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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역사와 문화의 나라 중국(中國)
역사(歷史)의 여로(旅路) 실크로드(Silk Road)
실크로드 / 명사산(鳴砂山)을 오르는 낙타행렬
1. 기행(紀行) 여정(旅程)
2010년 8월 22일 오후 7시 10분, 인천국제공항을 이륙한 대한항공은 5시간 20분을 비행한 끝에 밤 12시 20분,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新疆维吾尔自治区) 우루무치(乌鲁木齐) 공항에 도착하였다. 서울과 시차는 3시간 30분이라고 하나 중국은 북경시간으로 통일한다고 하니 시계를 한 시간 늦추어 11시 20분으로 맞추었다. 숙소는 5성급 호텔(美麗華賓館)이었는데 시설은 별로이고 기온은 30도 정도로 한밤중인데도 후텁지근하다.
여행사의 관광 일정이 우루무치로부터 깐수성(甘肅省)인 돈황(敦煌)으로 가서 그곳에서부터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 관광을 시작하여 마지막 날 우루무치로 다시 돌아와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일정으로 엄청난 거리(1,680km: 4천 2백리)를 갔다가 되짚어 돌아와야 하는 여정(旅程)이다.
텐샨(天山) 산맥 북쪽 기슭의 오아시스에 자리 잡은 우루무치(乌鲁木齐)는 몽골어로 ‘좋은 목초지’라는 의미라는데 신강위구르자치구의 중심이며 이 지역의 행정, 문화, 경제, 산업의 중심지로 제일 큰 도시이다.
이곳은 이슬람 문화권인 위구르(维吾尔)족이 가장 많이 살며 언어와 풍습을 잘 간직하고 있고, 원주민의 생김새도 아랍권을 닮은 외모이다. 우루무치 인구는 120만 정도인데 중국 내에서 위구르 인들은 여러모로 평판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한다. (잦은 독립시위로 인한 듯)
나는 혼자 일주일 패키지여행을 끊어 왔는데 패키지 일정이 끝난 다음 돌아가지 않고 홀로 떨어져 중국 곳곳을 한 달 동안 배낭여행 할 계획으로 왔다. 중국어를 못해 좀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한문 공부를 좀 했으니 영어와 한자(漢字) 필담(筆談)으로 버텨 볼 작정이다.
2. 서역(西域)의 중심도시 우루무치(烏魯木齊)
신장위구르자치구(新疆維吾尔自治區)의 성도(省都)인 우루무치(烏魯木齊)는 중앙아시아의 등줄기인 천산산맥(天山山脈) 기슭에 있는 도시로 중국 옛 명칭인 서역(西域)의 중심도시이다.
이 지역은 먼 옛날, 해수면과 거의 같은 높이로 바다였던 곳이고, 20여 개의 염호(鹽湖)가 흩어져 있어 이 염호(鹽湖)에서는 많은 소금이 생산된다고 한다. 황량한 사막 저편으로는 만년설을 이고 있는 천산산맥(天山山脈)의 5,000m급 고봉(高峰)들이 꿈결처럼 아련히 누워있다.
신장위구르자치구의 면적은 중국 대륙면적의 1/6, 인구는 2,200만으로 13억 중국 인구의 1/60 정도라는데 인구밀도는 낮으나 중국 제일의 지하자원 보고(寶庫)로 석유 매장량 및 생산량은 중국 1위라고 한다.
또, 석탄을 비롯한 수많은 지하지원이 무진장 매장되어 있는 곳이라니 격렬한 위구르 민족의 독립운동에도 중국 정부에서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곳이겠다. 인구 비율은 위구르족(45%)과 한족(40%)이 가장 많으며 카자흐족(7%)과 기타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는 물론, 문자도 한자와 위구르 문자(아랍문자와 비슷: اپتونومست)를 같이 사용하고 있고 종교도 불교(佛敎)와 이슬람(Islam)이 공존하고 있는 곳이다.
