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신화'란 단어는 총독부가 1938년 만든 말" 고증자료 찾아 알래스카까지…'2200년 역사' 기록
한민족 반만년의 역사 중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는 민족사는 얼마나 될까. 학교 교육 혜택을 받는 대개의 국민들은 삼국시대부터 현대사까지 2000여년의 역사만을 배우게 된다. 그렇다면 삼국시대 이전 단군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된 것일까. 흔히 신화 수준으로 폄하되는 당시의 역사가 그저 구전해 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면 우리의 뿌리는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단군은 실존 인물이었다’는 책을 펴낸 송호수 박사(75)는 우리의 국조인 단군은 실존 인물이었고, 47대 2200년간 한반도와 일본, 산동반도 양자강 위까지 세력을 펼쳤다고 주장한다. 송 박사는 이 책에서“‘단군신화’라는 단어는 총독부가 1938년부터 만들어 7년(1938∼1945) 밖에 못써먹고 패전하고 말았다. 총독부 이전에는 우리 5천년사에 단군신화라는 기록은 어느 문헌에도 없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에도 총독부 사학파 잔당들은 일본이 검정한 단군신화는 믿고 , 우리가 검증한 단군역사는 안 믿는다”고 지적한다.
40여년간 단군연구에만 매달리고 있는 송 박사가 처음 단군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강단에서 동양철학을 강의했을 때라고 한다.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에 철학이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 그는 이때부터 단군의 자료가 보존되어 있다는 곳이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산중에서 길을 잃거나 영양실조로 죽을 고비도 여러번 넘겼다고 한다. 어려운 형편에도 단군고증을 위해 중국 인도 알래스카 등을 방문했고, 결국 40년의 각고 끝에 단군의 2200년 역사를 한권의 책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게 됐다.
“이 책은 안호상 박사 등 민족사학파의 엄정한 검증을 거쳤으며 중국 정사 후한서 등 여러 고서를 토대로 만들어졌습니다. 세계 일류 역사에 하나의 역사가 2000년 이상 이어진 것은 유일합니다. 세계 통치사의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송 박사는 책을 통해서도 쓰고 있지만, 한글이 단군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등 놀라운 주장들을 제시하고 있다. 한단고기 단기고사 홍사 규원사화 동국역대 등에 한글 38자가 고스란히 등장하는데, 세종 때 28글자로 축소해 훈민정음이라 했으며 지금 쓰이는 글자는 이중에서는 4자를 제외하고 24자만 사용하고 있다는 것.
또 송화강가에 기계를 만드는 공청(工廳)을 설치해 각종 배와 기계를 만들었다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 이 때 나라 안에 현상을 걸어 새로운 기계를 발명하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어 장려했다는 것이다. 상을 받은 발명품들로는 양우계(量雨計) 구석편(驅石鞭) 목류마(木流馬) 측우기(測雨機) 측풍계(測風計) 자명종(自鳴鐘) 등 총 26종에 이른다. 이처럼 단군조선은 영토확장과 더불어 과학기술 발전에도 힘썼다는 주장이다.
단군역사에 젖어살고 있는 송 박사는 한국철학서의 시초가 될만한 것이 이 책이라며 과감하게 자평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의 사료들만으론 단군고조선사 회복엔 부족합니다. 단군역사에 관한 숨겨진 사료들은 혹독한 탈취, 소각, 말살 등의 일제 총독부 만행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일본 패전 후 6·25 전쟁까지 지하에 묻혀 있다가 이제야 빛을 보게 된 것들입니다. 각 나라마다 전통적인 철학이 있듯이 이제는 우리도 우리의 철학을 공부해야 합니다.”
