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일 神父의 - 외줄위를 걷는 人生
41. 왕의 얼굴 신미장
동 트기 전 여섯시. 그 시간대에 버스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체로 낯이 익다.
어두컴컴한 길에 서 있다가 허름한 모자를 쓰고 버스에 올라타면 대체로 연장가방을 든 노가다다.
광나는 양복을 걸쳐 입어도 작업복으로 보인다.
현장에 대해 서로 묻기도 하지만 정확한 정보는 주고받지 않는다.
약속된 장소에 모여 실려 간 곳은 허름한 공장사택이다.
미장이 신씨가 기다렸다는 듯 고양이 눈을 뜨고 아침부터 고함을 지르며 군기를 잡는다.
신씨는 처음 보았을 때 초췌한 행색에다 바람에 날리는 촛불처럼 시커멓게 꺼져가는 얼굴이었는데, 일할 때는 얼굴에 빛이 나며 딴 사람이 되어버린다.
은 담벼락에 넝쿨처럼 착 달라붙어 일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거의 춤추는 동작이 된다.
신미장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손놀림이 빨라지면서 위엄 있는 왕의 얼굴로 변한다.
신미장이 가장 멋있어 보이는 순간이다.
이럴 때 나는 미장이가 되고 싶은 열망에 빠진다.
미장이기술을 배울 수만 있으면 배우고 싶었다.
신미장의 내리찍는 것 같은 살벌한 어투에 짓눌리며 하루 종일 사모래를 나르다 보니 해질 무렵에는 쓰러지기 반보 직전이다.
나도 모르게 이빨 사이로 신음소리를 냈는지, 병곤이가 신미장을 향해 폭발하듯 화를 낸다.
“에헤이 참! 인간 덜 된 게 꼭 저런다니까. 노가다 밥 처 묵고 배운 게 고작 초짜 괴롭히는 일이가.
형요! 좀 나와 보소! 내 이 인간 이번에 반드시 사람 좀 만들어야지 안 되겠다. 도저히 못 참겠네. 눈꼴 시러바서.”
“병곤아! 그라지 마라. 신미장은 자기 맡은 일 열심히 하느라고 그러는 건데, 와 화를 내노?” “
형은 모르요. 저 인간 이번에 골탕 좀 미기야 정신 차리요.”
병곤이가 시멘트와 모래를 잔뜩 쏟아 부어서 직접 통으로 나르기 시작하니 금방 비명소리가 난다.
“병곤아! 사람 잡을라카나! 일 끝났는데 와 자꾸 사모래 비벼 오노?”
“아무 말 말고 다 바르고 가소. 오늘 특근이요. 내일 새벽까지 하입시다.”
“아이고! 알았다카이! 앞으로 잘 하께. 성질 내지 마라.”
신미장은 마흔이 넘어 장가를 가서 아들까지 낳고는 세상이 온통 무지개 서린 꽃밭이 되어버렸다.
아직 돌아눕지도 못 하는 아들 자랑에 침이 마를 지경이다.
신미장이 숨이 가쁘게 어제 일어난 밥상머리 시시콜콜한 젓가락전쟁을 중계방송하는 사이 잠시 호흡을 고르는 그 짧은 순간을 틈타 김미장이 묵직하게 한 마디 툭 던진다.
“보소. 우리 딸 이번 모의고사에 또 전교 일등 했다 안하요.
담임선생이 서울법대에 입학원서 넣어 보라고 통 사정하는데, 그놈의 돈이 원수라 눈물을 머금고 부산에서 사범대나 다니라 했드만, 딸이 밥도 안 묵고 매일 울어쌌는데 우째야 될지 모르겠소.
어린 것을 아무 연고도 없는 객지에 덜렁 떨차 놓을 수도 없고.
김군 생각은 어떻노? 서울에서 학교 다녔다며? 내 딸 서울 보내도 되겠나?”
“뭔 방법이 생기겠죠. 원서야 못 넣겠습니까?”
