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2. '시인 김소월'
최근에 창간된 한 시전문 계간지가 시인과 평론가 1백명에게 지난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시인 10명을 선정해 달라는 설문을 낸 적이 있다. 그 조사에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첫 번째 꼽힌 시인은 다름아닌 김소월(金素月)이다. 올해로 꽉찬 탄생 1백주기를 맞은 소월은 한국 현대시인의 대명사이다. 그는 명실공히 이 땅의 민중의 한과 슬픔으로 덧난 상처를 보듬어 안은 민족시인이다. 그가 생애에 남긴 단 한 권의 시집인 "진달래꽃"은 무수히 많은 유.무명 출판사에서 숱한 판본으로 거듭 출간되었다. 그의 시집은 아직 공식적으로 집계되지 않았지만 세월과 무관하게 이 땅의 영원한 베스트셀러다. 평론가 김병익에 의하면 김소월은 서구(西歐)의 데카당적 시상(詩想)과 이국적(異國的)인 언어 형식만이 풍미하던 시대에 돌연히 나와 토속(土俗)의 이미지와 전통적인 7.5조의 민요풍 리듬속에 동양(東洋)의 심상(心象)을 최고의 격조로 수용한 시인이다. 평론가 송희복은 "그는 일제 강점기의 민족적 삶의 갱생을 부르짖은 경륜가가 아니었다. 당대의 표준적 생활수준으로부터 그닥 벗어나지 않았던 한 사람의 농민, 한 사람의 식민지 잔맹(殘氓)에 불과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변방의 이름없는 소지식인, 얼치기 농민, 저 북방의 소도시에서 신문지국을 경영하며 비관과 술로 서서히 자신의 생명의 불을 소진시켜가던 이 평범한 청년이 어떻게 우리 시대 최고의 높이에 도달한 민족시인으로 태어날 수 있었을까. 1923년 12월 하순 평북 정주의 산자락에 자리잡은 무덤들 주변을 한 남자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삼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에는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초췌해 보였다. 그는 간략한 성묘를 마친 후 한 무덤가에 앉아 무덤에 뿌리고 남은 술을 천천히 마셨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남자는 허청거리며 산길을 내려갔다. 내려오는 길에 그는 장에 들러 아편을 구했다. 그리고 서둘러 귀가해서 아내와 함께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그는 아내가 술에 취해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장에서 구해 온 아편을 삼키고 잠에 빠져든다. 그 다음날인 1923년 12월 24일 새벽에 그 남자는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소월이 우리에게 보여준 마지막 모습이다. 소월의 본명은 김정식(金廷植)으로 1902년 9월 7일에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평북 정주군 곽산면 남서동으로 그곳은 일찍부터 공주 김씨들만 백여 호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소월은 그 정주의 공주 김씨 문중의 장손으로 출생한다. 그의 부친 성도(性燾)는 소월이 두 살 나던 해인 1904년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들과 시비가 붙어 집단 폭행을 당한다. 당시 정주와 곽산을 잇는 철도공사에 일본 낭인(浪人)들이 투입되는데 김성도는 음식 선물을 말등에 싣고 처가 나들이를 나섰다가 그것을 뺏으려는 이들과 싸움이 붙었던 것이다. 말잔등에 거꾸로 매달려 돌아온 그의 부친은 근 한 달 동안 의식불명 상태로 있다가 깨어난다. 그 뒤로 정신이상자가 되어 평생을 폐인으로 보내게 된다.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난 것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혼자 구석진 곳에서 무언가를 소리없이 중얼거리고 있는 폐인 아버지는 소월의 운명이 품어 안은 원초의 어둠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 소월의 비사교적인 성격과 폐쇄적인 내향성은 그 어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소월의 유년기 인격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숙모 계희영(桂熙永)과의 만남을 빼놓을 수 없다. 신학문에 눈을 뜬 아버지 덕분에 일찍부터 언문을 깨우쳐 고대소설과 설화들을 탐독했던 계희영은 소월이 만 세살 되던 해 공주 김씨 문중으로 들어왔다. "신부인 나는 큰 머리를 하고 은봉채를 꽂은 채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데 개구멍 바지를 입고 눈은 샛별같이 반짝이며 네 살짜리 사내아이가 새색시 앞으로 다가앉으며 야, 새엄마다라고 반색을 했어. 사내아이는 치맛자락 가까이 다가앉아서 얼굴을 자세히 들여보다가 옷도 한 번 쓸어보고 종일 내 곁에서 떠나지 않았어"라고 숙모 계희영은 소월과의 첫 만남을 회고한다. 