특히, 송 박사는 특정 종교인들의 단군에 대한 선입견이 사라져야 우리의 전통성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서 단군이 우리의 국조라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며, 단군상이 집단 우상숭배를 위해 세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얼을 회복하고 선양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조 단군을 부정하는 국적불명의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의 후손인지 되묻고 싶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그는 통일이라는 민족적 성업은 빼앗기고 잃어버린 단군 역사와 단군 정신을 회복할 때 가능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심백강 박사, 중국 ‘사고전서’에 기록된 역사 밝혀내 … 역사학계 능력부족으로 실체규명 외면
"요(堯) 임금 때인 무진년(B.C. 2333년)에 신인(神人·성인보다 한 단계 위의 훌륭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태백산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니, 조선인(朝鮮人)이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단군(檀君)이라 칭했다. 이것이 조선이 나라를 세운 시초다. 정초(鄭樵)가 지은 ‘통지략’(通志 )에 이르기를 조선이라는 나라는 왕험(王險)에 도읍을 정했는데, 한(漢) 시기의 낙랑군이 그곳이다. 모씨(茅氏)의 ‘상서록’(象胥錄)에 의하면 단군과 아울러 기자(箕子)도 왕양(王壤)에 도읍을 정했다. 역사에서는 위만도 왕험에 도읍을 정했는데, 곧 평양이다. (하략)”
단군의 실존에 관한 중국측 역사 기록 중 한 대목이다. 굴 속에서 21일 동안 마늘과 쑥을 먹어 여인으로 변신한 곰과 사람(환웅) 사이에서 단군이 태어났다는 식의 전설 같은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그것도 청나라 때의 유명한 역사학자 오임신(吳任臣)이 지은 ‘산해경광주’(山海經廣注)라는 정통 사서에 등장하는 글이다. 중국 진(晋)나라 학자 곽박이 지은 ‘산해경주’를 바탕으로, 오임신이 그 주석을 널리 보완하는 형식을 취하며 지은 ‘산해경광주’. 현재 전체 18권이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돼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과연 ‘사고전서’란 어떤 책인가. 중국 청나라가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아니 세계 최대의 총서로, 선진(先秦) 시대에서 청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역대의 주요 전적들을 가려 수록한 책만 무려 7만9000여권. 연인원 3000여명이 동원돼 무려 10년에 걸쳐 완성된 대작이다. 그래서 중국 학자는 물론 한국과 일본 학자들도 사고전서의 학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지 않을 정도다.
단군역사 언급 9종류 확인
바로 그 ‘사고전서’를 일일이 뒤져 단군에 대해 기술한 저작들을 처음으로 밝혀낸 한국인 학자가 있다. 민족문화연구원(이사장·강동민) 원장인 심백강 박사(47·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그 주인공.
“사고전서는 경(經)·사(史)·자(子)·집(集)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편찬된 체제입니다. 이중 단군의 역사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자부에 3개, 사부에 4개, 집부에 2개 등 모두 9종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우리나라 강단 사학자들이 외면하는 단군 역사를 중국 정통 역사서가 뒷받침해 준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최근 심박사는 중국을 수십 차례 드나들며 찾아낸 것들을 ‘사고전서 중의 단군사료’(민족문화연구원 학술총서 제7집)라는 자료집으로 엮어냈다. 원서 그대로 수록한 이 책은 대중서라기보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자료 성격이 짙은데, 단군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대목을 네모꼴 모양으로 굵게 표시해 두었다. 그중 한 대목을 찾아 띄엄띄엄 읽어보니 매우 충격적이다. “전부(錢溥)가 지은 ‘조선국지’에 의하면 세 종류의 조선이 있다. 하나는 단군조선이요, 또 하나는 기자조선이요, 나머지 하나는 위만조선이다….”(‘산해경광주’ 18권)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가 단군이 B.C. 2333년에 조선(고조선)을 세웠다는 정도로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과는 달리, 이 중국측 기록은 고조선이 하나가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시작해 위만조선에 이르기까지 세 단계의 역사를 밟고 있음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심박사는 더 흥미로운 사실도 지적한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널리 인정받던 단군의 실체가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철저히 은폐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조선을 속국으로 여겼던 명나라도 단군 역사를 교묘하게 가리려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고전서 집부(集部) 편에 역대의 부(賦)를 모은 ‘어정역대부휘’(御定歷代賦彙·청나라 때 편찬됨)라는 책이 있어요. 이중 단군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것이 조선부(朝鮮賦)라는 대목입니다. 저자는 명나라 효종 때의 동월(董越)이라는 사람인데,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또 관련 자료를 참고해 조선부를 지었다고 하지요. 아마 중국인의 입으로 단군조선을 직접 언급한 현존 자료 중 가장 시기가 앞선 기록일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고전서 사부(史部) 편에도 똑같이 실린 원래의 조선부에는 단군 기록이 쏙 빠져 있어요.”