“대통령이 아르바이트를 못 하게 하니 그기 문제 인기라. 그래서 나도 매일 술만 마시는 기라. 속도 상하고”
“김씨! 아 이번에는 딸 서울법대 가는 게 핑계요. 술 좀 웬만큼 하소. 딸 사법고시 패스하는 거는 보고 죽어야 할 것 아니요.
술 한 잔 들어가면 몸도 못 가누면서. 그리고 술 취했다고 아무데서나 바지 내리고 오줌 싸지 마소. 우리까지 다 이상한 사람 되요.”
“딸래미 학교 보낼라면 술도 끊어야 하는데 일하다 보면 그기 마음대로 되나.”
밥 나르던 젊은 식당아줌마가 비명을 지르더니 쟁반을 집어던지고 한 쪽 구석에서 울고 만다.
신미장이 뭐라고 수작을 걸은 모양이다.
“사람을 뭐로 보고 이래 막 대하노? 밥장사 하면 이런 대접 밖에 못 받나?”
“아줌마! 저 물건도 인간의 탈을 쓰고 사는 지라, 지가 잘못한 줄 알고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네요.
마음 푸이소. 영 몹쓸 물건은 아닌데 가끔 감당 못할 실수를 하네요.”
“세상 물정 모르는 남편이 사업 망해 묵고, 아기 우유값이라도 만들라고 길바닥에 나앉으니, 꼴뚜기처럼 생긴 게 남의 속을 홀딱 뒤집어 놓는다 아이요. 아이고 분해라. 내 못 산다.”
“아줌마 얼른 그릇 챙기고 돈 받으소. 아줌마도 땡볕에 한두 푼 벌어 보겠다고 이래 열심히 뛰어다니는데, 하늘이 도와도 도울 끼요. 식당음식도 맛있고 하니 금방 일어설 끼요. 눈물 닦으소.”
“총각도 한번 생각해 보소. 가난한 것들끼리 서로 도우며 살아도 힘든 세상에, 쓸 데 없이 눈에 소금물 빼게 하면 되겠소? 저 쭉정이 같은 인간이!”
김미장도 대낮부터 취했는지 횡설수설 한다.
“김군! 내 군대 하사관으로 근무할 때 얘긴데 우리 부대장이 조례 때마다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라고 훈시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권력 있고 돈 있고 배운 놈들을 위해 내 이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드는 기라.
나는 제대해 봐야 노가다 밖에 해 묵을 끼 없고. 북한놈들 쳐들어온다 해도 나는 손해 볼 게 없더라고.
오히려 대환영을 해야 되는 기라. 북한놈들 오면 이제는 내 세상 아이가? 나는 계급이 제일 밑바닥이니까.
세상이 반대로 뒤집히면 나는 출세하는 일만 남은 기라. 김군! 그래 되면 김군은 내 도움 좀 받아야 될 끼야.”
“김씨! 마 누워 자소. 일하지 말고. 또 술 취했네. 술만 취하면 꼭 저런다니까. 어디서 자기도 모르는 이상한 소리나 듣고 와서.
아침부터 뒤숭숭하더니만. 김군! 술 한 잔 더 먹여서 아예 기절시켜야지 안 되겠다. 이러다 사고 나면 우리 모두 큰 낭패 본다.”
오늘 현장 분위기가 이상하다.
집주인이 통 얼굴을 보이지 않아 이유를 물어보니 부인과 오늘 교회 가는 문제로 인부들 앞에서 큰 싸움을 했다는 것이다.
집주인이 공사감독을 이유로 교회 좀 빠져야겠다고 안주인에게 한 마디 했다가 작업 자체를 중지 시켰다는 것이다.
“어이! 김군! 이리 와 봐라! 김군이 일 끝나면 아아들 모아서 기도하고 예배 본다며?
너그들 예수 믿을라면 지금 나가라. 진작에 인연 끊자. 나중에 갈등 생겨 복잡해지기 전에.
내는 예수쟁이라면 아주 딱 질색이다. 냄새도 맡기 싫다니까.”
“오늘 무슨 일 있었습니까?”
