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 현해탄(玄海灘/1938), 찬가(讚歌/1947), 회상/1947]
프로 시인으로서의 임화를 우리 시문학사에 각인시킨 이 작품은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우리 오빠와 화로>를 탄생시킨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 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네거리’의 이미지는 후일 <다시 네거리에서>(1935.7)와 <9월 12일, 1945 또다시 네거리에서>(1945.9)로 변주(變奏)됨으로써 임화 시의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 시는 시적 화자인 오빠가 종로 네거리에서 방황하고 있는 누이동생 순이에게 하소연하는 독백체 형식으로, 선동적이며 격정적인 호흡과 고백적이면서도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계급 투쟁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면서도 이데올로기만을 강조하던 종전의 경향시와는 달리 서정성도 가지고 있다.
소위 ‘단편 서사시’로 분류되는 작품이지만, 일정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 실제로 등장하거나 일정한 질서를 지닌 사건이 구체적으로 전개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서사시라기보다는 이야기를 담은 서정시, 즉 이야기 시로 부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누이동생 순이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집에서 살림을 하면서 공장에 나가는 노동자이며, 오빠는 ‘남은 것이라고는 때묻은 넥타이 하나뿐’인 지식인 계급으로 누이동생의 방황을 보며 현실 인식이 조금씩 바뀌게 된다. 청년은 순이와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언 눈길을 걷는 발자국 소리와 더불어’ ‘따뜻한 귓속 다정한 웃음으로’ 꽃다운 청춘을 보내던 연인 관계이지만, 그가 공장에서 노동 운동을 한 죄목으로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두 사람은 고통과 수난을 겪게 된다. 그러나 어떠한 행동도 표출하지 못한 채 그저 마음속으로만
갈등하는 무기력한 오빠는,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서 방황하는 누이동생과, ‘젊은 날을 부지런한 일에 보내던 그 여윈 손가락으로 /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며 감옥 생활을 하는 청년을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프로 시로서의
계급 의식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것은 ‘보아라! 어느 누가 참말로 도적놈이냐?’라는 설의적 의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시인이 의도하고 있는 계급 의식은 다만 추상적 관념으로만 나타나 있을 뿐, 구체적 현장성이나 실천적 운동성을 갖추지 못하였다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네거리의 순이(順伊)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너,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순이,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 --- 그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눈바람 찬 불상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 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눈물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었지! 그리하여 너는 이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핀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날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청년을 가졌었고, 내 사랑하는 동무는 ---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겨울날 찬 눈보라가 유리창에 우는 아픈 그 시절, 기계소리에 말려 흩어지는 우리들의 참새 너희들의 콧노래와 언 눈길을 걷는 발자국 소리와 더불어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청년과 너의 따뜻한 귓속 다정한 웃음으로 우리들의 청춘은 참말로 꽃다웠고, 언 밥이 주림보다도 쓰리게 가난한 청춘을 울리는 날, 어머니가 되어 우리를 따뜻한 품속에 안아주던 것은 오직 하나 거리에서 만나 거리에서 헤어지며, 골목 뒤에서 중얼대고 일터에서 충성되던 꺼질 줄 모르는 청춘의 정열 그것이었다. 비할 데 없는 괴로움 가운데서도 얼마나 큰 즐거움이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났더냐?
그러나 이 가장 귀중한 너 나의 사이에서 한 청년은 대체 어디로 갔느냐? 어찌된 일이냐? 순이야, 이것은 --- 너도 잘 알고 나도 잘 아는 멀쩡한 사실이 아니냐? 보아라! 어느 누가 참말로 도적놈이냐? 이 눈물나는 가난한 젊은 날이 가진 불상한 즐거움을 노리는 마음하고, 그 조그만 참말로 풍선보다 엷은 숨을 안 깨치려는 간지런 마음하고, 말하여보아라, 이곳에 가득 찬 고마운 젊은이들아!
순이야, 누이야!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내의 연인아! 생각해보아라, 오늘은 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젊은 날을 부지런한 일에 보내던 그 여윈 손가락으로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또 이거 봐라, 어서, 이 사내도 네 커다란 오빠를 --- 남은 것이라고는 때묻은 넥타이 하나뿐이 아니냐! 오오, 눈보라는 트럭처럼 길거리를 휘몰아간다.
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예 아니냐! 어서 너와 나는 번개처럼 두 손을 잡고,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 네 사내를 위하여, 또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을 위하여 ---
이것이 너와 나의 행복된 청춘이 아니냐?
