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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정씨 화이팅 원문보기 글쓴이: 정철중(23세)
세 | 성 명(자, 호) | 주요 이력 ‧ 행장 |
6 | < Ⅱ 동백 >
정인인(鄭麟仁) 덕수(德秀) (? ~ 1504) 節義
*부 찬우(纘禹) | 연산군4년(1498년) 무오 식년 문과 장원(壯元) 사헌부장령, 집의(司憲府掌令, 執義), 홍문관전한(弘文館 典翰),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 제주목사(濟州牧使) 갑자피화형졸(甲子被禍刑卒), 증참판(贈參判) 사적(事蹟) : 남추강*언행록(南秋江言行錄), 김사재*척언(金思齋摭言), 동각잡기*(東閣雜記)
* 정인인(鄭麟仁)
1498년(연산군 4년) 종부시주부로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지평에 승진, 홍문관 전한이 되었다. 1500년 장령을 거쳐 1502년 집의가 되고 다음해 당상관에 승진되면서 제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사직하였다.
이 때문에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장류(杖流)하도록 논죄되었으나, 대신들의 “더운 날씨에 결장(決杖)함은 생명에 위험하니 감형하라."는 구호로 감장부처(減杖付處)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면서 전일에 홍문관·사헌부에 재직하면서 왕의 실정을 비판한 것을 비롯하여 제주목사의 부임을 기피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연산군의 혐오로 이에 연루되어 참수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의 즉위와 함께 신원되면서 관작이 복구되었고, 아들도 녹용(錄用)되었다.
* 남효온(南孝溫) : 1454 ~ 1492, 호 추강(秋江), 행우(杏雨), 시호 문정(文貞)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인물됨이 영욕을 초탈하고 지향이 고상하여 세상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다. 김종직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우리 추강’이라 했을 만큼 존경했다 한다.
1478년(성종 9)성종이 자연 재난으로 여러 신하들에게 직언을 구하자, 25세의 나이로 장문의 8개 조의 소를 올렸다. 그 내용 중 여덟째, 문종의 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이 포함되었는데, 소릉 복위는 세조 즉위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명분을 직접 부정한 것으로서 이 일로 인하여 훈구파의 미움을 받게 되었고, 세상 사람들도 미친 선비로 지목하였다.
1480년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마지못해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그 뒤 다시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의 금기에 속한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 6인이 단종을 위하여 사절(死節)한 사실을 「육신전(六臣傳)」이라는 이름으로 저술하였다. 죽은 뒤 1504년 갑자사화 때에는 소릉 복위를 상소한 것을 난신(亂臣)의 예로 규정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김시습·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 등과 함께 생육신으로 불렀다. 저서로는 『추강집(秋江集)』·『추강냉화(秋江冷話)』·『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귀신론(鬼神論)』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안국(金安國) : 호 사재(思齋), 본관 의성(義城)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1509년 중종 4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해 호당(湖堂)의 재주있는 문신으로 뽑혔으며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관찰사(觀察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고 병조 예조 형조참판을 지낸 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문(詩文)이 당대에 뛰어났고, 의서(醫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를 비롯한 저서를 많이 남겼다.(의성김씨 종친회 자료에서)
* 동각잡기(東閣雜記) 조선 명종·선조 때 문신 이정형(李廷馨)이 찬술한 야사책.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한 배경으로부터 선조 때까지 정치와 명신(名臣)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성계의 무공(武功), 정도전(鄭道傳)의 정치 활동, 제1·2차왕자의 난,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 찬탈, 육신(六臣)들의 복벽운동(復辟運動), 기묘사화·을사사화·기축옥사·임진왜란 등을 중요한 기사로 다루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
8 | <Ⅰ-1 절제사>
정호(鄭虎) 퇴재(退齋) 節義
*부 참동(參仝) | 생원, 무과, 임치진첨절제사(臨淄鎭僉節制使)
「나주금강계회」 11현인으로서, 육봉 박우가 그 일을 기록하고 한림 나창계가 시로 지었다. 기록은 섬호 진경문이 시화로 남겼다 羅州錦江契會 十一賢人 朴六峰祐記其事 羅翰林昶繼以詩 遺蹟載 陳剡湖景文詩話中
* 나주금강계회 - 계원 : 나주 태학관 유생 출신 11명 정문손(鄭文孫), 임붕(林鵬), 김두(金豆), 김식(金軾), 나일손(羅逸孫), 진이손(陳二孫), 진삼손(陳三孫), 정호(鄭虎), 김구(金臼), 김안복(金安福), 진세공(陳世恭)
* 계회 결성 배경
중종14년(1519년) 남곤, 홍경주, 심정 등 훈구파의 모함으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세력 100여명이 화를 당한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규명을 위해 나주출신 태학관 유생 11명은 이들의 구명을 위해 태학관 유생 200여명의 호응을 얻어 집단상소를 올렸다, 주동인물은 정문손과 임붕 2인이 대표이고 상소문은 정문손이 썼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귀향해 錦江(영산강) 가에 아옥*을 짓고 금강계를 조직하였다. 정치의 비정함을 한탄하고 후일을 기약하며 변치 않는 절개를 맹세하였다
* 금강11인계 나일손의 자 한림 나창(羅昶)의 시
십유일인분사구(十有一人枌社舊) 십일인 옛 고향 벗들이 모여 맹세하고 한송심사죽청진(寒松心思竹淸眞), 새한의 소나무 심사요 대나무 청진이다 차거영취수선후(此去榮悴雖先後) 이로부터 번영과 시듬에 누가 선후되더라도 막작도화난작춘(莫作桃花爛作春) 봄날에 흐드러지게 피는 도화는 되지 마세
* 금사정 : 錦祠亭,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 외구마을)
