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석철 편집장 / 사진 이윤상 작가
박정헌은 오른손잡이다.
글을 쓸 때 그랬다.
자서전적 생환수기집
<끈>에 저자 서명을 부탁했을 때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엄지와 뭉툭해진 인지로 써내려간
박정헌체는 연예인들의 친필사인처럼
예와 끼를 담고 있었다.
'경남공감, 도민과의 소통의 길로
저버리지 못하는 산이다
박정헌 대장…
2017.4.3. 실내 암벽장 *Yeti에서'
* Yeti(예티)는 히말라야에 산다는 전설적인
괴인 눈사람이다.
사인이 끝나고 늘 다른 것을 추구해온 박정헌 대장에게 필자도 다른 식으로 물었다.
보통 산을 오르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만 내리막도 길이니까 내려오는 것은 어떤 의미냐고 했더니 하산은 등반의 절반이라 한다.
"등반에서 오름은 끝이 아닙니다, 정상도 반환점이죠. 대지의 두 땅, 오르는 길과 내려오는 길을 모두 밟아야 완전한 등반이라 할 수 있죠."
그의 말대로 박정헌은 지난 12년간 산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고난도 거벽 등반가답게 히말라야를 수도 없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거벽 등반가 박정헌이 돌아왔다
'박정헌과 함께하는 히말라야 알파인스쿨'이 문을 열었다. 지난 4월 21일 로 부제 동봉(6119m)을 향해 제1기생들이 출발했다.
박정헌 대장의 안내로 10명의 남녀가 미리 정해 놓은 코스를 따라 트레킹 중이다.
여전히 줄지어선 고난도 히말라야 등 반대열을 생각하면 이들의 등반은 주목할 '깜'이 아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다.
거벽 등반가로 세계 등반사를 새로 쓴 박 대장이 히말라야를 다시 오르는 것은 12년 만이다. 박 대장의 8개 손가락은 한두 마디씩 잘려나갔다. 발가락2개도 마찬가지다. 직각을 넘어선 오버행 암벽까지 기어오르며 새 길을 개척한 지난 2005년 촐라체 북벽 등정 때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손마디가 짧아져 뭉툭한 바위보다 모난 바위가 더 편해진 박 대장을 히말라야로 다시 불러들인 통로는 서정빈(65)씨였다. 서씨는 박 대장이 운영하는 경남 진주의 실내 암벽장 '예티'를 드나들며 죽기 전에 해야 할 버킷리스트에 히말라야 등정을 넣었다. 암벽체험수업 때 난이도가 낮은 코스를 선택하는 박 대장을 보면서 가슴이 아파 아예 히말라야 길잡이를 부탁했다.
"제가 졸랐죠,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 당신은 꿈을 이루었으니 우리의 꿈도 이루게 도와달라고 했죠."
촐라체 하산 길 사고로 손가락 8개 잃어
2005년 1월 박정헌은 후배 최강식과 함께 촐라체 북벽 등정에 도전했다. 사흘 만에 새로운 길로 정상에 올랐지만 하산 도중 사고를 당한다. 후배 최강식이 크레바스(crevasse)에 빠졌고 끈 하나로 연결된 두 사람은 초인적인 힘으로 크레바스를 빠져나와 구사일생으로 구조됐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수술을 받았다. 최강식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동상의 후유증으로 모두 잘라냈다. 험한 길만 골라 히말라야를 주름잡았던 산사나이들이 크레바스보다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 이후 박 대장은 히말라야를 완전히 하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생사의 갈림길에 떠오른 것은 가족뿐
또 히말라야를 찾는데 가족들에게 미안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대뜸 이기적 DNA로 응수한다.
"아닙니다. 저를 이해하는 것은 가족들의 몫이죠. 아버지가 정상에 있다면 가족들은 해발 1000미터에 있다고 할까요? 위치가 다르면 생각이 다르죠. 사고율로 치자면 고속도로가 산보다 훨씬 더 위험해요."
