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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念願(염원)하는 ‘성령님의 侍從’, ‘殉命의 사람’ 배종부 목사의 묵상 3 (734P) ♥
♥ ‘믿음’ 의 은사 (28P) ♥
♥ 1. ‘믿음’ 에 대한 序論(서론)
2022년 새해에 새로운 ‘믿음’ 의 결단을 가지고 살아 가야 할 것이다.
진실로 ‘믿음’ 으로 승리하는 한 해가 되도록, ‘믿음’ 으로 내 인생의 새 장을 만들어 가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부흥성회를 인도한 교회 목사님이 편지를 보내 오셨다.
샬롬! 배목사님. 추운 날 부흥성회에 성령님의 뜨거운 은혜가 넘치시길 기도합니다.
생각 나서 뒤늦게 좋은 소식 알려 드립니다.
작년 부흥회 때 교인들 기도해 주셨는데, 그 중 환상으로 비만인 청년 자매에게서 말뚝을 뽑았다고 하셨지요. 그렇게 운동해도 안 빠지던 살이 기도하고 운동하고 식사 조절하면서 약 40kg이 빠졌습니다. 할렐루야!
또한 호주로 이민 가려던 젊은 남자 집사도 주변 사람들이 어렵다고 했지만, 기도 받고 믿음으로 기도했더니, 아예 영주권까지 나와, 11월에 이민 갔네요. 가서 직장도 금방 좋은 곳에 됐습니다.
보내기 아까운 일꾼 집사인데...^^
감사 드리며~♡
♥ 2. 믿음으로 구원 받느냐, 행위로 구원 받느냐? ♥
어느 거룩한 사모님이 저의 강의를 들으시고, 이의를 제기하셨습니다.
저의 강의에서, “나는 행위와 삶이 따르지 않는 사람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행위가 따르지 않는 자는 천국 갈 수 없다.” 라고 말한 것이 문제입니다.
질문의 해답은 간단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그 믿음이란 것이 어떤 믿음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입술로 믿음을 고백하면, 구원 받는다’ 라고 합니다.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행전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믿음으로 구원 받는 사실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저는 이 ‘교리적 구원관’을 흔들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삶을 말하는 것이지요.
믿음과 행위를 양분하는 논리에 큰 함정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선행을 遺棄(유기)케 하는 함정 말입니다.
제가 지금 소개하는 아래 짧은 영상은 너무나 정확한 답을 주기 때문에, 모든 논쟁을 차치하고, 아래 영상으로 해답을 드리고자 합니다.
시청하시고, 큰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삶이 따르지 않는 “말로만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면 구원 받고, 천국 간다.” 는 거짓설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진실로 믿는 사람은 행위와 삶으로 그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그의 구원은 의심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한 편 강도의 구원은 아주 예외적인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삶의 열매는 없었지만, 온전히 회심하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 받아, 거룩하고 의로운 영혼이 된 것입니다.
결론은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느냐, 행위로 구원 받느냐 하는 문제는 말 장난에 불과합니다.
“진실로 믿음으로 가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행위와 삶에서 그 열매가 반드시 나타 난다.”는 것입니다.
열매로 보아 나무를 아는 것입니다.
행위와 삶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은 의심해 봐야 합니다. 물론 마지막 구원 여부는 훗날 천국에 가 보아야 알게 될 것입니다.
♥ 3.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야, 구원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교리로만 믿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 것인가, 행함도 필요한가?” 로 고민하는 상담 메일을 보낸 분이 계십니다.
정답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습니다' 입니다. 단 그 믿음이 구원의 교리를 믿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리 지식을 믿는 것으로는 구원 받지 못합니다. 구원 받은 자의 삶이 살아지지 않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올바른 교리를 알면서도, 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것은 올바른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를 은밀한 죄를 지어도 구원은 받을 것이고, 사람들과 불화하고 다툼이 있어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악용한다면, 그는 올바른 교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이 이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오직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지시고 죽으셨다는 교리 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그 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다릅니다. 속죄의 교리는 그 자체로 감격스럽지만, 우리를 일상 생활에서 죄에서 승리하게 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속죄의 주님과 동행하며,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는 죄에서 승리합니다.
찬송가 438장 (후렴)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렇습니다. 죄 사함만 알면, 지금 여기서 누리는 천국을 알 수 없습니다.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자가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야고보서에 보면 죽은 믿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죽은 믿음이란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을 말합니다.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선행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일, 라함이 정탐꾼을 숨겨준 일 등은 선행과 상관 없는 일입니다. 믿으니, 그런 행함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속죄의 복음을 믿습니까?
입으로 ‘아멘’ 한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보고서야 정말 믿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지옥에 갈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고, 예수님은 자신을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음을 믿는 사람이라면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고, 원수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십자가 복음을 믿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지만, 기쁘지 않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고아입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분명히 존재하고 그 아버지의 사랑을 믿지만 쓸쓸하고 가난하고 두렵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바라 보는 아들은 너무나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모든 은혜와 사랑을 다 받고 누립니다.
이것이 교리로 믿는 믿음과 인격적인 교제로 믿는 믿음의 차이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예수님은 한 분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고 사는 모습이 천차만별인 것은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과의 친밀함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 가운데 사는 법을 잘 모릅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추구하는 데만 신경 쓰다가,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를 소홀히 한 것입니다.
신학교에 들어 갔더니 교수님들이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믿는 것이고, 십자가 복음은 다 아는 것인데, 신학교까지 와서 굳이 그것을 다시 공부할 필요가 무엇이냐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정말 그런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현대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닌 것을 늦게 깨달았습니다.
제가 신학생 당시에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 복음을 믿는다 생각하였던 것은 교리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닫고 지나 간 세월이 얼마나 안타까왔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예수님의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의 열매란 삶의 변화입니다. 우리가 정말 확인해야 하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삶입니다.