“오늘 일만 문제가 아닌 기라. 예수쟁이하고는 상종을 못 한다 카이.”
“아침에 일 할라고 새벽부터 와서 연장 챙기고 있는데, 주인하고 주인여자하고 금방이라도 일낼 것처럼 부부싸움을 하는 기라.” “아니 이 많은 사람 불러 놓고, 우리는 우째란 말이고. 그라몬 오늘 허탕이가?”
“예수쟁이들은 일요일은 아무 것도 못 하게 한다 안하나. 오늘 일은 접어야 할 끼요. 여자가 억세 갖고 남자가 못 이긴다카이. 마 포기하고 갑시다.”
대낮부터 오뎅국물에 소주를 마시며 모두들 한숨을 땅이 꺼지라고 내쉰다.
“주인여자 말이 웃기네.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하실테니까 아무 염려 말고 그냥 가라 안 하나. 그라몬 오늘 우리가 일 안하면 하느님이 대신 노가다 해 주나?”
“빗방울은 뚝뚝 떨어지죠, 셋방 들어올 식구들은 빨리 방을 고쳐 달라고 눈물바람이고. 마당에는 방에 들어갈 이삿짐 잔뜩 널려 있지. 이불이고 옷이고 누가 책임 지노?”
“교회는 자기들이나 다니지 우리 일하는 건 왜 막는지 모르겠네.”
“아무 소리 말고 일합시다. 셋방살이 하는 사람 속 타는 심정을 집주인이 어찌 알겠소?
방 고쳐 놓으면 돈 안 주겠나? 주인양반이 워낙 점잖은 양반이라 마누라에게 져주는 척 하는 기요.” “
나중에 엉뚱한 말 할까 봐 그라는 거 아이요. 도대체 누구 말을 들어야 할 지 모르겠네.
하여튼 예수쟁이들 희한해.
공장에서 기계 앞에 한 줄로 서서 정신없이 작업을 하다가도 교회 종소리만 들리면 그때부터 좀이 쑤셔서 안 되는 기라. 두 눈 딱 감고 마 가뿌린다 아이가. 나머지 일하는 사람은 그노마 일 빵꾸 때우느라고 죽을 똥을 싸고.”
“김군! 내가 와 교회 안 다니는 줄 아나? 이런 꼴 보기 싫어서 안 가는 기라.
오늘 아침에도 보일러부속이 몇 개 모자라서 급하게 사러 나가는데 주인여자가 문간에서 교회가자고 붙들고 늘어지는데 화가 어찌 안 나겠노.
연장 풀어놓고 일판 벌려 놓은 것까지 다 그냥 놓고, 일꾼들까지 모두 데리고 교회 가자고 쌩 야단 인기라.
나머지는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한다고. 그라몬 이 일 안 해서 애 묵는 거 누구고?
장농이고 밥그릇이고 살림 다 펼쳐 놓고 방고치기만 기다리는 셋방사람들만 골탕 먹는 거 아니가.
남의 말 안 듣고 막무가내 끌고 나가는데 미치겠더라니까.
완전히 돌았어. 제 정신이 아니야. 교회에서 무얼 어떻게 가르치면 저렇게 되는지 무섭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내가 너그들 예수 믿을라카면 지금 아예 갈라서자 그라는 기야.”
“우리는 예수 그렇게 요란하게 안 믿습니다. 물론 십장님에게 예수 믿으시라고 하지도 않을 거구요.”
“나는 모른다. 예수 믿지도 않을 꺼고.
너그들 잘 봐라! 이 바닥에서 마누라 예수 믿는다는 노가다 중에 사람대접 받고 사는 인간 있는가.
술 묵고 담배 묵는 인간이라고 한 집안 안에서 마귀두목이라 해 쌌는데, 그거 안 하고 노가다 무슨 힘으로 하노?
일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시간이 죽어도 안 가는데, 담배핑계라도 대고 시간 때워야 할 것 아이가.
교회일이라면 끔찍이 챙기면서 남편은 들어오든 나가든 쳐다보지도 않는 기라.”