1929. 조선지광
해설 :
프로 시인으로서의 임화를 우리 시문학사에 각인시킨 이 작품은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우리 오빠와 화로>를 탄생시킨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 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네거리'의 이미지는 후일 <다시 네거리에서>(1935.7)와 <9월 12일, 1945 또다시 네거리에서>(1945.9)로 변주(變奏)됨으로써 임화 시의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 시는 시적 화자인 오빠가 종로 네거리에서 방황하고 있는 누이동생 순이에게 하소연하는 독백체 형식으로, 선동적이며 격정적인 호흡과 고백적이면서도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계급 투쟁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면서도 이데올로기만을 강조하던 종전의 경향시와는
달리 서정성도 가지고 있다. 소위 '단편 서사시'로 분류되는 작품이지만, 일정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 실제로 등장하거나 일정한 질서를 지닌 사건이 구체적으로 전개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서사시라기보다는 이야기를 담은 서정시, 즉 이야기 시로 부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누이동생 순이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집에서 살림을 하면서 공장에 나가는 노동자이며, 오빠는 '남은 것이라고는 때묻은 넥타이 하나뿐'인 지식인 계급으로 누이동생의 방황을 보며 현실 인식이 조금씩 바뀌게 된다. 청년은 순이와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언 눈길을 걷는 발자국 소리와 더불어' '따뜻한 귓속 다정한 웃음으로' 꽃다운 청춘을 보내던 연인 관계이지만, 그가 공장에서 노동 운동을 한 죄목으로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두 사람은 고통과 수난을 겪게 된다. 그러나 어떠한 행동도 표출하지 못한 채 그저 마음속으로만 갈등하는 무기력한 오빠는,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서 방황하는
누이동생과, '젊은 날을 부지런한 일에 보내던 그 여윈 손가락으로 /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며 감옥 생활을 하는 청년을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프로 시로서의 계급 의식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것은 '보아라! 어느 누가 참말로 도적놈이냐?'라는 설의적 의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는 카프에 가담한 시인이 [조선지광]에 발표한 시로서 일제 치하의 노동자의 권익옹호를 위한 투쟁의지를 담고 있는 시라 할 수 있다. 특이한 점은 화자가 노동자가 아니라 지식인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이는 시를 통해 노동자들과 생각을 함께하는 지식인상을 보여줌으로써 지식 계급이었던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표현상의 특징 -대화체 사용 : 자신이 가진 이념이나 계급 투쟁의 목적을 일반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함 -시적 대상을 여성으로 택함 -과장된 감상적 정서를 유발
* 구성 제1연 : 근로자들의 힘의 근원인 청년을 지키기 위해 누이동생인 순이에게 대열을 이탈하지 못하도록 당부하는 내용 제2연 : 나, 너, 청년의 인물을 제시하면서 근로자와 근로자, 근로자와 지식인 사이의 깊은 연대감을 불러 일으킴 제3연 : 노동자들이 힘든 노동 속에서도 청춘의 정열로 일했고, 또한 권익을 찾기 위해 함께 단결했음을 힘차고 밝게 이야기하고 있음 제4연 : 행복감이 분노로 변하게 됨 - 청년이 해고당하고 그들의 투쟁은 고용주의 착취에 의해 짓밟혔으므로 제5연 : 좌절하고 갈등하는 지식인의 내면 의식 제6연 : 미래에 대한 전망과 극복 의지를 격정적 어조로 노래
다시 네거리에서...
지금도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맞고 보내며, 전차도 자동차도 이루 어디를 가고 어디서 오는지, 심히 분주하다. 다시 네거리에서
네거리 복판에 문명의 신식 기계가 붉고 푸른 예전 깃발 대신에 이리저리 고개를 돌린다. 스텁 - 注意(주의) - 꼬 - 사람, 차, 동물이 똑 기예(敎練)배우듯 하다. 거리엔 이것밖에 변함이 없는가?
낯선 건물들이 보신각을 저 위에서 굽어본다. 옛날의 점잖은 다 어디로 갔는지? 그다지도 몹시 바람은 거리를 씻어갔는가? 붉고 푸른 「네온」이 지렁이처럼, 지붕 위 벽돌담에 기고 있구나.
오오, 그리운 내 고향의 거리여! 여기는 종로 네거리, 나는 왔다. 멀리 >>밑 오막살이를 나와 오직 네가 네가 보고 싶은 마음에.....
넓은 길이여, 단정한 집들이여! 높은 하늘 그 밑을 오고가는 허구한 내 행인들이여! 다 잘 있었는가? 오, 나는 이 가슴 그득 찬 반가움을 어찌 다 내토를 할까? 나는 손을 들어 몇 번을 인사했고 모든 것에게 웃어보였다. 변화로운 거리여! 내 고향의 종로여! 웬일인가? 너는 죽었는가, 모르는 사람에게 팔렸는가? 그렇지 않으면 다 잊었는가?