3. 중앙아시아의 등줄기 천산산맥(天山山脈)
천산산맥은 중국의 신강성에서 시작하여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까지 동서로 2,000km에 걸쳐 뻗어있는 대산맥으로 평균 높이가 3,500~4,000m이고, 최고봉인 포베디봉(Pobedy Peak)은 높이가 7,439m라고 하니 어마어마한 대 산맥이다. 이 산맥의 남쪽은 죽음의 땅 타클라마칸 사막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천산산맥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파리쿤(巴里坤)은 카자흐족의 고향으로, 목장에서 카자흐족의 작은 말을 타는 체험도 하고 카자흐 유목민의 천막집인 파오(Pao)에 들르면 파오의 안주인은 방문객에게 마유차(馬乳茶)와 곁들여 건포도와 하밀과(哈密瓜/멜론), 그리고 마유(馬乳) 치즈 말린 것을 대접받는다.
4. 신장 위구르자치구(新疆維吾尔自治區)의 지역적 특성
중국 대륙의 서북쪽 국경, 중앙아시아에 있는 신장위구르자치구는 중국에 합병(1884)되기 전 서역(西域)으로 불리던 지역으로 대부분 타클라마칸 사막과 고비사막이 차지하는 황량한 지역인데 곳곳에 형성된 작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흉노족(匈奴), 돌궐족(突闕), 몽고족(蒙古) 등이 세운 수십 개의 작은 나라들이 난립하며 흥망을 거듭하던 곳이다. 동쪽은 감숙성(甘肅省)과 청해성(靑海省), 남쪽은 서장(西藏) 티베트 자치주, 북동쪽은 몽골, 북서쪽은 카자흐스탄, 서쪽으로는 키르키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인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알타이산맥, 천산(天山)산맥, 곤륜(崑崙)산맥이 가로로 길게 뻗어있다. 천산산맥을 경계로 북쪽은 중가르 분지(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으로 타림분지, 동쪽으로 투루판 분지가 펼쳐져 있는데 신강(新疆)의 강(疆)이 세 산맥(一)과 분지(田)를 형상화한 글자이다. 또 쿠무타크(庫木塔格) 사막 근처의 돈황(敦煌) 부근은 모래가 많고 모래바람이 심하여 사주(沙州)로, 투루판(土魯番)지구는 분지(盆地)로 너무 더워 화주(火州)로 불린다고 한다. 이곳은 불모의 땅인 타클라마칸 사막, 고비사막, 쿠무타크(庫木塔格) 사막 등 황량(荒涼)한 들판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 곳이다.
<1> 비단길(Silk road)과 옥의 길(Jade road)
실크로드(Silk Road)는 글자 그대로 낙타 등에 중국의 비단을 싣고 유럽으로 가고 유럽의 여러 물산이 중국으로 유입되는 낙타 캐러밴(Caravan) 교역로였지만 그 이전에도 옥(玉)의 생산지로 유명한 신장성 허텐(和田/和闐)의 질 좋은 옥이 중국으로 유입되어 옥의 길(Jade Road)로 먼저 시작되었다고 한다.
타클라마칸 사막 서남단(西南端)의 허텐은 옥과 함께 사금(砂金), 비취(翡翠)의 생산지로도 유명했는데 중국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옥(玉)을 무척 좋아한다. 이 지역의 명칭은 서역으로부터 옥이 들어오는 관문이라 하여 옥문관(玉門關)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후일 비단이 오가면서 옥의 길(Jade Road)이 비단길(Silk Road)로 이름이 바뀌었다.
<2> 천산북로(天山北路)와 천산남로(天山南路)
실크로드의 시발점은 중국 본토의 시안(西安), 혹은 더 멀리 낙양(洛陽:현재의 鄭州)으로부터 시작하여 당시의 국경 부근인 감숙성(甘肅省)의 옥문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이 기점(起點)이었다.
