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핏파이어의 Mk.V는 새로운 멀린 45 엔진을 탑재해서 기존의 Mk.II 보다 훨씬 강한 출력을 확보하고 당시 메서슈미트 Bf 109F가 등장하여 자칫 Bf 109 시리즈와의 성능의 균형이 열세가 될 뻔한 상황에서 대등한 수준이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스핏파이어의 주익의 형태 변천사를 미리 흝어보겠습니다.
(Mk.I/II/V에 일반적인 타원형 주익 형태)
(날개 끝을 절단한 형태로 저고도에서 공중전을 벌일 때 비행 성능을 향상
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적용된 방법입니다. L.F.Mk.VB라고 불리는 이 버전은
Fw 190이 등장해서 성능이 열세가 되자 보다 강력한 멀린 65 엔진을 탑재한
Mk.IX형이 준비되기 전까지 임시 방편으로 강구했던 방법입니다.)
1940년 8월부터 11월까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 전투기들이 루프트바페의 Bf 109E를 비롯하여 슈투카와 쌍발 폭격기들을 상대로 얻어낸 값진 승리 후에 히틀러는 영국 본토 상륙(일명 "바다사자 작전")의 야욕을 거두고 동부전선과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촛점을 맞추게 됩니다. 하지만 비록 승리는 했지만 엄청난 희생을 치룬 영국 입장에서는 아직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니고 충분히 자국을 초토화시켜버린 나치 독일에 대해서 응분의 대가를 치루게 하지도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다시 한번 루프트바페의 본토 폭격이 시작되지 말라는 법도 없었고 실제로 1941년부터 1945년 종전이 임박한 시점까지 나치 독일은 본토 공격과 심지어 V2 로켓과 같은 새로운 공격 방법으로 영국 공군과 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영국 공군(RAF) 지휘부는 1941년 초에 그동안 방어와 제공권 확보 중심의 전략에서 독일의 점령 지역인 프랑스를 공습하는 공격 위주의 전략으로 변경하게 됩니다. 즉 날아오는 루프트바페 전투기와 폭격기들을 격추시키기 바쁜 수동적인 전략에서 도버 해엽을 건너 독일 본토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프랑스 지역에 독일측 주요 시설과 루프트바페 공군기지를 파괴하는 공격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1941년초에 영국 공군(RAF)이 보유했던 쌍발 폭격기 브리스톨 블렌하임, 효과적인 폭격이
가능했떤 아브로 랑카스터 중폭격기는 1942년이 되어서야 등장했으므로 1940년 후반에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만시창이가 되어버린 영국 국민들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 RAF는 1941년 초
부터 프랑스 본토 공습을 결정하였지만 당시 보유했던 폭격기는 효과적인 폭격을
하기에는 준비가 미비한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루프트바페가 그러했듯이 주간 폭격은
매우 위험한 임무였고 속도가 느린 폭격기 조종사들의 경우에는 아무리 전투기들의
호위가 있더라도 무모한 행동이었습니다. 참고로 대부분의 영국 폭격기들은 루프트바페
주력 전투기인 Bf 109에 비해서 최고 속도가 100km나 차이가 나는 느린 속도였습니다.)
사실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은 공군 기지에서 24시간 대기하는 조종사들이 방공 기지로부터 루프트바페 전투기와 폭격기가 출현했다는 연락을 받으면 서둘러 뛰어나가 출격하였고 문자 그대로 "개싸움"(Dogfight : 공중전을 일컫는 용어)처럼 적기를 쫓아가며 격추시키는 혼란스러운 교전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스핏파이어는 주로 Bf 109나 전투기 용도의 쌍발 군용기들이나 슈투카를 상대했다면 호커 허리케인 전투기는 본격적으로 폭격기 편대를 상대하는 역활 분담이 이루어졌지만 이것도 스핏파이어의 공급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허리케인이 Bf 109를 상대하기도 하였고 한마디오 "그때 그때 달라요"式의 혼란스러운 전투였습니다.