나를! 일찍이 뛰는 가슴으로 노래한 너를 노래하던 사내를, 그리고 네 가슴이 메어지도록 이 길을 흘러간 청년들의 거센 물결을, 그때 내 불쌍한 순이는 이곳에 엎더져 울었었다. 그리운 거리여! 그 뒤로는 누구 하나 네 위에서
청년을 빼앗긴 원한에 울지도 않고, 낯익은 행인은 하나도 지나지 않던가?
오늘밤에도 예전같이 네 섬돌 위엔 인생의 비극이 잠자겠지! 내일 그들은 네 바닥 위에 티끌을 주우며..... 그리고 갈 곳도 일할 곳도 모르는 무거운 발들이 고개를 숙이고 타박타박 네 위를 걷겠지. 그러나 너는 이제 모두를 잊고, 단지 피로와 슬품과 검은 절망만을 그들에게 안겨보내지는 설마 않으리라. 비록 잠잠하고 희미하나마 내일에의 커다란 노래를 그들은 가만히 듣고 멀리 문밖으로 돌아가겠지.
오오 정다웁고 그리운 고향의 거리여! 너는 내 귀한 동생 순이와 같이 그가 사랑한 용감한 이 나라 청년과 같이 노하고 즐기고 위하고 싸울 줄 알며 네 우를 덮는 검은 ××을
×수처럼 ××하던 저 위대하고 아름다운 청년들의 발길을 대체
오늘날까지 몇 사람이나 맞고 보냈는가 고향의 거리여.....나는 지금 네 우에서 한 사람의 낯익은 얼굴도 찾을 수가 없다.
간판이 죽 매어달렸던 낯익은 저 二段(이단)
지금은 신문사의 흰 旗(기)가 죽지를 늘인 너른 마당에, 장꾼같이 웅성대며, 확 불처럼 흩어지던 네 옛 친구들도 아마 대부분은 멀리 가버렸을지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순이의 어린 딸이 죽어간 것처럼 쓰러져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일찍이 우리가 안 몇 사람의 위대한 청년들과 같이, 진실로 용감한 영웅의 단(熱(열)한) 발자국이 네 위에 끊인 적이 있었는가? 나는 이들 모든 새 세대의 얼굴을 하나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건재하라! 그대들의 쓰린 앞길에 광영이 있으라」고.
원컨대 거리여! 그들 모두에게 전하여다오! 잘 있거라! 고향의 거리여! 그리고 그들 청년들에게 은혜로우라, 지금 돌아가 내 다시 일어나지를 못한 채 죽어가도 불쌍한 도시! 종로 네거리여! 사랑하는 내 순이야! 나는 뉘우침도 부탁도 아무것도 유언장 위에 적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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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루돌프 발렌티노'라 불리웠던 시인. 임화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은 그저 인상에 가까운 것들인지 모른다. 그것은 오랫동안 풍문. 바람에 실려 왔다가 어둠 속으로 묻혀버린 과거의 전설같은 것이다. 카프(KAPF)의 서기장을 역임했고, 80여편에 가까운 시와 200편이 넘는 평론을 남긴 우리 현대문학 속에서 시와 비평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 임화, 그는 1946년 월북했으나 1953년 미제 스파이라는 혐의로 사형 당하고 만다. 이제 누가 있어 그의 죽음에 얽힌 비밀과 억울함을 풀어줄까?
임화(林和, 1908~1953) 본명은 임인식(林仁植). 필명은 청로(靑爐),쌍수대인(雙樹臺人),성아(星兒),임(林)다다, 김철우(金鐵友). 서울출생. 보성고보를 중퇴하고 다다풍의 습작시기를 거쳐 1920년대 후반부터 프로 시인과 비평가로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가을, 일본으로 건너가서 수학하다가 1931년, 귀국해서 카프의 서기장을 역임하면서 이 당의 프로문학운동을 실질적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935년 카프 해산 무렵부터는 순문학 쪽으로 기울어서 시집<현해탄>(1938)과 비평집<문학의 논리>(1940)를 간행하고, <조선문학사>를 집필하는 등 순수문학의 길을 걷게 된다. 또한 이 무렵에 출판사 <학예사>를 경영해 보고 영화 관계 일을 하기도 하면서 친일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에 가담하기도 한다.
해방 후에는 '조선문학건설본부(1945)'를 만들어 그 서기장을 지내고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는 등 남로당 노선을 걸으며 문화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1946년, 공산당이 불법화된 후 1947년 4월경 이른바 제 2차 월북파로 입북하여, 북한에서 문화선전성 부장, 조소문화협회 부위원장을 역임하고 6.25에 종군하다가 1953년,'미제 스파이'혐의로 사형에 처해진 비극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시집에 <현해탄>,<찬가>,<회상시집>등이 있다.
