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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人間革命 28卷
第3章 革心 (6~11)
<혁심 6>
1977년 7월, 덩샤오핑은 당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등의 요직을 맡아 활약한다.
1978년이 되자 중국은 새로운 행보를 시작한다. 2월 말부터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의 ‘4대 현대화’에 본격적으로 힘쓸 것을 확인하고 ‘사회주의 강국’을 최우선 목표로 한다고 발표했다. 그것을 위한 지도체제로서 화궈펑 당 주석이 국무원 총리 등을 함께 맡게 되었다.
‘중일평화우호조약’도 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힘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국에 그 도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이전부터 반패권 조항을 놓고 의견이 대립해 조정하는 데도 난항을 겪었다.
또 4월에는 중국 국기를 단 100척이 넘는 어선이 센카쿠 열도 영해에 접근해 그 일부가 영해 안으로 들어오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의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영해에서 나가도록 촉구했으나 어선은 중국의 영해임을 주장해 긴장감이 높아졌다.
그러나 중국 어선이 해역에서 물러가, 결과적으로 센카쿠 열도 문제가 조약 체결에 심각한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8월 12일, 드디어 ‘중일평화우호조약’을 베이징에서 조인했다.
조약은 전문과 5개 조항으로 제1조 제1항에는 양국은 “주권 및 영토보전의 상호존중, 상호불가침, 내정에 상호불간섭, 평등 및 호혜 그리고 평화공존의 모든 원칙을 기초로 양국 사이의 항구적인 평화우호관계를 발전시킨다”고 씌어 있다.
제2항에는 “상호관계에서 모든 분쟁은 평화적인 수단으로 해결하고 무력을 사용하거나 무력을 내세워 위협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평화우호조약이라고 해도 그것이 결실을 보려면 신뢰라는 토양을 끊임없이 일구어야 한다. 조약 체결은 결승점이 아니라 만대에 걸친 교류의 시작이다.
<혁심 7>
‘중일평화우호조약’을 추진하는데 난항을 겪은 반패권 조항은 제2조에 넣었다.
“두 체약국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은 물론 다른 어떤 지역에서도 패권을 추구할 수 없으며 이와 같은 패권을 확립하려는 다른 어떤 국가와 집단의 시도도 반대한다.”
중국 측은 ‘중일공동성명’에 규정되어 있으므로 패권반대를 그대로 조문화하도록 주장했다.
한편 일본 측은 패권 반대가 중일이 함께 소련을 견제하는 꼴이 되어 중소 대립에 휘말리는 것을 염려했다. 그리고 패권반대는 특정한 제3국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명기하도록 강하게 요구했다.
최종적으로 패권 반대는 중일 양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 일반원칙으로 하고 제4조에 “이 조약은 각 체약국과 제3국과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하고 명기했다. 소련을 배려한 내용이다.
이 ‘중일평화우호조약’을 조인한 뒤 10월 일본의 국회가 비준을 승인하자 덩샤오핑 부총리, 황화 외교부장 일행이 일본을 방문해 비준서를 교환하고 평화우호조약은 발효한다. 중국 수뇌가 일본을 방문한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야마모토 신이치는 전부터 주장한 ‘중일평화우호조약’이 체결되자 진심으로 기뻤다.
이 평화우호조약이 내실을 기하고 영원히 이어지도록 자신의 위치에서 최대한 노력하자고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어쨌든 신이치가 중일국교정상화를 제언한 지 만 10년 만에 드디어 ‘중일 신시대’를 맞았다.
역사는 바뀐다. 인간이 서로 흉금을 터놓고 진지한 대화를 꾸준히 나눈다면 불신을 신뢰로 바꾸고, 증오를 우애로 바꿔, 전쟁을 평화로 전환할 수 있다. 이것이 신이치의 철학이자 신념이고 확신이었다.
<혁심 8>
3년 5개월 만에 제4차 중국방문을 이룬 신이치는 상하이 훙차오국제공항을 출발해 숙소인 진장호텔로 가는 차 안에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여성들의 복장은 짙은 남색이나 카키색과 같은 단색으로 바지 차림이 많았지만, 개중에는 연분홍색이나 줄무늬 블라우스를 입은 젊은 여성도 있었다. 또 모두 표정이 밝았다. 신이치 일행이 탄 차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드는 사람도 있었다.