하지만 1941년 이제는 당하지만 말고 우리가 먼저 찾아가서 파괴하자는 방향이 결정되자 RAF는 철저하게 편대 단위의 출격으로 계획을 세워서 임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이렇게 프랑스 지역 공격에 동원된 전투기들은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에 추가로 웨스트랜드 월윈드(Westland Whirlwind) 전폭기도 포함되었습니다.
(1940년 6월에 최초로 공급된 웨스트랜드社에 월윈드 전폭기는 쌍발 롤스로이스 페레그린 엔진으로
강력한 파워와 시속 580km까지 낼 수 있는 성능을 가졌고, 무려 4문의 히스파노 20mm 기관포로
무장할 뿐만 아니라 500파운드 폭탄 2개를 장착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스핏파이어나 허리케인보다
훨씬 긴 항속 거리로 인해서 프랑스 지역 공격에 큰 활약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빈번한 결함으로
불안정한 성능을 보여주었고, 워낙 개발이 지연되어서 정작 생산이 시작된 싯점에 폭격기 요격 임무는
2문의 20mm 기관포를 장착한 스핏파이어에게 맡겨지고, 쌍발 전폭기의 임무는 더 성능이 우수하고 안정된
성능을 가진 브리스톨社에 뷰파이터(Bristol Beaufighter) 중전폭기가 맡게 되어서 대부분 야간 폭격 임무로
돌려졌다가 1942년 1월까지 고작 116대가 생산되고 생산이 중지됩니다.)
이제는 스핏파이어를 비롯한 영국 전투기들이 불과 몇달 전에 루프트바페에 Bf 109와 슈투카와 같은 전투기/전폭기들이 경험했던 항속 거리의 한계와 부족한 연료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으로 역전되어 버린 것입니다. 실제로 프랑스 지역 공습은 RAF 폭격기들뿐만 아니라 이를 호위하는 전투기들에게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데 주로 주간에 진행된 초기의 공습은 1940년에 영국 상공에서 루프트바페 조종사들이 불리한 조건과 한정된 시간으로 인해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갚아주기에 안성맞춤인 기회가 되었습니다. Bf 109는 영국 전투기들과의 공중전 중에 연료가 부족하면 근처에 아군 비행장에 내려서 주유를 한 후에 바로 다시 이륙하여 남은 적들을 소탕할 수 있는 느긋한 전투가 가능했고 실제 전투기들이 출격하기 전에 굳이 88mm 대공포가 아니더라도 수없이 배치되어 있는 20mm 대공포만으로도 저고도 비행을 하는 영국 전투기들은 얼마든지 위협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이 패했지만 루프트바페의 에이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조종사들은 절대 전투기의 성능이나 조종사의 능력이 영국에게 떨어져서가
아니라 부족한 연료 조건을 무릅쓰고 폭격기의 호위를 해야 하는 임무 자체가 영국
조종사들과의 진검 승부를 겨룰 수 있는 정당한 조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
했고 그점에 대해서 매우 원통해하고 있었습니다.)
Fw 190 등장하다!
(포케불프 Fw 190 전투기는 Bf 109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2차대전 루프트바페의
주력 전투기였습니다. Bf 109보다 훨씬 늦게 1941년말에야 그 모습을 드러낸
이 전투기는 1941년초반에 스핏파이어 Mk.V를 가지고 간신히 Bf 109F의 성능을
따라갔던 RAF에게는 또한번의 충격이었습니다.)