중국 상인들은 서역(西域-현 新疆)에 들어온 후 투루판을 거쳐 천산산맥 남쪽을 지나 신장성(新疆省) 서쪽 끝인 카스(喀什:카슈가르)에서 파미르 고원을 넘어 터키의 이스탄불로 이르는 천산북로, 또 하나는 쿤룬(崑崙)산맥의 북쪽을 지나 카스(喀什)로 이르는 천산남로로 나뉘었다. 돈황(敦煌)과 옥문관은 감숙성(甘肅省)의 란주(蘭州)에서 시작되는 하서회랑(河西回廊 혹은 河西走廊)의 서쪽 끝부분으로, 황하(黃河) 서쪽에 있다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河西)이다. 실크로드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감숙성(甘肅省)의 좁고 긴 약 1.000km의 황량한 대협곡(大峽谷)은 마치 긴 복도와 같다고 하여 하서회랑(河西回廊)이라는 명칭이 붙었고, 이 길로 당나라 고승 삼장법사가 천축국(天竺:印度)으로 불경을 가지러 다녀온 길이기도 하며 그 이야기가 후일 서유기(西遊記)라는 소설이 되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3> 교역로(交易路)의 개척역사
BC 2세기,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때 장건(張騫) 장군은 이 지역을 지배하던 흉노(匈奴)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왔으나 오히려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장건은 10여 년간 볼모로 잡혀 있으면서 흉노 여자와 결혼도 하고 자녀도 있었지만 결국 탈출하여 이 지역의 자세한 지리와 풍습을 기록하여 한무제(漢武帝)에게 바침으로 후일 흉노 토벌의 큰 공을 세운다.
장건(張騫)장군 동상 / 양관(陽關) 봉수대
그 이후, 이곳에 국경의 관문인 양관(陽關)을 설치하고 주변 여러 나라와 문물을 교역하는 루트를 개설했으며 대상(隊商)들을 보호하여 실크로드를 있게 한 실질적인 개척자(開拓者)로 알려져 있다.
중국 서쪽 관문인 양관(陽關)은 글자 그대로 뜨거운 햇볕(陽)으로 가득 찬 불모(不毛)의 땅으로 이곳을 나서면 죽음의 땅 타클라마칸사막(Takla Makan Desert)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 오손공주(烏孫公主) 비수가(悲愁歌)
오손국(烏孫國)은 서역 지방에 할거하던 투르크(Turk) 계의 유목 민족으로, 한때 그 세력이 천산(天山)산맥 북쪽의 이르츠크 호수로부터 일리(Ili)강 유역의 분지(盆地)까지 이르렀을 만큼 강대했다.
전한(前漢) 당시, 중국의 북방을 장악하고 있던 흉노(匈奴)는 오손보다 강했는데 자주 한(漢)나라를 침범했다. 한고조 유방(劉邦) 이래 6대 황제 경제(景帝)에 이르기까지 줄곧 펼쳐 왔던 흉노에 대한 화친 정책을 강공책으로 바꾼 무제(武帝)는, 오손국(烏孫國)과 함께 흉노를 협공할 계획을 세우고 장건(張騫)을 사신(使臣)으로 보내 동맹을 맺는다. 그리고 10년 후 동맹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무제의 형 강도왕(江都王) 유건(劉建)의 딸인 세군(細君)을 공주라 속여 늙은 오손의 왕에게 시집보낸다. 그 덕분에 흉노는 한나라와 오손의 협공을 견디다 못해 한층 더 북방으로 밀려났으며, 서역 50여 나라가 한나라를 상국으로 섬기게 되었고, 한나라는 이민족의 이반을 막기 위해 쿠차(龜玆)에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두었다. 세군은 말도 통하지 않는 이역 땅에서 사는 슬픔을 노래한 것이 오손공주비수가(烏孫公主悲愁歌)이다.
오손공주비수가(烏孫公主悲愁歌)
吾家嫁我兮天一方(오가가아혜천일방) 우리 집에서 나를 시집보내니 하늘 한쪽 끝이어라
遠托異國兮烏孫王(원탁이국혜오손왕) 머나먼 타국에 몸을 맡기니 오손왕이로다.
