이 아님에도 전하께서는 기필코 골육을 보전하고자 하시니 이는 삼대(三代) 제왕의 일입니다. 옛날 송(宋)나라 태조(太祖)는 ‘천명을 소유한 자는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바, 금기와 제한을 엄격하게 두지 않았던 것이 그 정도였음에도 그것을 이용해 기회를 엿본 자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제왕의 큰 도량은 응당 이와 같은 마음가짐이어야 하니,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모두 가슴속에 제왕을 생각하여 간악한 마음이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하여, 상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공은 이어 또 아뢰기를,
“같은 쪽을 좋아하고 다른 쪽을 미워하는 오늘날의 풍조가 어찌 치세(治世)의 기상이라 하겠습니까. 일전에 정경세(鄭經世)가 올린 차자에 비답을 내리면서 ‘옥당이 정도(正道)를 지켰다.’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이귀의 말은 권도(權道)에 맞는 것이라 여기시는 것입니까? 권도란 경중(輕重)을 저울질하여 중도(中道)에 맞도록 함을 말하는 것인데, 이귀의 말을 어찌 중도라 하겠습니까.”
하였다. 이상의 공의 말에 상은 마치 메아리가 울리듯 신속하게 응답해 주었고, 이에 좌우에서 듣고 있던 자들은 두려움에 목을 움츠렸다. 그런데 공이 자리에서 나간 뒤에 외부의 논의가 들끓어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이다.[任自爲之]”라고 한 말을 네 글자의 죄안(罪案)으로 삼자, 대신(臺臣)들이 공의 파직을 청하였다. 그러나 상은 이르기를,
“경연을 담당하는 신하가 자기 임금이 허물이 없기를 바라서 기휘(忌諱)를 회피하지 않았으니, 이는 제 직분을 다하였다고 할 만하다. 훈신(勳臣)이 한번 말을 꺼낼 때 그 잘못을 아무도 감히 바로잡지 못하는 것은 국가로서 복된 일이 아니니, 그대들은 자기와 다른 의견에 대해 공격하는 이귀의 행동을 본받지 말라.”
하였고, 이후 대신들의 청이 재차 올라왔을 때에도 상은 이전처럼 그 요청을 물리쳤다. 이에 대사간 장공 유(張公維)는 “이 어른에겐 딴마음이 없으니, 심각하게 법을 적용하려 든다면 우리들은 공의(公議)에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헌납 정공 백창(鄭公百昌)은 대청(臺廳)으로 나아갔다가 물러날 때 공의 집으로 찾아가 절하고 말하기를 “공께서는 저를 허물하지 마십시오. 공께서는 저로 인해 명성이 더욱 높아졌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레가 울리는 이변을 계기 삼아 응교로서 차자를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오늘날 국사를 의논하는 자들은 다스림의 효과가 드러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경우엔 위력과 형벌을 행함으로써 그것을 진작하고자 하고 국가의 예산이 넉넉하지 못할까 걱정하는 경우엔 세금을 마구 거둠으로써 보태고자 하며, 참과 진실이 거짓과 속임수만 못하다고 말하고 인(仁)과 의(義)가 각박하고 모진 것만 못하다고들 말합니다. 이 가운데 하나만 있더라도 모두 국가를 내리치는 도끼와 국가를 좀먹는 해충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옥당의 차자가 문장이 좋고 의론이 올바르니, 임금에게 고하는 글은 응당 이 정도여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을축년(1625)에 사간에 제수되고 필선을 겸관하였다. 이 당시 상이 명을 내려 공주의 집을 짓도록 하였는데 그 규모가 정해진 제도를 훨씬 뛰어넘었다. 이에 공이 힘써 간쟁하였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자 나아가 아뢰기를,
“신들이 논하는 것은 조종(祖宗)의 법이고 전하께서 행하시는 것은 자궁(慈宮)의 뜻입니다. 전하께서는 일국의 법도가 되는 군주이시니 응당 사리로 깨우쳐 이끌어야 대효(大孝)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모후(母后)의 분부라는 이유로 뜻을 굽혀 불의(不義)를 따르면서 그것을 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후 사성, 사복시 정, 보덕, 집의 등으로 누차 천직하고 필선을 겸관하였으며, 말미를 청하여 고향에 내려갔다가 얼마 안 되어 집의로 소환되었다. 당시 정자(正字) 유공 석(柳公碩)과 대교(待敎) 목공 성선(睦公性善) 등이 소장을 올려, 이공을 찬축(竄逐)한 것은 무슨 죄 때문이냐고 아뢰자 상이 그에 대한 사면을 명하였는데, 이에 연평이 “감히 나서서 유석(柳碩)을 편드는 자가 있으면 역모로 논할 것이다.”라고 고성을 질러 대자, 마침내 양사(兩司)에서 합동으로 이공을 풀어 주라고 한 명을 거두어 달라고 청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이 고향으로부터 돌아오자 벗들이 공을 맞이하면서 “공이 만약 시의(時議)와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는다면 화가 즉시 닥쳐올 것이다.”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공은 대청에 나아간 뒤 계사(啓辭)를 올리기를 “유석의 우직한 그 행위는 실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이로 인해 당시 논자들이 분노한 얼굴과 요란한 목소리로 들고 일어나 마침내 면직되었다. 이때 완평공이 감탄하기를 “나도 이러한 노련한 계책을 할 줄 몰랐는데, 지금에서야 사람의 마음을 자못 통쾌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병인년(1626)에 인헌왕후(仁獻王后)가 훙서하자 연평이 상에게 삼년상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주상께서는 지손(支孫)으로서 대통(大統)을 계승하시므로 소종(小宗)을 대종(大宗)에 합치는 것은 불가합니다.”라는 의견을 내놓으면서 삼년상이 예에 맞지 않는다고 극력 논하자, 이에 예관(禮官)은 마침내 부장기복(不杖期服)을 입을 것을 청하였다. 상은 비록 마지못해 그 청을 따라 주긴 하였으나 의장(儀章)과 예법은 모두 왕후의 예법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공이 또다시 간쟁하였는데, 그 대략에,
“종통(宗統)의 중함과 천지의 상도(常道)와 상하의 구분은 대의(大義)에 따른 경계가 분명합니다. 진실로 그 정해진 구분을 뛰어넘어 해서는 안 될 일을 한다면 이는 예가 아닌 예가 되어 버려 종묘로부터는 죄를 얻고 후세로부터는 비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지손으로서 대통을 계승하시는데도 어버이에게 검박(儉薄)하게 대우하는 것이 미안한 일인 줄만 알 뿐, 예가 아닌 지경에 빠진다는 것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번 사적인 마음에 의해 판단이 가려진 까닭에 행동이 예에 위배되어, 명정(銘旌)에 금전(金篆)을 사용하고 성빈(成殯)에 찬궁(欑宮)을 사용하면서 5일 만에 빈(殯)을 하고 6일 만에 복(服)을 입으셨으니, 이는 왕후의 예법입니다. 그 상(喪)에 걸맞지 않은 예법을 쓰면 예에는 위배되고 분수에는 참람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런데 그때 상이 상주(喪主)가 되어 장기복(杖期服)을 입으려 하자, 하루만을 남겨 둔 상황에서 또 간쟁하기를,
“신의 간쟁이 만일 오늘을 넘겨 버린다면 더 이상 가망이 없게 됩니다. 전하께서 이미 종묘를 주관하면서 또다시 사사로운 상(喪)까지 주관하신다면 어찌 존귀한 사람이 두 명이며 참최복(斬衰服)을 입어야 할 사람이 두 명인 꼴이 아니겠습니까. 고금 천하에 결단코 이러한 이치는 없습니다.”