딛 1: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계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항상 기뻐하라! 는 말씀을 너무나 잘 알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대로 사십니까?
‘범사에 감사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은 분명히 알지만 그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면 교리 지식, 성경 지식을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삶입니다.
말로만 믿지 말고, 오직 삶의 전반에서 주 예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https://m.facebook.com/pastor.yookisung/posts/695913693839956
♥ 4. ‘믿음’ 의 은사
⑴.믿으려고 하라.
2021.1.9. 토 오전 10시 <성령사관학교> ‘믿음의 은사’ 서론 중에서...
(히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 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말로는 믿는다 하나, 실제로는 믿지 않도록, 우리 의식이 평생에 훈련이 되어 있다.
세상의 각종 지식, 문화, 합리성, 이성적 판단, 과학적 사고, 논리적 체계, 신학적 도그마... 등이 그 원인이다.
매일, 매 순간 TV와 인터넷으로 산 세뇌 교육을 받는다.
믿음을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믿음도 훈련이다.
지속적인 ‘성령의 삶’ 이 있어야, 믿음이 자란다.
이성적 지식이나 논리적 체계가 곧 믿음이 자라게 하지는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의 믿음의 삶’을 통한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이 믿음을 자라게 한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현장에 늘 있어야 한다.
매월 첫 주 2박 3일 간의 <성령 컨퍼런스>,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의 <성령사관학교> 는 너무나 좋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충만히 받는 현장이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가는 사람을 찾기가 너무 힘들다.
‘올바른 성령’ 을 배우고, 진정한 ‘성령의 기름부음’ 을 충만히 받을 수 있는 이런 ‘성령의 지성소’ 가 대한민국의 한국교회 안에 과연 어디에, 얼마나 또 있을까?
정말 새성교회에서 실시하는 이 <성령사관학교>, <성령컨퍼런스>에는 사람들이 널리 알고, 모여 들어야 한다.
이 곳은 참으로 성스러운 성령님이 나타 나는 현장이다.
기적이 벌어지고, 살아 계신 성령 하나님이 실제로 나타 나시는 현장이다.
각 개인의 골방의 신음의 삶이 병행한다면, 진정한 기적과 기도 응답의 삶을 볼 수 있는 곳이 이 곳이 바로 새성교회 라마나욧의 현장이다.
이 곳은 이름 그대로 ‘새예루살렘성’, ‘지성소’, ‘시은소’, ‘시은좌’, ‘속죄소’ 이다.
성경 말씀의 지식, 믿음의 지속적인 훈련, 성령 주목, 성령 동행, 성령 복종, 성령 충만의 지속적인 훈련 만이, 진실로 믿음을 자라게 한다.
⑵.“믿습니다” 라고 확신이 올 때까지 반복 기도하라.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믿음의 말로 시인하고, 끊임없이 선포하고, 말로 확증할 때에,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믿음이 오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 난다.
⑶.마음에 실감으로 느껴질 때까지, 부르짖으라.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충분히 말로 선포하면, 충만한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여 내 영혼에 확증이 오고, 성령의 역사가 마침내 일어나, 응답이 오는 것이다.
⑷.오직 성령을 의지하라.
(히2: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기도 응답,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전적 성령의 역사이다. 우리의 믿음이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다.
⑸.담대하게 행동으로 옮기라.
(대상 28:20) 또 그 아들 솔로몬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게 이 일을 행하고,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여호와의 전 역사의 모든 일을 마칠 동안에 여호와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사, 네게서 떠나지 아니 하시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믿는 자는 그대로 살며, 행동한다.
기도는 곧 행동이요, 삶이다.
자기가 그대로 살지 않는 모든 말은 거짓말이다.
많은 영적 지식을 추구하지 말라.
삶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라.
자기의 분수에 맞도록, 가진 바 그 믿음으로서 삶을 이루어 내라.
말씀을 혼잡케 하지 말라.
유학을 다녀 온 세습한 유명한 교회 목사들이 방송에서 말씀을 혼잡스럽게 풀며, 말 장난을 하며, 잘난 척을 한다.
듣고 있으면 기가 찬다.
창세기 11:7자, 우리가 내려 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 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11:9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고린도후서 2:17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린도후서 4:2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⑹.성령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라.
(눅 5: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 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성령님이 항상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시고, 감동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신다. 오직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순종함이 필요하다.
요일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요일2:27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 5. 믿음은 깨달음이다.
항상 깨달음이 중요하다 - 링컨의 통회의 기도
링컨 대통령이 마차를 타고 가다가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대는 돼지를 보았다. 링컨은 그 모습을 무심히 바라 보며 지나쳤다. 백악관에 돌아 와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양심의 고통을 느꼈다.
“돼지도 하늘이 지은 생명이다.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수렁에 빠진 돼지를 모른 척 하다니…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링컨은 곧장 달려 나가서 수렁에 빠진 돼지를 구해 주었다. 그리고 그 날 밤 통회의 기도를 드렸다.
“저는 죄인입니다. 오늘 돼지를 구해 준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마음 속에서 일어 나는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행위였습니다. 그것은 제 자신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선행을 주저하지 않는다.
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베푸는 사랑은 ‘건전한 이기심’일 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분석과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항상 깨달음이 중요하다.
♥ 6. 믿음의 확신들이 필요하다.
1>.철저히 회개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죄악의 삶, 옳지 않은 삶, 성령님이 원치 않으시는 삶과 생각과 말과 행동과 대인관계와 사회생활, 돈... 등을 쓰지 말라.
2>.새 마음으로 시작해야, 새 시대가 열린다.
오직 성령께서만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하신다.
‘日新又日新(일신우일신)’ 하라.
3>.큰 꿈을 꾸면,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성령님은 큰 하나님이시다.
