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왕능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국립경주박물관[國立慶州博物館]은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76번지에 있다. 총 2만 705평의 대지 위에 연건평 3,312평, 전시실 면적 1,050평 규모이다. 소장유물은 신라시대 유물을 중심으로 1만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경주에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능을 비릇하여 남산에는 왕릉이 13기, 절터가 147곳과 불상 118기, 탑이 96기, 석등이 22기 등 발견된 문화유적의 수가 672개에 달한다. 경주 남산을 유네스코는 2000년 12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신라 천년의 고도(古都) 경주는 한 해 500만 명이 넘는 국내외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경주는 신라의 시조 왕능을 비릇하여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유적물이 즐비하다. 삼국사기에 신라의 경주는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 계림(鷄林),시림(始林)이라 불렀으며, 전성기의 경주 인구가 백만을 넘었고, 숯으로 밥을 지었으며 초가집이 없었다. 또한 경주에는 대형 국제시장을 3곳이나 두었고, 시장(市場)업무를 관리 감독하는 관청까지 두었던 신라의 왕도(서울)이다.
필자는 경상북도 월성군 경주는 신라 천 년의 고도(古都)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4월 7일 경주를 찾아가 박혁거세왕능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았다.
일제가 가짜로 만든 경주의 5능
일제가 가짜로 만든 경주의 5능한국 정통사서의 [삼국사기]에 박혁거세왕은 사후 담엄사 북쪽 사능 능원 안에 묘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박혁거세(BC 57-AD 3년)왕 알영부인,남해왕(AD4-23년),유리왕(24-56년),파사왕(AD 80-112년)의 5능(五陵)이 있다. 또한 신라의 제6대 지마왕, 7대 일성왕. 8대 아달라왕등 마지막 제 56대 경순왕(AD 935)릉 등 총 36기의 왕능으로 경주 일대는 온통 왕들의 무덤뿐이다.
유구한 신라 1천년 왕도의 비밀을 간직한 5능은 BC 57~AD 3년의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릉이므로 지금으로부터 무려 2,064년 전의 무덤이 훼손되지 않고 100여년 전의 무덤과 같이 봉분이 깨끗하였다.
일제가 가짜로 만든 경주의 5능한국 정통사서의 [삼국사기]에 박혁거세왕은 사후 담엄사 북쪽 사능 능원 안에 묘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박혁거세(BC 57-AD 3년)왕 알영부인,남해왕(AD4-23년),유리왕(24-56년),파사왕(AD 80-112년)의 5능(五陵)이 있다. 또한 신라의 제6대 지마왕, 7대 일성왕. 8대 아달라왕등 마지막 제 56대 경순왕(AD 935)릉 등 총 36기의 왕능으로 경주 일대는 온통 왕들의 무덤뿐이다.
유구한 신라 1천년 왕도의 비밀을 간직한 5능은 BC 57~AD 3년의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릉이므로 지금으로부터 무려 2,064년 전의 무덤이 훼손되지 않고 100여년 전의 무덤과 같이 봉분이 깨끗하였다.
“ 경주 ”는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부터 마지막 56대 경순왕까지 무려 1000년(992년) 동안 신라의 왕도(王都:서울)입니다. 일반적으로 왕도를 중심으로 정치, 군사, 경제, 문화가 발달하므로 경북 월성군 경주가 신라 천년의 왕도라면 그 어느 도시 보다 왕도 경주에 인구가 집중되고 교통시설이 발달되어 있다는 것은 일반적 상식입니다. 한반도 속의
경북 경주 지역이 신라 천년의 도읍지로 타당한가? 일반적 상식으로 고찰해 봅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통일신라는 성덕왕(702~737)때 극성기를 맞이하여 신라의 수도 경주는 17만 8,936호이고, 1,360방, 55리, 35金入宅(금입택) 4절 유택(四節游宅) 등이 있는 호화로운 도시로서 통일 후 약 100 여년 간 번영을 누렸다.