하였다. 당시 삼사(三司)가 함께 소장을 올렸는데, 우복공도 대각에 있으면서 더욱 힘써 간쟁하자 상이 심히 분노하여 간원(諫院)의 관원들을 모두 다 체직시켜 버렸다. 이에 공은 “승정원이 헌체(獻替)의 임무를 맡고 있으면서 능히 내비(內批)를 봉환(封還)하지 못하고 끝내 군부의 잘못된 행동을 실현하게 만들었다.”라고 하면서 마침내는 해당 승지를 탄핵하여 파면시켜 버리니, 이를 대단하다고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연평이 “죄를 얻는다.”, “비판을 받는다.”라는 등의 구절을 골라내어 “이런 말을 한 자는 모두 참수해야 한다.”라고 조정에서 크게 꾸짖자, 공이 사간으로서 스스로를 탄핵하며 말하기를,
“이귀가 이미 앞장서 그릇된 주장을 하여 전하를 잘못으로 인도하였음에도 잘못을 인정해 반성할 생각은 하지 않고, 되레 신하가 임금에게 아뢴 극히 간절한 말들을 골라 끄집어내어 상의 분노를 돋우고자 하니, 이로 인해 대각이 비록 체면이 가볍게 되었기로서니 어찌 훈신이 마구 꾸짖도록 용인할 수 있겠습니까. 후세에 반드시 그 폐단이 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텐데, 신이 어찌 구차하게 그것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훈귀들이 시장(柴場)을 절수(折受)하고 노비를 차지하면서 해당 지역의 백성들이 견디지를 못하자, 공이 아뢰기를,
“임금이 국가를 유지하는 것은 ‘팔병(八柄)’이 자기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그것을 잃어버리면 찬탈의 화를 누가 막겠습니까. 신은 훈귀들의 방자하고 제멋대로인 버릇이 끝내 노(魯)나라 경(卿)들이 만족을 모르던 지경에 이르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정묘년(1627) 1월에 청인들이 군사를 일으키고 쳐들어와 여러 고을을 연달아 함락하자, 상은 세자(소현세자(昭顯世子))에게 명하여 호남으로 나가 순행하면서 사방의 장정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였다. 공은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행장을 꾸린 뒤 눈물을 흘리면서 군사를 모집하였는데, 그 결과 병사들이 다투어 모여들었다. 그 무렵 세자가 전주(全州)에 머무르고 있었기에 그곳으로 말을 달려가 배알하고 이어 말하기를,
“인재를 기르고 명령과 형벌을 분명하게 시행하며, 성과 해자를 수선하고 무기를 수리하는 것이 바로 ‘대비를 갖추는 것[有備]’입니다. 애당초 대비를 갖추지 못한다면, 난을 마주한 상황에서 어찌 일을 해결할 가망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무군사(撫軍司)에서 공을 조도사(調度使)로 제수할 것을 청하였다. 공은 그 명을 받들고 무군사의 제공에게 말하기를,
“제 생각에 이 적들은 천조(天朝)가 자신들의 뒤를 밟을까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므로, 형세상 틀림없이 스스로 퇴각할 것입니다. 단 지금 이후로는 우환이 한창 커지게 될 터이니, 바라건대 자강(自强)과 자립(自立)을 기본으로 삼아서 적들의 퇴각을 다행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다행일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마침내 행군을 나서는 한편 열읍(列邑)에 격문을 돌렸는데, 사람들 모두가 그에 감동해 메아리가 울리듯 호응해 주어 한 달 만에 쌓인 곡식이 1만여 곡(斛)이나 되었으며, 이후 적이 평정된 뒤에는 그 곡식을 관아에 귀속하였다. 4월에 서울로 조회를 가자 상이 가상히 여기고는 특명으로 자급을 올려 주어 첨지중추부사 지제교에 제수하였다. 이에 공이 또 소장을 올리기를,
“전하의 근심은 이제부터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마치 적이 눈앞에 와 있는 양 엄숙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산천이 험준한지 평탄한지, 사졸이 용맹한지 나약한지, 어떤 장수가 해당 험지를 장악하는 데 능한지, 어떤 병사가 해당 지점을 방어하는 데 적당한지 등등의 문제를 두고 스스로의 마음으로 일일이 따져 보지 않는 부분이 없도록 하심으로써, 잠시 동안의 안정을 다행이라 여긴 나머지 적을 관망만 한 채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하였다.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무진년(1628)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가 전직되어 좌부승지에 이르렀다. 당시 포로로 붙잡혀 갔다가 도망쳐 돌아온 우리 백성들에 대해서 청인들이 으름장을 놓으며 쇄환을 요구해 왔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주려고 하였는데, 공은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쫓겨 가는 자들의 가슴속 통한이 골수에 사무치게 될 뿐만 아니라, 아직 돌아오지 못한 자들도 장차 남쪽으로 돌아올 희망을 접고서 적을 섬길 마음을 더욱 굳게 다질 것입니다. 하물며 내 품속에 있는 갓난아기를 떼어 내서 범의 아가리에 던져 버리는 일을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가납해 주었다. 또 고변(告變)이 계속 이어지면서 옥사(獄事)의 처리 방식이 지나치게 엄혹해지자 그로 인하여 상소하기를,
“아직 성동(成童)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와 이미 방축되었던 사람까지도 모두 낱낱이 조사해 내어 북녘 땅으로 쫓아 버린 결과, 구족(九族)들은 비통한 심정이 되어 그 원한으로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에 닿을 정도가 되었으니, 만약 법률상 연좌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절대 잘못된 전례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무고(誣告)의 경우는 한(漢)나라 법에서 엄중히 취급하였던 사안이니, 진정 반좌율(反坐律)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선량한 사람이 화를 입는 일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가뭄으로 인하여 또 상소하기를,
“역도(逆徒)의 시신에 추형(追刑)을 가한 일로 말하자면, 반성하고 두려워해야 할 시기를 마주한 상황에서 덜컥 시신을 참하라는 참혹한 명령을 내리셨으니, 이는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박승종(朴承宗)의 경우, 그는 반정(反正) 초기에 자기 아들이 병사를 모으려던 것을 제지하였고 아들의 딸이 폐인(廢人)을 위해 죽은 것 역시 가상하다 할 만합니다. 하물며 박승종은 이미 이이첨(李爾瞻)을 비롯한 여러 간신과 서로 등졌고 모후를 보호한 공도 있으니, 비록 탐람(貪濫)한 죄가 있다 한들 어찌 그 죄를 덮어 버리기에 부족하겠습니까. 폐서인(廢庶人 이공(李珙))이 비록 죄를 지어 죽었다 하더라도 그 후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 주도록 한다면 어찌 성인(聖人)이 끊어진 대를 잇도록 해 주었던 의리에 부합하지 않겠습니까. 이인거(李仁居)는 비록 만 조각으로 참해야 마땅하지만 필부 한 사람이면 너끈히 결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홍보(洪靌)의 공은 한 자급만 받아도 족한데, 어찌하여 작위(爵位)를 나눠 주고 모토(茅土)를 나눠 주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게 하십니까.”
하였다. 이에 시의(時議)가 크게 놀라 서인(庶人)과 관련된 일은 응당 말할 바가 아니라고 하면서 탄핵을 일으켰으나 상은 들어주지 않았다.
경오년(1630)에 삼척 부사(三陟府使)에 제수되었다. 동계옹(桐溪翁)이 찾아와 작별할 때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자네는 어이하여 조금 더 머물러 나와 함께하지 않는가. 내가 자네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누구와 함께하겠는가. 바라건대 자네는 그 말을 빨리 몰고 가지 말게나.”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1년을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고, 그 뒤에 예조 참의와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인목왕후(仁穆王后)가 훙서하자 공은 병을 조리하라는 상의 명을 받들고 서울로 가는 길에 우복옹(愚伏翁)을 찾았다. 그런데 그때 옹은 이미 병세가 깊어진 상태라 공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내 더는 청광(淸光)을 가까이하지 못할 것이거니와, 국사는 아직은 해 볼 만한 여지가 있으니 공은 힘써 주게나.”라고 하였다. 이 당시 상의 몸이 편찮았는데, 한 요망한 의관이 침소로 들어와 근시(近侍)들을 물리치고는 마음대로 침을 불에 지져 옥체에 놓는 등, 눈을 부라리며 고함치는 꼴이 극히 흉악하였으나 아무도 그에 대해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이에 공이 진언하기를,
“조정의 예는 엄격함을 주로 삼으므로 필부와 요망한 자가 멋대로 솜씨를 놀리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대신이 감히 아무 말도 못 하고 대각이 아무런 쟁론도 못 하는 것은 단지 군부께서 이미 그것을 싫어한다는 점을 크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가 요망하고 허탄하다는 것을 안 이상, 어찌 한갓 부시(婦寺)의 사랑만 실천하면서 사리에 해가 있음을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상소하기를,
“마음이란 것은 동요하는 바가 있으면 외부의 삿된 것이 혹 그것을 틈타 들어오는 법입니다. 《대학》에 이르기를 ‘마음에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을 수 없으며, 걱정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을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신은 삼가 지나친 걱정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로 인해 식견이 있는 자들은 “조정에 진정한 유신(儒臣)이 있다.”라고 감탄하였다.
갑술년(1634)에는, 상이 일전에 대원군(大院君)을 추숭하여 묘호(廟號)를 원종(元宗)으로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원종을 태묘(太廟)에 모시는 일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공은 예전(禮典)에 근거해 소장을 올려서는 그 잘못에 대해 남김없이 다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지극한 정에 의해 판단이 가려져 있으니, 비록 예에 맞지 않은 일을 거행하신다 한들 대원군께서 그 어찌 예에 맞지 않은 제향을 편하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위로는 공(功)을 이룬 성조(聖祖)에 부묘(祔廟)를 하고 아래로는 온 나라의 공론을 거스른다면, 신이 어찌 재야에 있다는 이유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성명(聖明)하신 전하로 하여금 후대의 기롱을 받도록 하겠습니까.”
하기까지 하였다.
을해년(1635)에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이보다 한 달 앞서, 폐조(廢朝)의 여얼(餘孼)이 체포되어 그의 공초에 연루된 관원들의 수가 몹시 많았는데, 상이 특명을 내려 이준, 정온(鄭蘊), 최현(崔晛)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한 일이 있은 뒤 새로운 관직에 임명되어 서둘러 길을 나섰다가 충주(忠州)에 당도할 무렵 병이 들었다. 이에 소장을 올리기를,
“신은 어쩌면 살아서 성은에 사례하지 못할 듯합니다. 수레를 재촉해 길을 떠나 아침저녁으로 쉬지 않고 내달렸는데, 중간도 채 다다르지 못하고 병이 들어 꼼짝없이 누워만 있는 꼴이 되어 버렸으니 천지와도 같은 은혜에 보답할 길이 다시는 없게 되었습니다. 죽어 구렁에 뒹굴 날이 장차 머지않은 듯하니, 북편으로 궁궐을 바라보매 눈물만 마구 흐릅니다. 신은 학식이 몹시도 부족한 몸으로서 이미 가지고 있는 능력을 시험해 보았으나 드러난 효과는 전무했습니다. 더구나 듣자 하니 비상(非常)한 대례(大禮)를 거행하려는 가운데 전하의 결단이 이미 분명하여 되돌릴 수 없는 형세라 하니, 신의 부족한 학식으로 어찌 털끝만큼이나 성덕(聖德)에 보탬을 줄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마침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6월 17일에 지팡이를 끌고 밖으로 나가 화단을 따라 걸으면서 섬돌을 가지런히 놓으라고 명하였다. 날이 저물자 “기운이 평안하지 못하구나.”라고 하고는 시중드는 이에게 물 뿌리고 쓸어 당실(堂室)을 깨끗하게 해 놓으라고 명한 뒤 그곳에서 눈을 감고 단정한 자세로 앉았다. 그렇게 있다 얼마 뒤 자리를 바르게 하도록 하고는 누웠다가 신시(申時)에 정침(正寢)에서 생애를 마쳤으니, 향년 76세였다. 부음이 이르자 나라 사람들 가운데 탄식하고 애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듬해 1월에 거주하던 오리(五里) 대현(大峴)에 장사 지냈다가 그 뒤 도장산(道莊山) 묘향(卯向)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는데, 두 부인이 그곳에 합장되었다. 공은 일찍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들었는데 조정에서 추은(推恩)하여 이조 참판으로 추증하였다.