窮廬爲室兮旃爲墻(궁려위실혜전위장) 천막이 집이 되고 모전은 담장이 되었으며
以肉爲食兮酪爲漿(이육위식혜락위장) 고기가 밥이 되고 양젖이 국이 되었네
居常土思兮心內傷(거상토사혜심내상) 살면서 항상 고향 그리워하니 마음이 아프구나
願爲黃鵠兮歸故鄕(원위황곡혜귀고향) 황곡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고파
♣旃(전)-모전<장막> ♣황곡(黃鵠)-누런 고니<세군(細君)을 일명 황곡(黃鵠)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노래를 전해 들은 한무제(漢武帝)도 세군(細君)을 가엾게 여겨 해마다 세군에게 선물을 보낸다.
수년이 지나 노령(老齡)이 된 오손왕은 오손(烏孫)의 풍습에 따라 세군을 자기 손자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그들에게는 당연한 풍습이었지만 세군에게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군은 한나라에 사자를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귀국하게 해 달라고 무제에게 부탁했으나 무제는 끝내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세군은 오손왕의 손자인 손잠(孫岑)의 아내가 되어 딸을 낳았다.
이처럼 한나라를 흉노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한, 일등 공신인 세군(細君)은 말도 통하지 않는 이역 땅에서 고향을 그리는 노래를 부르며 슬픔 속에 살다가 늙어 죽었다고 한다.
◆ 비련(悲戀)의 여인 왕소군(王昭君)
또 한 사람, 전한(前漢, BC206~AD5) 원제(元帝)의 후궁이었던 왕소군(王昭君)은 중국 역사상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인물로 훗날 흉노(匈奴)의 왕 호한야(呼韓耶)에게 화친을 목적으로 시집을 가게 되는데 왕소군의 원래 이름은 장(嬙)이고, 자는 소군(昭君)이며, 아명은 호월(皓月)이다.
BC 36년, 전한의 11대 황제 원제는 전국에 궁녀를 뽑아 올리라는 조서를 내렸다. 왕소군은 열여덟 살에 이미 가무(歌舞)와 비파(琵琶) 연주에 능했고 자색이 뛰어나 궁녀로 선발되었는데 당시에는 뇌물을 주면서까지 궁녀로 선발되려는 경우가 많았다. 선발되는 궁녀의 수도 수천 명에 달했고 황제가 일일이 선발된 궁녀를 확인하는 일은 불가능했기에 화공(畵工)이 초상화를 그려 올린 것을 보고 간택했다고 한다.
당시 궁녀들은 황제를 하룻밤이라도 모시기 위해 화공들에게 뇌물을 주어 자신을 예쁘게 그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고 궁(宮)에 연줄도 없었던 데다 원제(元帝)를 속일 마음도 없었던 왕소군은 화공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았고, 그 결과 평범한 얼굴에 큰 점이 찍힌 추녀(醜女)로 그려진 초상화를 얻게 되었다. 그녀는 5년간 원제(元帝)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궁녀 신분에 머물며 외롭고 쓸쓸한 궁 생활을 비파(琵琶)를 연주하며 이겨냈다고 한다.
당시 흉노(匈奴)는 정권다툼이 심했는데 친형인 질지선우(郅支單于)와 정권을 다투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는 형에게 밀려 한(漢)의 장안(長安)에 들어와서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BC 51년, 한나라와 동맹 관계를 구축한 호한야(呼韓邪)는 이번 기회에 스스로 한나라의 사위가 되길 청하며 화친을 강화하고자 했다. 한나라는 건국 후 계속되는 흉노와의 갈등 속에서 이렇다 할 해결책을 찾지 못했는데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흉노의 호한야(呼韓邪)와 종실(宗室)의 공주를 정략 결혼시켜 평화를 유지하기로 한다. 원제(元帝)는 크게 기뻐하며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고 자신의 부름을 받지 못한 궁녀들에게 연회 자리에서 술을 따르도록 했다. 그중에는 왕소군(王昭君)도 끼어 있었는데 왕소군에게 미모에 마음을 빼앗긴 호한야는 종실의 공주가 아닌 궁녀 중에서 한 명을 택해도 좋다며 왕소군을 선택했다. 원제는 공주를 선택함으로써 생길 어려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의 제의를 기꺼이 수락했다. 원제는 ‘흉노에 시집가는 궁녀(宮女)는 공주(公主)와 같은 대우를 받을 것이다.’라는 말로써 뒷일을 보장해주기까지 했다.