1941년 후반기에 스핏파이어에게 Bf 109에 이어서 위협적인 존재가 되는 또 하나의 강력한 라이벌 포케불프 Fw 190 전투기가 드디어 전선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Bf 109 이외에 강력한 전투기의 출현을 미리 예측하지 못했던 RAF는 전선에서 새롭게 발견되곤 하는 원형 엔진 탑재의 신형 전투기에 대해서 1942년 6월에 루프트바페에 아르민 파베르 중위가 실수로 영국 웨일즈에 비행기지에 자신의 Fw 190을 착륙시키게 되면서 새로운 전투기가 당시 스핏파이어보다 더 뛰어난 성능과 무장이 되어있음을 알게 됩니다. Fw 190을 샅샅이 테스트한 결과 당시 영국의 최신 기종인 스핏파이어 Mk. Vb가 선회 능력을 제외하고 모든 항목에서 열세임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Fw 190은 최소한 스핏파이어 Mk.V보다 무려 시속 40~50km 더 빠른 전투기였고, 고도 상승 속도 역시 훨씬 더 빨랐습니다. 결국 RAF 사령부는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영국 본토와 프랑스 지역 공격 중에 Fw 190을 만나면 무조건 최고 속도로 달아나라는 지침을 내리게 됩니다. 동시에 새롭게 등장한 강적을 상대하여 격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전투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날개 절단형 L.F Mk.Vb)
1942년 후반까지 Fw 190과의 어느 정도 대등한 성능을 갖추기 위한 임시 방편으로 스핏파이어 L.F Mk Vb(주익 끝을 절단한 형태: 위에서 설명)를 공급 받게 됩니다. 이 버젼은 임시 방편으로 멀린 엔진에 공기 공급 회전 날의 직경을 줄이고 일부 구조를 수정하여 저고도에서 좀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임시방편으로는 Fw 190와의 열세를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스핏파이어 Mk.IX
Fw 190과의 공중전으로 인해서 스핏파이어의 격추 댓수가 급격히 늘어나자 RAF 사령부는 패닉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루프트바페 에이스 한스 한은 그의 108대의 격추 기록 중에서 스핏파이어가 53대를 차지했고, 요세프 프릴러는 101대 중에서 68대가 스핏파이어였습니다. 희생된 스핏파이어는 대부분 1941년 초에 Bf 109F의 성능을 따라 잡았다고 기뻐했던 Mk.V형이었습니다.
(스핏파이어의 주익이 개조된 또 하나의 사례는 Mk. VI / VII형에 적용된 고고도에서
운동성 저하를 막기 위해서 적용된 연장익(H.F)입니다.)
1942년초에 드디어 개발이 완료된 Mk. IX(九)는 Mk.V보다 더 강력한 멀린 61 엔진을 탑재했습니다. 1942년 7월에 RAF가 탈취한 루프트바페의 Fw 190와 스핏파이어 최신형 Mk. IX와 모의 공중전을 실시한 결과 어느 정도 대등한 성능을 갖게 되었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아직도 20,000피트 고도에서와 3,000 피트 고도 이하에서 Fw 190이 좀 더 빠르다는 결과가 있었지만 Mk. IX가 Fw 190보다 훨씬 뛰어난 선회 성능을 가지며 공중전에서 우세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였습니다.
(1942년 3월에 치열한 지중해 항공전이 벌어졌던 몰타 섬에 스핏파이어 Mk.V형이
배치되었습니다.)
(스핏파이어 Mk.Vb "트롭", 북아프리카 전역과 몰타 섬에 공급된 스핏파이어는
사막 모래 여과 장치를 기수 밑에 부착하였습니다. "트롭"의 뜻은 "Tropical"의
줄인 말입니다. 즉 열대 기후용
몰타 섬에 항공전에 관해서 잠시 설명이 필요합니다.
(몰타 섬은 지중해에 이태리 "장화" 모양의 반도에 바로 밑에 있는 시실리 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위치한 아주 작은 섬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이태리와 전쟁을 하는 나라의 경우 매우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 될 수 있는 곳입니다.)