아아, 공이 하였던 학문은 공자와 맹자 및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도이고, 하였던 말들은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만들고 백성을 요순 시대의 백성같이 되게 하는 방책인즉, 후대인들이 공의 글을 읽는다면 비로소 공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될 것이고, 공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된다면 비로소 공을 배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공을 배우는 일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공은 언제나 말하기를,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그 앎을 지극하게 만들려는 것이고, 자신에게 돌이키는 것은 그 내용을 실천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앎을 지극하게 만들기를 경(敬)으로 하지 않으면 혼란하고 번잡해져 얻는 것이 없게 되고, 내용을 실천하기를 경으로 하지 않는다면 나태하고 방자해져 위태로운 상태가 되니, 그 두 가지 일에 반드시 경으로 옆에서 붙들어 주어야 학문이 진전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공이 집에 있으면서 자신을 수양하고 임금을 모심에 충심을 다하였던 것들을 한마디로 총괄해 보자면 경일 따름이다. 그런즉 경이라는 한 글자는 공을 배우기 위한 진전(眞詮)이자 묘결(妙訣)이 될 것이다. 하늘의 법칙을 극진히 다하였던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를 향한 우애, 그리고 친족과 마을 사람이 두루 다 기쁜 마음으로 따랐던 일들에서는, 자연 큰 것을 미루어 작은 것을 알 수 있을 터이니, 어찌 그에 대해 상세하고 남김없이 찬록할 필요가 있겠는가.
공의 선취(先娶)는 선산(善山) 문수민(文秀民)의 따님으로 2남 1녀를 낳았다. 첫째는 대규(大圭)로 현감을 지냈고, 그다음은 원규(元圭)로 문과에 급제해 정랑을 지냈으며, 사위는 이혐(李馦)이다. 후취(後娶)는 능성(綾城) 구충윤(具忠胤)의 따님이자 참판 구봉령(具鳳齡)의 손녀로 2남 2녀를 낳았다. 첫째는 문규(文圭)로 지행(志行)이 있었으나 요절하였고, 그다음은 광규(光圭)로 국자 생원이며, 두 사위는 조흥원(趙興遠)과 유천지(柳千之)이다. 측실에게서 아들 산규(山圭)를 두었고 딸은 이제전(李悌傳)에게 출가하였다.
대규의 아들은 재관(在寬)이고 사위는 이동야(李東野)와 이렴(李濂)이다. 원규의 아들은 재발(在發)이다. 이혐은 1남을 두었는데 이유후(李裕後)이다. 문규의 아들은 재청(在淸)과 재명(在明)이다. 광규의 아들은 재아(在雅)이다. 산규의 아들은 재시(在始)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5대손인 현감 화국(華國)이 일찍이 공의 행적이 담긴 글을 가지고 나에게 행장을 지어 달라는 부탁을 했는데, 그때 나는 그것이 주제넘은 일인 줄 생각하지 못하고 부탁을 받아들여 찬술했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지금, 현감군(縣監君)은 천고(千古)의 사람이 되어 버려 군의 손자인 석배(錫培)와 재종손인 학배(學培)가 또 비명(碑銘)을 부탁해 왔는데, 그 요청이 1년이 흐르는 동안에도 여전히 간절하였다. 나는 공에 대하여 마부가 되어서라도 한번 모셨으면 하는 소망을 늘 가지고 있었으므로 감히 여든의 나이라 정신이 어둡고 쇠약하다고 사양할 수는 없는 까닭에, 삼가 이전에 지은 행장을 통해 그 대략을 간추리고 이어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삼대의 시절 아득히 멀기에 / 三代邈矣
세상엔 치세와 난세가 공존해 있네 / 世有治忽
혼군 명군 차이가 생겨나도 / 昏明雖殊
우리의 도는 변함없이 하나이니 / 吾道則一
나아가면 천하를 두루 구제하려 하고 / 進欲兼濟
물러나면 방 한 칸에 거처하는 것이네 / 退則一室
훌륭하도다 창석이여 / 韙哉蒼石
나는 그분께 흠잡을 것 없노라 / 吾無間然
스승과 벗 들에게 나아가 / 就之師友
천인의 이치까지 강론했는데 / 講及天人
입 밖에 나오는 말마다 / 其言出口
요순 군민의 계책이었네 / 堯君舜民
우아한 봉황 땅 위로 내려앉자 / 儀鳳下之
덕의 광채가 나라에 충만했는데 / 德輝滿國
훈귀가 크게 고함치기에 / 勳貴殷咆
스스로 산림에 묻힐 결심 하여 / 我有林壑
서책 안고 돌아가 은거하니 / 抱書歸卧
삼대의 시절 요원해져 버렸네 / 三代之邈
공이 없다고 말하지 마라 / 莫曰公亡
글은 천지간에 남아 있으니 / 書在天壤
명으로써 후학들에게 보이노니 / 銘眎後學
백세토록 산처럼 우러르리 / 百世山仰
贈嘉善大夫吏曹參判行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蒼石先生李公神道碑銘
濟恭嘗讀蒼石先生李公遺文。喟然歎曰。公當世第一人也。所言皆當世第一義。光海昏亂主也。道不容言不合。固無怪爾。惟是仁祖龍興。萬物咸覩。而眞正大義理大議論之關國家治亂者。輒與勳貴之權謀術數。相鑿枘。不得大展布於世。使斯民蒙其澤。後學之所慕仰者。不過紙上之言耳。道之不行。豈特爲斯人之命也。實天下國家之恨也已。公諱埈。字叔平。系出興陽。在麗有陽升。與契丹力戰死。史稱將軍李陽升死之是也。於公十二世祖也。入聖朝。曰舒原。贊成門下事。是生垠司憲府大司憲。垠之子堰。尹全州。光廟賜手札。褒淸白。子壽川。司憲府執義。是爲四世祖也。曾祖兆年判官。祖琢。父守仁贈左承旨妣高靈申氏。守涇之女。贈淑夫人。以嘉靖庚申。生公于尙州里第。旣長。從西厓柳先生學。志不在功利。壬午。中國子生員。辛卯。闡文科屈隷校書館。盖當路者惎之。壬辰。倭大躪嶺以南。公時在京師。徒步還故里。旣至。失父母所在。日號泣行。遇之孝谷山中。人以爲孝感。於是團避亂人數千。據鞍嶺拒賊。賊掩之。人死者相枕藉。公亦遭大酷。泣血謀倡義。衆推公及愚伏鄭公。分主召募。未幾。募至數千。以忠義相激勵。多所斬獲。癸巳春。賊大殺掠。義軍潰。公亦跳忽眩仆。幾不得脫。