처음에는 초가집으로 지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당초이름은 금강정, 1665년 김만영, 나기, 김이상 등에 의해 재건되었고 1869년 중수되었다가 1973년에 새로 세웠다. 이 정자 건립당시의 동백나무가 2009년 12월에 천연기념물 제 515호를 지정되었다 하니 그 나이가 5백년이 넘었고, 그 붉은 동백꽃은 사화에 희생되고 구명을 위해 노력하신 선비들의 충절이리라! |
8 | < Ⅱ-9 성재 >
정이주(鄭以周) 방무(邦武) 성재(醒齋) (1530~1583) 忠 淸白
* 부 경(褧) | 선조원년(1568년) 무진 문과 갑과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한림(翰林), 사헌부장령(司憲掌令), 정주목사(定州牧使) 증예조판서대제학(贈禮曹判書大提學), 책훈광산부원군(策勳光山府院君), 후증 순충보조공신 영의정(後贈純忠補祚功臣 領議政)
- 율곡 이이와 막역 - 장유의 계곡만필에 족적 기재(事載張維谿谷漫筆) - 명신록의 동국호보 간쟁편(見名臣錄東國號譜諫諍篇)
< 신도비명 중 발췌 >
정주목사에 부임하여 자식과 같이 백성을 사랑하고 직책을 수행함이 물 흐르듯 하였으며, 검소하고 아껴서 재정을 넉넉하게 하고 세금을 줄여 줄 것을 약속하니 관리와 백성들이 춤추며 기뻐하였다. 새해인사는 오직 오랜 친구에게만 보낼 뿐, 쓸쓸하고 가난하여 이름난 집에는 미치지 않았다. 당초 마음이 모질고 격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직을 그만두고 돌아 왔을 때에도 새로운 옷 롱이 2개가 있었는데 화를 내며 이를 불살랐다. 퇴직하여 돌아온 날에는 돈을 이웃에 빌려서야 밥을 지었다. 구업이 춘천에 있었는데 보잘 것이 없었으나 이곳에서 말년을 한가하게 보낼 생각이었다. 필마로 귀향하여 소연하게 이곳에 살게 되니 편안하였다. ~~~집에 머물며 제사일이 오면 목욕재계하고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제기와 봉물을 닦고 다듬고 찌고 몸소 행했다. 몸이 아파도 그만두지 않았다. 관직에 임하기를 한결같이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털끝만큼의 사사로운 정을 두지 않았다. 공정한 일이 아니라면 남에게 지조를 꺾는 일이 없었고, 사람들 역시 공에게 함부로 협잡하는 일이 없었다. ~~~가정 일에 대하여도 근심이 없어 집이 기울면 버팀목으로 받치고 비바람을 피하면 될 뿐이고 자손을 위해 한 뙈기의 땅도 마련함이 없었다.
赴定州牧使至則 愛民如子居官如水 以約取足悉捐征入 吏民歌舞之 歲時問餽唯於親舊 孤寒不逮要顯家 初非矯激以然及其解組歸也 親裝有新衣籠二 奴而立焚之 到家之日 稱貸於隣邦 始擧火 舊業在春川薄甚然 有優遊卒歲之計 匹馬東歸 環堵蕭然居之晏如也 ~~~家居遇祭日沐浴齋戒必盡誠敬 洗滌割熟必躬莅雖有病恙不廢 爲官無小大一意奉公 不間雜以一毫私情 非惟公不以關節及人 人亦不敢以關節浼公 ~~~ 不以家事累心屋傾則撑僅庇風雨 不爲子孫營立一畝之庄
* 장유(張維) : 1587 ~ 1638, 호는 계곡(谿谷)·묵소(默所).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사위로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05년(선조 39)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호당(湖堂: 독서당의 다른 이름)에 들어갔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해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고 봉교를 거쳐 전적과 예조·이조의 낭관을 지내고, 그 뒤 대사간·대사성·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이듬해신풍군(新豊君)에 책봉되어 이조참판·부제학·대사헌 등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왕을 호종하였다. 1630년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부음(訃音)으로 18차례나 사직소를 올려 끝내 사퇴했고, 장례 후 과로로 병사하였다.
일찍이 양명학(陽明學)에 접한 그는 당시 주자학(朱子學)의 편협한 학문 풍토를 비판해, 학문에 실심(實心)이 없이 명분에만 빠지면 허학(虛學)이 되고 만다 하였다. 또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 마음을 바로 알고 행동을 통해 진실을 인식하려 했던 양명학적 사고방식을 가졌다. 이식(李植)은 그의 학설이 주자(朱子)와 반대된 것이 많다 하여 육왕학파(陸王學派)로 지적했으나, 송시열(宋時烈)은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程子)와 주자를 주로 했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만한 이가 없다.”고 칭송하였다. 천문·지리·의술·병서 등 각종 학문에 능통했고, 서화와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이식 등과 더불어 조선 문학의 사대가(四大家)라는 칭호를 받았다.
많은 저서가 있다고 하나 현재 『계곡만필』·『계곡집』·『음부경주해(陰符經注解)』가 전한다.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계곡만필 : 1635년(인조 13) 장유(張維)가 지은 수필평론집.
1643년 『계곡집(谿谷集)』을 간행할 때, 문집 맨 뒤에 붙여 함께 간행하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과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나오는 해석상의 문제점이 되는 구절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 평소에 보고 들어왔던 기문·한시·문장 등에 대한 고증과 비평, 그리고 자기의 학문 및 문필에 관한 것 등, 총 210항의 단편적인 이야기를 모아 기록한 일종의 일사(逸史)의 성격을 띤 수필평론집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
9 | < Ⅰ-2 응교 >
정응규(鄭應奎) 몽득(夢得) 서해(瑞海) (1508 ~ 1565) 賜牌 賜禮葬
* 부 웅(熊) | 중종28년(1533년) 癸巳 무과 1549년 장흥부사, 고령진첨사(高嶺鎭僉使), 양산군수, 부산진첨사, 1556년 가덕진첨사(加德鎭僉使), 1560년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1563년 경기수사(조선왕조실록), 1564년 경원부사 불부(慶源府使 不赴)
* 명종 11년(1556년) 상이 가덕 첨사(加德僉使) 정응규(鄭應奎)에게 "근래에 첨사와 만호들이 침탈만을 일삼고 방비하는 일에는 유의하지 않아서 지난해에는 참혹한 변고를 당하였다. 지금부터는 법을 벗어난 일은 일체 하지 말고 군졸들을 어루만지고 살피며 군기를 잘 단련시켜 날로 새롭게 변란에 대비하여야 한다." 분부하였다.(조선왕조실록)
- 전공 사예장(戰功賜禮葬) 및 사패
10여 년간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안의 군직 및 수령으로 재직하며 왜구방어에 진력하였다. 그 공로로 장례 시 예장을 내리고, 살던 곳을 사패지로 내렸다 |
9 | < Ⅰ-7 진사 >
정인영(鄭仁榮) 선수(善守) (1569 ~ 1627) 倡義 * 부 사(獅) | 정유(丁酉) 1597년 의병을 일으켜 여러 번 공을 세워 충의교위(忠毅校尉)를 제수 받고 선무훈의 공신에 올랐다 만년에 기산(箕山)남쪽에 ‘부벽정(浮碧亭)’을 짓고 경서 와 사서를 읽으며 지냈다.
