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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로 깔보던 청에게 조선의 인조는 삼전도에서 치욕의 항복을 처절하게 당했다.
청은 조선에게 '병자호란 때 청의 왕이 조선에 베푼 공덕을 찬양하는' 승전비를 치욕의 현장 삼전도에 세울 것을 강요했다.
조선의 선비들이 제2의 치욕을 삼전도 현장에서 당해야 했다. 오랑캐 청나라 왕의 공덕을 추켜세우는 비문을 지어야 했다.
"장유(張維)·이경전(李慶全)·조희일(趙希逸)·이경석(李景奭)에게 명하여 삼전도비(三田渡碑)의 글을 짓게 하였는데,
장유 등이 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 신하가 마지못하여 다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이경석의 글을 썼다."
인조실록은 인조 15년(1637) 11월 25일 기사에서 삼전도비문을 이경석이 찬술하였슴을 밝히고 있다.
비변사에서는 찬술할 인물로 이경석 장유 이경전 조희일 등 네명을 인조에 극비리에 천거한 것이다.
서로 꺼리는 일이었다. 이들 가운데 이경전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나머지 3명이 모두 글을 지어 인조에 올린다.
인조는 이 글쓰기에 가장 싫어하였던 이경석을 조용히 불러 간곡히 부탁한다.
중국 춘추시대의 월나라 제2대 왕인 구천(句踐)이 오나라에서 치욕을 참고 신첩 노릇을 하면서
와신상담하다가 끝내 부차(夫差) 에게 당한 치욕을 갚았다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상제의 법칙만이 위엄과 덕을 함께 펴도다. 황제께서 동을 정벌하시니 그 군사 10만이로다.'
그는 이런 문구로 가득찬 비문을 짓고만다.나라의 존망(存亡)이 달려 있는 일이며,
후일을 도모하는 것은 나의 역할이니 오늘은 다만 문자로 저들의 비위를 맞추어
일을 더 격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 뿐이다"라고 하면서 인조는 간곡하게 비문의 찬술을 부탁하였다.
그가 나서지 않으면 조선의 왕이 그 비문을 지어야 할 지경이다.
이경석은 자신의 명예보다는 국가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 끝에 어려운 결단을 내리고 비문을 짖게 되었다.
이경석 후손들이 경기도박물관에 기증한 궤장(几杖)이다.
궤장은 팔을 걸 수 있는 편안한 의자(几)와 지팡이(杖)를 말한다.
조선시대는 당상관 정2품 이상의 관원으로 70세가 되면 퇴직을 할 수 있었다.
70이 넘어도 정사에 임해야하는 정1품 관 원에게 왕이 친히 의자와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이경석이 74살이었던 현종 9년(1668)에 궤장잔치가 내려졌다.
이경석이 신하로서 최고 영예인 ‘궤장’을 하사받은 것이다.
조선의 선비에게는 궤장을 받는다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이다.
조선 500년에 걸처 궤장을 받은 이는 10여명에 불과했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이후 50년 만에 처음으로 이경석이 궤장을 받은 것이다.
경기도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궤장연희도첩이다.
궤장을 하사할 때 임금은 친히 축하연을 베풀어 주었다. 이를 ‘궤장연’이라 했다.
1987년 궤장과 함께 보물 제930호로 지정된 <연회도첩>은 이경석이 현종에게 궤장을 하사받는 절차를 3점으로 기록한다.
먼저 교서와 궤장을 싣고 온 행렬이 이경석의 집으로 들어가 는 장면을 그린 ‘지영궤장도 祗迎几杖圖 ’,
뒤이어 왕의 교서를 낭독 하고 궤장을전달하는 모습을 담은 ‘선독교서도 宣讀敎書圖 ’
그리고 의식이 끝난 뒤 연회를 거행하는 ‘내외선온도 內外宣醞圖’가그 것이다.
화첩에는 송시열, 정태화 같은 당대 석학들이 지은 축하 글 과 이경석의 기쁜 마음을 읊은 시 등도 함께 있다.
이때 우암 송시열이 궤장연을 기리는 궤장연서에서 '壽而康'라는 문구로 이경석을 희롱했다.
예전 송나라 흠종(欽宗)이 금나라 진영에 구금되었을 때 손적이 오랑캐인 금을 칭송하는 글을 바쳐 풀려난 일이 있었다.
"당신이 오랑캐 진영에서 천리에 순종하여 자기를 몹시 위하였으니 장수하고 건강한 것이 당연하다"
이 일을 두고 당시 사람들이 '壽而康'라고 기록했다. 주자도 손적의 일을 기록하면서 인용했던 구절이다.