賴伯氏月澗公。背負以走。得以全。轉以見方伯洪公履祥泣言狀。方伯曰。公若力可以屯田事濟矣。公遂斬艾墾土。計其出賑民饑。餘悉屬之軍。時甲午也。朝廷以倡義有功。陞典籍。服未闋不赴。九月。拜禮刑二曹佐郞。乙未。爲慶尙都事。兼管調糧魚塩等事。時。朝廷令儒臣。述前代興廢以進。公先是撰中興龜鑑。自夏少康。至宋高宗。先論君德得失。次及臣下邪正。瞭若指掌。至是投進。上賜手敎褒之。時。鄭仁弘宰寧海。士大夫多趍附者。公獨曰。此邪人也。道過府。仁弘出迎。公如不覩。令呼唱而過。仁弘大嗛之。不恤焉。秩滿。體察使李公元翼。請仍之以調糧魚塩。無不中機宜也。丁酉。拜司憲府持平。秋。倭再動。大駕議出狩。公膺召募官上䟽。請駐蹕鳥領之御留城。親總三軍。使勇氣百倍。以圖克敵。上嘉之。卒不能行。公受命而南。體察使屬之郭公再祐。遂入石門。繕城池峙粮餉。衆皆知城可嬰而死可樂也。亡何。浮議煽命罷之。公痛恨曰。天實爲之。謂之何哉。檢察使成泳辟從事。戊戌。移佐摠理使李公元翼。李公悉以事委之。俄授醴泉郡守。摠理使以聞曰。所管非李某莫可。上仍之。己亥。拜丹陽郡守。時。天兵大集。折辱守宰。日刦奪人。公至則其禮恭其辭正。泣以告曰。父母而救其子。侵㬥之可乎。游擊茅國器。作歌詩以謝。戢軍卒橫者。民乃帖然。居五年。觀察使上治行第一。癸卯。拜弘文館修撰。民攀轅不忍送。歌曰。丹山秀且奇。丹水深而淸。不能使公留。但得留公名。前此厓翁爲羣小所擠遜于荒。至是入經幄。因文義奏曰。唐德宗初政。非不淸明。猜察太過。終致播遷之辱。有一陸贄而弃之若遺。殿下待柳成龍。不幸而近之。上不悅罷。後數日。五峯李公好閔。言於上曰。近日柔佞成風。獨李埈。敢言人所難言。可賞不可怒。上默然。左遷刑工二曹正郞。相禮兼實錄郞。甲辰。以書狀如皇京。明年還。戊申。宣廟昇遐。光海立。由修撰拜正言。公憂光海厥德罔終。有闕失輒先事諫正。遇灾異則箚陳近習不可不祛偏係而廓大公之量。壅蔽不可不察其幾而燭未然。又曰。含冤枉死。久而未洩者。旣曰非辜。則昭雪之何待三年。又曰。責成大臣。只是常程。瑣瑣而黜陟賢否。事關安危者。則漠然不相管攝。使之不安其位。相繼請告。盖臨海之獄。有司請置之辟。首相完平公以全恩請。被臺嘖不視事。公極論之如此。光海不能用。憂經筵久廢則箚曰。侍御僕從讒巧之人。誘之非禮。導之非義。自然與道相離。憂土木頻作則箚曰。宮中雖窄陋。實先王儲神燕閒之地。殿下卽宜居於斯寢於斯。仰瞻楹桷。俯視軒。常若先王實臨其上。此誠肯構之道。而又起大役於不急之地。非祇懼之意也。吊使至。朝家如古例。設假主以迎則箚曰。我國用宗號非禮。然沿襲之久。數百年不改者。盖出於臣子尊君父之誠也。如欲遮前掩後。以護其失。失禮之中又失禮焉。况人君以至誠爲心。不容一毫私僞。交隣國待夷狄猶不可。况上國之於本朝。其尊如天。遣使致祭是何等盛禮。而敢行虛僞於至敬至重之地乎。作燕居十箴以進。則光海賜貂皮以奬之。白沙李公貽書曰。箴說精切。不謂今日得見溪上緖論。策士任叔英直言削科則箚曰。叔英以醜詆君父。命削科。所謂醜詆者何事。卽使沽激不實。終何損於聖德哉。其所言萬一不誣。尤當惕然自省。不可以違格而斥之也。因旱灾應旨則曰。外人有交通宮禁者矣。內旨有私授除拜者矣。祈天永命。本在修德。而有淫祀禬禳以啓神奸者矣。用人立政。本在擇賢。而有餽遺權貴以圖爵祿者矣。今欲求其消灾之術。莫如正其致灾之本。不然。雖惻怛之言不絶於口。終何㿽於消厭之道乎。憂賦役煩重。營作又興。則箚言父母愛子之心。靡所不至。疾病則藥餌之。饑寒則衣食之。如此而或至於死。猶不敢怨天而自傷救療之未盡。安有爲民父母啓此無㿽興作之事。以促其垂絶之命乎。鄭仁弘䟽詆晦退兩賢。則䟽言二儒道德。蔚爲時宗。而其師之學。不見與於二儒。彼以忌克之心。抱憤懟之氣。毁之極口。殊不知是非之判有如白黑。雖欲一世之改視易聽。有不可得矣。於是太學諸生。削仁弘儒籍。光海怒。命錮諸生。公上䟽諫。光海以黨同伐異不顧義理責之。又䟽曰。殿下之所謂義理者。指何事而言耶。道之所在。卽理之所在。今以扶正道衛斯文爲非義理。則必須藉仁弘之說而鼓其瀾。附汝樑之論而助其勢。將順君父過擧。禁錮一時多士。然後方合於義理耶。光海曰。由予暗劣。致諸賢不安其位。須亟就位以掩予過。於是三凶號爲三昌。植黨援。擅威福。公曰可以退矣。臨發。陳䟽曰。罔念作狂。欲敗度縱敗禮。雖至親如父子兄弟。亦不能保其常。豈非大可懼哉。一時賢士大夫莫不惜其去。五峯李公言于光海曰。李某以孤直。不容於朝。片舸南歸。可惜云。公就澗邊構精舍。端坐讀易。至忘寢食。愚伏鄭公日相就講討亹亹。公常曰。愚伏是我兄弟。特姓不同耳。壬子。出補鏡城判官。不赴。癸丑。授豊基郡守。治法專以化民成俗爲務。時。永昌大君纔八歲。凶黨謂逆本在是。鍛鍊極其慘。公聞之太息曰。邦其喪乎。草䟽萬言以極言之。會。兵判朴承宗傅戍卒誣訴罷公職。遂已之。居十年仁祖反正。召以校理。俄轉檢詳,舍人。移執義。初上卽大位。命安置廢世子晊于江華。至是鑿竅出。延平李公貴欲置之辟。公議不合。愚伏公時在玉堂。抵公書曰。議者以禍本爲慮。生亦不能保其必不然。議者又言上亦不無爲後日慮。玉堂不當抵死立異以歸評於君父。此則或有理矣。公答曰。將順德意。不欲苟同時議。是兄初見也。諸議之不欲歸評於君父。此大害理。忠臣從道而不從君。天意之有動無動。恐不當論。延平又抵公書曰。公必欲爲庶人立節耶。公答曰。自古因事必爭之君父者。皆爲其事立節耶。遂啓畧曰。江都穴墻之變。雖曰難明。而其情跡則易見。土竅之掘。內而達外。則無外援可見。書札之作。假而非眞。則無外應可知。是不過圍中狹窄。當此暑月。風道四塞。憂愁鬱悒。遂成狂疾。欲視天日之心。思見父母之情。偪塞於中而不能自遏。妄作出圍之計。自速逃命之罪。深究其情。是可哀也。今執法者但當執之。治其逃出之罪。拘囚之如故而已。廢朝十數年。戕害骨肉。終至於滅絶天常。顚覆厥德。此誠今日之所深戒也。延平怒不已斥之。外除鐵原府使。判吏部申公欽大驚。招郞官問曰。李公之林下已十數年矣。今乃不能容。又斥之去耶。居數月。申公謂李某久於外。非朝廷福。啓請以舍人還。未幾因事罷。大司諫鄭公曄白上曰。李某有文章德義。平日行事履方秉直。不宜同衆人混罷。首相完平公知公必不留。以書挽公曰。義不可留。將還。上萬言䟽。備言關西形勢。又曰。守城之制。砲樓最要。其制具在先正臣柳成龍撰進兵要。亟賜採行。仍令頒布中外。時。淸人盤據遼瀋。公深以爲憂。首及之。上嘉納。甲子。副元帥适反。上出狩公州。公聞難。募軍得千餘。號曰義勝軍。將刻日赴行在。聞賊破卽罷兵。入京都請後至罪。仍䟽言賊變由民怨狀。上納之。由執義拜應敎。移舍人典翰。先是。仁城君珙出逆招。上命勿問。延平䟽斥兩司不論珙。公曰。珙旣出賊口。不出之。恐其藉之者甚。不如姑出之。亦保全王子之一道也。朝廷不從。至是。賊又援珙。延平請置珙大內以爲防。公謂延平曰。公以保全爲名。聽之美而行之難。自古臣子處嫌逼之地。與至尊同處而安有自全者乎。且公欲置之內者。是疑之也。不去一疑字。雖重城。複壁。何㿽。及侍講。上問曰。時事有所欲言否。對曰。珙之出逆口非一再。殿下必欲全骨肉。此三代帝王事。昔宋太祖有言曰。有天命者任自爲之。其不嚴禁防如此。未聞有以此乘之者。帝王大度須如此爲心。人皆懷於我而奸心自消矣。上稱善。公又曰。今之喜同惡異。豈治世氣象。頃日答鄭經世箚若曰。玉堂守經。然則以李貴言爲中於權耶。權者權輕重。使之得中之稱。李貴言豈可謂之中也。上酬答如響。左右聞者縮頸。旣出。外議謹沸。以任自爲之。爲四字案。