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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리뷰
『Art of Freedom』 보이테크 쿠르티카 지음 . 김영도 옮김. 2020년 하루재 클럽
글. 코오롱 등산학교 명예교장. 이용대
이 책은 히말라야 빅월 클라이밍의 선두주자 보이테크 쿠르티카(Wojtech Kurtyka. 이하 쿠르티카)의 등반과 삶을 조명한 전기다. 쿠르티카는 1947년 폴란드 남부 스크진카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폴란드 산악인들의 모산 타트라산맥 북단에 위치한 곳이다. 2천 미터 내외의 산들로 이어진 이 산맥자락에서 훗날 세계 산악계를 주름잡는 여러 명의 산악인이 배출된다. 반다 루트키에비치. 예지 쿠크치카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부친은 폴란드에서 필명이 널리 알려진 작가였다. 그는 고등학교시절 타트라로 갔던 하이킹에서 산을 처음 만나 마음을 빼앗긴다.
1968년 21세 때 첫 바위를 경험한 그는 암벽등반의 매력에 빠져든다. 그가 수직의 등반세계에 끌린 것은 타고난 운명이었다. 전자공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폴란드 최고의 암벽등반가로 성장해 있었다. “바위의 동물”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암벽등반에 심취해있었던 그에게 등산은 자유를 향한 탈출구였다.
그의 첫 해외 고산등반은 1972년에 아프카니스탄의 힌두쿠시 아케르 키오크(Acher Chioch. 7017m)북벽에서 이루어진 알파인 스타일 초등정이다. 이 등반에서 그는 고산 알파인스타일에 대한 필요성을 체험한다. 1973년에는 프랑스알프스 프티 드류 북벽에 예지 쿠쿠츠카와 함께 VI급. A1의 새로운 길을 열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그는 높이를 추구하는 등반가가 아니다. 그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히말라야의 거벽들이며 8천m에는 못 미쳐도 등반가치가 높은 산을 등반대상으로 삼았다. 그가 찾는 길은 아마 그런 이름 없는 산들의 어느 거벽에 있었으며, 오직 알파인 스타일만이 등반의 가치를 높여준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등반방식으로는 더 이상 등반의 어려움을 논할 수 없다고 말하며, 등반에서 최대 모험이란 극한의 위험에 직면해서 사느냐 죽느냐하는 갈림길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쿠르티카는 1990년 대한산악연맹의 초청으로 방한한 적이 있어 한국산악인들에게 낮 설지 않은 이름이지만 그의 고통과 사색의 세계를 접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이제 그의 전기가 국내에서 처음 출간되어 그의 독창적인 등산 관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 것은 퍽이나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그는 세계의 고산에서 소수정예로 어려운 루트를 등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실증했으며 1970년대에 히말라야 등반의 궤적을 바꾼 인물이다. 힌두쿠시, 히말라야, 카라코람에서 거벽등반기록을 열한 번이나 세웠으며, 그중 여섯 번이 8000m급 고봉이었다. 그는 스타일이야말로 등반의 모든 것이며 정상이란 그저 그에 따르는 결과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 책은 미래지향적 스타일로 언제나 자신의 이상에 충실한 그의 등반과 삶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1980년 다울라기리(8167m)동벽을 신 루트로 등정했고. 1982년 브로드피크(8051m)를 알파인스타일로 등정한다. 1983년 가셔브룸2봉(8034m)남 동릉에 신 루트를 개척했고. 가셔브룸1봉(8080m) 남 서벽에 2개의 신 루트를 알파인 스타일로 개척한다. 1984년 브로드피크 북봉(7490m)-중앙봉(8011m)-주봉(8051m)을 알파인 스타일로 트래버스 했으며, 1985년 가셔브룸 IV봉(7925m)서벽을 10일 동안 알파인 스타일로 신 루트를 개척했으며 등반 후 정상에는 가지 않았으며 미답의 북릉으로 하산한다. 1988년 트랑고 타워(6239m)동벽에 VI, A3급의 1100m 신 루트 개척한다. 1990년 초오유(8188m) 남 서벽에 신 루트 개척하면서 등정했고, 같은 해에 시샤팡마(8008m) 중앙 봉 남벽에 독특한 스타일로 신 루트를 개척하면서 등정한다. 당시 이들은 초콜릿 바 4개, 음료수 통 3개, 7밀리미터 로프 30미터, 피톤 4개만을 챙겼다. 심지어 하네스 조차 베이스캠프에 남겨두고 야간에 등반을 하는 “한밤중에 벌거벗기”라는 초경량의 알파인 스타일로 정상에 올랐다. 이처럼 그가 이룩한 고산거벽의 굵직한 등반기록들은 경탄 그 자체다.
