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cydides 『The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제1권-5장>
제5장 라케다이몬에서의 두 번째 회의-전쟁 준비와 외교적 전초전-킬론-파우사니아스-테미스토클레스
줄거리: 아테네와의 격전을 위해 라케다이몬이 펠로폰네소소 동맹국들을 소집했다. 여기서 동맹국들은 아테네와의 개전을 다짐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준비 기간 중에 라케다이몬은 아테네가 킬론을 주살한 일로 신전 정화를 요구했다. 이것은 개전 명분을 정당화하기 위한 조치였는데 이에 대해 아테네는 라케다이몬이 파우사니아스를 신전에서 죽게 한 일로 응수했다. 라케다이몬에서는 계속해서 사절을 보내 이런 저런 구실로 개전의 명분을 찾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아테네는 적절히 응수했다. 마지막으로 메가라 법령에 철회에 대한 요구하며 라케다이몬은 평화를 원하지만 헬라스의 평화를 위해 아테네가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는 통첩을 하자 아테네 의회를 개전과 화평의 두 의견으로 갈리었다. 이때 페리클레스가 개전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여 의회의 마음을 개전으로 몰아갔다.
-라케다이몬은 펠로폰네소스 동맹국을 소집해 2차 회의를 열었다. 2차 회의는 코린토스가 요청하여 가졌던 1차 회의 후의 일이다. 코린토스는 아테네와 개전하기 위해 사전에 여러 도시국가에 개전으로 가야함을 설득했다. 그리고 회의때는 가장 마지막으로 개전을 촉구하는 쪽으로 연설을 했다. 2차 회의에서는 다수가 아테네와의 개전에 뜻을 모았다.
-개전 의사를 정했지만 대 아테네전을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라케다이몬은 개전의 정당화를 위해 명분을 구하기 위해 올림피아 우승자 킬론을 아테네 시민들이 신전에서 죽인 일로 신전 정화를 요구했다. 라케다이몬이 하필이면 이런 구실을 찾은 것은 반라케다이몬 정서가 강한 페리클레스가 킬론을 척살한 사람들과 혈연관계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테네는 오히려 라케다이몬의 왕 파우사니아스를 신전에서 굶겨 죽게 한 라케다이몬의 행위를 내세우며 반격하였다.
-그러자 라케다이몬은 파우사니아스가 친페르시아 행동을 할 때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가 공범했다고 했다. 아테네는 이에 동의하고 테미스토클레스를 잡으러 사람들을 보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사실을 알고 도망쳐 몰로스의 왕 아드메토스에게 의탁하여 겨우 페르시아로 갈 수 있었다. 페르시아 왕 영지에 도착한 테미스토클레스는 편지로 페르시아 왕에게 자신이 크세르크세스의 퇴각때 도움을 주었다고 말하여 환심을 샀다. 그리고 1년여 동안 페르시아어를 배웠다. 1년 뒤 그는 페르시아 궁에 들어가 아르타크세르크세스를 섬겼다. 결국 그는 페르시아에서 병사했다. 라케다이몬의 아테네에 대한 요구는 이와 같이 반격에 의해 끝나버렸다.
-그리하여 라케다이몬은 계속하여 아테네에 사절을 보내 포티다이아에서의 철병과 아이기나 시의 주권 반환, 메가라에 대한 지배권 반환 등을 요구했다. 그때마다 아테네는 적절한 다른 구실로 라케다이몬의 사절에 대해 응수했다. 최종적으로 라케다이몬은 사절을 통해 아테네가 헬라스의 자유를 빼앗지 않는다면 평화로울 것이라고 통첩했다. 이에 대해 아테네는 싸우자, 평화에 방해되는 메가라 법령을 철회하자는 두 의견으로 분분했지만 반라케다이몬 감정이 강했던 페리클레스의 개전 주장 연설로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라케다이몬에서의 2차 회의때 코린토스 대표가 개전론을 위해 주장한 연설과 페리클레스가 개전을 위해 아테네 의회를 설득하기 위한 연설을 비교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