자유를 박탈당한 문화대혁명의 시대가 끝나고 ‘4대 현대화’로 나아가기 시작한 중국의 미래에 사람들은 희망을 느끼는 듯했다.
신이치는 진장호텔에서 중일우호협회 쑨핑화 비서장 일행과 교류하며 방중단 멤버를 소개했다.
일행 중에는 중국을 처음 방문한 종문(宗門)의 승려와 소카(創價)대학교 교수도 있었다. 당초 신이치는 닛타쓰 법주를 모시고 싶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장거리 여행은 삼가야 했다. 지금까지 닛타쓰 법주와 동남아시아, 인도를 비롯한 남아시아, 미국, 멕시코, 유럽을 방문했다.
불법서환도, 일염부제 광선유포 즉 세계평화도, 어본불 니치렌대성인의 유명(遺命)이자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문하의 사명이다. 또 세계평화를 구축해 이 세상에서 ‘비참’이라는 두 글자를 없애는 일이 바로 불법자(佛法者)의 사명이다.
한동안 국교가 끊겼지만, 중국은 불교를 전해 준 대은의 나라다. 중일의 평화를 위해서는 그러한 역사에 바탕을 두고 폭 넓은 문화우호교류가 필요하다고 신이치는 생각했다.
불법(佛法)의 자비와 생명존엄이라는 법리를 인류의 공동재산으로 하기 위해서는 불교 관계자를 비롯해 여러 종교의 지도자와 대화해야 한다. 아니,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 국가의 정상과도 흉금을 터놓고 꾸준히 대화할 필요가 있다.
꽉 막힌 원리주의는 니치렌불법(日蓮佛法)의 정신을 왜곡시켜 근본 목적을 잃게 한다.
<혁심 9>
이번 중국방문에는 창가학회 측 통역으로 저우쯔잉도 동행했다.
저우는 홍콩 태생으로 소카대학교 대학원생(박사전기과정)이었다.
1974년 1월, 신이치가 홍콩을 방문했을 때 홍콩대학교와 홍콩중문대학교 등에서 광둥어 통역으로 대학 1학년인 저우를 기용했다.
일본어도 아직 서툴러 결코 훌륭한 통역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신이치는 여러 통역 경험을 쌓아 일류의 통역사로 성장하기를 바라고 기대했다.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세계 지도자들과 대화를 추진하려면, 각 언어별로 훌륭한 통역사가 필요하다. 더구나 신이치의 경우 불법에 관해 말할 때가 많기 때문에, 통역사는 불법용어를 올바르게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래를 전망할 때 그러한 실력을 습득해 신이치의 마음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는 통역사를 육성하는 일이 아주 중요한 과제였다.
1974년, 홍콩을 방문했을 때 신이치는 저우에게 이번에 중국에 가면 그곳에서 통역을 하도록 말했다. 저우는 죄송스러워하며 홍콩에서는 광둥어를 사용하지만, 중국은 베이징어로 발음이 전혀 달라 통역할 수 없다고 말했다.
물론 신이치는 잘 알고 있었다.
“아쉽군. 중국에서는 국가 지도자도 만나 회견할 예정이네. 자네가 통역해 준다면 안심인데 말이야. 언젠가는 통역해 주게.”
그 말이 저우의 가슴을 찔렀다. 저우는 일본에 돌아오자 베이징어를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실력이 눈부시게 향상했다. 소카대학교에서 처음 개최한 중국어변론대회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소카대학교가 중국정부에서 파견하는 유학생을 받아들이자, 배우고 익힌 베이징어를 구사해 의사소통에 도전했다.
그리고 제4차 방중 때는 드디어 베이징어 통역으로서 분투하게 된다.
사명을 자각하고 ‘뜻’이라는 씨앗을 가슴속에 품어야 향학심이 불타고 재능의 싹이 급속도로 자라 꽃을 피운다. 뜻이 있는 사람은 강하다.