그 이후 소월은 틈만 나면 숙모의 곁으로 달려가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댔다. 성격이 활달하여 종가 살림살이를 떠맡고 있던 소월의 모친은 "인제부터는 자네가 우리 갓놈에게 이야기를 실컷 좀 들려주게. 나는 이야기하는 재질도 없고 또 할 말도 없어"라며 소월을 동서 계희영에게 떠맡겼다. 혼인한 직후부터 숙부가 고향을 등지고 외지를 떠도는 바람에 소박맞은 것처럼 혼자가 된 숙모는 틈날 때마다 찰싹 달라붙는 소월에게 심청전 장화홍련전 춘향전 옥루몽 삼국지 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비범한 기억력과 관찰력을 가졌던 소월은 이것들을 다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구술하는 데도 재간을 보인다. 폐인으로 일생을 마친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혐오의 양감정에 휩싸여 있던 소월을 소극적이고 여성적인 시세계로 이끈 것은 어머니와 수시로 옛날 이야기,민요를 들려주던 숙모로부터 받은 영향이 압도적이다. 유년기에 듣던 숙모의 이야기들은 소월의 문학적 자양이 되기도 하는데 평안도 박천 진두강가에 살던 오누이가 계모의 학대로 죽어 접동새가 되었다는 설화를 담은 "접동새"같은 시는 바로 숙모가 들려준 이야기를 모태로 씌어진 것이다. 부친이 폐인이 되자 광산을 경영하던 조부가 소월의 교육을 책임졌다. 공주 김씨 문중에서 세운 남산보통학교를 마친 소월은 민족적 자긍심이 강했던 오산학교에 진학한다. 여기서 그의 문학의 두 번째 스승인 김억을 만나게 된다. 소월은 김억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에 몰입하게 되고 "창조" 동인이었던 김억의 소개로 마침내 1920년 3월 "창조"에 "낭인(浪人)의 봄"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며 데뷔한다. 그리고 같은 해 학생계 7월호에 "거친 풀""흐트러진 모래"등을 발표하여 자신의 문학적 자질을 확인하게 된다. 그 후 소월은 3.1 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폐교하자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할 때까지 "개벽"에 "엄마야 누나야""봄 밤""진달래꽃""개여울""먼 후일"등과 소설 "함박눈"등을 꾸준히 발표한다. 이듬해인 1923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그 해 9월 관동대지진으로 짧은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다. 이때 서울에 머물며 안서와 함께 이리저리 직장을 구하고 활동무대를 찾았으나 여의치 않자 소월은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의 재능을 높이 사던 소설가 월탄 박종화는 이즈음 두어 번 소월을 만나는데 그의 인상을 단아하고 얌전한 사람이었다고 쓰고 있다. 잠시 "영대(靈臺)"의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1925년 소월은 살아 있을 때의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을 펴낸다. 이때 발표된 시편들은 거의 오산학교 시절, 그의 나이 불과 17,8세에 씌어진 것들로 여기에 나타난 민요의 가락, 한과 슬픔의 정조, 설화성 등은 당대 문인들의 주목을 받는다. 그의 스승인 안서 김억은 1939년 봄에 "소월시초(素月詩抄)"를 펴내며 "나이가 불과 17,8이라고 하면 아직도 세상을 모르고 덤빌 것이어늘 이 시인은 혼자 고요히 자기의 내면생활을 들여다보면서 시작에 해가 가고 날이 저무는 것을 모르고 삼매경에 지냈으니 조숙(早熟)이라도 대단한 조숙이외다"라고 소월에 대해 쓰고 있다. 문단의 성향이 카프 중심으로 한창 떠들썩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한켠에서 묵묵히 우리 고유의 언어와 정서를 빚어내던 김소월이 이 해 펴낸 이 시집은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그의 시를 가리켜 민요적 리듬과 부드러운 시골 정조 외에는 보잘 것 없다는 평가도 없지 않았지만 그는 이 시대 다른 작가들과 달리 서구사조의 모방이나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색채와 목소리로 노래한다. 나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영변에 약산/진달래꽃/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가시는 걸음걸음/놓인 그 꽃을/사뿐히즈려 밟고 가시옵소서//나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시집의 표제로 삼은 "진달래꽃"은 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이별이 처절할만큼 절제된 감정으로 표현되어 있다. 미래에 있을 이별을 예감하면서 가는 님을 잡지 않고 고이 보내드린다거나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린다고 말하는 것은 어느 서구 유행사조도 흉내낼 수 없는 한국식 사랑이다. 