2차대전이 발발하기 약 150여년 전인 1800년에 영국 해군의 불세출의 영웅인 넬슨 제독이 이끄는 함대는 이곳 몰타 섬을 영국 영토로 정복하게 됩니다. 이태리 코 앞에 있는 섬인데도 영국은 2차대전 이태리와 전쟁이 발발하는 싯점까지 여전히 이곳을 영국의 영토로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이태리 무솔리니는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서 엄청난 규모의 이태리 공군을 투입하여 폭격을 가합니다. 하지만 영국은 몰타 섬에 주둔한 영국군을 지원해줄 수 있는 여유가 없었고 고작 3대의 복엽기를 수십대의 이태리 폭격기들을 상대로 분전한 영국 공군의 조종사들은 기적과 같이 약 한달 동안 이속을 지켜냅니다. 이후에 영국 본토의 항공전이 승리로 돌아가고 조금 여유가 생기자 서둘러 호커 허리케인 전투기 편대와 대공포를 추가로 공급한 후에 또다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게 됩니다. 사실 여전히 영국 본토와 프랑스 지역에서의 전투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전투에 비해서 우선 순위에서 밀리다보니 1942년 3월이 되어서야 영국 최강 전투기 스핏파이어 Mk.V가 지원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비록 부족한 지원으로 어렵게 방어를 해나가고 적지 않은 희생을 치뤄야 했던 영국군은 하지만 끝끝내 이곳을 방어해냈습니다. 이곳에서 벌어진 치열한 항공전은 따로 나중에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몰타의 기사
(조지 뷰링 (1921년~1948년) 몰타 항공전에서 활약한
천재적인 격추 에이스, 그가 만약 독일 공군 에이스들
만큼 전투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에 못지않은 기록을
세웠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1942년 3월 영국 항공모함 이글호에 실려서 몰타 섬에 보내진 15대의 Mk Vb형은 유럽 대륙 밖으로 공급된 최초의 스핏파이어 기종이었습니다. 그만큼 영국 본토와 서부 전선 이외에 지역에 스핏파이어와 같은 최강 전투기보다는 생산성이 훨씬 높아서 비교적 충분한 숫자가 확보된 호커 허리케인 전투기가 우선적으로 공급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몰타의 전략적인 중요성을 깨달은 영국 지휘부는 스핏파이어 공급을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후에 Vb형은 북아프리카 전역과 태평양 전선에도 공급되었습니다.
어쨌든 몰타 항공전에서 스핏파이어를 몰고 전투를 했던 조종사중에 뛰어난 격추 기록(통산 32대 격추)으로 영국 공군의 최상급 에이스로 명성을 얻은 조지 뷰링이 있습니다. 그는 하사관 계급이었지만 몰타 섬에서 불과 14일 동안에 무려 27대의 추축군 전투기와 폭격기들을 격추시킨 기적과 같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Mk.IX가 RAF 조종사들에게 공급되자 비로서 Fw 190와 Bf 109의 신형 버전들과 대등한 공중전을 벌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Mk.IX가 경쟁력을 갖춘 성능을 보유하게 되었지만 전쟁의 양상은 스핏파이어의 활약을 타의에 의해서 제한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바뀌어갔는데 그 이유는 스핏파이어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점점 패색이 짙어가는 적 나치 독일 탓이었습니다. 앞에 글에 첫머리에서 윌리엄 그린의 저서에 나온 글을 인용했듯이 스핏파이어는 최고의 방어용 전투기라는 의미가 이제 이해가 갈 대목입니다. 스핏파이어는 뛰어난 비행 성능으로 영국 본토 제공권을 놓고 루프트바페의 최정예 전투기 Bf 109E와의 공중전에서 성공적인 활약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1941년 프랑스 북서지역 소규모 공격 임무에 투입된 후에 한정된 연료 적재랑으로 짧은 항속 거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충분한 폭탄을 탑재하지 못하는 탓에 기껏해야 철도나 포장 도로에 기관총이나 기관포 정도로 사격을 해대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게다가 워낙 짧은 항속 거리 탓에 폭격기 편대 호위를 따라가기에 턱 없이 부족하였습니다.
1943년에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을 하게 되자 영국 해엽을 건너 프랑스 지역뿐만 아니라 독일 본토로까지 폭격 편대들이 공습 임무를 띄고 날아가게 되는데 이런 대규모 폭격 편대들의 호위 임무를 맡은 전투기들은 스핏파이어나 허리케인이 아니라 P-51 무스탕이나 P-38 라이트닝 전투기였습니다.
전투기
스핏파이어
허리케인
P-51 무스탕
P-38 라이트닝
항속 거리
1,840km
965km
2,755km
2,100km
(P-38 록히트 라이트닝 전투기, 이 강력한 쌍발 전투기는 유럽 대륙뿐만 아니라 태평양
전쟁 지역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합니다.)