“고조선은 하나 아닌 3단계 역사”
그러니까 명나라 때 처음 씌어진 조선부에는 단군 기록이 빠져 있는 대신, 그 후인 청나라 때 편집한 ‘어정역대부휘’ 안의 조선부에서는 똑같은 저자의 이름으로 단군조선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객관성과 권위를 따져볼 때 어정역대부휘가 단연 앞섬은 두말할 나위 없다. 심박사는 이를 두고 “명나라에서 우리 단군조선의 역사를 부정하려 했던 모종의 음모가 있었다는 의심을 지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즉 동이족보다 그 역사가 짧은 한족(漢族)이 주도적으로 세운 명나라는 대국의 자존심상 동이의 후손인 조선을 깎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단군과 고조선 관련 사료는 명나라의 직접적 간섭을 받던 조선조 때 많이 인멸됐고, 이후 일제의 지배를 받으면서 거의 말살됐다는 게 심박사의 해석. 그러다 보니 강단 사학계 일각에서는 단군 역사를 실재로 인정하기를 거부해 신화로 취급하거나, 심지어는 고려 때 항몽전쟁이나 일제 때 항일민족주의 감정의 소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는 것. 바로 그 때문에 ‘사고전서 중의 단군사료’는 중국의 문헌을 근거로 단군의 실재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심박사는 이 자료집 외에도 16∼17세기 문헌인 ‘조선세기’(朝鮮世紀)를 처음으로 발견한 학자로 유명하다. 명나라의 오명제(吳明濟)가 지은 이 책은 조선 영조 때 편찬됐다가 고종 때 중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역대서적’조에 제목만 전해져 오던 것이다. 지어진 지 4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빛을 본 ‘조선세기’는 특히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 등 삼조선의 역사를 차례로 소개하고 있는데, 위만조선부터 다룬 사마천의 ‘사기’나 기자조선 이후만 인정하는 대부분의 중국 사서들과 뚜렷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또 단군왕조의 시작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도 곰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신화적 내용 대신 “가화합(假化合)을 이뤘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우리나라 학자들은 광복 50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 고전 문헌에 산재한 단군 및 고조선 사료를 왜 찾아보지 못했을까. 심박사의 해석은 의외로 간단하다. “첫째는 우리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자주적 사관이 없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한문 해독능력 문제를 꼽을 수 있을 거예요. 중국 원전을 해석하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아마 우리나라 역사학자 중 그런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세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것입니다.”
이렇게 단언하는 심박사는 한학자 집안에서 자라 5세 때 천자문을 독파하고 16세 이전에 사서삼경을 독파한 수재. 19세 나이에는 당대의 유명한 학승 탄허 스님을 만나 한문으로 문답을 나누는 등 뛰어난 한학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1983년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연구하다가 10년 만에 교수직을 그만둔 그는 현재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한국 사학자들의 단군 및 고조선 연구를 돕기 위해 주로 중국측 사료를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하고 있다.
"'단군신화'란 단어는 총독부가 1938년 만든 말" 고증자료 찾아 알래스카까지…'2200년 역사' 기록
한민족 반만년의 역사 중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는 민족사는 얼마나 될까. 학교 교육 혜택을 받는 대개의 국민들은 삼국시대부터 현대사까지 2000여년의 역사만을 배우게 된다. 그렇다면 삼국시대 이전 단군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된 것일까. 흔히 신화 수준으로 폄하되는 당시의 역사가 그저 구전해 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면 우리의 뿌리는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단군은 실존 인물이었다’는 책을 펴낸 송호수 박사(75)는 우리의 국조인 단군은 실존 인물이었고, 47대 2200년간 한반도와 일본, 산동반도 양자강 위까지 세력을 펼쳤다고 주장한다. 송 박사는 이 책에서“‘단군신화’라는 단어는 총독부가 1938년부터 만들어 7년(1938∼1945) 밖에 못써먹고 패전하고 말았다. 총독부 이전에는 우리 5천년사에 단군신화라는 기록은 어느 문헌에도 없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에도 총독부 사학파 잔당들은 일본이 검정한 단군신화는 믿고 , 우리가 검증한 단군역사는 안 믿는다”고 지적한다.
40여년간 단군연구에만 매달리고 있는 송 박사가 처음 단군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강단에서 동양철학을 강의했을 때라고 한다.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에 철학이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 그는 이때부터 단군의 자료가 보존되어 있다는 곳이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산중에서 길을 잃거나 영양실조로 죽을 고비도 여러번 넘겼다고 한다. 어려운 형편에도 단군고증을 위해 중국 인도 알래스카 등을 방문했고, 결국 40년의 각고 끝에 단군의 2200년 역사를 한권의 책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게 됐다.
“이 책은 안호상 박사 등 민족사학파의 엄정한 검증을 거쳤으며 중국 정사 후한서 등 여러 고서를 토대로 만들어졌습니다. 세계 일류 역사에 하나의 역사가 2000년 이상 이어진 것은 유일합니다. 세계 통치사의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송 박사는 책을 통해서도 쓰고 있지만, 한글이 단군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등 놀라운 주장들을 제시하고 있다. 한단고기 단기고사 홍사 규원사화 동국역대 등에 한글 38자가 고스란히 등장하는데, 세종 때 28글자로 축소해 훈민정음이라 했으며 지금 쓰이는 글자는 이중에서는 4자를 제외하고 24자만 사용하고 있다는 것.