丁酉 倡義旅累建奇功 除忠毅校尉錄宣務勳 晩築浮碧亭於箕山之陽 書史自娛 증손 선(繕)이 귀하게 되어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증직되었다
* 선무공신(宣武功臣)
임진왜란이 끝난 뒤, 왜군 정벌에 공을 세운 장수들과 명나라 군대에 군량 공급을 담당한 사신들을 대상으로 했다. 이순신, 권율, 원균 등 모두 18인이 선무공신으로 봉해졌는데, 곽재우, 정인홍, 고경명, 김천일, 조헌 등이 빠지고 전공과 관련 없는 사람이 선정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논란이 계속되자 1605년 음력 4월 16일에 선무공신 책봉에서 빠진 9,060명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봉했다. |
9 | < Ⅱ-6 양촌 >
정대휴(鄭大休) 회헌(悔軒) 倡義 殉節
* 부 함(涵) | 생원, 경기전참봉(慶基展參奉)
임진왜란 시 완산에서 순절하여 우승지에 증직되었다. 전쟁터에 나갈 때 유서를 남겨 종제 대신에게 조상봉사를 부탁하였다.
壬辰之亂 殉于完山 贈左承旨 臨行時遺書從弟大伸移住奉仕
< 전랑공 출전시 유서(1864년 정면수 공 필사) >
집 오가며 어른모시니 근황은 어떠하시냐! 멀리 있으니 그리움이 밀려온다. 나라가 장졸을 모집하고 형은 장차 전쟁터에 나갈 터인데, 생사가 어떠할지 알 수가 없구나! 죽어도 무슨 여한이 있겠냐마는 특별한 것은, 숙부(정대휴공 부친)께서 연로하시고 너 역시 자식이 없으니 반드시 피란하여야 한다. 십분 명심하여라!
나는 비록 아내를 얻어 인연 맺어 살았지만 여러 달 봉양을 고심했는데, 너에게 조상께 술 올리고 제사모시고 부모님 양친하여 줄 것을 부탁한다. 형수는 의당 가사에 대하여 너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것인데 핍별하지 말고 잘 돌보아다오!
만약 형에게 불행이 오면 집안의 재산과 논밭 노비는 이를 재산으로 하여 조상봉사를 일여할지니 형은 천만다행으로 여긴다. 후일 집안에 분쟁이 생기면 이 문서로서 해결해라! 눈물이 흐르는 것을 주체할 수 없구나. 이만 그친다.
임진(1592년) 8월 11일 완산에서 종형 씀
< 殿郞公出戰時遺書 >
通來侍況差何遙慕實深 兄爲國事願兵將赴戰所 未知死生雖死何恨就中 叔父年深 君亦無子避亂一事十分愼之 我今雖得妾子緣閱月餘長養可慮願君愼酒敬奉養親及兄妾宜吾家事專恃於君勿以逼別善處如已事兄若不幸家財田民以爲已物 祖上奉祀一如兄所爲千萬幸甚他日門中如有爭端以此爲遺臨紙不覺淚下只此不備姑惟照下 壬辰八月十一日 從兄 大休於完山草
< 전랑공(殿郞公)의 충절을 기리며, 23세 정철중 >
명문 대관가의 젊은 아들아! 연로하신 부친이 생존해 계시고 사랑스런 아내가 있으며 조상봉사를 맡아야 하는 막중한 장손의 의무가 있거늘 어찌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전쟁터에 나서시는가? 부친은 동구 밖에 나서 생사의 길을 배웅하시고 젊은 아내는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치는데 어찌 남남처럼 총총히 길을 떠나시는가!
명문에 충신이로다! 종제에 가사 맡기고 구국의 길 나서는 의연함을 적장이 목도했더라면 어찌 귀한 몸 상했으리오! 한설에 절조 지키는 거목청송처럼 한 몸 바쳐 이름 후세에 빛나니 유서 한 장이 역사의 증언이로다!
남녀가 없으며 반상이 없으며 노소의 차별이 없어라! 조세와 부역 한 끼 연명에 힘 부쳤어도 무엇이 가슴을 들끓게 하였는가? 충심은 풍악 보다 붉고 초(楚)나라 오상(伍尙)의 효절(孝節) 보다 뜨겁구나! |
9 | < Ⅱ-9 성재 >
정사호(鄭賜湖) 몽여(夢與) 화곡(禾谷) (1553~1616)
諡號 忠敏
*부 이주(以周) | 선조10년(1577년) 정축 문과 이조참의 (吏曹參議),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 황해·경상·평안·경기관찰사(黃海慶尙平安京畿 四道觀察使), 이조판서(吏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
임진왜란 중 금성현령으로 현민을 구제하고, 정유재란 중 안동부사로서 (군량조달에 진력하여) 명나라 장수 양호와 토적에 성공하므로 광성군에 책훈되고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壬亂中 以錦城縣令救濟縣民 丁酉再亂中 安東府使 與明將楊鎬 討賊成功 策勳光城君 贈左贊成
영조 임오년(1762년)에 시호 “충민(忠敏)”을 내렸다. 나라걱정에 가사를 잊으니 “충”이요, 사변에 대응하여 공을 세우니 “민”이다
英祖壬午 贈諡忠敏 廬國忘家曰忠 事變有功曰敏
< 영의정 유척기(兪拓基) 찬 신도비명 중 발췌 >
안동부사(1597년, 정유재란)가 되니 이 때 명장 양호가 두 번째로 왜인들을 섬과 산으로 몰아 압박하던 시기인데 여기에 들어가는 군량미가 거의 안동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달아나 운량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공은 지방토호를 잡아가두고 도망친 자들을 잡아들여 이 일을 강행함으로써 군량조달을 할 수 있었다. 이에 토호들이 원망하니 체찰사가 공을 파직시켰다. ~~ 얼마 후 호조참의(1599년 2월)가 되어 경성의 군량을 관장하기를 능숙 탁월하게 처리하니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올랐다. ~~ 공은 아름다운 수염에 과묵한 성품을 타고나 함부로 시시덕대는 일이 없고 효우 또한 돈독하였으며 입조 40년간 “애군우국(愛君憂國)”함은 한결같으니 이는 순수하고 정성스러운 “성(誠)”에서 나온 바였다