쿠르티카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산이 가셔브룸 IV봉(7925m)의 서벽이다.
8000m에서 75m가 모자라는 서벽은 고도차 2500m의 세상에서 가장 험난하고 아름다운 벽으로 알려진 곳이다. “빛나는 벽”으로 불리는 서벽은 저녁 햇살을 받으면 은은한 빛을 발하는 대리석지대가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이벽을 처음 오른 사람은 쿠르티카다. 서벽은 아름답지만 위험스러운 등반루트로 세계의 첨예한 알피니스트들에게 외경의 대상이었다. 영국. 미국. 일본 등 수많은 산악인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아 왔으나 미답의 벽으로 남아 있었다.
이 책의 10장 “빛나는 벽”을 보면 가셔브룸 IV봉 서벽에서의 등반과정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1985년 쿠르티카와 로버트 샤우어(Robert Schauer)가 알파인 스타일로 오른 가셔브룸 IV봉 서벽초등은 현대 등반 사에서 가장 용감하고 훌륭한 등반으로 평가 받고 있다. 당시 이들의 등반은 두 사람이 무명이었다는 이유로 매스컴의 주목밖에 있었으며 정상을 밞지 않았다고 해서 논란의 여지를 남기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그들의 목표는 서벽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었지 정상이 목표는 아니었다. 서벽이 끝나는 지점부터 정상까지는 등반성이 없는 평탄한 설릉이다. 그들은 정상을 90m 남겨 놓고 정상을 밟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초 등반 목표인 벽을 끝냈기 때문이다. 거기서 정상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쿠르티카는 “우리의 목표는 서벽에 있었지 정상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그들의 도전은 치열한 사투였다. 벽에서 열흘을 보냈으며, 6,900m에서의 비박이 두 번, 7,000m 이상에서의 비박이 일곱 번이었는데, 그중 두 번은 잠도 자지 못했고, 세 번은 먹지도 못했으며, 두 번은 물도 마시지 못했으며, 24시간 동안 강행군 끝에 베이스캠프로 귀환했다. 그들은 죽음의 가장자리에서 간신히 되돌아왔다.
전 세계 산악계는 그들의 도전을 ‘세기의 등반’이라고 칭송했다. 쿠르티카는 더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창조의 위대한 기쁨, 완벽한 함정” 그는 자신이 이룩한 등반성과에 대한 지나친 칭송을 경계했다.
그는 가셔브룸 IV봉 등반이 가져온 명성이라는 함정을 경계했다. 무엇보다도 그런 명성을 피하고 싶어 했으며. 훗날 그는 자신이 이룩한 성과를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했다. “알다시피 등반은 우리에게 심리적으로 도움도 주고 똑같이 상처도 준다. 성취에 넋을 빼앗긴 나머지 오만으로 쉽게 바뀔 수 있는 시건방진 자만에 빠질 수도 있다.”
쿠르티카의 서벽 성공에 대하여 2008년 『알피니스트』 온라인 편에 등반 역사가 린제이 그리핀은 “둘이서 밀어 붙인 그들의 대담한 알파인 스타일 등반은 히말라야와 카라코람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취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그 루트는 오늘날 까지도 재등이 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또한 세계 각국의 중량급 산악인들이 가셔브룸 4봉 등반에 대해 한마디씩 했다. 메스너는 탁월했다고 했으며, 더그 스콧은 그 고도에서 그때까지 이루어진 기술적으로 가장 어려운 바위와 얼음에서의 완전무결한 알파인 스타일 등반이었다고 격찬했다. 그 이듬해 북동릉으로 정상에 선 그렉 차일드는 “두 사람의 등반 선은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도 알피니즘에 대해 내가 가장 많은 영감을 받는 루트”라고 말했다.
가셔브룸 IV봉 서벽등반은 프랑스의 유명 등산역사 저술가 로제 프리종 로슈가 평가한 《세계 등반사 100대사건》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가셔브룸 IV봉 서벽은 한국 팀과도 인연이 있다.