또 송화강가에 기계를 만드는 공청(工廳)을 설치해 각종 배와 기계를 만들었다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 이 때 나라 안에 현상을 걸어 새로운 기계를 발명하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어 장려했다는 것이다. 상을 받은 발명품들로는 양우계(量雨計) 구석편(驅石鞭) 목류마(木流馬) 측우기(測雨機) 측풍계(測風計) 자명종(自鳴鐘) 등 총 26종에 이른다. 이처럼 단군조선은 영토확장과 더불어 과학기술 발전에도 힘썼다는 주장이다.
단군역사에 젖어살고 있는 송 박사는 한국철학서의 시초가 될만한 것이 이 책이라며 과감하게 자평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의 사료들만으론 단군고조선사 회복엔 부족합니다. 단군역사에 관한 숨겨진 사료들은 혹독한 탈취, 소각, 말살 등의 일제 총독부 만행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일본 패전 후 6·25 전쟁까지 지하에 묻혀 있다가 이제야 빛을 보게 된 것들입니다. 각 나라마다 전통적인 철학이 있듯이 이제는 우리도 우리의 철학을 공부해야 합니다.”
특히, 송 박사는 특정 종교인들의 단군에 대한 선입견이 사라져야 우리의 전통성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서 단군이 우리의 국조라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며, 단군상이 집단 우상숭배를 위해 세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얼을 회복하고 선양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조 단군을 부정하는 국적불명의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의 후손인지 되묻고 싶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그는 통일이라는 민족적 성업은 빼앗기고 잃어버린 단군 역사와 단군 정신을 회복할 때 가능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심백강 박사, 중국 ‘사고전서’에 기록된 역사 밝혀내 … 역사학계 능력부족으로 실체규명 외면
"요(堯) 임금 때인 무진년(B.C. 2333년)에 신인(神人·성인보다 한 단계 위의 훌륭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태백산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니, 조선인(朝鮮人)이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단군(檀君)이라 칭했다. 이것이 조선이 나라를 세운 시초다. 정초(鄭樵)가 지은 ‘통지략’(通志 )에 이르기를 조선이라는 나라는 왕험(王險)에 도읍을 정했는데, 한(漢) 시기의 낙랑군이 그곳이다. 모씨(茅氏)의 ‘상서록’(象胥錄)에 의하면 단군과 아울러 기자(箕子)도 왕양(王壤)에 도읍을 정했다. 역사에서는 위만도 왕험에 도읍을 정했는데, 곧 평양이다. (하략)”
단군의 실존에 관한 중국측 역사 기록 중 한 대목이다. 굴 속에서 21일 동안 마늘과 쑥을 먹어 여인으로 변신한 곰과 사람(환웅) 사이에서 단군이 태어났다는 식의 전설 같은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그것도 청나라 때의 유명한 역사학자 오임신(吳任臣)이 지은 ‘산해경광주’(山海經廣注)라는 정통 사서에 등장하는 글이다. 중국 진(晋)나라 학자 곽박이 지은 ‘산해경주’를 바탕으로, 오임신이 그 주석을 널리 보완하는 형식을 취하며 지은 ‘산해경광주’. 현재 전체 18권이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돼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과연 ‘사고전서’란 어떤 책인가. 중국 청나라가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아니 세계 최대의 총서로, 선진(先秦) 시대에서 청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역대의 주요 전적들을 가려 수록한 책만 무려 7만9000여권. 연인원 3000여명이 동원돼 무려 10년에 걸쳐 완성된 대작이다. 그래서 중국 학자는 물론 한국과 일본 학자들도 사고전서의 학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지 않을 정도다.
단군역사 언급 9종류 확인
바로 그 ‘사고전서’를 일일이 뒤져 단군에 대해 기술한 저작들을 처음으로 밝혀낸 한국인 학자가 있다. 민족문화연구원(이사장·강동민) 원장인 심백강 박사(47·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그 주인공.