원제(元帝)는 호한야 선우(單于)와 왕소군을 장안에서 결혼시키고 난 후, 그녀에게 ‘한나라 황실과 황제를 빛내라,’는 의미가 담긴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흉노족 차림의 붉은 옷을 입은 신부 왕소군을 태운 말이 떠날 때 원제는 처음으로 절세미인이 단아하면서도 우아한 자태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제야 왕소군의 미모를 알아차린 원제는 자신의 결정을 크게 후회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왕소군의 출가를 번복할 경우 호한야 선우와의 신뢰가 깨지고 흉노와의 관계가 악화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궁으로 돌아와 궁녀들의 초상화를 대조해 본 원제는 왕소군의 초상화가 실물과는 전혀 다르게 그려진 데다 커다란 점까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분노한 원제는 초상화 제작 과정에서 뇌물이 왕래했음을 간파하고 자신을 기만한 화공(畵工) 모연수(毛延壽)를 참수(斬首)했다고 한다.
부모 형제가 있는 고향과 이별하고 오랑캐로 부르던 흉노 훈족(Hun族)의 옷으로 갈아입고 홀로 먼 북쪽 오랑캐의 땅으로 떠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왕소군이 훈족의 영역으로 넘어갈 때, 마침 기러기 떼가 그녀의 머리 위를 날았다. 그러자 그녀는 비파(琵琶)를 꺼내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 포함된 노래 출새곡(出塞曲)이 바로 그 노래인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왕소군의 노래와 미모에 놀라 날갯짓하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 이후 왕소군은 ‘기러기가 떨어졌다’라는 의미의 ‘낙안(落雁)’이라는 별칭을 얻는다.
출새곡(出塞曲)<변방을 나서며 부른 왕소군의 노래>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오랑캐(훈)의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겠구나.
BC 31년, 호한야선우가 세상을 떠나자 20대 초반이던 왕소군은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는 흉노(匈奴)의 풍습에 따라 호한야의 장자(長子) 복주루(復株累)와 혼인해야만 했다.
왕소군은 이러한 풍습에 거부감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한나라의 제12대 황제 성제의 만류로 그 뜻을 접어야만 했다. 다행히도 젊었던 복주루가 왕소군을 사랑하여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았다.
복주루와 결혼한 왕소군은 11년간 그와 살면서 두 명의 딸을 낳았고, 그 사이 한나라에 있던 왕소군의 형제들이 제후(諸侯)의 신분에 봉해졌으며, 그녀의 두 딸인 수복거차(須卜居次)와 당우거차(當于居次)도 장안으로 들어와 머물며 원제(元帝)의 황후를 모시는 등 두 나라 간에 평화가 지속(持續)된다.
BC 20년, 복주루 선우가 사망했고 이후 왕소군은 홀로 생활하다 흉노 땅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지금의 내몽골자치구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에서 남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묻혔다. 그녀의 무덤은 가을에 북방의 풀들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그 무덤의 풀만은 늘 그 푸르름을 잃지 않아 ‘청총(靑塚)’이라 불린다고 한다.
훗날 시선(詩仙)이라 불리던 당(唐)나라의 시인 이태백(李太白)이 쓴 ‘왕소군(王昭君)’이라는 시이다.
왕소군(王昭君) <이태백(李太白)의 시>
昭君拂玉鞍(소군불옥안) 소군이 옥으로 만든 말안장을 잡고
上馬啼紅頰(상마제홍협) 말 위에서 울어 뺨이 붉어졌구나.