“그런 사람이 간혹 있지만 다 그러기야 하겠습니까? 착한 사람도 생각보다 많습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 더 잘 해주고 불교 믿는 사람이라 못 해주고 할 수는 없는 기라.
어느 종교 하나를 믿으면 다른 종교는 싫어지게 되고, 그라다 보면 어느 한 쪽은 소홀해 지기 십상인기라.
그런데 우리 일은 사람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일 아이가. 집 어설프게 손대면 큰 일이 난다카이.
그래서 나는 종교는 안 믿는다. 나는 내 직업에 충실할 뿐인 기고.
종교란 게 원래 몸 아프고 쉴 때 잠시 믿는 거지. 거기에 미치면 집안 식구 밥 굶길 짓 하기 딱 좋은 기라.
어느 종교든지 가보면 가르치는 게 다 비슷비슷하고 고만고만한 게 거기서 거기야.
따지고 보면 착한 마음 묵고 착한 놈 되어서 좋은 일 하고 살라는 거 아이가.
크게 보면 다 같은 기라.
종교가 가지 수는 많은데 별로 다르다는 것을 못 느끼겠어.
앞으로 좋은 말 해쌌는 것도 뒤로 나쁜 짓하는 것도 우째 그리 똑 같은지 하여튼 희한하다니까.”
“앞으로 조심하께예”
“내사 마 모르겠다. 니 인생 니 알아서 해라.”
“김군! 나는 변기 사 가지고 자전거에 싣고 갈테니까 자네는 버스타고 온나. 한 시간 뒤에 만나자.”
현장이 좀 멀기도 하고 길이 복잡하기도 해서 간신히 찾아갔더니, 십장도 자전거에서 변기를 내리고 있었다.
내가 도와준답시고 변기를 손으로 어설프게 받다가 자전거가 넘어지면서 그만 땅에 떨어뜨려 폭삭 깨버렸다.
“허허 참 사람. 와 그래 넋을 놓고 사노. 정신을 차리고 일에 바짝 달라붙어야지. 안 그라몬 사고 난다이.
노가다는 이력서도 시험도 없지만 보험도 보상도 없다카이.”
“아고! 총각이 그 비싼 걸 깨 묵었나? 우짜노? 몇 날 며칠 일 한 거 다 날려 묵었네.”
“아주무이요. 나 힘없는 사람한테 덤텡이 씌우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이. 실수 안 하는 사람 어디 있습디까.”
“그냥 해 본 소리요. 총각 좋은 날 올끼요. 이렇게 고생하다 보면.”
“예! 저도 돈 모아 장가 갈라꼬예.”
“아이고 그런 소리 마소. 요즘 노가다하는 남자한테 시집오는 그런 여자가 어디 있노?”
“아주무이 한 마디 더 하네. 사람 기죽일 일 있소?”
저녁에 일 끝나고 십장이 술 한 잔 하자고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그로서는 좀처럼 드문 일이었다.
“아저씨! 뭐 묵을라꼬예?” “하하. 오늘은 내가 사는 건데. 아줌마! 그 친구가 술 살 줄 어떻게 알았심니까?”
“제일 훤하게 생겼다 아이요.”
“김군! 오늘 진짜 술 사야겠네. 내가 봐도 김군은 노가다해 묵을 친구는 아닌 거 같고.
노가다 세계를 글로 쓴다면 모를까.
내 한번 물어보자. 남들 담배 피우고 쉴 때 무슨 글을 그렇게 써 쌌노? 기자 취재 나온 것도 아니고.”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 봤습니다. 지나가면 잊어묵으니까예.”
“노가다라! 좋은 경험이지. 평생 해묵기는 힘들고.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마음먹을 만큼 괴로울 때도 있는 기라.
나도 노가다 하고 싶어서 했겠나.
열두 살 때 큰 장사하는 집 심부름꾼으로 들어가서 한 재산 떼 준다는 말 믿고 죽도록 일했다 아이가.
스무 살 되어가지고 준다던 집 달라고 했더니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영감이 마 죽어삔 기라.