성령의 사람은 큰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작은 일들 하나 하나에 정성을 다하며, 결코 허황된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작은 빈 틈도 소홀히 하지 아니하며,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정리와 결산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나, 사람은 자기의 믿음과 행함과 가진 것으로 하나님의 채우심을 받는다. 믿음이 있어야 응답이 있고, 기도도 채움이 있어야 그 분량이 주어진다.
뿌린 대로 거두어지며, 은총을 받을 만큼 행함으로 먼저 살아야,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진다. 영적인 세계 만큼 철저하고, 무서운 계산의 세계는 다시 없다.
2021.1.8.금. 새해 벽두에 내가 사는 집의 보일러 배관이 동파되어, 터졌다.
강추위에 베란다가 얼어 붙자, 낡은 보일러 배관이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터진 것이다. 당연히 히터를 틀어서 동파를 방지했어야 했었다.
모든 일의 결과는 항상 정직하다. 20만원이 날아 갔다. 부품 값 5만, 인건비 5만으로 계산하면, 나머지 10만은 수리공에게 가는 보너스요 선물인 셈이다.
나에게는 대비치 못함, 불평, 불만, 남 탓함, 준비성 없음... 에 대한 교훈의 비용이다.
교회 화장실의 외벽 쪽에 있는 소변기 2대도 또 얼어 붙어서, 히터를 갖다 대고 녹인다. 밤 12시 30분이다.
어제 밤에 나름대로 조처를 했는데, 결국 하루 만에 또 위기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주님! 소변기 배관이 터지지 않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켜 주옵소서. 오늘 밤도 영하 20도 가까운 강추위인데, 지금 이 시간도 배관이 서서히 녹아 동파되지 아니하고, 물이 정상적으로 나오게 하여 주옵소서...”
정말 세상에는 아무 것도 공짜가 없다.
오늘 여기 <성령사관학교>에 오신 것도 절대 그냥 온 것이 아니다. 영적 이치를 깨달아, 성령의 삶을 살기 시작하면, 진실로 그 인생이 하늘 고속도로로 질러 갈 수 있다.
진정한 ‘영적인 사람’, ‘성령의 사람’ 은 인생을 가로 질러, 달려 가는 사람이다. 성령의 삶이 곧 ‘적중의 삶’ 이다.
4>.없는 것 한탄 말고, 있는 것 가지고 시작하라.
항상 내 손에 무엇이 있는가를 살피라.
내게 없는 것으로, 하나님은 절대 역사하시지 않는다.
설교를 못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소중한 강단에 절대 세우시지 않는다.
성령으로 살지 않는 사람을 들어 쓰시는 법이 없다.
죄악의 삶을 사는 자는 하나님이 눈 감아 주시는 법이란 없다.
진정한 성령의 사람이 되라.
진정한 은혜의 사람이 되라.
진정한 말씀의 사람이 되라...
사필귀정이요, 인과응보이다.
5>.믿음으로 나아 가면, 꿈이 현실이 된다.
하나님은 믿음을 꿈으로, 비전으로 부으시고, 행함으로 하나 하나 연단하신 다음에, 이루어 가신다.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믿음은 기도가 되고, 소원이 되고, 염원이 되고, 성령의 역사를 불러 일으키고, 마침내 그 현실의 열매를 내 눈에 갖다 준다.
6>.하나님 말씀 붙들고 가면, 형통함이 온다.
말씀은 살아 있다.
말씀이 하나님이시다.
말씀은 생명이다.
말씀을 믿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7>.기도는 기적의 시작이다.
성령님은 마음의 소원을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생각 나게 하시고, 그리고 기도하게 하시고, 말로 시인하게 하시고, 기도의 분량을 채우시고, 나를 합당하게 빚어 가시고, 그리고 응답을 선물로 주신다.
그 때에 우리는 기뻐한다. 감사한다. 행복해 한다.
항상 그 마지막은 하나님께 영광 돌림이다.
8>.순종은 기적의 조건이다.
순종함 만큼 영성이 자란 것이다. 기쁨과 감사가 순종의 정도이다.
불평, 불만, 원망, 시비, 남 탓... 은 순종함의 부족이다.
진정한 순종의 사람을 어디에서 찾으리요?
말씀에 순종, 성령께 순종, 목사님께 순종, 남편에게 순종, 아내에게 순종, 자식에게 순종, 부모에게 순종...
진실한 순종의 영성을 배우라.
9>.새벽에 울면, 낮에 웃는다.
인생을 편히 살려 하지 말라. 공짜로 살려 하지 말라. 남의 덕으로 살려 하지 말라. 너의 할 도리를 다 하라. 네 할 일을 다하라.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이다.
시편 126편 5-6절의 말씀을 네 삶으로 이루라.
5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 오리로다.
10>.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믿는 자는 반드시 주님이 주시는 영광을 본다.
믿는 자는 가지게 된다.
믿는 자는 진실로 부요해진다.
믿는 자는 큰 자이다.
믿는 자는 부족함이 없다.
시편23: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11>.믿으면, 기도한다.
하나님을 믿는 만큼 기도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기도한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만큼 기도한다.
내 믿음의 크기 만큼, 믿는다.
믿음과 기도는 같이 간다.
믿음이 있는 자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믿음의 사람은 허황됨이나 거짓이나 탐욕을 따라 기도하지 않는다.
믿음과 기도의 사람은 주신 것을 감사하며, 근검 절약하며, 항상 여유로우며, 언제나 사람이나 환경을 바라 보지 아니하며, 하나님만 바라 본다.
그는 날마다 풍족하게 누리며,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어찌된 삶인지 그의 삶은 항상 미리 미리 예비되어 있다. 기쁨과 감사와 풍요와 눈물과 섬김과 나눔과 자기 부인의 삶이 늘 가득하다.
12>.사랑은 고난을 감수한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부어진 사람이다. 그는 행복이나 고난을 추구하거나 피하려 들지 않는다.
인생은 원래 喜怒哀樂(희로애락), 艱難辛苦(간난신고)의 여행 길이다.