今日漢宮人(금일한궁인) 오늘은 한나라 궁궐의 사람인데
明朝胡地妾(명조호지첩) 내일 아침이면 오랑캐 땅의 첩이 되는구나.
5. 환상적인 경관(京觀)의 천산천지(天山天池)
우루무치(烏魯木齊)에서 돈황(敦煌) 근처의 유원(柳園)까지는 기차로 11시간 정도 걸리고, 거기서 다시 버스로 둔황까지는 1시간 4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기차 출발이 저녁 9시 40분이라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곧바로 우루무치 인근의 천산천지(天山天池) 관광길에 나섰다.
중국인들은 중국 북동부 길림성(吉林省)의 장백산 천지(白頭山 天池)보다도 이곳 천산의 천지를 더 높이 평가한다고 한다. 해발 2,000m 정도의 이 호수는 천산의 만년설이 녹아내린 물이 고인 호수로 산 아래의 황량한 사막 불모(不毛) 대지를 적시는 젖줄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불모의 뜨거운 벌판을 지나 천산이 가까워지자 계곡이 나타나고 계곡 속으로 푸른 나무와 숲이 나타나 눈이 편안해진다. 계곡 멀리 푸른 초원이 나타나며 유목민족인 카자흐족들의 천막집 파오(Pao)가 보이고, 양떼와 소,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천지(天池)를 오르려고 좁고 가파른 계곡도로를 오르다 보니 수천마리의 염소 떼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오고 있어 수십 대의 관광버스들이 꼼짝을 못한다. 무리해서 비집고 가던 우리 버스가 기어이 염소 한 마리를 깔고 말았다. 염소 주인과 염소값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느라...
우루무치의 천산(天山) 천지(天池) / 우루무치 홍산(紅山) 공원
천지(天池) 300m쯤 아래 관광마을에 도착하면 이곳부터는 케이블카가 운행되는데 우리는 올라갈 때는 버스로 오르고 내려올 때 케이블카를 탔다. 케이블카에서 바라보면 수정처럼 푸른 소천지(小天池)도 보이고,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하늘을 찌르고 울창하게 덮여 있는 산봉우리들이 연이어 지나간다. 백두산 천지 2/3 정도의 크기라는 천산천지는 10여 대의 호화롭게 장식한 중국식 유람선이 관광객들을 싣고 호수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물빛도 너무 아름답고, 주변의 경관이 너무도 환상적이어서 잠시 넋을 빼앗겼다.
우리 일행도 유람선을 타고 20여 분 남짓 호수를 돌았는데 주변 경관이 너무나 환상적이다.
점심식사를 했던 관광마을은 관광 소품들을 진열한 가게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특히 이곳 지방 특산인 한약재인 동충하초(冬蟲夏草), 백사(白蛇) 말린 것, 석이(石耳)버섯 등을 전시한 한약방이 눈길을 잡는다.
돌아오면서 우루무치 시내 가운데 있는 홍산(紅山) 공원에 들렀는데 잘 가꾸어진 나지막한 산으로, 숲도 잘 가꾸어져 있고 휴식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얼굴에 삶의 여유도 보이고 표정들도 밝다.
이 홍산 공원은 우루무치 유일의 공원으로 토, 일요일이면 사람들로 무척 붐빈다고 한다. 공원의 꼭대기에 있는 3층 전시관의 맨 위층에 오르면 우루무치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6. 황량한 사막 도시 둔황(敦煌)과 그 인근의 유적들
우루무치에서 저녁 9시 50분, 유원(柳園)행 야간기차를 탔는데 6인 1실, 3층 침대가 있는 기차로 2층이 내 자리인데 비좁기 그지없고, 가격은 비교적 저렴하다고 한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너무 시끄러워 눈을 떠보니 투루판(土魯番)인데 중국 단체관광객 떼거리가 올라타며 시끄럽기 짝이 없다.
