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광동성 광저우의 강남인 판위(番)에 있는 최고급 차예관. |
보이차에 갓 입문한 사람들은 숙차를 먼저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생차의 존재는 모르고 보이차는 숙차만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오해에는 숙차를 탄생시킨 중국이 숙차를 편애하는 속내가 은연중에 깔려 있다.
1970년대 중국 광동성(廣東省)의 보이차 연간소비량이 200t이고, 홍콩은 6000t이었다. 대만과 홍콩의 보이차 애호가들은 노차(老茶)를 즐겨 마신다. 노차는 오래된 생차다. 그런데 노차는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오쩌둥(毛澤東) 정권이 생차에 정치적 색깔을 입혀 생산을 중단해 버렸다. 생차가 마오 정권에 의해 유산계급(有産階級)의 전유물이 되어 타도의 대상이 됐다. 1960년대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들은 중화민국 시절에 생산된 호급차(號級茶)를 찾아내어 불태웠다.
정치적 격변기에 정통 보이차인 생차의 가격이 가파르게 올랐다. 갈수록 진품을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대만과 홍콩의 보이차 애호가들은 보이차에 목말라했다. 윈난(雲南)에서 조금씩 나오는 생차로는 갈증을 채울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품 노차의 구감(口感)을 흉내 낸 저렴한 숙차가 출현했다. 1973년이었다. 마오쩌둥 정권이 생차 대신 숙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숙차는 생차를 강제 발효시킨 제품. 대만과 홍콩의 상인은 숙차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마오 정권이 만들어낸 숙차는 대륙에서조차 인기가 없었다. 정통 보이차로서의 품질과 맛 그리고 효능에 있어서도 생차를 당할 수 없었다. 수많은 중국 문헌을 통해 맛이 검증이 된 생차 앞에서 숙차는 맥을 못췄다. 마오 정권의 보이차 관련자들은 고민했다. 제품은 쌓이고 판로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생차에 목마른 대만과 홍콩 상인이 ‘숙차’를 차선책으로 선택하자, 중국의 고민이 풀렸다. 홍콩과 대만의 상인들은 대량 수입하기 시작했다.
대만 상인이 숙차를 선호한 건 상술이 숨어 있었다. 값이 싼 숙차는 약간 가공하면 값비싼 노차로 속여서 팔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과 대만이 서로 잘 아는 사실이지만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생차보다 이문을 더 남겨주는 숙차에 대만 상인들은 환호했다.
대만 상인들은 홍콩을 통해 수입한 보이차를 창고와 동굴에 대량으로 저장하였다. 생차는 장기보관해 노차로 만들었고, 숙차는 제조과정에서 생기는 특유의 냄새를 순화시켜 노차로 둔갑시켜 팔았다. 노차로 둔갑한 숙차는 몇십 배의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대만은 보이차 연구도 대륙보다 체계적으로 했다. 학자들을 동원해 보이차 연구에 몰두했다. 이들은 보이차의 역사와 효능, 시장을 연구해 방대한 자료를 축적했다. 대륙에서는 단절된 보이차의 맥을 결국 대만이 이었다. 1970년대 대만의 보이차 연구는 오늘날에도 인정된다. 보이차에 대한 품평은 대만의 영향력이 더 크다. 중국 보이차 업계에서는 윈난에서 만들어진 보이차가 대만에서 평가되며 광저우에서 마시고 광동성의 동관(東莞)에서 보관된다고 말한다.
현대 보이차 확산의 일등공신은 덩샤오핑(鄧小平)이다. 이 사실은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지난해부터 부각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덩샤오핑의 세 번째 아내 줘린(卓琳)은 윈난의 부유한 사업가의 딸이기도 하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 사망 후 덩샤오핑이 정권을 틀어잡고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 나섰다. 광동성 선전이 개혁개방 시범특구가 되었다. 홍콩과 인접한 주강 삼각주(珠江 三角洲)에 홍콩과 대만 사람들이 들어가 대규모 투자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대륙에 가서도 보이차를 즐겨 마셨다. 이들의 보이차 문화를 눈여겨본 대륙의 중국인들이 선망의 시선으로 덩달아 보이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보이차가 중국 대륙에서 소비되는 발화점이 된 것이다.