그는 항상 자기 삶에 주어지는 대로 늘 기뻐하며, 감사하며, 누리며, 고생을 인내하며, 어떠한 상황도 견디며, 능히 감수하며, 창조적으로,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그리고 사랑함으로 살아 간다.
그는 염려 근심 걱정 불안 두려움이 없고, 불평 불만 원망 시비 한탄이 없고, 미움 다툼 시기 질투가 없다.
그는 오직 성령 안에 살아 감으로, 원수 마귀가 불행하게 만들 수가 없다.
♥ 7. 믿음의 형태
1) 모든 사람이 갖는 일반적인 믿음
하나님은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대로 다루신다.
(롬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2) 구원의 믿음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3) 성령의 열매인 믿음(한글 개혁 성경 -‘충성’으로 번역)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제자들은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주님께 간청하였다.
(눅17: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4) 은사인 믿음
같은 성령님에 의해 다른 믿음의 은사가 주어졌다. 예수님과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산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능력으로서의 믿음이다.
(마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고전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고전12: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 8. 믿음의 종류
‘믿음의 은사’ 는 신자의 삶의 모든 열쇠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믿음의 은사’는 능력을 행하는 믿음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제반 믿음의 선물을 주님께 다 받고 싶다.
1>. 고백하는 믿음 – 3대 고백 : 회개 고백, 신앙 고백, 사명 고백(우정적 사랑 고백)
회개 고백:
눅5: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신앙 고백:
마16:15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사명 고백(우정적 사랑 고백):
요21:15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주님 – 1회, 아가파스 메, 2회, 아가파스 메, 3회 필레이스 메
베드로 – 1회, 필로 세, 2회, 필로 세, 3회 필로 세
요21:15οτε ουν ηριστησαν λεγει τω σιμωνι πετρω ο ιησους σιμων ιωαννου αγαπας με πλεον τουτων λεγει αυτω ναι κυριε συ οιδας οτι φιλω σε λεγει αυτω βοσκε τα αρνια μου
16λεγει αυτω παλιν δευτερον σιμων ιωαννου αγαπας με λεγει αυτω ναι κυριε συ οιδας οτι φιλω σε λεγει αυτω ποιμαινε τα {VAR1: προβατια } {VAR2: προβατα } μου
17λεγει αυτω το τριτον σιμων ιωαννου φιλεις με ελυπηθη ο πετρος οτι ειπεν αυτω το τριτον φιλεις με και {VAR1: ειπεν } {VAR2: λεγει } αυτω κυριε παντα συ οιδας συ γινωσκεις οτι φιλω σε λεγει αυτω {VAR1: ιησους } {VAR2: [ο ιησους] } βοσκε τα {VAR1: προβατια } {VAR2: προβατα } μου
2>. 능력을 행하는 믿음,
3>. 삶으로 이루어 가는 믿음,
4>. 내 삶에 필요한 모든 믿음의 역사
이 모든 ‘믿음의 은사’ 를 다 나의 것으로 받고 싶다. 아멘.
♥ 9. 믿음의 근거
우리는 말씀을 읽어 나가는 데 있어 믿음이 필요하지만, 믿음을 갖게 하는 말씀도 필요하다. 그렇지만 이 작은 문제를 푸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믿음은 마음을 열고 있는 자의 가슴 속으로 흘러 들어 간다.
믿음이 믿음을 가져 온다.
불신자, 냉소자, 훼방자는 믿음에서 이미 떠난 자이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주님께로부터 온다. 믿음은 선물이다.
그것은 보는 것, 혹은 듣는 것과 같이, 우리가 거듭날 때 주신 그 분의 가장 큰 선물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고 계신 것들을 우리가 손을 뻗어 받아 들일 수 있는 축복이다. 만약 우리가 그 믿음을 파괴 시키거나 손 마른 자와 같이 된다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믿음의 실패자가 되지 말라.
보라. 성경에는 얼마나 많은 믿음의 실패자들이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 주는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 사사 삼손, 사울 왕, 솔로몬...
우리는 때때로 기적에 근거를 둔다.
그러나 이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요2:23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24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표적을 보고 믿는 믿음은 단지 일어난 충동일 뿐, 진실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때, 그러한 믿음은 증발될 수 있다. 은사 사역의 맹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진실한 믿음을 갈고 닦으라.
♥ 10. 성장하는 믿음
예수께서는 사람 들을 ‘믿음이 작은 자들’ 이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마6: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눅17:1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3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5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 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믿음의 성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님에 의해 주어진다(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지속적인 교회 생활, 예배 생활, 헌금 생활, 봉사> 충성> 헌신> 산순교> 순교의 삶, 전도 생활, 선교 생활... 등에서 믿음이 자란다.
기도, 예배, 말씀, 헌금... 등에 의해 믿음이 성장된다.
얼마나 핵심적인 말씀인가?
우리는 믿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지만, 우리의 기도가 응답 되기 위해서는 말씀을 기초로 하여야 한다.
우리가 말씀을 적게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지 못한다. 우리가 말씀을 아주 적게 알고 있다면, 우리는 서 있을 수 없거나, 혹 한 발로 균형을 잡아야 할 정도 밖에 될 수 없다.
젖은 헝겊 위에서 사과나무를 키우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누군가의 경험을 써 놓은 책을 통해 배양된 믿음을 얻으려고도 한다. 그러나 각종 영성 서적들 보다는, 말씀을 계속해서 읽고 듣는 것 만이 믿음을 성장시키는 바른 길이다.
이 길 만으로 교회는 강해질 것이며, 교인은 의심을 피할 수 있으며, 또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 것이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 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11. 믿음의 정의
불행하게도 믿음은 형이상학적인 종교적인 추상적 개념이 되어 가고 있다. 성경에 기록되어 모든 믿음의 말들은 신의가 두터운, 관계에서의 신뢰, 신뢰할 수 있는 행동,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정직성을 암시한 어원으로부터 온다.