(P-51 무스탕 전투기는 Bf 109나 스핏파이어보다 훨씬 늦게 1943년에 유럽 상공에
등장합니다. 늦게 등장한 만큼 가장 강력한 공격형 전투기로써 기록에 남게 됩니다.)
스핏파이어 Mk. XIV (1944년~1945년)
(Mk.XIV의 특징은 새롭게 롤스로이스 그리폰 엔진을 탑재하여 무려 720km에 이르는 엄청난
속도가 가능해졌습니다. 이를 위해서 기존의 3날 프로펠러를 5날 프로펠러로 바꾸었습니다.)
롤스로이스社는 그동안 스핏파이어용으로 멀린 엔진을 생산하였는데 1943년에 그리폰이라 불리는 새로운 엔진을 개발합니다. 실제 그리폰 엔진은 멀린 엔진보다 약간 길고 컸는데 따라서 그리폰 엔진 탑재 스핏파이어는 기수의 설계가 변경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스핏파이어 Mk. XIV(十四)라고 명명된 그리폰 엔진 탑재 생산 버전은 최종적으로 2,050마력의 파워를 갖게된 그리폰 65 엔진을 탑재하게 됩니다. 1944년에 역대 최고의 성능을 갖게 된 스핏파이어 Mk. XIV는 태평양 전쟁 지역에서 일본 공군과의 공중전에서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1940년에 Mk.I의 멀린 엔진이 1,030마력이었고 최고 속도 역시 600km를 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44년에 생산을 시작한 Mk. XIV는 무려 720km까지 최대 속도가 올라가게 됩니다. 또한 Mk.I 이 8정의 기관총을 주익에 장착하였던 것에 비하면 Mk. XIV형은 E-type이라 불리는 개선된 강력한 화력의 20mm 히스파노 기관포 2문과 12.7mm 기관총 2정으로 무장하여 한층 강화된 파괴력을 갖게 됩니다. 이미 루프트바페의 2대 라이벌들이었던 Bf 109와 Fw 190도 이때쯤 되면 스핏파이어가 성능 면에서 멀찌감치 추월을 하게 되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렇게 월등한 속도를 갖게 된 스핏파이어를 기다리는 전혀 새로운 상대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치 독일이 개발한 세계 최초의 "로켓 추진 미사일" V-1이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영국 상공에 나타나서 국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이 전혀 새로운 개념의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마치 현대전에서 패트리오트 미사일과 같은 역활을 빠른 속도의 스핏파이어 전투기가 맡아서 요격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대전 말기에 영국 국민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나치의 미사일 V-1)
(스핏파이어의 목숨을 건 육탄 돌격 - V-1 미사일의 최고 속도는 시속 640km였습니다. 이정도
속도를 추격하여 요격할 수 있는 전투기는 연합국 내에서 스핏파이어 Mk. XIV형 정도는 되어야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V-1을 사격하면 공중에서 폭발을 일으키게 되는데 200야드 이내에 요격기가
비행하고 있으면 폭발시에 파편을 맞고 손상이 되어서 추락하는 불상사가 생겼습니다.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사격으로 잡는 것보다 나중에는 위에 사진처럼 근접 거리까지 따라가서 주익으로 V-1의
날개를 건드려서 추락하게 만드는 "곡예 비행"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는 용감한 조종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리핀 엔진이 생산되었지만 멀린 엔진의 후속 버전을 탑재한 스핏파이어도
계속 생산이 되었습니다. 스핏파이어에 탑재된 롤스로이스 멀린 66 엔진)
스핏파이어는 영국인들이 "불멸의 스핏파이어"(Immortal Spitfire)라고 부를 만큼 사랑을 받았던 2차대전 영국의 수호신과 같은 전투기였습니다. 호커 허리케인 전투기와 함께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나라를 구하였고 당시 유럽 최강의 공군력을 자랑하던 Bf 109의 에이스 조종사들이 유일하게 두려워했던 적의 전투기였습니다.