신라의 삼국통일 시대의 수도 “ 경주의 호수가 17만 8천호 x 5인=890,000명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지금의 경주시 인구보다 1천300년 전의 인구수가 더 많습니다. 도대체 상식적으로 납득 할 수 없으나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일제와 식민사학자에 의해 임의대로 지정한 경주를 신라 천년의 도읍지로 세뇌되어 참과 거짓의 역사를 분별하지 못하고, 우리나라의 국사가 왜곡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기록된 박혁거세왕의 고찰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1] 신라의 시조는 혁거세(赫居世) 거서간(居西干)이다. 시조의 성(姓)은 박씨며 휘(諱)는 혁거세이다. 원년 갑자(BC:57년) 4월 병진일(일설은 정월 15일)날 13세에 즉위하여 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고 국호를 서나벌(徐那伐)이라 하였다. 먼저 조선의 유민(遺民)들이 산곡(山谷)에 나누어 살던 곳으로 六村(6촌)이 있었다.
첫째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 취산(嘴山:선도산) 진지촌(珍支村), 넷째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 있었다. 이것을 진한(辰韓)의 6부(六部)라 한다.
[삼국유사] 옛 진한(辰韓)에는 6村(촌)이 있었다. 첫째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남쪽에 담엄사(曇嚴寺)가 있고 촌장은 알평(閼平)이다. 둘째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의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셋째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의 촌장은 구례마(俱禮馬)이다. 넷째 취산진지촌(嘴山珍支村)의 촌장은 지백호(智伯虎)이다. 다섯째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의 촌장은 지타(祗陀)이다. 여섯째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의 촌장은 호진(虎珍)이다.
서기전 69년 3월 1일 당시 사로6촌(斯盧六村)의 촌장(村長)들이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서 덕성을 겸한 임금 옹립하여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할 것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때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근처에 하늘에서 땅에 닿도록 신기한 빛이 비추고 흰말(白馬)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찾아가보니 말은 하늘로 날아가고, 자주 빛의 큰 알이 하나 있었다. 알을 깨고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동천(東泉)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찾아와 춤을 추었다. 알이 둥근 박(瓠)과 같다고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고, 몸에는 광채가 나와 그로 인하여 이름을 혁거세라 하였다. 나이 13세에 왕으로 추대되었다. 왕은 국호를 徐羅伐(서라벌) 또는 徐伐(서벌) 혹은 斯羅(사라) 또는 斯盧(사로)라 하였다.
[환단고기의 고구려 본기 제 6] 사로(斯盧)의 시조 혁거세왕은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 황제 궁실의 娑蘇(사소)라는 여인이 남편 없이 아이를 잉태 하여 사람들의 의심을 받게 되자 눈수(嫩水:만주 흑룡강성)에서 도망하여 東沃沮(동옥저)에 이르고 또 배를 타고 남행하여 진한의 奈乙村(내을촌)에 당도 했을 때 蘇伐都利(소벌도리)가 소문을 듣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길렀는데 나이 13세가 되자 다 숙성하여 聖德(성덕)을 두루 갖추었기에 진한의 6부에서 居世干(거세간:거슬한(居瑟邯)으로 추대하고 국호를 서나벌(徐那伐),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라 하였다. BC 37년 경성(京城)에 금성(金城)을 쌓고, BC 32년 금성에 궁궐을 지었다. 서기 4년 봄 3월 왕이 승하하시니 사능(蛇陵)에 장례를 하셨는데 曇巖寺(담암사) 북쪽이다. 본문 끝.
상기의 [삼국사기, 삼국유사, 환단고기]의 사서(史書)에 기록된 지명을 살펴보면 첫째 양산(楊山), 둘째 돌산(突山), 셋째 취산(嘴山), 넷째 무산(茂山), 다섯째 금산(金山), 여섯째, 명활산(明活山)이 있었다.
지금의 경주가 신라의 도읍지(都邑地)라는 고증(考證)은 찾아 볼 수가 없어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와 조국을 배신하고 일왕에게 충성하며, 죽을때까지 부귀 영화를 누린 한민족의 반역자이자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만든 현행 국사에서 경주가 신라의 천년 도읍지로 지정돼 있을 뿐입니다.
1905년 국권을 탈취한 일제는 하느님을 숭배한 한국인의 천손사상(天孫思想)과 부모국의 한국 역사를 말살하지 않고, 어찌 식민지로 통치할 수 있겠으며, 전통적 민족문화를 말살하지 않고 어찌 우리나라를 영원히 멸망시킬 수 있겠는가?