臺臣請罷職。上曰經幄之臣。欲其君無過。不避忌諱可謂盡其職。勳臣一出言。莫敢矯其非。非國家福。爾等勿學李貴攻擊異己之論。及臺請至再。上斥之如前。大司諫張公維曰。此老其心無他。若深文之。吾輩得罪公議矣。獻納鄭公百昌詣臺罷。造門拜曰。公勿罪我。公以我名益高矣。因雷異。以應敎陳箚畧曰。今之議者。患治效未著。則欲振以威刑。患國計未贍。則欲因以聚斂。謂誠信不如假譎。謂仁義不如刻核。有一於此。皆足以爲伐國之斧斤。蠧國之螟螣也。上語侍臣曰。玉堂箚。文章好而議論正。告君不當如是耶。乙丑。拜司諫兼弼善。時。命造公主第。踰制甚。公爭之力。上不聽。進曰。臣等所論。祖宗之法。殿下所行。慈宮之旨。殿下爲一國法度之主。當以事理開導之乃爲大孝。豈可以母后所敎而曲循不義。以爲之孝乎。累遷司成,司僕寺正,輔德,執義。兼弼善。乞暇還未幾。以執義被召。時正字柳公碩,待敎睦公性善等䟽言珙之竄何罪。上命宥之。延平大言曰。敢有出而右柳碩者以逆論。於是兩司合請寢釋珙之命。及公至自鄕。知舊迎謂之曰。公若貳於時議。禍立至。旣詣臺啓曰。柳碩之戇。實出於憂國。時議色怒聲喧。遂坐免。完平公歎曰。吾亦不知爲此老謀。今乃殊快人也。丙寅。仁獻王后薨。延平謂上當行三年喪。公議以爲主上以支孫承大統。不可以小宗合大宗。極論三年非禮。禮官乃以不杖期請。上雖勉從。儀章節文。皆用王后禮。公又爭之。畧曰。宗統之重。天地之經。隆殺之分。大義截然。苟有過其常分而爲所不當爲。是爲非禮之禮。得罪於宗廟。取譏於後世。殿下以支孫承大統。惟知儉其親之爲未安而不自覺其陷於非禮。惟其一蔽於私。是以動違於禮。銘旌用金篆。成殯用欑宮。五日而殯。六日而服。此王后禮也。非其喪而用其禮。於禮爲乖。於分爲僭矣。時主喪杖期成服。只隔一日。又爭之曰。臣之所爭。若過今日。不復望矣。殿下旣主宗祧。又主私喪。則豈不是二尊二斬哉。古今天下。斷無此理矣。時三司交章。愚伏公在臺爭㿽力。上恚甚。悉遞諫院官。公以爲政院主獻替而不能封還內批。遂成君父過擧。遂駁罷該承旨。人莫不偉之。延平剔出得罪取譏等句。大罵於朝曰。爲此說者皆可斬。公以司諫自劾曰。李貴旣倡邪說以誤殿下。而不思引咎自反。反欲抉摘人臣告君痛切語。以激怒於上。臺閣雖輕。豈容使勳臣亂罵。後世必將曰其害自臣始。臣豈可苟容乎。諸勳貴折受柴牧。占取奴婢。所在民不堪。公啓曰。人君所以維持國家者。以八柄在己。一失之則攘取之禍。孰禁之哉。臣恐勳貴恣雎之習。終至於魯卿之無厭矣。丁卯正月。淸人擧兵入。連陷州郡。上命世子出廵湖。收召四方。公聞亂趣裝。涕泣募士。士爭赴。時。世子駐全州。馳往謁。仍曰。作人才明政刑繕城池修器械。是有備。旣不能有備。臨亂何望其有濟乎。於是撫軍司請授公以調度使。公受命謂撫軍司諸公曰。度此賊畏天朝躡其後。其勢必自退。但此後憂方大。願各以自强自立爲本。勿以冦退爲幸則幸耳。遂行。且檄列邑。人皆感勤響應。旬月。峙粟萬餘斛。賊平。歸之官。四月。朝京都。上嘉之。特命超資。授僉知中樞府事知製敎。公又䟽曰。殿下之憂。從此益深。願殿下凜然若敵之至。山川之險夷。士卒之勇㥘。何將能控扼某險。何兵宜防守某處。莫不一一經畫於吾心。無以少安爲幸而玩冦度日也。拜工曹參議。戊辰。拜同副承旨。轉至左副。時。我民之被擄逃還者。淸人喝令刷還。朝廷欲依其請。公力言其不可曰。不惟被驅而去者含痛次骨。其未還者。亦將絶望於南歸。益堅事賊之心。况奪吾懷中赤子。忍投之虎口乎。上嘉納。又因告變相續。治獄甚嚴。䟽曰。未成之童。已放之人。亦皆一一覈出。投畀有北。九族含悽。冤號徹天。若非法律應坐。决不可刱謬。至於誣告。漢法所重。苟無反坐。良善之受禍無窮矣。因旱又䟽曰。逆胔之追刑。適當省懼之日。遽行斬尸慘刻之令。此臣所未解。至於朴承宗。在反正初。止其子聚兵。其女之爲廢人死者亦可嘉。况承宗旣與爾瞻諸孼相背。而有扶護母后功。雖有貪濫之罪。其不足盖之耶。廢庶人雖有罪而死。立其後以祀之。豈不有合於聖人繼絶之義。李仁居雖合萬斬。然一匹夫縛之有餘。洪靌之功。止於一資足矣。是何裂爵分茅。爲世笑囮也。時議大駭。謂庶人事非所宜言。彈擊發。上不聽。庚午。除三陟府使。桐溪翁就別。執手而語曰。子何不少遲而偕我。我非子與偕而誰偕。願子無疾其驅。居一年棄歸。後拜禮曹參議,大司諫不赴。仁穆王后薨。公承上命調病而西。歷訪愚伏翁。翁病已深。執手泣曰。吾不復近淸光矣。國事尙可爲。公勉之。時上體違和。有妖醫入卧內。屛近侍。自以針火燒之。投玉體瞋喝狀甚獰。人無敢言者。公進言曰。朝廷之禮。以嚴爲主。非匹夫妄人作弄伎倆之地。而大臣不敢言。臺閣不能爭者。徒以君父已疾之爲大。然旣知其妖誕。則何可徒爲婦寺之仁而不念有害於事理哉。又䟽曰。心之爲物。有所動則外邪或乘之。大學曰。心有所恐懼則不得其正。有所憂患則不得其正。臣竊不勝過慮也。有識者歎曰。朝廷有眞儒臣也。甲戌。上旣追崇大院君廟號元宗。將議祔太廟。公據禮典上䟽。極言其非。至曰殿下爲至情所蔽。雖爲非禮之擧。大院君。其安於非禮之享乎。上以祧有功之聖祖。下以違擧國之公論。則臣豈以在野而不言。終使聖明取譏於後世乎。乙亥。拜弘文館副提學。前一月。有廢朝餘孼被逮。辭連搢紳甚多。上特命李埈,鄭蘊,崔晛勿問。及新除降。趣發行。至忠州疾作。上䟽曰。臣恐不得生謝聖恩。促駕就途。朝暮馳不息。未及中道。病發僵卧。天地之恩。無路更報。溝壑之塡。將恐不遠。北望宸極。涕泗橫流。臣之不學之甚。已試無驗。况聞將擧非常之大禮。天斷旣銳。勢不可回。以臣不學。豈絲毫補聖德也哉。遂還。六月十七日。曳杖出步循花堦。命整砌石。日晩曰。覺氣不平矣。命侍者洒掃堂室令潔凈。瞑目端坐。已而命正席卧。以申時終于正寢。壽七十六。訃及。國人無不咨嗟痛惜。明年正月。葬于所居五里大峴。後移道莊山卯向之原。兩夫人祔焉。公嘗參原從勳。朝廷推恩澤。追爵吏曹參判。嗚呼。公之所學。孔孟程朱之道。所言。堯舜君民之謨也。後之人讀公文。方可以知公。知公方可以學公。學公如之何。公常曰。窮其理所以致其知。反其躬所以踐其實。然致知不以敬。昏惑紛亂而爲罔焉。踐實不以敬。怠惰放肆而爲殆焉。二者必敬以夾持。可以進乎學矣。公之所以在家而修之身。事君而盡其忠者。一言以蔽之。曰敬而已。然則敬一字。是學公之眞詮妙訣也夫。至若孝友之盡乎天則悅服之。遍乎宗黨。自可推大知小。安用撰錄之詳且盡也。公先娶善山文秀民女。生二男一女。長大圭官縣監。次元圭文科正郞。婿李馦。後娶綾城具忠胤女。參判鳳齡之孫。生二男二女。長文圭有志行早歿。次光圭國子生員。二婿趙興遠,柳千之。側室有男山圭。女李悌傳。大圭男在寬。婿李東野,李濂。元圭男在發。李馦一男裕後。文圭男在淸,在明。光圭男在雅。山圭男在始。曾玄以後不盡錄。五世孫縣監華國。嘗以公之事行。托濟恭爲狀。濟恭不揆僭猥。奉以撰次。今於十六載之後。縣監君作千古人。君之孫鍚培。再從孫學培。又以麗牲顯刻見托。其請歷歲猶勤。濟恭於公常有執鞭之願者。不敢以八耋耗昏辭。謹就前日狀文。畧綽刪節之。仍作銘。銘曰。
三代邈矣。世有治忽。昏明雖殊。吾道則一。進欲兼濟。退則一室。韙哉蒼石。吾無間然。就之師友。講及天人。其言出口。堯君舜民。儀鳳下之。德輝滿國。勳貴殷咆。我有林壑。抱書歸卧。三代之邈。莫曰公亡。書在天壤。銘眎後學。百世山仰。
영의정 채제공 찬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行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兼經筵知製敎春秋館修撰官參贊官蒼石李公諡狀