말 한 마디 못하고 그 집에서 등 떠밀려 나왔지. 가진 거 없지. 배운 거 없지. 그때부터 노가다만 하는 기라.
노가다는 해묵을 게 그것밖에 없는 사람이나 하는 기지 아무나 달라든다고 할 수 있는 기 아니라카이.
노가다가 재미있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말 이면에는 남이 이해 못 할 고충이 있는 기야.
김군! 내 밑에만 있으면 노가다가 진짜 무언지 모를 수 있으니까 여기 저기 댕기 봐.
딴 사람도 소개 시켜 줄 테니까 이리저리 겪어보고. 노가다판 피눈물 나지.
뼈 빠지게 정직하게 일해도 돈 떼어 먹히는 일 다반사고. 그리고 웬만하면 노가다 하지 마라.
일 없을 때 집에만 있지 말고 직장 알아보러 다니고.
큰 공사 터져도 정 급하지 않으면 부르지 않을 테니 섭섭하게 생각지 말그라.
김군! 아아 낳을 때 되었재? 무엇이든지 여물어야 한데이.
사람도 여물어야하고 고추도 여물어야하고 땅도 여물어야 물이 고이고. 보르꼬(블럭)만 여물어야 되는 기 아닌 기라.”
십장을 통해 최기사라는 사람을 소개받았다. 대학건물이나 아파트 등 큰 건물 배관시설이 전문분야라고 했다.
오늘부터 해야 할 일은 우선 높이 180센티 지름 140센티의 정화조를 땅에 묻는 일이었다.
“요즘 배관일이 없다보니 닥치는 대로 일을 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어.
정부에서 배관 1급 자격증 없는 자슥들은 일체 사업을 못 하게 법으로 금지시켜야 하는데 개나 소나 다 배관을 하니 공사도 엉망이고 내같은 실력 있는 기술자들은 일 다 뺐기고 정화조나 파고 있는 실정인기라.
김군! 내하고 일 년만 같이 있으면 일류 기술자 된다이. 딴 생각 품지 말고 우리 운명을 같이 하자. 알겠나? 어떻게 생각하노?”
“일하면서 생각하입시더.”
그날따라 땅이 돌멩이처럼 딱딱한 게 도통 삽이 들어가지지를 않는 것이었다.
최기사는 허리를 다쳤다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땅을 파는데 다친 오른 팔이 끓는 물에 담근 것처럼 아파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파낸 구덩이가 내 키보다 20센티나 높아 흙을 내보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샘이 터진 듯 물이 솟으니 뻘구덩이 속에서 맨발로 일하는 고역이 보통이 아니다.
노가다 시작해서 땅을 이렇게 많이 파보기는 처음이다.
옆집에도 정화조를 파고 있었는데, 그 양반 왈 “정화조 돗내기 맡았소? 뭘 그렇게 열심히 파요? 내일은 일 안 할 끼요?”
“김군! 내일 안 오면 안 된다이. 내 혼자 일 못 한다. 알겠재?”
다음날 아침 일어나며서 가래를 뱉으려니 입안에 핏덩어리가 가득하다.
밤에 코피가 터졌던 모양이다. 다시 누워버렸다. 통증 때문에 허리를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
한 시간 늦게 현장에 나가보니 허리 아프다던 최기사가 열심히 정화조를 파고 있다.
오전 내내 뭉기적대다 오후에 다시 삽을 들었다. 동네 전체가 정화조시설을 하라는 시 명령을 받았는지 집집마다 삽질이다.
몇 번이나 중도에 집에 가려다가 오기가 나서 끝까지 버티었다.
허리 아픈 것만큼 고통이 심한 게 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허리 아래로 통증 때문에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노가다는 놀 때 실감난다지만, 아플 때 진짜 노가다의 설움이 무언지 알게 되는 모양이다.
“김군! 우리 동네 친목계를 하는데 형사과장이 하나 끼어 있는 기라.
가끔 노름판 벌리면, 내가 일부러 돈 좀 잃어주는 기라. 친하게 지낼라꼬.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한번 써 묵을 수 있을 끼야.”