安東府使是時 天將 梁經理鎬復大擧蹙倭于島山兵糧之出安東幾半之 而民散無以運 公乃嚴拘土豪之爲捕逃走者 括其丁輸之得不乏軍餉 土豪恚愬 體使罷之~~俄入爲戶曹參議 管京餉益以能著 稱陞嘉善戶曹參判~~公美紫髥自持簡黙 不妄笑語敦孝友 立朝四十年愛君憂國一出於誠
<선조실록(선조 31년(1598년) 11월 16일) >
ㅇ 사간원이 유성룡을 탄핵하다 ~~안동(安東)의 구제(舊第)는 기름진 땅을 많이 점령하였는데도 부역을 하지 않으므로 부사(府使) 정사호(鄭賜湖)가 그 가호에 부역을 시키려고 하자 남몰래 친한 자를 시켜 남쪽 지방으로 좌천시키니, 식자들은 모두 침 뱉고 욕 하였습니다 ~
< 황명어사 손원화 찬 정자 정공 신도비명 중 발췌 >
- 조카(동생 명호의 5살 아들 두원)를 양육하다
~~ 정자공(정명호)이 일찍 아들을 두어 5살이 되었는데 형조판서공(정사호)이 조카를 양육하였다. (두원은) 문과에서 장원이 되어 10년 만에 경에 이르니 덕을 쌓고 능력을 인정받아 이조판서로 귀하게 되었다. 명성을 날리고 행의를 세우니 새삼 정자공의 요절함을 추도하게 되니 어찌할 수 없다. 고아 되어 아버지 없음을 가슴아파할 것이나 아버지 있어도 아버지가 없고, 아버지 없어도 아버지 있으니, 다시 조카를 기른 아버지인 형조판서 공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 ~~~當正字公早作一子甫五歲 刑書公撫猶子 擧鮮元會魁爲文科 高第十年之間爲躋於卿 得有造有德以成吏書旣貴 明楊行立追悼正字公之夭 不竟厥施 又自痛其孤失怙 有父無父 無父有父 乃更痛其撫已猶子之猶父刑書公矣~~~~ |
10 | <Ⅰ-5 능파정>
정언우(鄭彦祐) 종우(宗祐) 둔암(遯菴) (1552 ~ ? ) 倡義 *부 인량(仁良) | 어버이 묘소에 여막 살이 하며 효도를 다하였다.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청주에서) 순절하였다. 공적은 「예조문첩」과 「호남절의록」에 실렸다
居廬盡孝 壬亂倡義殉節(于淸州)事蹟俱載禮曹文帖及湖南節義錄 |
10 | < Ⅱ-7 참판 >
정후계(鄭後啓) 창경(昌卿) 운계(雲溪) (1600~1670) | 인조(1635년) 을해 진사
1649년 함의(침 의원, 鍼醫), 전설별검(典設別檢), 어의(御醫) 1651년 세자 진료의 공으로 부호군(副護軍), 양천현감(陽川縣監) 1652년 양천현령 정후계와 교하현감 이종룡 상환(직책교환) (陽川縣令 鄭後啓, 交河縣監 李從龍等, 相換) 1653년 가선대부(종2품하, 加嘉義事) 6월 가의대부(종2품상, 嘉義大夫) 윤7월 자헌대부 승자(정2품, 加資憲) 1656년 양근군수(楊根郡守), 1659년 지사(知事) 1661년 가자(加資) 숭록대부(종1품 崇祿大夫) 1664년 남양부사(南陽府使), 이방승지는 영장(군의 진장)을 겸하는 곳이라 의관은 불가함을 상주함, 파주목사(坡州牧使) 제수로 2개월간 사간원의 개차 상주 → 신료들의 반대로 부임하지 못함 1664년 지사(知事) * 종3품 관직 1665년 정후계의 자제에게 실제 직책을 제수하려 하였으나 사간원 반대 1670년(현종11년) 8월 16일 “입시 의관 정후계와 많은 기간 동안 약제를 논의하여 왔는데 이제 고인이 되니, 너무나 측은하고 아쉽기 그지없다. 관련 부처에 명하여 제수를 특별히 장만하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入侍醫官鄭後啓, 以積年議藥之人, 今已身故, 事甚矜惻。令該曹祭需從優磨鍊題給 1670년 8월 24일 안진이 아뢰길, “호조에서 정후계의 제수는 특별히 마련하라는 주상의 분부에 따라 물목단자를 준비하였는데, 금번 건은 상격이 있으므로 그에 맞게 명을 하달했습니다. 목면은 10필, 쌀 5석을 원 단자에 추가하고자 합니다.“ 하니, ”알았다“ 하였다. 安縝, 以戶曹言啓曰, 以鄭後啓祭需從優磨鍊題給單子判付內, 今番則兼有賞格, 加磨鍊以給可也事, 命下矣, 木綿加十疋, 米加五石, 原單子中付標以入之意, 敢啓。傳曰, 知道。
* 어의 정후계를 파견하여 치료받게 한 신료
영의정 이경여, 영돈령부사 김상헌,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구인후, 이경억, 송시열, 영중추부사 이경석 등 1650년 領議政 李敬輿, 領敦寧府事 金尙憲, 1653년 前領議政 鄭太和 1655년 左議政 具仁垕, 李慶億, 1657년 宋時烈, 1660년 領議政 鄭太和, 1663년 領中樞府事 李景奭
< 족보 기재내용 > - 의관(醫官) - 효종 청나라 입반 시 백의배종 충성호가하여 임금으로부터 은전이 두텁고 무겁다. 연이은 공로로 숭록대부 지중추부사(종1품)에 이르고, 집을 하사받았다(孝宗入潘時白衣陪從盡忠扈駕自上恩眷隆重連佩郡章至崇祿大夫知中樞府事賜第) - 금요문 밖의 인정전에 공신의 현판을 걸고 현종은 여러 번 편지를 내리는 등 예우가 매우 깊었다.(金曜門外仁政展懸功臣板 顯宗累下手札禮遇殊深) < 왕조실록 > * 효종8년(1657년) 1월 3일 송시열이 지금 초야에 있는데 병이 매우 위중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을 들으니, 매우 놀랍고 걱정스럽다. 민간에서 구하기 어려운 것이 의약이니, 정후계(鄭後啓)로 하여금 내국(內局)의 의약을 가지고 속히 가서 구완하게 하라." 하였다.
