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인이 내 마음을 알았을까. 장작불에 군고구마를 알맞게 구워 내왔다. 어린 시절 더 많이 먹으려고 서둘러 입속에 넣었다가 뜨거워 입천장이 데였다. 오늘은 여유를 부리며 먹어도 된다. 이미 시골 유기농 봄나물들로 배를 채워 놓았으니. 주인장은 고로쇠 수액과 오징어와 고추장을 내왔다. 고로쇠 수액을 밤새워 마시려면 오징어가 제격이란다. 둘이 궁합이 안성맞춤이다. 방이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거우니 고로쇠가 술술 넘어갔다. 밤새 아궁이에선 다닥다닥 소리를 내며 불꽃을 피워낸다. 투박한 가마솥에선 증기기관차의 굉음이 이어지고 있다. 적막하기만 하던 시골이 왁자지껄하다.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가마솥 열기보다 더 뜨거운 문학 주제가 토론의 끝장을 향해 달린다.
도심에서 보기 힘든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풀벌레가 노래를 해주니 그냥 이대로 모든 것을 정지시키고 싶다. 그동안 내 몸 깊숙이 자리 잡은 허상들을 미련 없이 내어주고 쌍책리 밤공기를 가득 담고 싶다. 쏟아지는 저 별도 같이.
오일시장
양영주
오늘은 오일장 날이다. 십여 년 전부터 시골에서나 봄직한 오일시장이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주민들은 좋아했지만, 주변 상인들이 집단으로 반발을 했다. 오일시장이 번성할수록 상가 손님들이 오일장으로 향할 것이고, 그 여파로 영업에 손실이 온다는 것이다. 사실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공터 활용을 위한 사유지에 들어서는 것을 법적으로 어찌할 수 있겠는가, 고객이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다. 싱싱한 농작물과 다양한 물건들을 저렴하게 살 수 있고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요즘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면 맞벌이 부부와 싱글족과 나홀로족들을 위한 상품들이 다양하다. 과일은 물론이고, 반찬, 채소 등 온갖 물들이 앙증맞을 정도로 예쁘고 자그마하게 포장되어 고객을 유혹한다. 예전엔 여러 가지 과일을 먹고 싶어도 크고 양이 많아서 어떻게 다 먹나 고민했다. 그런 고객의 마음을 알아챈 백화점과 마트에선 먹기 좋을 만큼씩 썰어 잘 혼합한 과일들을 판매한다. 하지만 시장에서 보는 풍성함이나 토속적인 멋은 부족하다.
장터에선 시골에서 농사지어온 각종 곡식과 채소도 팔고 생선, 씨앗, 꽃, 나무, 옷, 이불도 판다. 한쪽 구석에서는 국숫집과 순대 국밥집이 발길을 붙잡는다. 또한, 즉석에서 튀기는 통닭과 호떡은 다이어트 중이라도 지나치기가 어렵다.
내가 자란 마을은 산촌이라 시장은커녕 구멍가게도 겨우 한 곳밖에 없었다. 엄마는 한 달에 두 번 오일장에 갔다. 오일장 전날은 엄마랑 같이 가는 설렘으로 잠을 설쳤다. 육 남매 중에 넷째인 나, 딴 집 같았으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존재였을 텐데 엄마는 시장에 갈 때나 먼 친척 집 갈 때는 딴 형제들 제쳐놓고 나를 데리고 다녔다. 워낙 호기심도 많고 붙임성도 좋아서 만나는 사람에게 인사를 잘하여 칭찬을 받으니 엄마로서도 좋았던 모양이다.
없는 것만 빼놓고 다 있는 오일장은 나에겐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수많은 상품 가짓수가 놀랍고,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볼 수 있어 즐거웠다. 모처럼 시장에 가면 볼 것도 많았지만 특히 나를 유혹하는 건 장터국수였다. 국수를 좋아하는 나는 국수 삶는 냄새를 그냥 치나 칠 수가 없었다. 엄마 치맛자락 붙들고, “엄마 국수” 하며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엄마는 못 이기는 척, “기여 먹게, 아맹 돈 엇어도 느 먹을 국수 그릇은 사 주주.” (그래, 먹자. 아무리 돈이 없어도 너 먹을 국수 한 그릇은 사줄게)하시며 사 주었다. 구수한 멸치육수에 쫄깃쫄깃한 면발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엄마는 참 지혜로우셨다. 아들 셋, 딸 셋인데 한 사람도 열등감 느끼지 않도록 공평하게 대해주셨다. 각자의 개성을 존중해 주어 지금까지 한 번도 다투거나 서운해 한 적이 없다. 조용한 성격에 야무진 언니와 여동생은 주로 집안일을 시켰다. 활동적인 나는 오빠들이랑 텃밭에서 일했다. 넉넉지 않은 살림이지만 시장에 가면 육 남매가 필요한 것들을 골고루 사 왔다. 두 살 터울인 언니와 내 옷은 색깔만 다르고 디자인은 같은 옷을 사줬다. 덕분에 언니 옷 물려받는 설움을 모르고 자랐다. 오일장 갔다 온 날은 온 가족이 둘러앉아 시장에서 사온 소박한 물건들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오일장엔 다양한 봄옷과 예쁜 꽃, 풋풋한 나물이 눈길을 붙잡는다. 경기가 안 좋아서 작년만 못하다는 상인들이 애교 섞인 하소연에 못 이기는 척 티셔츠랑 청바지도 샀다. 싱싱한 채소에 과일, 노란 수선화와 마운트 후드라는 흰 수선화, 조날 제라늄도 샀다. 아이비 제라늄과 엔젤 제라늄이 베란다에서 기다리고 있다. 오늘 산 녀석들과 합치면 꽃동산이 된다는 생각에 까만 비닐봉지가 두 손 가득하지만 무겁지가 않다. 오일장 봄이 베란다로 옮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