“사고전서는 경(經)·사(史)·자(子)·집(集)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편찬된 체제입니다. 이중 단군의 역사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자부에 3개, 사부에 4개, 집부에 2개 등 모두 9종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우리나라 강단 사학자들이 외면하는 단군 역사를 중국 정통 역사서가 뒷받침해 준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최근 심박사는 중국을 수십 차례 드나들며 찾아낸 것들을 ‘사고전서 중의 단군사료’(민족문화연구원 학술총서 제7집)라는 자료집으로 엮어냈다. 원서 그대로 수록한 이 책은 대중서라기보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자료 성격이 짙은데, 단군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대목을 네모꼴 모양으로 굵게 표시해 두었다. 그중 한 대목을 찾아 띄엄띄엄 읽어보니 매우 충격적이다. “전부(錢溥)가 지은 ‘조선국지’에 의하면 세 종류의 조선이 있다. 하나는 단군조선이요, 또 하나는 기자조선이요, 나머지 하나는 위만조선이다….”(‘산해경광주’ 18권)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가 단군이 B.C. 2333년에 조선(고조선)을 세웠다는 정도로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과는 달리, 이 중국측 기록은 고조선이 하나가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시작해 위만조선에 이르기까지 세 단계의 역사를 밟고 있음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심박사는 더 흥미로운 사실도 지적한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널리 인정받던 단군의 실체가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철저히 은폐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조선을 속국으로 여겼던 명나라도 단군 역사를 교묘하게 가리려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고전서 집부(集部) 편에 역대의 부(賦)를 모은 ‘어정역대부휘’(御定歷代賦彙·청나라 때 편찬됨)라는 책이 있어요. 이중 단군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것이 조선부(朝鮮賦)라는 대목입니다. 저자는 명나라 효종 때의 동월(董越)이라는 사람인데,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또 관련 자료를 참고해 조선부를 지었다고 하지요. 아마 중국인의 입으로 단군조선을 직접 언급한 현존 자료 중 가장 시기가 앞선 기록일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고전서 사부(史部) 편에도 똑같이 실린 원래의 조선부에는 단군 기록이 쏙 빠져 있어요.”
“고조선은 하나 아닌 3단계 역사”
그러니까 명나라 때 처음 씌어진 조선부에는 단군 기록이 빠져 있는 대신, 그 후인 청나라 때 편집한 ‘어정역대부휘’ 안의 조선부에서는 똑같은 저자의 이름으로 단군조선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객관성과 권위를 따져볼 때 어정역대부휘가 단연 앞섬은 두말할 나위 없다. 심박사는 이를 두고 “명나라에서 우리 단군조선의 역사를 부정하려 했던 모종의 음모가 있었다는 의심을 지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즉 동이족보다 그 역사가 짧은 한족(漢族)이 주도적으로 세운 명나라는 대국의 자존심상 동이의 후손인 조선을 깎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단군과 고조선 관련 사료는 명나라의 직접적 간섭을 받던 조선조 때 많이 인멸됐고, 이후 일제의 지배를 받으면서 거의 말살됐다는 게 심박사의 해석. 그러다 보니 강단 사학계 일각에서는 단군 역사를 실재로 인정하기를 거부해 신화로 취급하거나, 심지어는 고려 때 항몽전쟁이나 일제 때 항일민족주의 감정의 소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는 것. 바로 그 때문에 ‘사고전서 중의 단군사료’는 중국의 문헌을 근거로 단군의 실재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심박사는 이 자료집 외에도 16∼17세기 문헌인 ‘조선세기’(朝鮮世紀)를 처음으로 발견한 학자로 유명하다. 명나라의 오명제(吳明濟)가 지은 이 책은 조선 영조 때 편찬됐다가 고종 때 중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역대서적’조에 제목만 전해져 오던 것이다. 지어진 지 4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빛을 본 ‘조선세기’는 특히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 등 삼조선의 역사를 차례로 소개하고 있는데, 위만조선부터 다룬 사마천의 ‘사기’나 기자조선 이후만 인정하는 대부분의 중국 사서들과 뚜렷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또 단군왕조의 시작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도 곰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신화적 내용 대신 “가화합(假化合)을 이뤘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우리나라 학자들은 광복 50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 고전 문헌에 산재한 단군 및 고조선 사료를 왜 찾아보지 못했을까. 심박사의 해석은 의외로 간단하다. “첫째는 우리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자주적 사관이 없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한문 해독능력 문제를 꼽을 수 있을 거예요. 중국 원전을 해석하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아마 우리나라 역사학자 중 그런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세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것입니다.”
이렇게 단언하는 심박사는 한학자 집안에서 자라 5세 때 천자문을 독파하고 16세 이전에 사서삼경을 독파한 수재. 19세 나이에는 당대의 유명한 학승 탄허 스님을 만나 한문으로 문답을 나누는 등 뛰어난 한학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1983년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연구하다가 10년 만에 교수직을 그만둔 그는 현재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한국 사학자들의 단군 및 고조선 연구를 돕기 위해 주로 중국측 사료를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