사실 박 대장은 미안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을 뿐이다. 손가락 절단 수술을 앞두고 수없이 결정을 뒤집었다. 아내와 아들딸에게 잘려나간 손발가락을 내보일 자신이 없었다. 갈비뼈가 부서지는 고통을 참아가며 크레바스에 떨어진 후배를 끈 하나로 끌어당기던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그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가족이었다.
"혈육이니까요. 왜 가족들이 떠올랐는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인터뷰 내내 아내 정정엽씨는 참 행복해보였다. 곁에 있는 남편이 더 좋은 모양이다. 산에 있는 남편과 어찌 비교하겠는가? 성인이 된 아들 성율씨도 밝기는 마찬가지다.
"남편의 불행이 가족들에게 행복일수 있지요. 그러나 촐라체 사고 이후 언제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고, 아이들도 저도 든든한 후원자가 됐어요. 가족이잖아요!"
박 대장 가족은 행복바이러스 충만한 전화위복 그 자체였다.
산은 젊었을 때는 붉은색, 지금은 푸른색
박 대장에게도 산은 변하고 있었다. 젊었을 때 산이 붉은색이었다면 지금은 푸른색이라고 말한다. 젊었을 때는 산이 아니면 죽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아니라 한다.
산 속이 아니라 밖에서 볼 줄도 알아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자주 했다.
그렇다고 산 DNA가 모두 사라졌다는 말은 아니다. 하산할 때는 오를 때보다 힘을 더 빼듯이 인생 후반전에는 전반전과 다르게 살게 되는 자연스러움을 말하고 싶은 거였다. 박 대장에게 가장 힘든 선택은 '철수'이다. 오랫동안 공들인 등정을 중도에 포기할 때가 가장 고통스럽다.
다르게 다가온 산, 책임을 동반한 선택, 미안하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가족들의 이해를 바탕으로 박 대장은 새로운 삶을 설계하고 있다.
끝나지 않은 도전, 걸어서 지구 한바퀴
그는 지금 걸어서 세계일주를 기획하고 있다. 쉰 살이 되는 내후년에는 남극에서 북극을 잇는 대장정을 통해 도보로 세계를 한 바퀴 돌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그가 오른 등고선을 옆으로 길게 늘여놓고 발로 밟고 지나가겠다는 발상이다. 2년 일정에 최소 30억원의 비용을 예상한다.
"이번에는 테크닉이 아니라 지구력이 관건입니다. 가족들과는 의논하지 않고 그냥 통보할 것입 니다."
끝으로 암벽을 오르는 모습을 촬영하고 싶다 했을 때도 주저함이 없었다. '나 박정헌이야'를 몸으로 보여주려는듯했다. 손으로 버틸 때도, 몸을 구부려 같은 색상의 홀더를 짚을 때도 역사들의 팔처럼 선명한 힘줄이 그어졌다.
걸어서 지구 한 바퀴 대장정을 설사없던 일로 하자 한들 누가 무엇이라 할터인가!
박정헌은 언제나 히말라야만큼이나 높은 곳에 삶의 목표를 두고 살고 있다. 한 번도 히말라야를 떠나본 적 없는 영원한 히말라야 예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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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경남 사천 출생
1989 초오유 동계 남동벽 등반
1994 안나푸르나 남벽 등정
1995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정
1996 초오유 등정, 시샤팡마 중앙봉 등정
1997 낭가파르밧 등정
1999 K2 토모체센 루트 등반
2000 K2 남남동릉 무산소 등정
2002 시샤팡마 남서벽 신루트 등정
2005 촐라체 북벽 등정
2011 히말라야 2400km
무동력 패러글라이딩 횡단
2014 히말라야 6500km
무동력 익스트림 횡단
현 등산문화연구소장
한국국제대 홍보대사
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
비영리법인 히말라얀 아트 갤러리 대표
한국등산문화연구소 소장
예티 클라이밍짐 대표
첫댓글 대단한사나이 박정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