또한 Bf 109와 Fw 190 2종의 루프트바페 주력 전투기들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성능의 경쟁을 벌였던 숙명의 라이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스핏파이어 함재기 버전인 씨파이어(Seafire)는 후에 따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네분의 고수님들 중에 우선 주인장님과 키위맨님 작품 고증 시작해보겠습니다.
1.주인장님 작품 : 스핏파이어 Mk. Vb
(바로 이작품입니다.)
(이 키트는 조금 혼란스러운 작례를 보여줍니다. 즉, 박스 커버 아트를 보면 히스파노 기관포
2문이 장착되고 F형(일반 타원형) 주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용 설명서에 작례를 보면 날개 절단형(L.F형)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즉, 이 키트는
F형과 L.F형 두가지 형태로 선택을 주었네요.)
스핏파이어 Mk. V형 뒤에 a 또는 b와 같은 알파벳이 붙는데 이것은 주익에 무장한 타입을 나누는 것입니다.
a 타입은 최초의 무장인 주익에 총 8정의 브라우닝 7.7mm 기관총만 장착된 타입을 의미합니다.
b 타입은 Bf 109의 기관포의 위력에 대응하기 위해서 20mm 히스파노 기관포 2문과 7.7mm 기관총을 장착한 타입니다.
(b 타입의 무장을 한 스핏파이어, 길쭉한 기관포 포신이 보입니다.
주인장님 작품의 위장 도색도 위에 작례와 동일합니다.)
따라서 Mk. Vb형이라 함은 기관포가 장착된 조건인 셈입니다. 또한 스핏파이어 Mk.Vb의 경우 위에 설명에도 나왔듯이 날개 절단된 L.F Mk.Vb형이 등장합니다. Fw 190이 새롭게 전선에 등장해서 Mk.V형이 성능에서 열세임이 입증되자 날개 끝단을 잘라내고 저공에 공중전에서 민첩성을 더해주기 위했다고 이미 위에서 설명했었지요. 하지만 주인장님의 작품은 F형 유선형 오리지날 디자인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측면에 편대 표시를 가지고 어느 편대인가를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사진에는 "GM"으로 보이지만 캐노피 옆에 문이 열려서 "A'자를 가렸습니다.
통상 동체 측면에 알파벳 마킹은 이전투기가 어느 편대 소속인가를 알 수 있는 표시입니다. "AGM"이라면......허걱 RAF 최고의 편대였던 제74 편대의 편대장이었던 아돌프 말란이 이듬해 런던 방공을 책임지는 비긴 힐(Biggin Hill) 비행기지에 전투비행단장(Wing Commander)으로 임명된 후에 그가 조종하는 愛機였던 스핏파이어였던 것입니다.
(영국 공군의 전설적인 제74 편대를 이끈 영웅,아돌프 G. 말란(1910년~1963년)은 1940년 본토
항공전에서 74편대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이어서 런던 근교에 비긴 힐 (Biggin Hill)
공군기지에 전투 비행단장에 임명되었고, 1944년 D-Day에는 직접 편대를 지휘하며
노르망디 해변 상공에서 전투 비행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의 최종 기록은
지휘관으로 승진되기 전에 편대장으로써 전투에 참가하였던 1940년~1941년
단 2년간 무려 30대의 루프트바페 격추를 달성합니다. )
(1969년 개봉했던 "공군 대전략"(Battle of Britain)에서 아돌프 말란役으로
출연했던 로버트 쇼(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죠스"에서 플린트 선장으로
출연했었지요.)의 콕핏트에서 찍은 스틸 사진)
여기서 말란이 영국 본토 항공전에 편대장으로 이끌었던 RAF 74편대를 잠깐 소개하면.....2차대전 초기인 1940년 프랑스 덩커크 철수 작전에서부터 74편대의 스핏파이어 Mk.I은 등장합니다. 바로 루프트바페의 Bf 109E가 도버 해엽을 건너 도주하는 영국과 프랑스 패잔병들을 수송하는 영국 수송선들에게 공격을 가하려고 추격해왔을 때 그들을 맞이하여 스핏파이어와 Bf 109의 역사상 최초의 공중전을 기록한 편대였습니다. 1941년 74편대는 중동 지역으로 이동하여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서 추축국 공군들과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 지역에서 연합군의 승리로 아프리카 군단이 항복하게 되자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때 맞춰서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서 D-Day에 다른 RAF와 미국 전투기들과 함께 활약을 하게됩니다.