* 순서 : 네거리의 순이(1929)-다시네거리에서(1935)-1945 또다시 네거리에서(1945)
우리 오빠와 화로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永男)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 온 그 거북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야 지금은 화젓가락만이 불쌍한 우리 영남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웨 ― 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실 그날밤에 연거푸 말은 궐련[卷煙]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었어요 오빠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 ― 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웨 그 날만 말 한 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 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야 기어올라가든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 ― 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백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야 제가 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었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바루르 밟는 거치른 구두 소리와 함께 ― 가 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 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 ― 그래서 저도 영남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제사기(製絲機)를 떠나서 백 장의 일전짜리 봉통(封筒)에 손톱을 뚫어트리고 영남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통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 ― 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 ― 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영남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든 쇠 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어요 그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나는 우리 오빠 동모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었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있고 그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듯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 저뿐이 사항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슳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 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의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야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는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 누이동생
* 피오닐 : 러시아 말로 영어의 pioneer에 해당됨. ‘개척자, 선구자’ 라는 뜻과 함께 ‘공산소년단원’(9세~14세)을 일컫는 말이기도 함.
(조선지광 83호, 1929.2)
이 시는 카프 내의 최고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임화의 초기 대표작이다. 임화는 시로 시작해서 문단에 알려지고 카프 내의 최고의 이론가이자 실권자로 활동하여 해방 후에는 좌익 문학계의 거두로 활약하다가 월북하지만, 6?25 후의 남로당 숙청 과정에서 박헌영과 함께 사형당한다.
그리하여 그의 문학은 그 동안 남?북한 양쪽에서 다 소외받아 온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계급주의 문학을 도외시하고는 한국 문학을 온전히 알 수 없고, 특히 임화를 모르고서는 계급주의 문학을 안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존재는 한국 문학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겨놓은 것이 된다. 비록 이데올로기에 치우쳐 예술성을 소홀히 하였다는 후대의 평가를 받고 있기는
해도, 그러한 예술성의 부족이라는 잣대로 계급주의 문학을 평가하고자 하는 태도 자체가 오늘날엔 비판받고 있기도 하는 것이므로, 이들의 작품을 무조건 예술성이 뒤떨어진다고 하여 문학사에서 제외시켜 버리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왜냐하면, 계급주의 문학은 일제 식민지가 낳은 일종의 저항 문학의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들의 일차적인 목적은
문학을 통한 정치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점에 따르자면 문학은 선전?선동의 도구로서 우선 간주되는 것이므로, 얼마나 이러한 목표에 충실하였는가가 작품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작품이 무조건으로 예술성을 배척한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예술성보다는 사상성을 그 우위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임화의 이 시는 시 속에 어떻게 사상을 담을 수 있는가 하는 계급주의 문학에서의 고민을 적절히 해결하여 당시 ‘단편 서사시’라는 이름으로 고평된 작품이다. ‘단편 서사시’란 짧은 서사시로서, 종래의 서사시가 영웅들의 세계를 노래한 반면 ‘단편 서사시’는 계급 투쟁에서 비롯되는 혁명적인 사건을 취급하여 서사적인 화자를 시 속에 끌어들여 표현하는 형식이다. 이러한 ‘단편 서사시’의 창작으로 임화는 일약 카프 내의 최고의 시인으로 떠오른다.
이 시는 시적 화자인 누이동생이 감옥에 갇혀 있는 오빠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남동생 영남이와 오빠와 함께 살고 있던 화자는, 오빠가 정치적인 이유로 구속되자, 동생과 함께 근무하던 공장에서 쫓겨나서 봉투에 풀붙이는 일로 겨우 연명해 나가고 있다.
그러던 중에 영남이가 사 온, 오빠가 매우 아끼는 질화로가 그만 깨어지고 만 것이다. 누이동생은 이 화로가 깨어진 것을 알려 주는 것으로부터 편지를 시작하고 있는데, 이 화로는 바로 오빠 또는 혁명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화로는 동생 영남이가 사 온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혁명의 정신이 계속하여 젊은 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은연 중 드러내 주고 있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화로가 깨어졌음은 곧
오빠의 구속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혁명 전선에서의 패배까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은 누이동생과 영남이는 오빠의 투쟁 정신을 되새기며 더욱 큰 일을 위하여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다. 그것을 임화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었어요 /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있고 / 그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듯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즉도 더웁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모든 무산 계급의 혁명적 연대 의식으로 확대되어 누이동생은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이처럼 프롤레타리아 문학(계급주의 문학)은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의 결말을 그 특징으로 하는데, 이러한 도식적인 창작 방법에 대해서 프롤레타리아 문학 진영 내에서도 자기 비판을 제기하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여 나아가게 된다. 그럴 때마다 항상 그 선두에 서서 진영을 이끌고 있는 이론가가 바로 위와 같은 ‘단편 서사시’로 프롤레타리아 시의 가능성을 열어 놓은 임화인 것이다.
[인용출처:*http://blog.naver.com/mklee831/40017195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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