이러한 이별의 표현법은 진달래꽃 외에도 "못 잊어""예전에 미처 몰랐어요""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님의 노래""먼 후일""초혼""왕십리""산유화""엄마야 누나야" 등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작품에서 계속된다. 이것은 당시의 식민지 시대를 거쳐 해방, 전쟁으로 끊임없이 상실의 아픔을 겪게되는 우리 민족 역사 전반에 걸쳐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먼 훗날까지 많은이들에게 애창된다. 김소월의 전반적 작품 경향은 우리의 전통적인 시편들인 "정읍사""가시리"와 맥이 닿아 있다. 그는 님과의 사랑, 이별, 한 등을 향토적.민요적 언어와 율격에 담아 표현해 낸다. 때문에 수많은 주옥 같은 시편들에도 불구하고 유교류의 휴머니스트라든가 과거지향적 수동주의 라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유교적 과거지향은 도덕이나 규범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님이 원할 때면 언제라도 기꺼이 보내드릴 용의가 있는 융통성 있는, 즉 현대적 자유가 부여된 복고주의로 해석되어야 한다. 또한 1924년 이후에 발표한 "나무리벌 노래" 외에 연대미상의 작품 "봄""남의 나라 땅""전망""물마름""옷과 밥과 자유""가을맘에 있는 말이라고 다 할까보냐" 등의 시편과 유일한 소설 "함박눈" 등을 보면 민족적 저항의식이 은근히 깔려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중 빼앗긴 땅에 대한 회복을 염원하는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다면"이 눈에 띈다.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벌가의 하루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마을로 돌아오는 꿈을/즐거이 꿈 가운데.//그러나 집잃은 내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다면!/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 물 손에/새라새롭은 탄식을 얻으면서"(중략) 소월의 한은 그의 성장기적 배경과 삶의 고단에서 오는 우울, 그리고 시인이 말하듯 남의 나라 땅에서의 서러움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를 따라다니던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허무의식과 슬픔에서 연유한 것에 더 직접적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곧 그의 생애의 비극적 결말과도 연결이 된다. 그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확증은 없다. 다만 그가 죽기 얼마 전 김억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보며 당시 그의 허무를 짐작할 따름이다. "제가 구성(龜城)와서 명년이면 10년이옵니다. 10년도 이럭저럭 짧은 세월이 아닌 모양입니다. 산촌 와서 10년 동안에 산천은 별로 변함이 없어 보여도 인사(人事)는 아주 글러진 듯하옵니다. 세기는 저를 버리고 혼자 앞서서 달아난 것 같사옵니다. 독서도 아니하고 습작도 아니하고 사업도 아니하고 그저 다시 잡기 힘드는 돈만 좀 놓아 보낸 모양이옵니다. 인제는 또 돈이 없으니 무엇을 하여야 좋겠느냐 하옵니다." 소월이 자신에게 상속된 전답을 팔아 식솔을 끌고 처가인 구성군 평지동으로 이사한 것은1924년이다. 그곳에서 동아일보 남시지국(南市支局)을 인계받아 혼자 신문 배포, 수금을 모두 책임지고 경영한다. 그러나 사업 수완이 전무하고 세속적인 처세에 서툴렀던 그는 곧 파산해 버리고 생계를 위해 어울리지 않게 고리대금업에도 손을 대보지만 이내 실패하고 만다. "조선문단" 1927년 2월호 문단소식 난에 의하면 그때까지 소월이 남시지국을 경영하고 있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문학도, 생활도, 삶에 대한 일체의 애착도 놓아버린 소월은 술에 기대 세월을 보낸다. 소월이 술꾼으로 허송세월하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문중에서조차 그를 불량자로 낙인찍고 천시한다. 잦은 통음(痛飮)으로 몸과 마음이 극도로 피폐해진 소월은 1934년 12월 23일 아편을 먹고 서른세 해의 생을 마감한다. 민족의 토속어.토착어를 가림새 있게 시적으로 승화하는데 발군의 역량을 발휘(송희복)한, 지난 세기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민족시인이었던 김소월은 식민지 변방의 소지식인으로 회의와 실의의 세월을 보내다가 그렇게 덧없이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만 것이다. 유장한 슬픔과 한의 시편들을 빚은 소월이 죽은 뒤 거의 한 세기에 걸쳐 그의 민요적 가락과 민족적 설화, 정한을 담은 시편들은 오랫동안 시름 많고 흠집 많은 우리 겨레의 심사를 달래주며 널리 애송되고 있다. (2002년 한국경제 연재,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