(RAF 제 74 편대 문장 : 이 문장에 호랑이 때문에
"타이거" 편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74편대에 유명한 에이스로써 후에 편대장까지 지내게 되는 존 프리본(1919년~2010년)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본토 항공전 기간 중에 가장 많은 출격 임무를 소화해낸 RAF 조종사로써도 기록되어있습니다.
(존 프리본 대위는 콧수염을 길렀지만 20대 중반의
나이는 숨길 수 없었습니다. 앳된 청년의 모습의 그가 일단
스핏파이어에 올라타는 순간 루프트바페 에이스들조차
두려워할 정도로 뛰어난 조종사였습니다. 그는
Mk.I 초기형으로 시작해서 이듬해 Mk.II까지 조종하게 됩니다.)
1940년 5월 던커크 철수 작전부터 그해 하반기 영국 본토 항공전을 거쳐 1941년 3월까지 1년도 채 안되는 기간 동안 12대의 루프트바페 전투기들이 그의 스핏파이어에 의해서 격추되었습니다. 그 기간 격추한 12대 중에 7대가 Bf 109였습니다. 그의 격추 기록이 1941년 3월에 끝난 이유는 그의 뛰어난 조종사로써의 능력을 높이 산 연합군 지휘부가 그를 스핏파이어 조종사 양성을 위한 교관으로 임명하여 전장에서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루프트바페 조종사들과 연합군 조종사들과의 차이점일 수 있습니다. 에리히 하르트만과 같이 무지막지한 격추 기록을 세운 루프트바페의 최상위 에이스들이 200대 이상의 격추 기록을 가진 반면 연합군 조종사들은 기껏해야 100대 이하에서 격추 기록을 남기게 되는 이유는 루프트바페 조종사들의 경우 제대란 있을 수 없었고 뛰어난 조종사들을 후방으로 데려와서 후배 조종사 양성을 위해 교관으로 기용할 수 있는 여유가 없이 죽거나 조종을 할 수 없을 정도의 부상을 당하지 않는 한 끝도 없는 출격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반면 연합군 조종사들의 경우 충분한 인적 자원이 영국 뿐만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 심지어 프랑스와 폴란드처럼 나치에게 이미 점령당한 국가의 피 끓는 젊은 조종사들이 달려와서 자원을 하는 바람에 굳이 우수한 조종사들을 오래 전쟁터에 밀어넣는 것보다 실전에서 축적된 귀중한 실력을 더 많은 우수한 조종사들의 양성을 위해 활용하도록 배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존 프리본 대위와 동갑내기인 1919년생 루프트바페의
젊은 장교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 그는 1940년 던커크
철수 작전에서 스핏파이어와 첫 교전을 하는 루프트바페
조종사들 중에 한명이었습니다. 프리본이 이듬해 교관으로
발탁되어 12대로 격추 기록을 마쳤지만 바르크호른은 영국
본토 항공전 후에 동부전선으로 옮겨서 소련 전투기들을
상대로 격추 기록을 끝없이 추가해나가다가 종전을 맡게
됩니다. 그때까지 이 불사신 격추왕은 무려 1,000회 이상의
출격 임무를 수행하면서 301대를 격추하여 2차대전 연합국과
추축국 통털어 에리히 하르트만에 이어서 2위를 차지하였습니다.)
2.키위맨님 작품 : 스핏파이어 Mk. I / II
(키위맨님의 작품 고증 시작합니다.)
"KL"이라면 RAF 제 54 편대네요.1940년 3월에 스핏파이어 Mk.I의 극히 초기 단계 버전입니다. 8정의 기관총만으로 무장되었던 극히 초기 단계....
(키위맨님 작품 딱 그 물건이 전투 중인 아트웍입니다.)
(1940년 RAF 제 54 편대 단체 사진 찰칵!)