先生諱埈字叔平別自號蒼石姓李氏興陽人在麗有陽升與契丹戰死史稱將軍李陽升死之於先生十二世祖也入我朝舒原贊成門下事是生垠司憲府大司憲大憲子堰尹全州著淸白光廟賜手礼褒之子壽川司憲府執義守正不撓是爲先生高祖曾祖兆年判書祖琢父守仁贈左承旨妣高靈申氏守涇女贈淑夫人嘉靖庚申三月六日先生幼讀孟子何必曰利惕然曰義利之辨學者所當先弱冠執贄謁吾先祖文忠公文忠極稱詡以遠大期之壬午上庠辛卯釋褐屈芸館蓋被當路惎壬辰倭大擧入寇嶺南先刳於兵先生時在京徒步還至家己父母去矣日夜號泣尋所在遇之孝谷山中蓋孝感也里人嘯聚假賊狀搶掠先生諭以義爲亂者服於是團避亂人據鞍嶺拒賊賊掩之衆皆死先生遭大酷泣血擧義衆推先生及愚伏鄭先生分主召募數千激以忠義衆爲先生泣願死遂軍于鈷鉧潭設方略多軒獲癸巳二月賊大殺至義軍潰先生病仆幾不免賴伯氏月㵎先生背負走得全入江左見方伯慕堂洪公泣言狀且請急洪公曰公私竭設有助何能萬一屯田事濟矣甲午先生謀同志募飢民力墾荒秋大熟計出賑飢餘悉屬之軍朝廷以倡義有功陞典籍服未闋不赴九月拜刑曹佐郞乙未爲慶尙都事兼管糧魚鹽事船鹽輦粟隨緩急典中機宜時上命儒臣述前代興廢以進先生嘗撰中興龜鑑至是投進上嘉歎手敎褒之時鄭仁弘竊名盛士夫夫多趨附先生曰邪人弘宰寧海聞先生過出迎先生不見直令呼倡而去弘怒咬齒秩滿體相梧里李公調度善請仍之丁酉拜持平秋倭再猘先生差召募官賊銳甚大駕將再遷上疏請駐蹕島嶺略曰嶺上有城曰御留其南咸尙沃野極望可以營田其北忠州臨江負險可以營壘親總三軍進駐嶺上天威所臨勇氣百倍又合咸聞龍三縣爲一大府以壯禦留之根本大設屯田於尙州等地如臨羌振武故事食必足守必固戰必克此今日急務上嘉之竟寢之先生受命南糾合義旅體相屬之忘憂郭公與之協力遂入石門繕城峙糧衆欲死守亡何浮議煽罷之公痛甚上言曰腸焦口燥修城聚糧區區拮据錙銖積者與洛水同流天實爲之不報梧相嘗敬重先生戊戌爲總理辟爲佐悉委務先生所施設以正大小不煩而事集時天兵大集邢門軍楊經理設屯田勒令課畝收穀先生歎曰民其殆乎遂呈文半其數俄授醴泉郡守總相啓所營非李某莫可仍任己亥拜丹陽郡守郡嶺之衝天兵相續折守宰劫人先生禮恭辭正爲之泣曰父母救子侵暴可乎茅游擊國器詩以謝戢軍橫民乃帖然居五年化大行監司上治行第一癸卯拜弘文館修撰民攀轅不忍送詩曰丹山秀且奇丹水深而淸不能使公留但得公留名前此吾先祖文忠公爲群小擠遜荒答先生書曰丹崖翠壁盡入彈文蓋指丹之雲岩別業也先生草疏痛切文忠聞之曰必欲老脚過分水嶺一步耶先生亦慮益禍止及侍經筵因文義奏曰唐德宗礿政非不淸明猜察乖隔終見播遷之辱有一陸贄棄之若遺殿下待柳成龍不幸近之上不悅後五峯李公言於上曰李埈言人所難言可賞上默然左遷刑工員外歷臚院相禮兼實錄記事官甲辰充奏請使書狀如燕明年還因事罷丁未入北寺與愚翁講心經戊申上昇遐光海立由修撰拜正言臨海獄起奏文言罪出狂持平任兗曰臨海當先王大漸以兵自衛逆也言廢疾何也先生曰天朝方疑我廢長若遽以是告恐暗昧不暴使臣之對所以釋天朝疑兗色沮然竟劾之使臣卽五峯也先生引嫌遞旋拜校理劾奇相自獻中其忌不肯草朴承宗敎書曰文小人恥也二人時之能貴賤人者不相饒如此自廢主初政公已憂其罔終闕失輒諫正其在玉堂因災異陳箚曰一總權綱二飭邊備三抑近幸四去壅蔽又曰冤枉昭雪一日爲急旣曰非辜何待三年時湖南人士請雪鄭困齋介淸諸公冤光海命以三年後議處故及之又曰大臣相繼請告不安其任殿下於大臣責成只是瑣瑣至於黜陟賢否不相管攝蓋臨獄有司請辟梧相以全恩被臺嘖不視事先生以此論之光海不能用經筵久廢箚略曰嗣服之礿三接絶罕侍御讒巧雜處其間誘以非禮導以不義自然與道相離賢人日疏末稍之憂不可勝言宋英宗有疾之君不以憂毁廢學哲宗幼沖之主酷熟可憂而程子不以此廢講今今有臣如程子召對之曠未必至此土木大作箚略曰宮中雖窄陋此先王燕閑之地殿下宜居斯寢斯常若先王臨其上誠肯構之道亦踐位行禮之義況法宮告成不久當御又起不急之役恐非祗懼之意宗廟成百官當賀先生以爲昔宋神宗之喪未除而百官以冬至表賀程子請改賀爲慰今亦倣而行之可也設假主以迎弔使箚略曰人君以至誠不容一毫私況上國於本朝遣使致祭何等盛禮敢行虛僞於至嚴至敬之地乎設或致詰當據實以對曰宗號之加非不知僭猥承襲之久自有所不敢不然然其事大之誠天日照臨云爾則辭順理直不猶愈於設假而行僞乎不納湖儒高敬履等上章以成牛溪渾繼國朝四賢而絀晦齋先生以爲先正臣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李滉一國無不同辭謂之五賢怪鬼敢肆睢盱與奪惟意亟意崇奬五賢從祀文廟使邪說不得作進燕居箴其目有十曰體天法祖尊賢愛民愼習遠慮聽諫去邪存誠務學廢主賜豹皮以奬之命張之臥內以便省覽白沙李相公貽書曰箴說義理切今日得見溪上緖論策士任叔英削科疏略曰叔英之意出於憂國悶世未嘗有動於得失爲他日直節之士必矣殿下取人每人如是文雖違格有補君德旱災應旨疏略曰外人交通宮禁內旨私授除拜賞拔未必賢勞原免未必冤枉祈天永命在修德淫祀襘禳以啓奸用人立政在擇賢餽遺權貴以圖爵欲求消災之術莫如正其本不然雖惻怛之言不絶於口終何益於消厭之道賦役煩營作興箚略曰自經喪亂太廟法宮之建一時爲急而其外曰閣曰殿督築於時月之間殿下斯民父母父母愛子之心靡所不至安有反毒苦之以促其垂絶之命乎殿下宅恤再期已過講筵未開安知無近習以汰侈蠱上心以啓此興作也奉差鞠囚鉤奴狹盜殺主按法以聞曰此非一朝夕故必有俑者不去其本無益內需司吏䝱細民招誘吠主者爭投宜發置法不省數年奴橫殺人血流道人服先見仁弘疏詆晦退疏略曰李滉之論曹植非末學可議然今曹植遺書帶銘曰縛生龍藏漠沖夫虛靈之體動靜無常才有意把捉不惟此心先動兀然守在這裡其全體大用不局於空寂乎神明舍銘又引陰符修養家說非吾儒家平坦切實語只此數段足以見先儒所指之有在非以植之高蹈不仕爲近於莊老也仁弘乃引大舜伊呂孔顔歷世不仕者以証之其何擬植於不倫論滉之非實也李彦迪之被構亦有由彦迪嘗聞曹植葬母用蜃灰曰近異雖植之曠度不能帖然至作詩以明之彼見二儒道德蔚爲時宗而其師之學獨不見與於二儒以忌克忿懟毁之極口殊不知是非之判有如白黑雖欲一世之改視易聽得乎於是太學諸生削仁弘名榜示中外廢主命禁錮諸生諸生空館四出先生上疏諫廢主怒曰前後箚辭黨同伐異又曰玉堂瀆擾無忌又疏曰人臣之道從義與理乖雖加刑戮不服殿下以漢末亡國之擧罪周庠齊憤之士殊不念是是非非之理道之所在今以夫正道衛斯文爲非義理則必藉仁弘之說而鼓其瀾附汝樑之論而助其勢將順君父過擧禁錮一時多士然後方始合於義理耶廢主曰須亟就位以掩予過廢主雖假色辭其貳於中者見先生退曰可以退時三凶號三昌者據朝廷植黨擅威福辛亥先生決意南下臨發陳疏以崇敬畏抑逸欲遠讒佞爲戒一時賢士大夫莫不惜其去五峯言於廢主曰某孤直不容片舸南歸先生所居有小澗澗邊小邱幽窈誅鼎茅名潄玉端坐讀易讀而思忘寢食愚翁日造對講先生嘗曰愚伏我兄弟姓不同壬子出補鏡城判官適桐溪鄭文簡公觸上怒移授不赴癸丑授豐基郡天旱禱雨法當待香祝先生曰苗枯苟以誠何不可壇於庭冠帶正笏徹夜立朝大雨尤以化民成俗爲務文諭之曰自奉簡聽政公在太守太守敢不勉孝友父兄和睦鄕隣恪守條法在爾百姓爾百姓聽之或詣白雲院或郡郡學會諸生講說以爲常儒化丕振時凶党誣人逆者踵永昌大君纔八歲造認等謂逆本在是鍛鍊極其慘先生太息曰邦其喪乎草萬言欲明其冤左右苦諫不聽會兵判朴承宗誣罷之先生遂絶意當世買地洛澨縳數間屋究經以自適視富貴若浼賢公卿諸名勝相往還禮之十年癸亥仁祖大王改玉以校理召俄轉檢詳舍人移執義廢世子祬嘗江華安置祬鑿竅出李延平貴擬之辟先生議不合愚伏書曰議者以禍本爲慮生亦不能保