믿음은 하나님의 미쁘심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히10:23-25).
23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서로 돌아 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진실한 믿음은 일어 나는 일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것에 있다. 믿음은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신뢰함으로, 자신의 의지를 뒤로 하고 물러 서는 것을 말한다.
1) 믿음은 단지 전통적이거나 혹은 교리에 대해 긍정적인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어떤 작은 부분이라도 그 근원이 우리에게 있다면, 대대적인 수정이 필요하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2)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면, 하나님! 당신을 믿겠나이다.”라고 말하며 하나님과 흥정을 하려고 한다면, 전반적 믿음의 문제에 전적으로 무지한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조건적이어서, 믿음을 갖는 데 실패한다.
모든 믿음은 선물이며, 하나님의 일이다(요6:27-29).
27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믿음의 능력은 성경에서 특별한 경우로써 다루어지고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성령님의 나타나심은 선물이며,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믿음은 하나님의 능하신 초자연적인 모든 표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선물이다.
믿음은 성령님의 행위에 의해, 주어진다. 이러한 수준의 믿음을 나타 내도록 나의 의지로 노력하는 것은 소용 없는 일이다. 믿음은 노력하고, 용을 쓰고, 전심 전력하는 것이 산물이 아니다. 믿음으로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오고, 훈련되어지고, 강해진다.
모든 믿는 자에게 요청되는 것은 성령이 이루어 놓은 일반적인 믿음 뿐 만이 아니라, 특별한 믿음의 신령한 은사, 곧 ‘산을 옮길 만한’(고전13:2), ‘능력을 행하는 믿음’ 이다. 물론 사랑이 더욱 더 중요하지!
고전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히13:33-34)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도 강하게 되기도 하며,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이 은사는 일정한 상황이나 곤경에 처한 사람의 마음 속에 파도처럼 흘러 들어 오는 초자연적인 확신감으로서,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곧 말씀이나 행동을 통해 역사하시리라는 초이성적인 보증과 확신을 갖게 된다. 그것을 말로 표현할 경우, 그 내용에는 창조와 파괴, 축복과 저주, 제거와 변형 등이 포함된다.
이 은사는 일정 시점에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시리라는 초자연적인 지식 및 성령의 능력을 통해 그 분의 개입을 초래할 수 있는 권세를 말한다" -그로스만-
믿음으로 민족을 움직이는 저명 인사들의 이름이나, 세계를 흔드는 믿음의 사람들은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지고 있다.
그들은 특권을 소유한 사람들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누구에게나 믿음의 은사는 주어진다.
♥ 12. 믿음의 은사 사례
1)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용장들
2)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사람이 위기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믿음
다니엘과 그의 친구 세 사람
멜리데 섬에서 뱀에게 물렸던 바울(행28:5, 막16:18)
3) 굶주리거나 단식을 행하는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음식물이 제공되는 경우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왕상17:4,6)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림(왕상17:21,22)
예수의 40일 금식기도(마4:4)
4)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경우
나이 든 사라(롬4:18-22)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5) 극도로 부도덕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치리하는 데 사용
음행을 하는 어떤 교인을 고린도 교회에서 치리(고전5:4-5)
6)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을 르비딤에서 격파(출17:11)
7) 가정의 경제적인 어려움이 극복되는 경우(엘리사/왕하4:3-4)
8)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남(나사로/요11:43)
9) 저주를 하는 데 사용됨(무화과 나무/마21:19, 아나니아와 삽비라/행5:9-10)
* 믿음의 은사를 사용한 결과
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
2) 사람들로 하여금 경외감을 느끼게 함(마21:20)
3)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믿음을 갖게 함(요11:45)
4) 이 은사로 통해 교회의 덕이 세워짐
믿음의 나타냄을 포함한 모든 선물은 ‘지역교회’를 위한 것이나, 크게는 하나님의 나라 전체를 위한 것이다.
믿음의 은사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모든 교인들이 활기를 띠게 되는 능력으로 두드러지지는 않더라도, 평범한 믿음으로도 보통 사람을 비범한 사람으로 만든다. 어떤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불과 물을 통과하면서, 연단 받으며 성장하기도 한다(바울과 실라).
♥ 13. 믿음과 순종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믿음이 필요하고, 또한 순종할 때 믿음이 주어진다. 순종은 믿음이며, 믿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의 은사는 다른 능력의 은사들에 비하여 극적인 성격 면에서 약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그 목적이 오랜 기간에 걸쳐 은밀하고도 조용한 기도 가운데 달성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기적을 행하는 은사는 하나의 사건으로 나타나는 한편, 이 믿음의 은사는 하나의 과정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성령께서 베풀어 주시는 능력의 은사들을 사용할 때에는, 한 가지 사건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은사들이 동시에 적용될 경우가 매우 흔하다. 예컨대,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데에는 믿음의 은사와 치유의 은사가 동시에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무덤에서 다시 살아났을 뿐 아니라, 그 몸이 완전히 치유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죽기 전에 병을 앓고 있었으며, 죽은 뒤에는 그 몸이 심히 부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몸으로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여기에 기적을 행하는 은사가 작용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 14. 믿음으로 살면 온전해진다
마 5:17~20절은 믿음은 곧 삶과 행위로 꾸준히 이루어 가야 함을 강조하신다.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 가지 못하리라.
♥ 15. 믿는 이는 성령의 은사를 가져야 한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Spiritual Gift)란 말을 자주 듣고 또 전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은사란 무엇일까요?