* 현종5년(1664년) 1월 12일 헌납 홍주삼(洪柱三) 등이 아뢰기를, "근래 의관(醫官)들까지 읍재(邑宰)로 뒤섞어 제수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청명한 조정의 일대 폐정(弊政)이라 하겠습니다. 이번에 정후계(鄭後啓)를 처음에 특명으로 남양 부사(南陽府使)에 제수했다가 곧바로 정청(政廳)이 아룀에 따라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바꾸어 제수하였습니다. 주(州)라 하든 부(府)라 하든 그 경중은 실로 같은 것이고 그의 자급(資級)이 걸맞지 않는 것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사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목사로 옮겨 제수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정체(政體)로 헤아려 보건대 훼손되는 점이 큽니다. 그리고 1품(品)의 자급을 수령으로 차임하는 규정이 일찍이 있지 않았는데 격외로 창시하는 것은 실로 뒤 폐단과 관련이 있습니다.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 결국 환수(還收)하였다. |
10 | < Ⅱ-9 성재 >
정두원(鄭斗源) 하숙(下叔) 호정(壺亭) (1581 ~ 1642) 諡號 敏忠
*부 명호(明湖) | 생진구중(生進俱中), 광해군8년(1616년) 병진 문과 강원감사(江原監司), 개성유수(開城留守), 이조판서(吏曹判書), 호조판서(戶曹判書)
명나라 원숭환과 모문룡이 후금(청)을 방어하기 위해 가도에 머무를 때 접반 및 관향사로 활동하였다. 진위사로 다시 조경에 들어가 서양사절인 육약한을 만나 홍이대포, 천리경, 자명종과 치력연기, 천문약남북극도 등을 가져와 조정에 바쳤다
皇朝 袁崇煥毛文龍 寄據椵島 防禦胡虜之時 差接伴兼館餉使 以陣慰使再度朝京 見西洋使者陸若漢 得紅夷大砲 千里鏡 自鳴鍾 及治歷緣起天文略南北極圖 等 納于朝 事載 「王朝實錄」
이괄의 난을 호종한 공로로 “갑자원종훈”에 책정되고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순조 임술년(1802년)에 시호 “민충(敏忠)”를 내리다. 사변에 공을 세우니 “민” 이요, 몸을 위태로이 하여 임군을 모시니 “충”이다.
甲子原從勳 贈右議政 純祖壬戌 贈諡敏忠 應事有功曰敏, 危身奉上曰忠
군수 조중진이 행장을 쓰고, 판서 이병정이 시장(시호 내리는 글)을 썼다. 종후손 송남 규종이 신도비명을 지었다. 문집이 1권 있는데 종후손 규종이 서문을 쓰고 영석이 발문을 지었다
郡守 趙重鎭撰行狀 判書 李秉鼎撰 諡狀 後從孫 松南 圭宗撰 神道碑銘 有文集 一券 後從孫圭宗序 永錫拔
< 민충공 호정 정선생 신도비명 중 발췌 : 종십일대손 규종 찬 >
갑자년(1624년) 이괄의 난에 성천부사로 병 3백을 이끌고 먼저 평양성에 들어가 금남군 정충신 장군과 함께 서울까지 추적하여 안현에서 공을 세워 진무훈에 책정되었다. 을축년(1635년)에 사은사가 되어 중국에 갔다.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가도에 머물 때 먹을 것을 백단으로 구하였다. 선생이 접반사로서 관향사(군량조달)를 겸임하고 기회에 따라 대책을 강구하여 조선에 무탈하게 하고 객수(손님 장수)의 환심을 잃지 않게 했다. ~~~
겸조송병기사로 두 번째로 중국 조경으로 가는 북관 길이 막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뱃길로 갔는데 폭풍과 고래 같은 파도를 헤쳐 배로 만리를 가니 사람들이 모두 만사일생이라 하는데 한번 가는 길, 두 번 가는 길에 낌새를 살피거나 시달리는 빛 없이 담연히 강장에 나아가 서양사절 육약한을 만나 홍이대포의 제조와 사용법, 천리경, 자명종, 자면화종, 천문남북극도, 치력연기, 직방외기 등의 물건을 얻어 신미년(1631년)에 제경으로부터 돌아와 조정에 바치니, 대포사용이 세상에 행해졌다. 주상께서 중원의 형편과 병세의 강약, 장수와 인재의 현명함에 대하여 자세히 묻고 하교하시기를 “서양대포를 얻어온 것은 뜻이 적국을 막는데 있으니 진실로 포상을 받을 만 하다.” 하시고 가일자(승자) 하시고자 하니 공께서 끝내 사양하고 받지 않으셨다. ~~~~~
정축년(1637년)에 남한산성의 치욕을 들으시고 궁궐을 향해 통곡하시고 살고 싶지 않은 듯 두문시세하고 시골에서 소요하며 유연자적 하시다 세상을 뜨니, 임오년(1642년) 4월 5일이라 향년 62세였다. 상께서 부음을 듣고 진도하여 3일간 철조(조정에 나가지 아니함)하고 의정부 우의정의 증직을 내리시고 예관을 보내 치제하고 부의를 특별히 하사하셨다. 영평에 예장하였다
甲子适變 以成川府使領兵三百先入箕城 與錦南君鄭公忠臣追賊至京 得捷鞍峴錄振武勳 乙丑以謝恩使朝天 明將毛文龍寄據椵島 仰哺於我徵求百端 先生以接伴使兼任管餉 隨機策應不生事於本朝 不失歡於客帥 ~~~ 兼助送兵器使再度朝京 而北關路梗入貢路我東 祖宗之誠始有航海之役 颶波鯨濤舟楫萬里 人皆視以萬事一生 而先生一往再往 了無幾微賢勞之色 擔然若就康莊 逢西洋使者陸若漢 得紅夷大砲製與放法 千里鏡 自鳴鐘 紫錦花種 天文南北極圖 治歷緣起 職方外記 等物 辛未七月還自帝京納于朝 大砲法倣行于世 上詳問中原形便及兵勢强弱 將材賢否 내下敎曰 得來西砲志在禦敵誠極可賞 特加一資 先生極辭不受 ~~~~ 丁丑聞城下之恥望闕痛哭 如不欲生杜門謝世 逍遙林壑悠然自適以終其世 崇禎壬午四月五日卒 享年六十二 訃聞自上震悼輟朝三日 贈議政府右議政遣官致祭 特賜優賻 禮葬于永平甲子原 ~~~~ |
11 | <Ⅰ-5 능파정>
정은수(鄭訔秀) 경헌(景獻) 미능재(未能齋) (1567 ~ 1612) 忠孝 倡義
*부 언우(彦祐) | 참봉(參奉) 이율곡 문인으로 임진왜란에 부친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전쟁터를 전전하였으나 부친이 청주에서 순절하시자 대신 병을 통솔하여 경성에 이르렀다. 군자감 정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반장하여 나주에 머물며 여묘하였는데 묘 옆에 호랑이가 와 같이 지키니 기이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묘 앞에 있는 소나무를 가리켜 “충효송”이라 불렀다. 그 행적이 「금성지」, 「호남절의록」에 실렸다
李栗谷門人 宣祖壬辰 從父倡義轉戰 淸州親竟歿節 代領其兵直到京城 除軍資監正不就 反葬羅州居廬墓側 有虎來同守之異 鄕人稱其墓前松曰忠孝松 事載「錦城誌」及「湖南節義錄」 |
11 | < Ⅱ-9 성재 > 정전창(鄭展昌) 자전(子展) 율탄(栗灘) (1631 ~ 1685) 節義
*부 현원(玄源) | 현종 임인(1662년) 진사 1665년 광릉참봉(光陵參奉), 1668년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 1682년 돈녕부봉사(敦寧府奉事) 1685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우암 송시열 선생께서 바다 섬으로 귀양 가심에 공께서 시를 지어 올렸다
상담천리 귀양길 고난에 눈물짓고 도의가 꺾어짐에 하늘도 슬퍼하고 의로운 길은 폐허가 되었구나! 옛 성은 입은 향기가 아직도 흩어지지 않아 지절의 호소 십언이 태양처럼 빛나네! 외로운 충정 의심하니 천주를 거스르네! 모든 일이 상처 되니 언월당이로구나! 금년에 대의를 결의하고 조정이 밝아지면 원앙처럼 노니세!