덩샤오핑은 차창별 브랜드와 로고 사용을 허락하였다. 보이차의 개별 상호와 이름을 허용하지 않고 국영기업의 이름과 로고를 획일적으로 사용하게 한 마오쩌둥의 시대는 지나갔다. 국유기업이던 맹해(孟海)차창을 비롯하여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노선에 따라 새로 생긴 차창들이 자신의 브랜드와 로고를 정식 등록하게 된다.
1996년부터 차예관(茶藝館)이 광동성에 유행처럼 만들어지며 보이차를 마시는 것이 고급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차예관은 고급 사교클럽이 됐다. 이곳에서는 다회와 전통문화 행사가 수시로 열리며 차연(茶宴)이라는 새로운 문화도 등장했다. 차예관은 이로써 일반 보이차 판매점과는 또 다른 방식의 고급 보이차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보이차가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알려진 계기는 2003년이다.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광동 지역을 중심으로 발병하고 세계적으로 확산되며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때 “보이차가 사스의 면역력 강화에 대한 효능이 있다”고 소문났다. 보이차 판매량이 폭증하게 되었다. 다른 종류의 차에 보이차라는 글자가 있는 포장지만 씌워도 팔려나갈 정도로 보이차의 인기는 치솟았다.
사스의 출현은 보이차가 약용작물이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21세기 초부터 중국 정부는 물론 해외에서도 보이차의 효능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발 빠른 다국적 제약회사가 윈난에서 대규모 다원을 운영하며 생약을 만들어내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보이차의 종주국이지만 대만보다 학술적 기반이 취약하다는 점을 잘 아는 중국 정부도 이를 극복하고자 숙차의 약리적 효능 연구를 열심히 하고 있다. 숙차를 생차와 맞대결하는 대신 약용으로서의 진로를 찾아보려는 현실적 돌파구를 찾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27일 중국 윈난성(雲南省) 푸얼시(普洱市)는 제2형 당뇨병(인슐린 비의존형)의 예방과 치료에 보이차의 탁월한 혈당조절 능력이 검증되었다고 발표하였다. 푸얼시가 윈난성 과기청(科技廳)에서 검증받은 내용은 푸얼시 보이차 연구소와 지린(吉林)대학 생명과학연구실(피셔 세포신호 전도실험실), 창춘(長春)이공대학이 120명의 당뇨병 환자와 동물을 대상으로 공동 연구한 결과다. 보이차가 혈당을 과다하게 높이는 인체 내 생물효소에 대한 직접적인 억제 효과를 통한 혈당강하 효과가 있음을 실험을 통해 증명하였으며 만성질환인 당뇨병을 치료하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로 인정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푸얼시는 이 연구 결과로 당뇨치료·비만억제와 관련된 5개의 국가발명특허를 출원했다고 한다. 이 발표는 지적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능성 보이차와 의약품 생산을 위한 초석을 중국이 마련했다는 무시 못할 의미가 있다.
대만과 홍콩으로 보이차의 주도권을 내주었던 중국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과 함께 다시 찾아온 보이차의 봄을 대륙에서 제대로 꽃피울지 궁금하다.
보이차 상식 차예관은 차관(茶館) 또는 회소(會所)라고도 하며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 많다. 식사와 술도 겸할 수 있는 차예관은 뇌물 수단으로 금보다 비싼 고가의 보이차를 주고받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한다. 시진핑(習近平) 정권이 들어서며 공무원들에게 보이차를 선물로 주고받지 말라는 지침이 생겼다는 소문이 들릴 정도로 보이차는 손쉬운 뇌물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
1956년 부산 태생. 유현목·이두용 감독 밑에서 영화를 배운 뒤 1984년 영화감독으로 데뷔. 1980년 무렵 보이차에 입문. 중국 윈난성 보이차 산지를 탐방하는 등 조예가 깊음. |
첫댓글 와~ 정말 재미납니다, ^^
근대 중국 보이차 역사를 뿌리부터 공부하는 시간 같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더 많은 분들께서 함께 읽으시고 이해하면서
보이차를 우린다면 조금은 더 가깝게 다가길 수 있으리라 생긱이 듭니다.
훌륭한 글 읽을 수 있어서 고맙고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힘찬 한 주 되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
좋은 공부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차 생활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