성령의 은사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에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사용하도록 성령에 의하여 주어진 특별한 속성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의 은사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온다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가르키는 일반적인 희랍어는 카리스마(Charisma)라는 말인데, 이 카리스마라는 단어의 복수형은 카리스마타(Charismata)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우리가 자주 듣는 카리스마 운동(Charisamatic Movement)이라는 말이나 [카리스마적](Charismatics)이라는 말은 이 희랍어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카리스마’ 라고 하는 희랍어 단어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하는 ‘카리스(Charis)’ 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그런 고로 성령의 은사와 하나님의 은혜와의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카리스마’ 라는 용어를 잠깐 유의해 보는 것이 믿음에 도움이 될 줄로 압니다.
로마서 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Charisma)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고린도전서 12:1절에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하였는데 이 때 [신령한 것]은 ‘성령의 은사’ 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 에베소 4:8절의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을 분량대로 은혜(Charis)를 주셨나니], 이 때 선물, 은혜라는 말도 도마(Doma), 복수형 Domata), 은사 라는 말을 썼고, 또 카리스마타 라는 단어는 대신에 [영적인 것들]을 가리키는 프뉴마티코스(Pneumatikos)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의 언어를 참고해 보는 중요한 이유는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성령의 은사는 믿음의 은혜를 따라 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란 믿는 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그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둘째, 카리스마타, 신령한 것인 믿음의 은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오는 것입니다.
믿는 이가 성령의 역사에 잡히게 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Charis)를 받게 됩니다. 즉 성령에 잡힌 성도의 삶 속에는 꼭 신령한 은사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 성령의 은사란 은혜의 두번째 역사(Second Work of Grace)] 를 따라 오는 것입니다.
믿는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알고,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는 깊은 믿음의 세계를 파고 들어 갈 때에 시간 마다, 장소 마다 임하여 붙들어 주는 것, 그것이 성령의 은사입니다.
그런 고로 모든 성도는 이 신령한 성령의 은사에 사로잡혀야 하고, 이 은사에 사로잡힐 때 나의 힘으로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수 있고, 나의 힘으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수도 있고, 나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죄와 악의 분노와 환난을 시간 마다 넘어갈 수 있답니다.
여러분의 믿음 위에, 은혜로 세움 받은 가정 들마다, 사명으로 섬기시는 제단들 마다 이런 신령한 성령의 은사들이 충만키를 축원합니다.
넷째, 성령의 은사는 위대한 위임 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따라 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모든 믿는 이는 우리 주님의 대위임 명령을 수행하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위임 명령을 수행한다고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명에 사로 잡혀서 힘쓰고 애써 보신 분들은 다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온갖 사명(Calling)을 받고, 그 사명을 감당키 위하여 기도하며 간구하시는 성도님들, 또 일년이 다가도록 전도의 열매를 맺지 못하여, 천하 보다 귀한 영혼의 이름을 불러 가며 기도하고 계시는 성도님 여러분!
이 모든 일은 성령의 은사를 따라 감당할 수 있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충만한 온갖 성령의 은사들을 받아 주님 안에서 사명 감당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하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섯째, 성령의 은사란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토록 주어진 것입니다.
믿음의 깊이가 더해 가면 갈수록, 감사와 감격 속에 나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기도 뿐입니다. 오직 믿음,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영광... 이것들이 믿음의 대주제입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일하고, 행한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같은 신앙의 마지막 절정을 위하여 믿는 이에게 주시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의 값없는 선물(God's Gift of Grace)이 성령의 은사(Spiritual Gift)입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한 눈을 뜨시고, 신령한 것에 잡혀 사는 믿음들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우리가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발견하는 일] 이 [발전하는 일] 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신령한 은사들을 하나님의 자유 재랑으로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11절에 성령의 은사를 나눠 주시는 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들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데로 지체를 각가 몸에 두셨으니,](고전12: 18)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성령의 은사를 부어 주는 일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능력이 있다는 믿음의 사람이나, 전도자나, 목사나, 총회장이나, 감독이나, 교황이나 신학대학 교수나, 학장이라고 할지라도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줄 수 있는 자격은 부여 받지 못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따라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 받는 자녀에게 직접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 성령의 은사인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은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오는 것으로, 사람의 공로나 행적과는 상관 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믿는 이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고로 오래 믿었다고 더 큰 은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뱃속부터 교인이었다고 더 많은 은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성숙하게 될 시간도 채 가지지 못한 새신자에게, 놀라운 은사들이 역사하게 되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또 모든 사람이 다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믿지 않는 이에게는 성령의 은사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진실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최소한 수십가지 이상의 은사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10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은혜의 선물인 은사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성도들 속에 나타나는 [혼합 은사](다양한 은사)에 대하여서는 보다 더 많이 연구하고, 서로 이 은사를 나누며 발견해야 할 아주 흥미로운 과제인 줄 압니다.
이제는 성령의 은사를 발견하고, 내 믿음 속에 발전시켜 활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 각 개인에게 다 같이 중요한 일이라면, 이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 실제적이고도 개인적인 방법으로 무엇인가 믿음의 일이 추진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고 있는 분명한 교훈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본적인 영적 관계 가운데 하나는 믿는 이가 자기 속에 나타난 영적 은사를 발견하고, 그 은사를 사용하여 발전시키는 일입니다.
물론 예배의 행위도 중요하고, 기도도, 찬양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믿음의 행위를 통하여 성도 속에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를 발견하고, 그 은사를 사용하여 이 죄와 악의 사악한 세상을 신령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일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믿음은 기쁨입니다. 믿음은 감격입니다. 믿음은 변화입니다. 이 신령한 은사는 소유할 때 성도는 더 좋은 교인(Better Christian)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생애를 통해서 나에게만 허락하시고 이루어지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주시는 신령한 힘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은사의 세계를 알고 소유했을 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소리쳤습니다.
또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 전체에 큰 역사를 일으킵니다.