언월당 세 글자로서 시정잡배가 크게 어지럽히니 은거하여 벼슬에 나기지 아니했다
尤庵宋先生 謫遷海上 公呈詩曰 “湘潭*千里泣風霜 道屈堪悲義路荒 貂拜舊恩香未末 志言新什日爭光 孤忠自擬警天柱 萬事從傷偃月堂* 最是當年結大義 明廷整笏摠鴛行” 以偃月堂三字大忤時輩屛跡不仕
손자 임기가 노전으로 귀하게 되어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以孫任基壽貴贈左承旨
* 상담(湘潭) : 중국(中國) 호남성(湖南省) 북동부(北東部) 상강(湘江) 하류(下流)의 상공업(商工業) 도시(都市). 그만큼 먼 곳
* 이임보(李林甫)의 서재 언월당(偃月堂) : 이임보는 당 현종 때의 재상으로 간신(奸臣)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의 서재인 언월당(偃月堂)에서 깊게 생각을 하면 누군가가 주살(誅殺)되거나 감옥에 갇히는 일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
12 | <Ⅰ-2 응교보>
정유(鄭維) 지세(持世) (1593 ~ 1654) 節義 旌閭
*부 보문(保門) | 광해군 무오년(1618년) 생원
사마시험 치룰 때 적신 이이첨이 사마 급제자를 부추겨 장차 폐모의 소를 올리려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그러한 불의한 자와 영화를 누리느니 바름을 지키고 죽는 것이 낫다. 또 아비가 없고 군주가 없는 사람과 사대부는 자리를 같이 할 수 없다” 하며 대과를 보지 않고 나주의 고향으로 내려왔다. 인조반정으로 상촌 신흠이 재상이 되자, 최우선으로 공을 천거하였다.
1634년 전의현감 1636년 병자란에 안무사 박횡의 종사관으로 근왕병을 통솔하였다. 1641년 구례현감 1648년 백천군수
光海 戊午 司馬時 賊臣李爾瞻 嗾新榜 將上廢母疏 公曰 與其不義而榮寧守正而死 且無父無君之人 士大夫不可同席而立遂不應榜遯歸羅州故庄 仁廟改玉申象村欽以冢宰首薦公 甲戌(1634년)全義縣監 當丙子亂 爲按撫使朴橫從事 領兵勤王 辛巳(1641년) 求禮縣監 戊子(1648년) 白川郡守
천성적으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나이 들어 기력이 쇠약한데도 죽을 먹으며 항시 소리 내어 우는 것이 돌아가신 날(1652년)과 같았다. 3년 탈상을 5개월 앞두고 돌아가셨다. 순조 임오년에 대신 김재찬과 한용구가 임금의 면전에서 충효를 아뢰니 정려를 내렸다. 8대손 제인이 묘 앞에 정려각을 짓고 기문을 세웠다
天性篤孝及丁外艱年己衰而啜粥呼泣常如袒括之日隔終祥五月而孝宗甲午(1654년)卒 純祖 壬午(1822년) 大臣 金載瓚 韓用龜 以忠孝筵奏命旌閭 八代孫濟寅建閣于墓前而延旌 |
12 | <Ⅰ-5 능파정>
정안민(鄭安民) 낙천(樂天) 태화당(太和堂) 倡義
*부 은수(訔秀) | 병자호란에 동생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 정홍명을 따라 군막에서 방략을 수립하였다. ⌜호남절의록⌟과 ⌜예조문첩⌟에 실렸다.
仁祖丙子(1636년)與二弟倡義從鄭弘溟2) 幕以糾畵方略 事載「湖南節義錄」及⌜禮曹文帖⌟
* 정홍명(鄭弘溟) : 1582∼1650
아버지는 우의정 정철(鄭澈)이며, 송익필(宋翼弼)·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모시고 공주까지 몽진 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소모사(召募使)로 활약하였다. 1646년 대제학이 되었으나 곧 병이 들어 귀향하였다. 뛰어나게 총명하여 제자백가서에 두루 정통했으며, 고문(古文)에도 밝았다. 하지만, 김장생의 영향으로 경전(經傳)을 으뜸으로 삼았고, 예학에도 밝아 김장생의 학통을 이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12 | <Ⅰ-5 능파정> 정의민(鄭誼民) 공보(公甫) 지헌(遲軒) (1602 ~ 1643) 倡義 *부 은수(訔秀) | 병자호란에 의병을 일으켜 청주에 이르러 화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였다. 남쪽 고향으로 내려와 자적하며 살았다. 인조 계미년(1643년)에 졸하였다. 증손 창후(壽同樞)가 귀하게 되어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행적이 ⌜예조문첩⌟에 실렸다.