제74 편대와 마찬가지로 이 편대도 1940년 프랑스에서 탈출하는 영국군과 프랑스군들의 던커크 철수 작전이 시작한 5월말에 공중 지원을 위해서 스핏파이어 Mk.I을 몰고 날아갑니다. 여기서 Bf 109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고, 이어서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루프트바페의 끊임없는 공습과 공중전을 막아냅니다. 이어서 1941년부터 프랑스 북서부 해안을 지나 독일 점령 프랑스 폭격 임무와 본토 방어 임무를 함께 수행합니다. 1943년 6월에 54 편대는 영국 본토를 떠나서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동합니다. 하지만 스핏파이어 기체의 선박 운송 도중에 발생한 고장으로 막상 태평양 전선에서 전투보다 기체 수리 보수에 더 정신을 빼앗기게 됩니다. 실제로 일본 공군과의 교전에서 종전 때까지 고작 적기 1대의 격추에 그치는 저조한 실적을 올리게 됩니다.
(RAF 54 편대 문장)
일단 오늘 두분의 작품 고증만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글에서 스핏파이어 후기 버전들에 대한 설명과 종전 임박해서 스핏파이어의 전투 기록들을 조금 더 설명하고 나머지 두분의 작품들의 고증을 마치려고 합니다. (원래 2편으로 마치려고 했었는데 스핏파이어 역시 Bf 109 못지않게 사연이 많은 탓에 1편 더 연장 결정했습니다.)
첫댓글 제가 이곳에 온지 얼마되지않아 잘 몰랐습니다만
김 선생님의 해박한 지식과 글을 쓰시기 위한 철저한 준비하심에 다시한번 놀랍니다.
좋은 글을 올려주신 덕분에 오늘도 부족한 부분 채워 갑니다. 고맙습니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Lammc님 같은 분께 칭찬 들으니 제가 영광입니다!
김작가님 제가 1번 찍을려 했는데 바쁜 일이 있어 지금 글을 올립니다. 매회마다 이렇게 재미있게 글을 쓰시는 바람에 중독이 되었습니다. 모형만 바라보다 김작가님 덕분에 지식도 날로 쌓여 갑니다. 감사합니다.
중독이요??? 아이고 중독까지는 ^^ 마마와 호환, 불법 비디오에 추가로 따블오남편 글 중독도 위험합니다요!
이야..~~~
내것도 스토리를 알고보니
새롭네요
다시한번32로 만들 계획이 있답니다.
주인장님 작품 기다리겠습니다!
오옷. 주인장이 같은 기체를 두번 만들겠다고 한 건 첨 봅니다!
@미친도사(정권희) 동스케일이 아니면 만들어
봐야죠.. 32로
제가 저것 만들때는 아무생각없이 만들었었는데....
단지 뉴질랜드에 거주 할 때라 뉴질랜드 출신 파일럿의 비행기를 찾아 만들었는데 이렇게 자세한 스토리를 알고 보니 다시 만들어 보고 싶어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아주 초기 버전의 스핏파이어입니다. 전설의 시작이 된 기체이지요.
흥미진진합니다 역시! 브이원 미사일을 날개로 쳐서 떨친다가 참 쇼킹하네요 디오라마 소재감인네요 완전 ! 오늘도 역시 잘 보고 갑니당
감사합니다. 앞으로 글들도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고증관련 question은 남편님꼐 여쭤보면 되겠습니다. ㅎㅎ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아이쿠! 그러다 제가 답변 못하면 어떡하지요?? 허걱!!! ^^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한데, 제건 데칼 짜깁기 한 것 같은데, 완전 뽀록날 것 같아요. 데칼도 좌우 잘못 붙였던 것 같고... 아이참...
수평 미익 마크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저의 고증은 고수님들 작품 트집 잡는 것 절대 아니구요. 모델링 취미하면서 역사를 좀 깊이 알아가자는 의도입니다. 헐헐헐
이제서야 다 읽었습니다. 만들고 베이스에 저 문장을 명판으로 만들어서 붙여도 멋지겠는데요! 좋은 힌트 하나 얻었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어 그럼 멋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