에베소 4장에는 성령의 은사가 작용할 때, 그 몸 전체가 성숙한다고 했습니다. 이 성령의 은사가 역사하는 교회는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부흥하고 발전하며 초대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듯, 오늘 우리 교회들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고로 성령의 은사는 교회 성장과는 특별한 관계가 있습니다. 세계 역사 속에 어느 시대이든 성령의 은사가 역사한 시대와 그 장소에서는 놀라운 복음의 불길이 일어 났습니다.
2022년에 한국 강산에 다시 성령의 불이 붙고, 은사가 불같이 일어나, 불의하고 악한 정권을 潰滅(궤멸)하고, 코로나를 퇴치하고, 한국교회 들의 성장이 불 같이 일어 나기를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은사가 역사하는 교회는 부흥의 불길이 붙고, 성령의 은사가 잠자는 교회는 부흥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믿음도 매 한 가지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있는 믿음 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만 그에게 영광과 권능을 돌릴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입니다.
성령의 은사로 무장한 성도들의 손이 닿고, 발이 닿고, 가슴이 닿고, 입술의 기도가 닿는 곳에서 세상을 구하고,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건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 16. 감각 지식의 믿음과 영적 지식의 믿음(Sense Knowledge Faith And Spiritual Knowledge Faith)
“사람이 마음(Heart)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감각 지식의 믿음과 영적 지식의 믿음은 다릅니다. 감각 지식의 믿음은 감각을 통하여 습득된 믿음이며, 현대 발명의 어머니입니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제도는 감각 지식의 믿음이 낳은 산물입니다. 사실상 당신은 감각 지식을 통한 믿음을 구축하고자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냅니다. 감각 지식의 믿음은 후각, 시각, 촉각, 미각, 청각을 사용하여 얻어진 관찰에 근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면 믿겠어요. 보지 못하는 것은 믿지 못하겠어요.”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자신들의 감각을 통하여 믿음을 건축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류의 믿음은 그들의 육신, 곧 그들의 감각을 담고 있는 몸에 의존합니다. 이를 ‘육신적 믿음’ 이라 표현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몸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감각으로 하나님과 접촉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생각(mind;마음)으로 믿지 않습니다. 생각으로는 추론을 할 뿐입니다. 오늘의 본문 구절은 사람이 ‘마음(heart;심령)’으로 믿는다고 했지, 생각(mind)으로 믿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심령’이란 바로 ‘당신의 영(spirit)’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당신이 감각 지식의 믿음으로 살아 가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고린도후서 5:7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다”
보는 것은 감각의 인지를 의미합니다!
로마서 8:13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육신은 감각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육신의 감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영의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영적 지식의 믿음’으로 살아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믿음, 즉 영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옵니다. 로마서 10:17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에게 들어 올 때, 믿음도 함께 옵니다. 말씀은 당신의 영에 믿음을 전이합니다. 예컨대 이렇게 해서 당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어떠한 과학적인 증거에 의지하지 않고도 믿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기 위해 그 분을 “느끼거나” 한 밤중에 천사의 방문을 경험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이 그 분이 계시다고 알려 주기 때문에, 당신이 말씀을 들을 때 영적 지식이 당신의 영에 믿음을 전이해서, 그 영적 지식을 받게 합니다.
아버지의 말씀으로부터 받는 지혜와 계시로 인해 감사 드립니다.
저의 믿음은 영적 지식에 근거하기 때문에, 활발하게 세력을 얻습니다.
제가 은혜와 말씀의 지식 안에서 자랄수록, 모든 면에서 진보하고 번영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요 20:29, 새번역)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롬 8:1, 새번역)
♥ 17. 겉 믿음과 속 믿음
마6: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우리 주변에서 자기만 예수를 잘 믿고, 예수의 사랑을 혼자 독점한 듯 살고 있는 사람이 그 마음은 예수와는 거리가 먼 자기 모순, 자기 기만, 부정 부패... 등에 철저히 지배 당하고 있음을 볼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속 빈 강정 같은 겉 다르고, 속 다른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그 마음을 모르지만,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일심으로 주를 섬겨야 합니다.
♥ 18. 구원에 이르는 믿음
마가복음10:46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 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 오거늘,
51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누구보다도 믿음을 많이 강조한 개혁자입니다. 라틴 말로 ‘Sola Fide(오직 믿음)’ 라고 하는 말을 그의 테마와 슬로건으로 삼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이렇게 믿음을 강조했고,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지주가 되어 오고 있습니다.
사람은 각자 저마다의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믿고, 어떤 이는 자기의 젊음과 건강을 믿고, 혹은 명예를, 권력을, 인적인 관계 등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을 만한 것이 못되는 것을 믿었다가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못 믿을 것을 믿는 일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다 할 때에 그 믿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 우리가 믿고 있는 바를 한 번 재점검했으면 합니다.
마틴 루터는 신앙을 정의하기를 "신앙이란,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이다." 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이나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실적인 가정 생활, 사회 생활 등 복잡한 현실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라 표현했습니다.
그는 다시 이것을 상징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의 그릇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그릇이다." 라고 설명합니다. 그릇이란 우선 비어 있어야지, 가득 채워 있는 그릇은 쓸모가 없습니다. 다시 무엇을 담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릇 구실을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깨끗하고 빈 그릇이어야 합니다. 독약이 묻었든지, 오물이 묻었어도 다시 무엇을 담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깨끗하게 씻겨져야 하는 마음이 믿음입니다.
또한 큰 그릇이어야 합니다. 너무 작은 종지 잔은 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큰 그릇, 큰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수로보니게 여자에게 "네 믿음이 크다" 고 칭찬하셨습니다. ‘크다’ 는 말을 헬라 원문으로 '메가스피스치스'라고 합니다. ‘메가스’ 는 ‘아주 크다’ 는 뜻으로, 적어도 메가톤 급의 큰 그릇이 필요합니다. 그릇이 커야만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큰 그릇, 위대한 그릇이 필요합니다.