仁祖丙子(1636년)倡義旅到淸州 聞和成痛哭南下 屛跡溪陽琴書魚樵逍遙以終 仁祖癸未卒 以曾孫昌垕貴 贈司僕寺正 事載⌜禮曹文帖⌟ |
13 | <Ⅰ-2 응교흥>
정수선(鄭壽先) 선지(先之) (1625 ~ 1671) 忠直 恩典
* 부 집(䌖) | 생원, 한성부 참군, 현감(生員 漢城參軍 縣監)
현종 신해 년(1671년)*에 노봉 민정중이 진휼낭청에 천거하여 근무 중 직소에서 졸하시니 특별히 은전과 부의를 내리셨다
顯宗 辛亥(1671년)* 閔老峰鼎重薦授賑恤郎廳卒於職所有別恩典賜賻 * 숙종 신해 → 현종 신해(족보 수정사항) * 현감 기록 : 사위 묘갈문에도 참군으로 기록되었고, 졸 당시 기록도 참군이며, 승정원일기도 참군 기록만 있고 현감기록은 없다 < 1671년 왕조실록 : 현종 12년 5월 13일 >
좌참찬 민정중이 아뢰기를, "한성 참군(漢城參軍) 정수선(鄭壽先)은 진휼청 낭청으로서 마음을 다하여 직무를 수행하였는데, 여역에 걸려 죽었으니, 매우 불쌍합니다. 낮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감히 초기(草記)로 우러러 진달하지 못합니다." 하니, 상이 장례 물품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 민정중(閔鼎重) : 1628 ~ 1692, 호 노봉(老峰)
송시열의 문인. 이조 호조 공조판서.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노론의 중진들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고 벽동(碧潼)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노봉집(老峯集)』·『노봉연중설화(老峯筵中說話)』·『임진유문(壬辰遺聞)』 등이 전하며, 글씨로는 「우상이완비(右相李浣碑)」·「개성부유수민심언표(開城副留守閔審言表)」·「개심사대웅전편액(開心寺大雄殿扁額)」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13 | <Ⅰ-6 승지> 정시래(鄭時來) 태경(台卿) 망북헌(望北軒) (1653 ~ 1713) 節義 | 병자호란의 삼전도 치욕을 한스럽게 여겨 조용히 물러나 살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恨南漢之恥 自靖不仕 |
14 | <Ⅰ-2 응교>
정장(鄭章夂) 현재(顯哉) (1650 ~ 1677) 節義
*부 시무(時武) | 숙종 병진(1676년) 무과(武科)
나이 12세에 한양에 구경 왔는데, 때마침 청나라 사신이 왔다기에 일행과 같이 이를 보러갔다. 공이 말하기를 “저들은 나라의 원수인데 보기 싫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청성부원군 김석주가 “매우 기특하다”하였다. 스스로 호를 “청영재”라 불렀다. 1676년에 무과 급제하였으나 다음 해에 졸하였다. 손자 택이 동지로 귀하게 되어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年十二歲 遊京 値胡使來 同隊往見 公曰 “彼乃國讐吾不欲觀” 金淸城錫冑* 聞而奇之 嘗自號淸纓齋 ~~ 以孫擇貴贈左承旨
* 김석주(金錫冑) : 숙종조 우의정(붙임), 1662년 문과 장원급제 |
14 | < Ⅱ-3 판서 >
정언택(鄭彦宅) 상훈(祥勳) 동은(東隱) ( ? ~ 1794) 忠義
*부 연광(演光) | 고을 원 이승훈(평택현감)이 사악한 무리와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이며 인륜에 어긋난 짓을 하며 문묘에 배향치 않으므로 격문을 내어 그 죄악을 성토하였다. 저들이 안무사를 뇌물로 무마하고 오히려 목에 칼을 씌우고 발에 차꼬를 채워 녹도로 유배하니 정조 갑인 년(1794년)*에 유배지에서 졸하였다. 향도가 누차 예조에 충정을 천거하였다
本倅李賊承薰1) 以邪黨惑世誣民 乖敗倫常不拜聖廟 發文聲討罪惡 彼賂結按使2)酷被桁楊 流配鹿島 正祖甲寅*卒于配所 鄕道累薦于禮曹
* 哲宗甲寅(1854년)卒 → 正祖甲寅(1794년)卒(족보수정사항)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60갑자를 거슬러 1794년(정조18년)졸로 고쳐야 한다.
1) 이승훈(李承薰)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의 한사람으로 1791년 평택현감으로 임명됐으나 ‘진산사건’이 일어나 1785년 을사추조적발 사건을 재론하면서 이승훈을 죄인으로 거론해 1791년 4개월여 만에 평택현감에서 물러났다. 1792년(정조 16)에 이승훈이 평택현감 재직 시 향교의 문묘(文廟)에 절하지 않은 것을 평택 유생 조상본(趙常本), 권위(權瑋), 정언택(鄭彦宅) 등이 성균관에 통문을 보내 그의 죄상을 성토했다.
결국 1792년 2월 안핵어사(按覈御使)를 평택에 파견해 진상을 조사케 했는데 안핵어사로 파견된 김희채(金熙采)는 이승훈의 친척 재종(再從)으로서 이승훈이 문묘에 배례를 한 것처럼 조정에 허위보고를 하는 한편 문제를 제기한 유생들을 오히려 무고죄로 몰아 엄형에 처했는데 권위는 심문 중 형장을 맞아 사망했고 아들들 역시 역모의 죄를 쓰고 섬으로 귀양을 갔으며 홍병원(洪秉元), 조상본(趙常本), 정언택(鄭彦宅)은 형장을 당한 뒤 귀양 갔다.
이후 조상본, 권위, 정언택 등은 복권돼 ‘삼정사(三正士)’라 불리었고 이들을 기리는 ‘향현사(鄕賢司)’가 세워졌다.
2) 김희채(金熙采)
1792년에는 경기도 평택현감이었던 이승훈(李承薰)이 천주교에 물들어 3년 동안 공자의 성묘(聖廟)에 배알하지 않았다는 탄핵상소가 들어와서, 부사이던 김희채가 평택안핵어사로 임명되어 진상을 조사, 보고하도록 파견되었다.