비어 있던 내 아래와 옆자리는 모두 중국 젊은 처녀들과 아주머니들이 차지며 끝없이 재잘거린다.
아침 8시 30분에 유원(柳園)에 토착하였으니 거의 11시간을 밤새워 달려온 셈이다. 곧 버스로 갈아타고 1시간 40분 만에 돈황(敦煌)에 도착하여 돈황양광호텔(敦煌陽光大酒店:Sunshine Hotel)에 짐을 풀고 아침을 먹었다.
중국의 서쪽 끝 감숙성(甘肅省)에 있는 돈황(敦煌)은 기원전 2세기, 한나라 때 세워진 도시이다.
훗날 실크로드의 시발점으로 번성과 영화를 누렸으나 지금은 인구 18만 정도의 소도시로 인근의 막고굴(莫高窟), 양관고성(陽關古城) 관광으로 명맥이 유지되는, 사막 가운데의 작은 오아시스 도시이다.
이곳 감숙성(甘肅省)은 신강성(新疆省)에 비교하면 경제가 매우 좋지 않다고 하는데 특히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이곳은 사막(고비사막) 인근 지역으로 모래바람이 특히 심하여 사주(沙州)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곳이다. 아침을 먹은 후 1시간 40분 거리의 양관(陽關)으로 이동하는데 뽀얀 고비사막의 흙바람 속으로 보수 중인, 길도 아닌 길로 우리 차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털털거리고 달린다.
7. 중국 서부의 관문 양관(陽關)
양관(陽關)은 작은 오아시스 옆에 세워진 중국 서부의 관문(關門)으로 이곳을 개척한 장건장군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근처에는 박물관, 전시실 등 건물들이 세워져 있는데 부근에는 적의 침입을 알리는 횃불을 올렸던 당시의 봉수대(烽燧臺)만이 옛 모습 그대로, 반쯤 무너져 내린 채 쓸쓸히 언덕 위에 서 있다.
붉은 언덕 위에 올라서서 바라보면 아득히 멀리 사막 너머로 흰 만년설을 이고 있는 산줄기가 보이는데 치롄산맥(祁连山脈)이라고 한다.
실크로드의 시발점 양관고성 유적 / 당나라 대시인 왕유(王維) 시비(詩碑)
옛날, 이곳 양관(陽關)을 나서면 타클라마칸(Taklamakan) 사막이 이어져 있는 죽음의 땅 서역(西域)으로, 살아 돌아오기를 기약하기 어려운 길로 알려졌다고 한다.
군인으로, 혹은 장삿길로 이 양관을 나가면 살아 돌아오기가 쉽지 않아 눈물로 송별을 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친구를 떠나보내는 슬픔을 읊은 당나라의 대시인 왕유(王維)의 동상과 시가 돌에 새겨져 있다.
送元二使安西<원이사를 안서로 보내며> 일명 渭城曲(위성곡)- 王維
渭城朝雨浥輕塵(위성조우읍경진) 위성에 내린 새벽 비가 흙먼지를 적시네.
客舍靑靑柳色新(객사청청류색신) 객사에 푸른 버들 색깔이 더욱 푸르구나.
勸君更進一杯酒(권군경진이배주) 그대에게 다시 술 한 잔 권하노니
西出陽關無故人(서출양관무고인) 양관 서쪽으로 나가면 아는 사람이 없을 터.
당(唐)의 대시인 왕유(王維)가 절친(切親)이었던 원이(元二)가 안서도호부(현 돈황) 사절로 가게 되자 송별의 술잔을 기울이며 읊은 시다. 위성(渭城)은 현 산서성(山西省) 함양(咸陽)의 옛 이름이다.
실크로드 천산남로의 시발점이었던 양관(陽關/천산북로의 시발점은 玉門關)은 이제 옛 영화를 까마득히 뒤로한 채 붉은 언덕 위에 쓸쓸히 서 있는데, 옆의 작은 오아시스 마을의 포도밭에는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사막의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향기로움을 더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