<혁심 10>
신이치는 진장호텔 교류회에서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 상하이시분회 책임자인 멍보를 보고 반갑게 웃었다. 멍보는 지지난해 ‘중국상하이경극단’ 부단장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신이치는 그때 시나노마치의 세이쿄신문사와 하치오지시의 소카대학교에서 멍보와 교류할 기회가 있었다. 소카대학교 체육관에서 경극단 공연도 감상했다. 그리고 청년부 5만 명과 함께 소카대학교 운동장에서 환영 집회를 크게 열어 일행을 맞이했다.
신이치는 환영집회에서 경극단원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멍보 부단장과 담소를 나눴다. 그리고 집회 인사말에서 ‘중일평화우호조약’의 조기 체결을 주장하고 중일의 ‘금의 다리’를 미래 영원히 빛내기 위해서도 문화와 교육 교류에 더욱더 힘을 쏟고자 한다고 말했다.
2년 만의 재회였다. 멍보가 이렇게 말했다.
“지지난해 일본공연 때 5만 명이나 되는 청년들이 환영해 준 일은 잊지 못할 추억입니다. 또 무엇보다 야마모토 선생님이 주장하신 평화우호조약이 드디어 실현되었습니다. 감개무량합니다.”
신이치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가 본격적으로 우호의 흐름을 만들 시대입니다. 드디어 진정한 의미에서 ‘우의(友誼)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제 뒤에는 수많은 젊은이가 저와 같은 마음으로 뒤따르고 있습니다. 유구한 우호의 대하를 열어갑시다!”
멍보가 빙그레 웃었다.
“야마모토 선생님은 2년 전보다 더 젊어지신 것 같습니다. 매우 정열적입니다.” “고마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청년’이라는 마음으로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웃음이 번졌다. 대화는 활기를 띠었다.
만나는 사람 대부분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이고 친구였다. 신이치는 중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동행한 멤버들이 매우 긴장한 얼굴로 중국 땅을 밟던 모습이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친분을 쌓고 대화를 나누고 우호를 맺으면 사람의 관계는 크게 바뀐다. 친구가 된다는 것은 마음을 맺는 일이다.
<혁심 11>
신이치 일행은 숙소인 진장호텔에서 상하이체육관을 견학하러 갔다. 이 체육관은 원형의 현대식 건물로 최신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1만 8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좌석이 마련되어 있고 의자도 버튼 하나로 자동으로 조절할 수 있었다.
마펑링 관장이 안내했다.
신이치는 관장에게 물었다.
“훌륭한 건물입니다. 건설하면서 외국 기술을 도입했습니까?”
바로 답변이 돌아왔다.
“아닙니다. 기술도 설비도 모두 중국인민의 노력과 단결로 이루어냈습니다.”
“위대한 중국인민의 노력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4대 현대화’를 목표로 약진하는 중국의 모습이 느껴집니다.”
신이치는 앞으로 중국이 눈부신 기세로 발전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단시일 내에 현대화를 급속도로 추진한다면 반드시 여러가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또 일본의 예를 보더라도 급격한 발전은 공해문제 등 많은 폐해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
신이치는 8억이 넘는 인민을 위해 중국의 현대화가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일행은 상하이체육관에 이어 근대 중국의 아버지 쑨원이 말년을 보낸 고택을 방문했다.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크게 가지를 펼쳐 ‘녹음터널’을 이루었다.
과거 프랑스 조계 시절의 건물이 늘어선 주택가 한쪽에 ‘쑨중산고택’이라고 쓴 양옥집이 있었다. ‘중산’은 쑨원의 호다.
고택에는 쑨원이 사용한 책상과 의자, 서적이 전시되어 있고 아내인 쑹칭링의 사진도 걸려 있었다. 서적은 당시 그대로라고 한다.
유품 등 유래가 깊은 물건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용했느냐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유품은 고인을 회상하고 그 삶의 행동, 사상, 정신을 배우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다. 그리고 시공을 뛰어넘어 마음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가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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