1997년 한국 팀의 유학재. 방정호. 김동관이 서벽 중앙 립을 타고 극지법으로 공략해 한국루트 개척에 성공했다. 그 성과에 대해 세계 산악계가 비상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한국대의 성과에 대해 미국의 산악전문지 《클라이밍》에서는 “연중 눈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열대의 작은 섬나라 자메이카의 봅슬레이 팀이 동계 올림픽에서 우승을 한 것과 같다”며 뜻밖의 성과였다는 투의 글을 싣기도 했다.
쿠르티카는 폴랜드를 대표하는 예지 쿠쿠츠카(이하 유레크.Jurek)와 쌍벽을 이루며 히말라야에서 강력한 팀웍을 이루었으나, 그들의 우정은 1984년 유레크가 메스너를 상대로 8000m 14봉 완등 레이스에 뛰어들자 금이 갔다. 유레크(Jurek)는 쿠쿠츠카의 애칭으로 ‘주먹’을 뜻한다.
그는 과열경쟁으로 치닫는 14봉 경쟁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미터를 피트로 환산해 보면, 8000미터는 26240피트다. 26000피트 급 봉우리는 27개나 된다. 26000피트급 레이스는 왜 안 벌이는지 묻고 싶다. 이처럼 숫자 놀이나 기록들을 수집하는 일은 알피니즘이 아니다.”라며 경쟁 열기를 띠어가는 완등 경주에 대해 일침을 가하면서 완등 경쟁은 감정의 소비라고 평했다.
쿠르티카와 가까웠던 동료들은 안나푸르나에서 낙석에 맞아 사망한 알렉스 매킨타이어. 로체남벽에서 로프절단으로 사망한 유레크. 알프스에서 사망한 에라르 로레탕 등 그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사람들이다. 이들 모두는 쿠르티카만을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극적인 모험의 세계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중함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세기적인 등반가 두 사람의 우정에 금이 간 것은 등산관과 성격의 차이에 기인한다.
쿠르티카는 신중했고, 유레크는 지나칠 정도로 과감했다. 생사를 다투는 고산에서 쿠르티카는 죽지 않고 돌아왔지만 유레크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쿠르티카는 조심성이 많고 신중했으며 세심하게 동료의 안전을 챙겼다. 한계선상까지 몰아 부치는 동료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제지했다.
그의 파트너였던 알렉스 매킨타이어. 유레크. 에라르 로레탕 등이 산에서 사망했지만 그들이 쿠르티카의 파트너로 함께 등반하는 동안에는 단한 번의 인명사고를 낸 적이 없다.
유레크는 많은 파트너를 잃었다.그 가 파트너를 잃지 않은 것은 보이테크와 붙어 다닌 4년간이 유일했다. 메스너는 “최고의 산악인이란 높은 수준의 등반을 하고나서 살아남는 자 이다”라고 말했다.
쿠르티카와 유레크는 고봉에서 함께 등반을 해온 파트너였지만 서로의 가치관과 산에 대한 접근방법이 너무나 달랐다. 유레크는 정상에만 집착했고 쿠르티카의 관심은 등로(등반선)와 스타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즉 정상과 등반선의 문제가 두 사람사이를 소원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그런 차이는 잠재적인 갈등을 키우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 개인적으로 유레크는 행운아였지만 그와 등반을 함께한 동료들은 위태로운 기회가 많았으며 5명을 잃었다. 유레크는 힘만 믿고 목적한 바를 향해 한계선상까지 돌진하는 코뿔소 같은 타입이다. 그에게 후퇴란 없었다. 물러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보이테크는 “탯줄을 끓어 버리고 등반 한다”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그가 말하는 “탯줄”은 무슨 의미일까? 고정로프, 이미 설치된 캠프, 산을 거미줄같이 얽어매는 것들. “그런 것들은 등반의 감각을 죽입니다.” 그러면 안전이 강화될지 모르지만 자유에 대한 감각이나 클라이머가 산과 느끼는 유대감을 해친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암벽의 자유등반루트에서 슬링을 잡고 등반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의 등산 관을 요약한 말이다.
정상보다 스타일을, 명성보다 자유를 추구했던 폴란드 등반가 쿠르티카! 이 책은 ‘탯줄을 끊어버리고 맛보는 자유’를 향해 쿠르티카와 함께 떠나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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