其必不然又曰上亦不無爲後慮玉堂不當抵死立異先生答曰不苟同時議是兄初見何執之不固也忠臣從道不從君延平又書曰公必欲爲廢人立節耶先生答自古因事而爭君父者皆爲其事立節耶遂草啓進曰凡罪之顯者雖聖人亦不能全之如周公之於管蔡是也若情跡之稍涉冤枉者聖王恐其陷於死必求所以生江都穴墻之變情跡易見土竅之掘內而達外無外援可見書札之作假而眞無外應可知是不過圍中暑月鬱悒成狂欲睹天日之心思見父母之情偪塞於中而不能自遏妄作出圍之計深究其情是可哀也執法者但當治其逃出之罪拘囚如故而已廢朝十數年戕害骨肉終至滅絶天常顚覆厥德誠今日之所深戒未及上徑遞延平怒不已斥除鐵原府使象材申公欽判銓太驚招郞問曰李公之林下已十數年今又不能容斥之去耶月餘申公謂李某久於外非朝廷福啓請以舍人還未幾罷守夢鄭公曄白上曰李某有文章德義平日行事正直不宜混衆罷首相完平知必去書挽先生謂義不可留上萬言疏南歸疏曰關西形勢雖以隋唐終不能得志今按其故多設城柵武弁有膽略知兵者爲鎭將申明紀律使人知入城而禦賊生出城而避賊死守城制砲樓最要其制具在先生臣柳成龍撰進兵要亟賜採行頒布中外時淸人據遼瀋强大先生深爲憂首及之上嘉納甲子西帥适反上出狩公州先生與同志募兵千餘刻日赴行在間賊破入京疏言賊變由民怨由執義拜副應敎遷舍人陞典翰白上曰晉陽國之南門兵與民不同兵使攝州事徒剝民設判官使各任職上從之先時仁城君珙出逆招上命勿問延平疏斥兩司不論珙先生曰珙出賊口不出之恐其藉不如出之保全王子不從至是賊又援珙延平請置珙大內以爲防先生與愚伏不可延平盛氣先生徐曰以保全爲名自古臣子安有處嫌逼狹危疑與至尊同處而自安且欲置內者是疑疑雖重城何益延平益怒後數日先生侍講講已將出上曰李埈前先生前上曰有言否對曰珙出逆口非一殿下必欲全是三代事傳曰親親而後仁民親親壞於始又何望仁民昔太祖微行曰有天命任自爲之其不嚴防如此未聞有以此乘之帝王大度須如此爲心人皆懷於我而奸心自消上稱善先生又曰論議異同不可力制今之喜同惡異豈治世氣像上酬答如響聞者縮頸外議讙沸以自任爲之四字爲案曰筵臣敢發此耶臺劾發上曰經幄之臣欲其君無過不避諱可謂盡職勳臣一出言莫敢矯其非爾等勿學李貴攻擊異已之論及臺請再上曰任自爲之之說古人美談人君徒懷疑忌忘殺不辜終於喪國豈不痛哉張谿谷維曰此老心無他若深文之吾輩得罪公議鄭玄谷百昌詣臺罷造拜曰公勿罪我公以我名益高遷尙衣院正時金昇平瑬子殺人下吏治昇平憂甚先生曰不見郭晞乎自古勳戚不法致覆敗多今日事非不幸幸耳公常持此戒昇平謝因雷異以應敎箚陳六事曰體天道務聖學養士氣親宗族收人才節財用末又曰立國不以力勝仁理財不以利傷義御物不以術數而易信用人不以便給而勝德或者患治效未著欲振以威刑患國計未贍欲益以聚斂謂誠信不如假譎謂仁義不如刻核有一於此皆足爲伐國之斧斤蠹國之螟螣也數日雷又作又上箚極論上皆嘉納語廷臣曰玉堂箚文章好而議論正告君不當如是耶乙丑拜司諫兼弼善時命造公主第踰制先生力爭上不聽先生進曰木石被於平原園墻周於數里呼耶徹於高空瞻同於太息特殿下未知臣等所論祖宗之法也殿下所行慈殿之旨也殿下爲一國法度之主當以事理開導之乃爲大孝豈可以母后所敎而曲循不義以爲之孝乎不省以兼輔德嘗入對書筵東宮左右顧先生正色曰動容貌正顔色不宜如是東宮動容累遷司成司僕正輔德執義兼弼善尋移輔德乞暇還未幾以執義召時正字柳公碩待敎睦公性善疏曰珙之竄何罪上命宥之延平大怒曰敢有右柳睦者以逆論於是兩司請寢釋珙之命及先生至自鄕知友迎曰公若貳於時議禍立至詣臺辭曰柳碩之戇實出憂國臣復守初見與議者乖仍自劾時議色怒聲喧逐坐免完平歎曰吾亦不知爲此老謀今乃殊快人也丙寅仁獻王后夢延平謂上當行三年喪持之力先生以應敎議以爲主上以支孫承大統不可以小宗合大宗極論三年禮禮官乃不杖期請上雖面從儀節皆用王后禮先生與同僚又爭之曰宗統之重天地之經隆殺之分大義截然苟有過其常分是爲非禮之禮得罪宗廟取譏後世銘旌用金篆成殯用欑宮五日而殯用日而服此王后禮也非其喪而用其禮於禮爲乖於分爲僭亟令綾原君俌爲喪主而喪制之踰制者一切停罷成服隔日又爭之曰所爭過今日不復望矣殿下與循序內承之君不同是與私家出繼何異入而直承宣廟是謂大統殿下旣主宗祧又主私喪豈不是二尊二斬哉古今天下斷無此理時三司交章愚翁在臺爭益力上恚甚悉遞府院先生以爲政院主獻替不能繳還內批逐成君父過擧害義傷體甚大遂駁罷該承宣人莫不偉之延平剔堂箚得罪取譏句大罵於朝曰爲此說者皆可斬先生以司諫自劾曰李貴旣倡邪說以誤殿下不思引咎反欲摘抉人告君痛切語以激怒上哉朝廷事體至嚴雖孔聖便便言惟謹臺閣雖輕豈容使勳臣亂罵副學崔公鳴吉上箚言主上承大統祭大院君以士非禮又言主上功等光武繼同孝宣不當以大院君爲庶爲支又言雖庶聖則以嫡無所壓先生又爭之曰鳴吉雖以無所壓而言殿下乃統於大宗大院君是別子小宗所謂小之壓於祖大宗者其義自若也諸勳貴折受柴牧占取奴婢民不堪詣臺啓曰柴牧之場穿於小民魚鹽之利市於私門郡邑之有奴婢如身之有乎足人君所以維持國家者以八柄在已一失之攘取之禍孰禁之臣恐勳貴恣睢之習終至於魯卿之無厭矣時詔使至有司以策應費廣請貸白金海營先生曰上年胡璫之行事者不以正惟致嗔爲懼所費白金殆至十萬目前雖或彌縫後弊其可勝言申命該曹務簡約海營母貸銀上怒甚曰構虛說使遠近之人有憾於朝廷仍命覈璫事先生又啓曰愚民之憾朝廷在於厚斂之日固無待於臣等之言殿下若欲民之無憾其本在於追該曹厚斂妄費今不思止憾之本而以臣等惹出所無之憾爲懼何示人不廣初遼人毛文龍率避亂人入我椵島以復遼名天朝嘉之就封爵我亦歲輸糧幣旣久勢甚張虛聲克捷實叵測天朝始疑之龍聞使至欲我盛稱功以掩迹朝廷不能違撰頌詞如其旨先生爭之曰詔使之來欲悉邊情及頌罔功以欺天朝耶世子接見詔使先生以輔德導前世子周旋中矩詔使賀上曰此春坊輔德導力也撤饌賜先生追上萬言疏言輔世子修學政作人才得將帥緩刑法反復懇款上嘉納丁卯正月淸兵入連陷州郡上命世子出巡湖收召四方先生趣装發道遇吾先祖修巖曰公行非計昔种師道入城朱子惜之蓋入城不能爲力故耳爲公計莫若倡東南之義激發之使人心曉然知討賊之爲大先生然之謀勤王衆推先生主盟先生慨然以忠義誓衆間者爭赴之尋號召使檄調糧先生激以義富室出粟不旬得數千斛時世子駐全州先生馳謁撫軍司請授先生調度使受命見撫事諸公曰度此賊畏天朝躡其後勢必自退但此後憂方大願各以自强爲本勿以寇退爲幸行且檄列邑人皆感奮旬月峙粟萬餘斛賊平歸召募糧於官四月還朝特招資授僉樞知製敎先生辭至三不許上疏曰敵所以退者非有信義畢竟和之一字欺我無謀覘我無備或假小故復肆大擧我所以應將出何策願殿下凜然常若賊至之日召大臣問曰敵退果無所事耶敵必不來耶廟堂之策只有和事而已耶至於山川險夷士卒勇怯何將能扼某險何兵宜防某處莫不一一經畫無以少安爲幸拜工曹參議乞暇還戊辰拜同副承旨轉右副左副朝廷遣使虜饋鉅先生曰聖明所以屈志就和專爲保民今若歲餽此數不戰自弊患一也虜性貪婪需索無窮今歲添略干明年添略干谿壑之慾何以塞之患二也彼見我餽遺之過其分必發難從之請無以應則執此動兵患三也不省我民被擄者逃還淸人喝令刷還朝廷欲依請公不可不惟被驅而去者含痛其未還者亦將絶望益堅事賊之心其讐我大而禍我深矣況奪吾懷中赤子忍投之虎口乎上嘉納又疏請選將積粟爲自强之本略曰今欲求良將以需急用一國之廣不應無人請於內三廳及軍官出身極擇驍健者束爲一哨試其藝則必有尤者得其人以爲百人之長合十哨長十人而試其藝則又必有尤者得其人以爲千人之長合百哨長百人而試其藝則又必有尤者得其人以爲萬人之長而要以有智慮知合變者拔出之必有一人可以爲大將者誠能得此等十數人則其視膏梁子弟之庸懦與夫富貴已極志氣已襄者其得失豈不萬哉上下廟堂議卒不行時告變相續治獄世嚴人無敢爲上言先生疏