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충무공 김시민 장군과 진주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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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 장군 (사진/전쟁기념관)
▲ 충무공 김시민(金時敏) 장군.
김시민(金時敏, 1554년~1592년) 장군은 충청도 목천현 백전촌(木川縣 栢田村) 지금의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부락에서 태어났다.
김시민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안동(구안동)이다. 자는 면오(勉吾)이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고려 때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13대손이자 지평(持平) 김충갑(金忠甲)의 셋째 아들이다.
다음은 장군이 태어난 백전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일화 한토막이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병정놀이를 좋아하고 언제나 대장이 되어 지휘하였다. 8살 때 길가에서 병정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마침 원님행차가 있어 수행원이 길을 비키라 하자 “한고을 사또가 감히 진중을 통과 할 수 있느냐”고 호령하면서 조금도 기가 꺽이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원님이 말에서 내려 장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큰 재목이구나” 하면서 길을 비켜 지나갔다 한다.9살 때 일이다. 백전마을 입구는 백전천(지금의 병천천)이 굽이 돌아 흐르고 있었는데 이 백전천가에 물에 잠긴 바위가 있고 그 속에 큰 굴이 하나 있었으며 이 굴속에는 큰 이무기 뱀이 살면서 수시 출몰사여 사람을 놀라게 하고 가축에 해를 끼치기도 하였다. 이때 장난꾸러기 소년 김시민은 이무기 퇴치를 궁리하였다. 뱀은 뽕나무활에 쑥대화살로 쏘아 잡는다는 고사를 읽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개울가로 가서 이무기 뱀을 나타나게 한 후 활로 쏘아 없애 버렸다 한다".
현재 백전마을 어귀에는 700∼800여년된 느티나무와 거북바위가 있는데 이곳이 활로 뱀을 쏘아 맞춘 사사처(射蛇處)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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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 장군의 생가터와 사사처.(사진/한문화재한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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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시 병천면 가전리에 위치한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생가터를 알리는 유허비.(사진/한문화재한지킴이)
김시민 장군은 1578년(선조 11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하였으며, 1581년 부평부사가 되었으나, 경기어사의 서찰로 구황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3년 여진족 이탕개가 회령(會寧) 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정언신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토벌하였다. 그 공으로 훈련원 판관(判官)이 되었다.
이때 그는 군대 개혁 및 강화에 대한 건의를 병조에 제출하였으나 평화로운 시기에 군기를 강화할 필요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질타하자 이에 젊은 혈기에 분개하여 사직하였다
김시민 장군 영의정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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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 장군 공신교서.공신교서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본내 경매장에 나오면서 우리나라에 알려졌고, 이를 환수하기 위해 진주시민의 모금과 언론사의 모금운동 끝에 지난 2006년 7월 19일 국내에 환수됐다. 이후 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시된 후 진주박물관에 안착했다.
임진왜란
1591년(선조 24)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고, 부임한 지 1년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하였다가 목사가 병사하자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 진주로 돌아와 성민을 안심시키고, 피난하였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으며, 성채를 보수하고, 한편으로 군사 훈련으로 군사 체계를 갖추었다.
왜군은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진격하였다. 이에 곤양군수 이광악과 상주판관 정기룡, 의병장 이달, 곽재우 등과 합세하고, 적을 중간에서 요격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고성과 창원을 수복하였다.
이어 의병장 김면의 요청을 받아, 구원병 1천을 이끌고 가서, 거창의 사랑암에서 금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왜군을 맞아 승전하였으며, 이 공으로 1592년 음력 7월 26일 진주목사로 관직을 승진 제수받았다.
김시민은 취임 후 염초(焰硝) 5백여 근을 만들고 총통(銃筒) 70여 병(柄)을 만들고, 따로 부대를 배정하여 숙달시키는 한편,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음력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내자 조정에서는 통정대부로 임명하였다. 그 뒤 금산(金山)에서 적을 격파하여 사기가 충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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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진주성도(국립중앙박물관소장)
진주대첩 1592년 음력 6월 이후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맹활약으로 기세가 꺾인 일본군은 병력을 집중하여 어떻게든지 하삼도의 관문인 경상도를 손아귀에 넣으려 했지만 전란 이래 진주성만은 공략하지 못하였다.
진주성은 앞은 남강이 흐르고 후방 삼면은 험준한 형세로 석벽을 높이 쌓아 올린 매우 견고한 성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도를 장악할 수 있는 본거지이자 전라도 침입의 교두보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요충지가 바로 진주성이라 여기고 공략을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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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원래 진주성을 지키는 장수가 머물던 지휘소였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이 함락된 직후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순국한 곳으로 유명하다.
1592년 음력 10월 4일 일본군은 2만의 군사를 이끌고 진주성을 포위하였다. 성안에는 진주목사 김시민을 위시한 3천 8백여 명의 병력과 백성들이 합세하여 결전 준비를 갖추었고, 성밖에서는 경상도 의병이 일본군을 배후에서 견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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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포대에 설치된 복원된 현자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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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총통 (보물 제885호)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군은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주위의 민가를 모조리 불지르고 총탄과 화살을 마구 쏘아대며 공격을 시작하였다. 일본군에 맞서 성안의 군사들은 현자총통을 비롯한 총포와 화살로, 백성들은 돌과 뜨거운 물로 대항하였다. 게다가 임계영, 최경회가 이끄는 전라도 의병 2천여 명이 성밖에서 진주성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음력 10월 9일 진주 목사 김시민이 시체 속에 숨어있던 왜군의 총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진주성을 공격한 지 이레 만인 음력 10월 10일 일본군은 퇴각하였고, 마침내 민관군(民官軍) 할 것 없이 단결하여 항전하였던 조선은 진주성을 방어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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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진주대첩으로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삼대대첩의 하나로 일본군이 호남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좌절시킨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승리였다.
진주대첩은 임진왜란 최초로 성을 지켜낸 전투이다. 진주대첩은 목사인 김시민의 전술과 민간인들의 합심 그리고 효율적인 무기 사용의 조화로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이긴 전쟁이다. 진주전 당시 일본군의 사망자는 지휘관급이 3백 명, 병사가 1만 여 명에 달했다. 또한 병력 손실 외에도 패배가 주는 여파는 대단했다. 일본은 진주전 참패에 분노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차전을 지시하고, 진주대첩 승리의 주역인 김시민 목사의 목을 베어 오도록 명령하였다..
진주대첩 승리의 배경.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은 위력적인 신식 무기 조총을 사용했고, 이에 비해 조선군의 주무기는 창과 활이었다. 하지만 조선군에게는 조총에 대응할 만한 승자총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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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승자총통 , 위로부터 소, 중, 대, 별승자총통.
일본군은 전투 4일째부터 새로운 장비를 동원하여 진주성을공격하였다 . 그러나 당시 진주성 안에는 일본군의 뛰난 장비에 대응할 만한 무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대형 화포인 현자총통과 독창적인 시한 폭탄인 비격진천뢰 등의 무기는 진주성을 지키는 일등 공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