보고에서 이승훈은 성묘에 의식대로 배알하였고 상소는 무고였다고 하고, 상소자 권위(權瑋) 등을 유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김대비(金大妃)의 수렴청정으로 천주교 탄압이 적극적으로 진행되어 신유사옥이 일어나 이승훈이 사형되자, 대사간 유한녕(兪漢寧)으로부터 김희채가 이승휴의 아버지 이동욱(李東郁)의 종서(從婿)로서 이승훈이 성묘에 불배(不拜)한 죄를 덮어주었다는 탄핵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듬해 사건을 소홀히 취급했다는 이유로 김대비에 의하여 삭직되었다 |
* 금강11인계 서문(김선) - 김선은 금강11인계원의 후손으로 보인다.
옛날에는 멀리 백 대가 지나도 서로 느끼는 경우가 있었다.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의기를 말함이다. 의기가 같으면 세대가 비록 멀다고 하여도 느끼는 경우가 있다. 하물며 같은 시대에 태어나 같은 고장에서 사는 사람이랴! 국가가 불행하게도 서로 붕당을 세운다. 위로는 조정에서부터 아래로는 골목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모두 기치를 세우니 누구와 더불어 질 나발을 불겠는가? 서로 응하고 서로 찾는 것은 형세가 반드시 이르는 바이다.
생각하건데 우리 계는 의관(衣冠)의 후예요, 사림의 선비로서 함께 의기를 품으니,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가 어찌 당일의 빼어난 경치일 뿐이겠는가? 고장에서는 자랑스런 법도가 되고 조정에 서면 모범이 된다. 지금 비록 연못 속에 숨어있는 것이지만 끝내 쑥대 밑의 평범한 사람은 되지 않을 것이다. 몸을 두고 마음을 세움에 마땅히 성인의 훈계에 따라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하며 장로들을 공경스럽게 섬기며 친구에게는 신의가 있으며 과실이 있으면 법도로 바로잡고 환난을 겪을 때에는 정성을 다하며, 문장은 그 나머지이니 그저 논할 겨를이 없는데 한 잔의 술로 기뻐하는 것을 어찌하여 입에 담겠는가?
아아! 월나라의 제단에 저 한번 맹세하였으나 오래 참는 친구관계를 맺었을 뿐이요, 공손저구(公孫杵臼)의 한마디는 곧 종신의 사귐이 되었으니, 한 때는 의를 숭상함에 많이 취할 필요는 없다. 난정(蘭亭)의 노소들은 그저 진나라의 습관을 면했을 뿐이요, 연사(蓮社)의 빼어난 원로들은 실로 당나라 시대의 존중을 받았으나 뒤에 이를 이가 없었다. 아아! 그만둘 수 있겠는가? 오직 우리 계원들은 늙었다 하지 말고, 이전의 현명한 이를 따르며, 서로 할 수 없는 것에서 서로 하고, 서로 어울리지 않음에서 서로 어울리고, 항상 과감함을 간직하고 더욱 절실함을 돈독히 하여, 장씨와 진씨의 흉한 종말을 경계하고, 소씨와 주씨의 틈이 벌어짐을 경계하여 푸른 소나무를 가져다가 마음을 보이고 맑은 물을 가리키며 신의를 나타낸다면, 아아! 영원히 미래의 이야기가 될 것이며, 저 수계(修禊)의 본의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옛날에 우리 집안의 고조부(金軾)와 응서의 증조부 사예공(羅逸孫)과 향원이 모두 11인으로 같이 수계를 하였으며, 사예공이 계축에 시를 제하여 읊기를, “열 하고도 한 사람이 오래된 마을의 모임인데, 차가운 소나무의 심사요! 대나무의 맑고 참됨이로다. 이로부터 영광과 초췌가 앞뒤로 다를 테지만 따스한 봄날의 복사꽃은 배우지 마세”라고 하였다. 이것이 실로 우리 두 집안에서 더욱 준수하여 놓치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이며, 온 계원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서문 가운데 기록하여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삼가 알린다. 김선(金璇)이 삼가 서문을 쓰다.
* 김선(金璇) : 1568(선조 1)∼1642(인조 20).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이헌(而獻), 호는 시서거사(市西居士) 또는 지서자(之西子). 전라남도 나주 출신. 아버지는 상호군(上護軍) 김부성(金富成)이다.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여 관계에 진출하였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한탄하여 나주로 내려가 두문불출하였다. 1615년(광해군 7) 강진 사람 이정언(李廷彦)·윤유겸(尹惟謙) 등이 김선이 영창대군을 옹호하였다 하여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나오게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참봉·찰방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양명학에 조예가 깊은 장유(張維)·임담(林墰) 등과 친밀히 교유하였다. 저서에 『초당한람(草堂閑覽)』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市西 金璇(1568~1642)은 조선 중기 나주 출신의 학자요, 문인이다.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평생을 布衣로 살았으나, 선조, 광해, 인조시대의 壬丙兩難은 물론 광해의 亂政과 反正등 많은 내우외환 속에서도 명분과 대의를 지킨 유학자였다. 시서는 광해원년(1609)에 五賢書院請額疏를 올려 나주의 錦陽書院이 景賢書院으로 賜額을 받는데 앞장섰다. 또한 이듬해인 광해 2년(1610)에는 道內儒林의 疏頭가 되어 文廟의 東方五賢配享을 위한 請五賢從祀疏를 주창하여 광해군의 허가를 받았다. 이는 前代의 己卯, 乙巳士禍로 인한 사회적 퇴폐분 위기를 일신하고 정통유학의 政論을 확립하여 文風을 통한 학문적, 사회적 교화를 이루려는 儒者의 현실의식을 조정이 반영한 것이다. 시서는 도학자이기에 앞서 시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시를 좋아하여 짧은 시에 힘을 기울였으며, 생전에 1200여 수의 漢詩作品을 남겼다. 시서 詩의 性情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憂國之情이다. 그가 處했던 시대가 亂世였기에 나라와 君主에 대한 단순한 哀傷과 念慮가 아닌 悲憤慷慨한 憂國語調가 수 편의 시문에 표출되어 있다. 둘째는 安貧樂道이다. 시서는 을묘년(1615), 그의 나이 48세 때 과거를 포기하고 향리에서 五樂亭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그는 형제, 처자, 시와 술 그리고 거친 음식과 貧窮을 五樂으로 삼았다. 窮하면서도 義를 잃지 않는 것을 樂道라 여겼다. 그것은 老莊의 無慾이 아닌 儒者의 분수로 시서는 그것을 가장 편하게 여겼고 또 그의 삶처럼 그의 시에서 즐겼던 것이다. (한국고시가문학회, 시서 김선의 삶과 시문학연구, 김귀석)
< 금사정(錦祠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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