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홍유릉내 산책길 위치)
(영원 英 園)
의민태자(懿愍太子, 1897년 ~ 1970년 )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영친왕)
이방자(李 方子 리 마사코[*], 1901년 ~ 1989년) 또는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일본어: 梨本宮 方子 )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로 의민태자 이은(李垠)의 비이다. 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사시(私諡)는
현덕정목온정자행황태자비(顯德貞穆溫靖慈行皇太子妃)이다.
(영왕과 이방자의 합장묘)
왕은 1897년 10월 20일, 조선의 26대 왕 고종과 궁인 엄씨(후일 황귀비로 책봉, 순헌귀비) 사이에서 덕수궁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은(垠)으로 정해졌다. 이후 군이나 대군 등 별도의 작위에는 봉해지지 않고 왕자
은으로 불리다가, 대한제국 수립 이후 격상되어 황자 은으로 불리게 되었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1900년 8월, 영친왕(英親王)에 책봉, 1907년, 이복 형 의친왕을
제치고 황태자직에 올랐다. 그가 황태자위에 오른 배경은 엄귀비의 압력이라는 설과
일본 제국의 압력이라는 설이 있다.[출처 필요] 같은 해 12월, 유학을 명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명목상의 후견인으로 삼아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그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감시를 받았다.
1910년 8월 한일 합방으로 순종이 폐위되자 이왕세자(李王世子)로 불렸다.
1907년 8월 17일 태황제 고종은 후사가 없는 순종의 황태자로 영친왕 이은을 결정하였다.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과 이강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과 이강은 졸지에
순종의 동생이자 황태자의 숙부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
저쪽편에 아들 (이 구)의 묘가 보인다
죽은지 8년이 넘었는데도 무슨사연이길래 아직 보호망이 씌운채 이름도 없다
같은 해 8월 26일 당시 일본 귀족이면 누구나 예외없이 강요받았던 군사 훈련 과정에 진입하여 일본 육군 육군중앙유년학교에 시험을 치른 그는,
예과 2학년으로 편입하였다. 1913년 7월 10일 예과를 졸업하였다.
비공개라 현재 문이 잠겨 있으며 승인을 얻은 후에 답사가능하며 10년 후쯤
공개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영원 (英 園) 의 앞쪽 담너머에 아버지 고종의 릉이 있다.
봄, 여름, 겨울에만 다녔던 산책로를 이번에는 낙엽을 밟으며 ....
이방자 여사가 말년까지 사셨던 창덕궁내 (낙선재 樂善齋)
이곳은 이방자여사가 1989년 마지막까지 거처한 낙선재 樂善齋임
영친왕과 일본여인 이방자 여사
1901년 11월 4일, 메이지 천황의 조카이자 황족인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모리마사(守正)와 그의 부인 이쓰코(伊都子)의 장녀 마사코(方子)로서 도쿄에서 태어났다. 사촌인 구니노미야 나가코(후에 고준 황후가 됨) 및 화족 이치조 도키코 등과 함께 황태자 히로히토의 강력한 배우자 후보로 떠올랐으나, 미미한 정치적 기반과 불임의 가능성을 이유로 1916년,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과 약혼하였다. 1920년, 일본 황실의 교육기관인 학습원(學習院) 여자고등과를 거쳐 같은 해 4월 28일, 도쿄 롯폰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21년, 장남 진(晉)을 낳았다. 그러나 이듬해, 첫돌도 채 지나지 않은 진을 조선 방문 중에 잃는 슬픔을 경험했다.
1931년, 둘째 구(玖)를 낳고 다시 단란한 생활을 하였으나 1945년, 일본의 패전 후 이왕가(李王家)가 폐지됨에 따라 신분이 강등되어 재산을 몰수당하고, 의민태자의 복권을 두려워 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방해로 귀국마저 좌절되자 재일 한국인으로서 고된 삶을 살았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 새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초청으로 1963년,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창덕궁(昌德宮) 낙선재에 기거하였다
권오창 화백의 '영친왕비'
이방자는 한국에서 지내며 평소 남편과 구상해 온 사회봉사를 시작해 1963년, 신체장애자재활협의회 부회장에 취임하기도 하였으며 1966년, 심신 장애인들의 재활을 위해 자행회(慈行會)를, 1967년, 농아 및 소아마비장애인들의 사회 적응을 위해 명휘원(明暉園)을 각각 설립하는 한편, 해외 모금 활동과 칠보(七寶)를 통해 복지 사업 자금을 모았다. 1970년, 남편을 잃고 1971년, 정신지체장애 어린이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수원에 자혜학교(慈惠學校)를 설립하였다. 1973년, 숙원 사업이었던 영친왕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켰으며 1982년에는 광명시의 명혜학교(明惠學校) 이사장으로 재직하는 등, 국가의 생활비 보조로 생계를 유지하는 어려운 생활 여건 속에서도 사회봉사에 정열을 쏟아 한국 장애인들의 어머니로 존경받았다. 일본에서는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은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말년에는 직장암으로 수술을 받은 후 일본에 있는 아들 구(玖)와 함께 지내기도 하다가 1989년 4월 30일, 서울 창덕궁 낙선재에서 운명하였다. 장례는 1989년 5월 8일, 각계 인사 등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경기도 남양주 금곡동 홍유릉 영원(英園)에 의민태자와 합장되었다. 생전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하였고 그 밖에도 서울특별시문화상, 적십자박애장 금장, 5·16민족상, 소파상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되었다.
*****(위키백과 자료에서....
6. 영친왕의 귀국
1963년 11월 22일 영친왕은 고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일본으로 떠난지 56년만의 일이다. 하지만, 이미 지병으로 반신불수의 몸이 되어 병상에 누운 채 돌아왔다.
실어증과 뇌혈로 7년동안 투병하다 숨을 거두었다. 황태자의 예로써 대한제국
국장으로 치뤄졌다.
절반은 일본인, 절반은 조선인..이라는 친일파, 망국노, 조센징의 비난 속 어디에도
속하고 환영받지 못한 재 망국의 상징이 된 것이다.
첫댓글 자료 올리는 중
1989년 5월 8일 어버이 날을 기억한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 홍유릉으로 가는 이방자여사 상여가 망우리 고개를 넘을때 뛰어가서 먼발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