즉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는 1910년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고, 조선사를 가장 공평하게 저작한다는 미명으로 한국의 국내는 물론 중국 각처에 산재했던 우리나라의 환인, 환웅, 단군관계의 증서 적 고대 사료를 전부 다 색출 수거하여 무려
20만권을 불태워 없애고, 거룩한 성군(聖君)의 역사를 짤라 없애고, 한국의 전통적 고유문화를 철저히 말살하여, 민족적 자긍심을 철저히 말살했습니다.
우리나라의 현행 국사는 현대사를 제외하고, 우리국민의 손으로 만든 국사가 아니고,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식민지시대에 일왕의 칙명을 받고, 한국인을 일본사람으로 동화시켜 대한제국을 일찍 멸망시키기 위한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자”들이 만든 망국적 국사입니다.
즉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는 인류의 부모국이며, 4대문명과 종교 원천국의 우리역사를 말살하고, 세계적 대국의 고조선 삼한(진한, 마한, 변한)과 아세아적 대국의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의 4국을 한반도 속으로 축소하여 한반도 속의 소국 적 사대역사관과 철저한 식민지사관의 망국적 치욕과 패배의식의 역사로 구성되어 대한민국의 장래를 망치고 있습니다.
경주는 신라의 도읍지가 아닙니다 경주는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식민지 시대의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가 창설되어 1915년부터 옛 객사 건물에 신라 유물을 전시하기 시작하였다. 1926년 9월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되고, 해방과 더불어 1945년 9월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으로 개편되었다. 1975년 7월에 현재의 위치에 본관을 신축하여 이전하고, 8월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승격했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전시실은 제1실이 선사시대실, 제2실이 고신라토기실, 제3·4실이 고신라공예실, 제5실이 와전실(瓦塼室), 제6실이 통일신라토기실, 제7실이 통일신라 금속공예실, 제8실이 조각실로 되어 있다. 별관은 천마총과 제98호 고분 유물실이며, 정원에는 성덕대왕신종 및 석탑·석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최근에는 안압지관(雁鴨池館)이 개관되어 안압지 출토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월성군·영일군 지표조사 보고서〉·〈경남지역 도요지 조사보고서〉·〈황성동 유적 발굴 조사보고서〉·〈민애왕릉 주변 정리보고서〉 등의 조사보고서를 출간했다.[브리테니카 백과 사전 참조]
상기 [브리테니카 백과 사전]과 같이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가 거짓 가짜로 지정한 신라 천년의 왕도 경주(慶州)를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신라 1,000년의 왕도(王都)로 인식하고 “아...! 황성 옛터의 신라의 달밤 ” 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을 일본사람으로 동화시켜 대한제국을 일찍 멸망시키기 위해 설치된 조선사편수회의 핵심위원이었던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삼국사기의 중국 지명을 한반도 내의 지명으로 얽어 맞춰 신라, 고구려, 백제, 및 가락국의 4국 영토를 한반도 속으로 축소 변조했던 것이다.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일제가 거짓 가짜로 만든 국사교육에 무려 61년 동안 세뇌되어 뇌리 깊숙이 각인된 거짓 지식으로 분별력을 상실하여 현행 국사가 “근본적 뒤틀린 실상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도 “고증에 의한 역사적 진실”도 쉽게 수용하지 못하고 부정하는 습성이 한국인의 고치기 어려운 가장 슬픈 고질적 병폐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당국자는 거짓 가짜로 만든 국사교육에 세뇌되고, 왜독에 중독되어 천인공노할 일제의 만행을 깨닫지 못하고, 경주를 신라천년의 도읍지로 둔갑하여 세계인이 인정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포장하고, 7천만 대한민족은 참과 거짓의 역사를 분별하지 못하고 넋을 잃고 있으니 한국인의 고질적 병폐를 그 누가 치유할 수 있겠는가?
머리는 짤라 버리고 전신이 유린되어 오늘도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으나 이미 눈과 귀가 먹은 대한의 아들딸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고질병을 앓고 있으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장손국의 천손들이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아...! 통한의 한국역사여...! 하늘을 우러러 땅을 치며 통탄할 뿐이다.
한국정신문화선양회 대표 박병역(朴炳譯)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3401§ion=section78§ion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