송나라의 손적이 흠종을 따라 금나라에 잡혀간 후에도 아부해 잘 먹고 잘살았다는 것을 빗대어
이경석도 청나라에 아부했다고 비난한 것이다. 그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효종 1년(1650) 산림의 공세로 권력을 빼앗긴 김자점(金自點)이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북벌 계획을 밀고했다.
청나라 사문사(査問使) 6명이 조사차 의주로 나왔다. 북벌 계획이 밝혀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
효종이 밤새 자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사대부 집안에서 이삿짐을 싸는 등 인심이 흉흉할 때 나선 인물이 이경석이었다.
이경석이 “저들이 만일 무리한 일로 힐책할 경우 신이 직접 담당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라가 무사하다면 신이 어찌 감히 몸 하나를 아끼겠습니까?”
라고 말하자 효종은 “경의 나라를 위한 정성이 간절하다 할 만하다”(<효종실록> 1년 2월8일)라고 칭찬했다.
그때 청천강을 건너며 지은 그의 시다.
“한밤에 충신한 마음으로 강을 건너니/
이 마음 오직 귀신만 알 뿐이로다”(半夜直將忠信涉/ 此心惟有鬼神知)
청나라 사신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이경석을 ‘대국을 속인 죄’로 몰아 극형에 처하려 했다.
효종이 그의 구명을 간청하며 막대한 뇌물을 전달한 덕분에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의주의 백마산성에 갇혀 앞일을 기약할 수 없었다.
이경석은 다시 ‘영원히 서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투옥 1년 만에 석방되었다.
귀국길에 사민(士民)들이 길가에 몰려들어 환호했다는 데서 그의 신망을 알 수 있다.
귀국 뒤 이경석은 광주(廣州)에 은거하고 금강산 유람을 하는 등
정사에서는 한발 떨어져 지냈으나 효종이 자문하면 정성껏 도왔다.
효종 6년(1655) 청나라 사신이 이경석이 서울에 있는 것을 질책함에 따라
아들의 임지인 안협(安峽)으로 피했다가 철원으로 이주하는 등 다시 시골을 전전했으나
효종은 그의 건의는 무조건 들어줄 정도로 그를 높였다.
1645년 이경석(당시 이조판서)의 추천으로 출사한 송시열이다.
당시 양송(兩宋)으로 우암과 같은 노선을 지켰던 송준길도 '송시열이 지나쳤다'고 말했다.
1669년(현종 10) 현종이 병 치료차 온양 온천에 거둥한다. 이경석을 유도(留都)대신으로 삼았다.
국왕이 없는 서울을 맡길 정도로 신임한다는 뜻이었다. 이때 이경석은 다음과 같이 세태를 비난했다.
“지난날 조정에는 급히 물러나려는 신하들이 이어지더니,
오늘날 행궁에는 달려가 문안한 신하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군부가 병이 있어 궁을 떠나 멀리 초야에 있으면 사고가 있거나
늙고 병들었거나 먼 곳에 있는 자가 아니라면 도리에 있어서
이와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이는 나라의 기강과 의리에 관계된 것입니다.”(<현종실록> 10년 4월3일)
송시열은 “만일 경인년에 이경석이 백마산성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지 않았으면 개조차 삼전도 비문을 쓴
이경석의 똥을 먹지 않을 것이다”고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이경석은 집에서 효도하고 우애로웠으며 조정에서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일찍부터 문망(文望)을 지녔었는데 드디어 정승에 올랐다.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은 늙도록 게을러지지 않았으나 친분이 두터운 사람에게 마음 쓰는 것이 지나쳤고
친지나 당류를 위하여 상의 은혜를 구하되 구차한 짓도 피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비평하였다."
현종실록 19권 12년(1671) 9월 23일 이경석의 졸기이다.
이경석은 정종의 왕자 덕천군의 6대손이다.아버지는 동지충추부사를 지낸 이유간이다.
할아버지는 지붕유설의 저자로 유명한 지붕 이수광이다.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문인으로 19세에 진사가 되고 21살에 중광별시에 합격하였다.
인목대비 폐비상소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합격이 모두 취소되었다.
그는 인조반정이후 문과에 급제하여 뛰어난 학식과 온화한 성품을 바탕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인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인조 19년(1641) 소현세자의 스승이 되어 심양으로 가서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에서 병자호란 포로 석방에 많은 힘을 쏟았다.
잠시 귀국한 뒤 인조 20년(1642) 심양으로 돌아가다 한 사건을 만난다.