曰殿下自逆獄之起慮餘孼爲患未成之童已放之人一一覈出投畀有北九族含悽若非應坐決不可刱謬至於誣告漢法所重苟無反坐善良之禍無窮矣上嘉之時議益不悅因旱應旨疏曰以婦諱夫之惡情理可哀愛英之死杖下宜在可恕李繼先等逆狀雖著未服而定罪可乎逆胔追刑適當災省之日遞行斬尸之令此臣所未解也朴承宗在反正初止其子聚兵寫所懷以聞且其女之爲廢人死者可嘉況旣與爾瞻諸孼相背而有扶護母后功雖有貪濫之罪其不足蓋之耶廢庶人雖有罪死自聖朝而言立後以祀豈不有合於繼絶之大義仁居罪當斬萬端然一匹夫縛之洪靌之功一資足矣是何裂茅爲笑囮也衆大駭謂庶人士尤非所宜言盛彈擊上終不聽己巳拜工曹參議庚午除三陟府使將行桐翁就別執手語曰子何不少遲階我我非子而誰偕願子之無疾其驅居一年儒化闡蔘徵簡漁戶謐民欹頌投狀歸處畝畝惟朝廷得失爲欣戚壬申拜禮曹參議陳疏辭不赴六月仁穆王后薨上聞先生病令調理就道惶恐承命西歷訪愚翁翁病已深泣曰吾不復近淸光矣國事尙爲公勉之時上體遞和術者言咀呪祟妖醫入臥內屛左右以針火投玉體作瞋喝狀莫有言先生進曰朝廷之禮嚴非匹夫妄人作弄之地大臣不敢言臺閣不能爭者徒以君父已疾之爲大無害於曲循之也然旣知其妖誕則何可徒爲婦寺之仁哉又請行禮禳曰朱子曰須是如雷在天方能克去非禮臣於妖祟之說有所復焉鬼神之德聰明正直使其有知殃禍必先於行凶者況積否之餘天生聖人爲禮樂人倫之宗主寧復有陰邪之妖敢干於太陽之淸明哉然心之爲物有所動則外邪或乘之大學曰心有所恐懼則不得其正有所憂患則不得其正臣竊不勝其過慮也有識歎曰朝廷有眞儒癸酉乞暇還甲戌上旣追崇大院君廟號元宗議祔太廟先生上疏極言曰禮曰父爲士子爲諸侯祭以諸侯其尸服以士又曰子無爵父之道又曰諸侯之子爲公子不得稱先君又曰畢孫不可祔祖又曰公子公孫之爲士爲大夫者不得祔於先君之廟又曰公子之子孫有封爲國君者後世祖是人不得祖公子禮不可追崇如此今說者誤殿下以祔廟是何禮與昇平書極言祔廟非禮末曰張璁桂萼以獻皇帝未爲天子不當於太廟立世室夫以璁萼之迎合猶爭其不可昇平得書上箚爭之遂被譴時掌令復泉姜公言事切直臺諫至請按律公以大諫請言事補外及屛塞者賜還仍言姜鶴年言雖不中何損聖德乙亥四月拜副提學前月廢朝餘孼李基安誣引被逮甚多上特命李埈鄭蘊崔晛勿問及新除趣行忠州疾作上陳戒疏徑還六月十七日曳杖出步花階命整砌石日晩覺氣不平命侍者灑掃堂室就淨處瞑目端坐而已正席臥申時終于正寢壽七十六訃出儒林相與哭弔明年正月葬于家近大峴後移葬家後道莊山卯向之原雨夫人祔焉先生嘗參宣武原從勳推恩贈吏曹參判仁廟嘗敎廷臣曰李埈以經幄儒臣獻替之誠白首深篤予嘗嘉悅及其歿臨筵悼惜曰嶺中予所倚信者李埈今又亡予不復聞嘉言格論矣先生天稟粹異早歲求道與愚伏依歸河上得聞陶山之學矣其言曰窮理所以致知反躬所以踐實然致知不以敬昏惑紛亂而爲罔踐實不以敬怠惰放肆而爲殆二者必敬以夾持可進乎學問思辨行五者廢一不可然重在篤行上聖人生知安行固無用力於篤行中人以下必從篤行底力做去四者自然有得是以居閒處獨儼然若見大賓對案端坐盛暑終日不跛不倚讀書本之論孟庸學旁及洛建諸書性理大全無不究極精微浸灌義理有疑思思又求其無疑雖夜燭而書之以之爲平生着力而以之而平生受用云自在幼少以父母心爲心愛敬俱至患菽水不給與澗兄躬漁樵以供甘旨及遭大酷幾不全曁年已耆誦哀哀父母之詩而輒泫然曰吾之所以祿仕而誰爲奉祭祀誠敬罔缺小或不如儀終日不樂以至公家祀享澡潔如私祀當時人家盡行俗節於墓所遂成風俗先生嘗謂重於墓而輕於廟非禮做文公禮只祭寒食及十月上旬於墓其餘俗節則幷設茶果於廟書問愚翁愚翁然之而爲之遵行每日晨興盥洗整衣冠望拜先壟於庭庭中有瞻松石澗兄長二歲嘗曰干戈饑疫之日無我身以事父者事之莅閨門斬斬有法度恤宗族尤急於孤寡未嘗營立己私以故歿也袒免外服期者以十計視諸侄無間已出敎諸子敦尙賁行與人交不以涼熟存歿而小變其於困厄之際尤致心焉接人甚厚如其家者人無不滿望而歸其仁厚之德藹然如此自夫釋褐以來以其明體適用之學已有格王經邦之志正色立朝忘身奉公處戎行則謨猷壯於國典州郡則惠澤孚於民立臺閣則知無不言言無不盡而丁寧告戎務回天聽至其事關大義理大議論則奮不顧身勇往直前觸上怒犯時諱招不來麾不去而其守也至介千仞壁立其存也至鶴萬牛難回嶷然不撓於震撼擊撞之中而不小恤焉此夫子所禰三軍可奪帥匹夫不可奪志孟子所言富貴不能淫威武不能屈之大丈夫者非耶之忠之直眞所謂其養有根其出有源者耳惟其世道多㸍直道難容實賴仁廟之聖而縱得免於世禍或遜於荒或斥於外而不得一日安於朝廷之上位止於下大夫而其道不克大行於世豈非天哉嘗曰文章只取辭達理明而已辭不達理不明奚文爲是以其著述數十餘卷無非至理所寓就其中謹於禮敎嚴於家訓則祭禮祔廟之誤用牲之僣喪禮殮殯之法風水陰陽之非等成書與夫屛詩八帖一皆本之以孝友敦睦之道而眞道德仁義之言也進御九重仰效芹曝則如中興龜鑑燕居十箴毖後箴等篇出於高明正大之學而可備百世之丹扆也明理經遠至誠前知則壬辰之亂丁卯之槍丙子之訌前後萬言籌畫雖不一二見行其事之驗有如燭照而龜卜也箚牘凜然辭嚴義正則光海立後廢世子全恩仁城臨海之事追崇祔廟之禮勳臣宮家之弊其忠鯁之氣懇惻之悃都將炳炳一腔血沸出來百世之下使人讀之不覺髮豎而淚隕矣鴒原急難其事曠古則倩工圖狀自爲欹詩而名賢鉅匠若不爲詩若文贊歎之遂成一大帖行于世心儔義故各在襄暮則還往詩札手自褙付而以寓一片靈犀庸替千里面目者莊于笥凡當金石繡棗之大筆一皆倚先生手而圖其所以闡先也梧里嘗字先生曰爲吾碑者某也邀之於座而親見其序次焉先生先娶善山文氏士人秀民女生二男一女長大圭蔭仕官縣監次元圭文科正郞壻李馦後娶綾城具氏別提忠胤女吏曹參判柏潭文懿公鳳齡之孫著閫宜生二男二女男文圭有志行早歿光圭國子生員二壻趙興遠柳千之逸掌令卽厚祚六代祖也側室男曰山圭女李悌傳大圭男在寬有文行壻李東野李濂元圭一男在發病廢嗣子在雄李馦一男裕後文圭男在淸在明壻金裕耉光圭男在雅蔭仕敎官次在夏壻黃霆李元祚李海達具爾性山圭男在始曾玄以下不盡錄其後科宦玄孫增曄進士五世孫華國進士官戶曹正郞嗚呼先生有春噓物茁之仁兼朱絃金矢之直緖言出而學聞于師造道極而行通于神君民世道便懷經濟者張橫渠范希文之志也扶樹正論以奬王室者陸宣公眞西山之忠也有德有言有體有用者卽吾先祖文忠公之正學大業所以承夫朱退之傳而先生實善繼者也是以學士大夫高山景行之思百世而不替厚祚先生之外雲而鄕里之後出也於先生之道德之正學問之純何敢有所識知而古今朝野賢達之公論有在矣竊自以爲亞鄕之贈不過原從之例推節惠之典有以資級而爲拘則是不但爲儒林之齎鬱有所來者實亦大爲朝家之闕章無甚於此上之四年丁卯夏厚祚猥參賓對言
先生道學其在聖朝表章風勸之方宜有爵諡之命上可之特贈先生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於是觀聽爲之聳動咸謂希世之盛典不亦懿哉先生八代祀孫起洛九代孫南敎敍敎以先生文集來請文於厚祚不敢以文拙辭謹撰次如右敬告于太常氏議其所以易名者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豐山柳厚祚謹狀
文簡[주:道德博聞曰文一德不懈曰簡]
文敬[주:道德博聞曰文夙夜儆戒曰敬]
孝簡[주:慈惠愛親曰孝一德不懈曰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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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