만약에 마틴 루터가 오늘 이 세대에 살아 있다면 믿음을 무엇에 비유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제 생각에는 “믿음이란 수신기 채널이다.” 라고 말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텔레비전, 라디오 등은 송신기가 아니고, 수신기입니다. 받아 들이는 기계이며, 여기에는 채널이 있습니다. 이 우주에는 여러 가지 전파가 오고 가고 있지만, 수신기가 없으면 들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가끔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피곤하면 라디오를 켜는데, FM 방송에서 좋은 음악이 나옵니다. 그러면 왜 진작 라디오를 듣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워 합니다. 아무리 좋은 음악이 흘러 나오고 있어도, 내 수신기의 스위치가 꺼져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수신기가 있고, 또 제 구실을 해야만 좋은 음악이 들어 올 수 있습니다. 물론 채널도 맞아야지, 이것이 빗나 가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수신기 채널 이것이 바로 신앙이라 비유해 봅니다.
구약에 보면 솔로몬 왕이 21세에 약관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일은 중첩되고 답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밤 새 기도를 드렸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까?" 솔로몬은 준비된 대답을 했습니다.
"주여! 내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옵소서."
이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오래 살게 해 달라고 장수를 구할 수도 있고, 부귀를 구할 수도 있고, 원수의 성(成)을 구할 수도 있고, 안정을 구할 수도 있고, 이렇게 구할 것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지혜를 구하느냐?"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은지라."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기도로서, 이것이 곧 믿음입니다.
이산가족을 찾느라고 TV에서 서로 만나고 전화를 하면서, "맞다, 맞다"라고 야단입니다. 맞아야지, 안맞으면 무효이지요. 묻는 말과 대답하는 말이 맞아야 일이 성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데 채널이 맞지 않고 그릇이 틀렸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시겠습니까?
이것은 마치 부모와 자녀와 관계와 같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키우면서 돈을 줄 때가 제일 기쁩니다. 자녀가 돈을 달라고 할 때, 선뜻 내어 주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없어서 못 주고, 주어서는 안되겠기에 안 주는 것입니다. 좋은 일에 바로 쓰기만 하면, 그 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생각할 때, 응답을 못 받는 우리도 답답합니다만, 못 주시는 하나님은 더 괴로울 것입니다. 주어선 안되겠기에,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고로 신앙이란 수신기의 채널로서 꼭 맞아야 합니다. 주시고자 하는 분 하나님과 받고자, 받고자 하는 자 나 사이에 매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디매오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 앞에 소정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말로만 고백한 것이 아니고, 그의 행동 자체가 하나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 때에 주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라는 말은 얼마나 정확한 말씀입니까?
아주 꼭 맞았다는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훌륭한 믿음은 인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병 고치실 때 가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믿는 대로 되리라, 네 소원대로 되리라."
어느 순간, 어느 믿음, 어떤 채널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내용입니다. 믿음, 바른 믿음, 바른 관계, 이것이 우리가 찾아야 할 채널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바디매오의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그는 ‘듣고 소리를 질렀다’ 고 하는데,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사람은 기회를 잘 포착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여리고 성을 나갈 때에," 라고 했습니다.
여리고 성을 들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성 밖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가시는데 그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소란한 소리 중에 예수님이 나가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때에 소리를 질렀는데 이 기회야말로 일생에 단 한 번 있는 귀한 기회였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타이밍입니다.
우리는 기회를 놓칠 때가 많으며, 뒤로 미루기도 합니다. 오늘 기도할 것 내일로 미루고, 오늘 해야 할 선한 일을 다음 번에 하자고 기회를 놓치고 있습니다. 기회를 놓치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입니다.
두 번째로 바디매오는 가능한 것을 총동원 했습니다.
소경으로 보지는 못했으나, 들을 수는 있었습니다. 이것을 최대한으로 활용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없는 것만 생각하여 불평하는 일이 많습니다.
저는 불평이 많고, 원망이 많은 젊은이들에게 간단히 말합니다.
"자네들이 내 나이 되어 보면, 알 걸세."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사실 젊었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최고로 행복한 것입니다. 나이가 들고 보면 돈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안됩니다. 젊었다는 것 하나가 얼마나 큰 밑천인데, 무엇을 불평 하겠습니까?
굶고, 먹고, 출세 따위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젊었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크게 행복한 것인데 과연 인식하고 살아 가고 있습니까?
그래서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장남이므로 돈도 없고, 지식도 없고, 명예도 없고, 친구도 없고, 가정도 없습니다. 이렇게 다 없으나 귀가 있고, 입이 있었습니다.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이 두 가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못 가진 것 원망하지 않고, 이미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시시하다고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은 못 해서 못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은 받아 들이고 기다립니다. 주님의 뜻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은 극대화 해서 최선을 다해 후회함이 없이 해 나갑니다. 굉장한 일을 하겠다고 떠벌릴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충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디매오의 신앙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방해가 많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군중들이 꾸짖고, 그가 주님 앞에 나아 옴을 방해했습니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은, 군중들은 예수님이 장님도 고쳤고, 문둥병도 깨끗이 낫게 하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장님 거지 한 사람이 주님께 간청할 때, 왜 좀 도와 주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휴머니티가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군중들은 메시야요, 그리스도요, 유대의 왕이 되실 분이 행차하시는데, 거지가 왜 이렇게 시끄러우냐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군중과 제자들로부터 방해 받은 바디매오는 자기를 소외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행차하시는데 나 같은 것이 방해를 해서 되겠느냐고 자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실은 말릴수록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고 했습니다. 이상하게도 사람에게는 하지 말라고 말리면 더 하고 싶은 생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바디매오도 잠잠하라고 꾸중했을 때, 더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역설적이고, 역동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조그마한 핍박이 있다고 해서, 넘어지고 낙심하는 신앙은 안됩니다. 핍박이 있을수록 더 크게 소리 지르고 열심히 나갈 수 있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의지의 구현이요, 굽히지 않는 실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