명나라의 선박이 선천에 정박하였던 사실이 청나라에 뒤늦게 알려졌다.
청나라가 나서 수사에 나섰다. 이경석이 왕을 대신해서 청나라에 설득했다.
“명나라의 잠상(潛商)이 우연히 정박한 것이다.
조선의 조정과는 무관한 일이다.”
청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이경석을 만주 봉황성 등에 구금했다.
그는 8개월 만에 ‘영원히 서용하지 않는다’(永不敍用)는 조건으로 겨우 석방되어 귀국했다.
“이제 살아서 돌아오긴 하였으나 복명하지 못하며 다시 용안을 뵙는다는 것도 기약할 수 없으니,
신의 죄과가 더욱 무겁습니다. …종이를 앞에 대하니 눈물이 흘러 무슨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인조실록> 20년 12월17일)라는 글은 그의 심정을 잘 대변한다.
<선조실록> 개수(改修) 작업 등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을 했다.
인조 23년(1645) 영불서용 조처가 풀림에 따라 이조판서로 임용되었고,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같은 사림들을 대거 등용해 한때는 그들의 주인으로 불렸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한국학중앙연구원을 끼고 의왕으로 가는 옛길을 따라가면
청계산 자락 길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산 16~18번지 경기도 기념물 제84호 이경석선생묘를 만난다.
묘역 입구에는 신도비 2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하나는 1754년에 세워진 원래의 비이다. 글자가 모두 깍여 보이지 않는다.
땅 속에 훼손당한채 300년동이나 묻혀 있던 비다.현재는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하다.
후손들이 땅속에서 파내어 다시 세운 원래의 비다.원래의 비문을 다시 새겨 세운 새로운 신도비다.
원래 이경석의 신도비의 비문은 서계 박세당이 짓는다.
"노성인(老成人)의 귀중함이 이와 같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노성인을 모욕하는 자가 있다면 천하의 불상(不祥)함이 막대하도다.
불상한 짓을 감히 한다면 또한 반드시 불상한 응보가 따를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도이니,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는 우암 송시열을 노성인(老成人)을 모욕한 불상한 무리로 규정한다.
당시 사림의 영수 송시열을 준열하게 비판한다.
그는 인조를 대신해서 신하로서 삼전도비문 찬술이 부득이했음을 강조하여 이경석을 두둔했다.
마지막으로 송시열에 대해 한마디 말을 더 추가했으니,
그것은 바로 은의를 저버린 배은자(背恩者)라는 표현이었다.
그는『서계집』권22, 「영의정백헌이공신도비명(領議政白獻李公神道碑銘)」)에서
결국 박세당은 이경석을 군자로 칭송한 반면 송시열을 소인(小人),
불선자(不善者)로 단정함으로서 이듬해에 큰 화를 초래하게 된다.
그는 비명(碑銘) 마지막에 송시열에게 올빼미를,
이경석에게 봉황을 비유하면서 이경석을 군자라고 칭송했다.
"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판이한지라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였네/
착하지 않은 자는 미워할 뿐 /군자(君子)가 어찌 이를 상관하랴 /
나의 명문(명문)을 빗돌에 새기노니/ 사람들이여 와서 공경할지어다."
노론은 박세당이 송시열을 모욕하였다며 분노하였다.
1703년 봄에 성균관 유생들은 박세당을 배척하는 상소(上疏)를 올렸다.
유생의 배후에는 박세당을 제거하려는 김창협, 김창흡 등 노론(老論)의 핵심부가 있었다.
그는 당시 송시열계 당인들의 감정을 자극하게 되어 삭탈관직을 당하고 유배를 떠나게 된다.
이경석의 신도비는 50여년 뒤인 영조 30년(1754) 이광사의 글씨를 받아 겨우 세웠다.
송시열을 따르는 노론쪽에서 신도비를 깍아내 훼손했다고 전해지는 그의 신도비다.
조선 중기의 문신 백헌(白軒) 이경석(1595∼1671)의 묘소이다. 시도기념물 제84호(경기)이다.
인조 1년(1623)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괄의 난 때에는 승문원 제조로 인조를 공주로 모셨고,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모시기도 하였다.
인조 16년(1638)에는 대제학에 오르고 효종 즉위년(1649)에 영의정에 올랐다.
인조∼현종 3대 50여 년에 걸쳐 난국을 적절히 헤쳐나가는데 공헌한 훌륭한 재상이었다.
그의 묘는 부인과 합장묘이며 봉분 앞에 상석이 있고, 우측에는 묘비가 봉분쪽을 향하고 있다.
봉분 좌우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이 각 1쌍씩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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