“경찰 도움 필요한 뭐가 있습니까? 경찰이 돈 땄다고 미안하게 생각해서 잘 해 줄낍니꺼? 이해가 안 되는데예.”
“그런가? 자기도 내가 일부러 져주는 거 알낀데.”
“안 좋은 일로 경찰서 가면 죄인 취급 받는 거는 다 똑 같습니다. 일부러 돈 잃어줄 필요는 없습니더.”
너무도 힘들게 일한 끝인지 일당으로 받은 만원을 깨기 아까워 버스를 타지 않고 집까지 걸어오고 싶다.
나흘 동안 어머니에게 침을 맞으며 정화조 일을 하고 났더니, 돌아눕지도 서기도 앉기도 힘들다.
이 허리가 쉽게 나을 허리가 아니다.
최기사와는 일 년은 커녕 고작 나흘로 인연이 끝나버렸다.
장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고.
이름을 뭐로 지을까 궁리하면서 필동 제일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장이 장인어른 친구라 비싸기로 유명한 이 병원을 선택했다고 했다.
3.65키로의 듬직한 놈이 세상에 나왔다.
머리통이 동그랗고 큰 놈이었다.
눈매가 날카로운 게 코나 입의 윤곽이 뚜렷했다.
아내가 아기의 전체적 분위기가 시어머니를 닮은 것 같다고 했다.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나를 장인어른이 병원복도 저쪽으로 끌고 갔다.
“윤희가 노산이라 정상분만이 안 되어서 제왕절개수술을 받는 통에 비용이 백만 원 가량 나왔는데 어떻게 계산할 작정인가?”
“십만 원 정도면 충분하다고 해서 이십만 원 정도 가져왔는데 큰일 났네요.”
“아니! 노가다를 꽤 했을 텐데 그만한 돈도 못 모았어?”
“수술을 하게 되리라고는 미처 예상을 못 하고! 제가 준비성이 부족했네요.”
“자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아기 아빠가 될 사람이 출산비용도 해결 못 해서 쩔쩔 매나?
출산비는 내 친구가 웬만큼 깎아주겠지만, 이제 아기 우유값은 어떻게 할 건가?
시간마다 아기가 급하게 울어댈 텐데 아이를 굶길 텐가?”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을 바짝 차리겠습니다.”
아내는 수술한 직후라 먹지도 못 하고 오줌도 관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이틀 밤을 아내와 같이 보내고 나니 간호사가 아기를 안고 왔다.
아내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쇠줄보다 더 질긴 인연의 회오리가 시작된 것이다.
어머니 동생들 장인어른 장모 처가식구들이 예쁘다고 환호성을 올렸지만 직업이 없는 나는 보험처리가 안되므로 출산비를 마련하지 못해 시간이 지날수록 옹색하고 딱한 처지가 되었다.
아내도 남편의 풀 죽은 모습을 보며 얼굴이 함께 어두워졌다.
공존모임의 기독교방송국 형님들이 격려차 다녀갔다.
결국 양가부모님들이 출산비용을 반반씩 부담하는 것으로 결말짓고 나는 어깨가 축 처져서 돌아왔다.
아들 낳은 턱으로 포도주 두 병을 사가지고 십장을 찾아가니 지금 하고 있는 공사가 끝나야 나를 다시 불러줄 수 있겠다고 한다. 하긴 허리와 팔을 다쳐 당분간 일하기도 어려운 상태다.
아기는 세상모르고 잘 자고 있을 텐데 애비는 노가다마저 쉬고 있으니 앞이 캄캄했다.
출생신고를 위해 이름을 고르다가 아내와 나의 가운데 이름 한자씩 골라 ‘김윤경’이라고 지었다.
진실로 윤(允) 경사 (慶) 진실로 경사로다.
그래! 경사는 경사다.
7대 독자가 첫 아이를 아들로 낳았으니.
아버지가 그토록 원했던 손자를 보지 못 하고 일찍 돌아가신 것이 가슴 아파 술 한 잔을 아버지를 향해 올려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