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속초는 ‘속새’가 많으므로 황무지, 들판의 뜻으로 ‘속새’ 또는 한자로 표기하여 속초(束草)라고 하여 함께 사용되다가 한자 표기 束草라는 지명만이 남고 속새는 사라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설악산에 동해바다와 함께 영랑호, 청초호는 연인의 두 개의 눈동자처럼 깊고 그윽하여 세계인을 불러 모으는 곳이기도 하다. 혹자는 속초는 양양군 도천면 속초리로 작은 포구였기에 역사와 뿌리가 없는 그냥 평범한 어촌에 불과하다고들 하기도 한다. 속초는 6.25 한국전쟁으로 아픔이 깃든 도시일 뿐으로 실향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로만 인식하고 있는 분이 많다. 6.25 한국전쟁으로 부월리 백사장이 아바이마을로 변한 것도 사실이고, 속초리, 속초읍, 속초시로 발전되어 오늘의 시 60주년에 이른 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태백산맥의 동사면으로 설악산맥이 뻗어 대청봉, 세존봉 등의 높은 산지가 동쪽으로 올수록 주봉산, 청대산으로 급격히 낮아져 해안 가까이에서 20m 내외의 구릉과 해안과 연결되어 발달된 마을로 형성된 곳이 속초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3천년 전 사람 살았던 흔적 조양동유적
조양동주민센터 뒤편에서 기원전 8세기경인 3천년 전 신석기시대 후기와 청동기시대에 속초에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인 조양동유적(朝陽洞遺蹟)이 발견되었다. 속초에 건축 붐이 활기차던 1990년, 한국토지개발공사가 13만평을 택지개발지구로 책정하고 강릉대학교박물관에 의뢰하여 지표조사를 하던 중에 이 지역에서 모두 7채의 움집터 주거지와 당시의 무덤이었던 고인돌 2기가 발굴되었다. 집터는 원래 지반인 풍화암반층을 40∼60m 길이로 파내고 바닥에는 고운 진흙을 얇게 깔아 처리했는데 평면은 동서방향이 약간 긴 네모꼴로 23㎡∼76㎡ 규모임이 밝혀졌다. 이로써 당시의 사람들이 7∼23평 크기의 움집을 짓고 조개잡이, 물고기잡이를 하고 사냥을 하고 열매를 따면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지금부터 3천년 전, 청대산을 지나 청초호 옆 낮은 구릉의 꼭대기에 남향으로 움집을 짓고 마을을 형성하여 살은 흔적인 것이다.
조양동유적은 1992년 10월 10일 국가문화유산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2만4,295㎡이다. 동해안의 청초호수(靑草湖水)를 앞에 두고 있는 조양동유적은 우리나라 선사시대 가운데도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집터이다. 조양동유적에서 많은 석기와 토기가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상을 밝혀 주는 자료가 되었다. 신석기시대의 토기로 빗살무늬토기, 겹아가리무늬토기, 구명무늬토기, 골아가리무늬토기, 붉은간토기와 석기로 돌토끼, 돌검, 반달돌칼, 가락바퀴, 그물추, 화살촉 등이 발굴되었다. 특히 움집터에서 서쪽으로 약 700m 떨어진 고인돌에서 발굴된 부채꼴 모양의 청동도끼는 편형동부(扁形銅斧)라 불리는데, 동해안 지역에서는 지금까지 발견된 예가 없어 이 지역 선사 문화 연구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3호 집자리에서 출토된 굽손잡이 그릇은 우리나라 동북지방의 신석기시대 말기 유적인 함경북도 무산 호곡동에서 출토되어 신석기시대 말과 청동기시대 초기에 있어서 동북지방과 강원 영동지역 간의 문화교류를 확실하게 입증해 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원래 이곳은 주택단지로 조성될 예정이었으나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사적으로 정하여 보존하게 되었다. 속초문화재지킴이 회원들과 매월 찾아 정화활동 등을 하며 찾아보면 고인돌의 흔적은 없고 움집의 모형 7기는 외형만 갖춰 있고 내부시설 등의 모습은 볼 수 없는 그냥 유적이 있었다는 사적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원전 8세기부터 터를 잡아 생활한 조상님들을 상기하면서 관광1번지 속초의 역사의 흐름과 삶의 체험과 숨결을 느끼는 새로운 명소로 거듭날 수 있지는 않을까? 어머니의 보금자리이자 탯줄과 같은 이곳을 속초의 뿌리교육과 자존심을 세우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약 2만년 전의 청호동유적
신석기시대 후기와 청동기시대의 유적지인 조양동유적에서 직선거리 2km 정도의 옛 세기상사가 위치했던 해발 10m 내외의 구릉성 사구(모래언덕)인 청호동 아이파크아파트(청호동 433-19번지 일원) 부지에서는 2015년 청초지구 공동주택 건설사업 과정에서 후기 구석기시대 뗀석기(돌도구)와 석기 제작소, 철기시대 마을 유적이 함께 확인되었다. 예맥문화재연구원의 발굴조사로 무려 3만5천년 전, 현 생존 인류의 출현과 같은 시기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청호동 유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청호동의 유적은 학자들이 약 2만년 전에 해당하는 후기 구석기문화와 대표적인 뗀석기인 모루돌, 망치돌, 좀날돌, 몸돌, 밀개, 찌르개, 새기개, 뚜르개, 끍개, 쐐기, 화살촉, 격지(수정) 등이 5,900점 출토되었다. 또 석기제작 도구도 함께 발견되어 석기 제작소가 존재하였음이 우리 지역 속초에서 최초로 확인되었다.
철기시대 마을 유적으로 한반도 중부지방의 철기시대 ‘중도유형문화(中島類型文化)’양상과 거의 동일한 4세기 전반, 즉 1천600년 전에서 후반경의 여(呂)자형, 철(凸)자형, 주거지(움집터) 15기와 수혈(구덩이) 70기 등 총 85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이곳에서는 경질민무늬토기 시루, 경질민무무늬토기 항아리, 경질민무늬토기 뚜껑과 두드럼무늬토기 짧은목 항아리, 두드럼무늬토기 긴몸 항아리, 철기류, 간석기류 등 총 329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저장용, 조리용, 식사용으로 사용한 살림살이 그릇으로 후기 구석기시대의 자연환경 및 생활문화, 석기제작 방식뿐만 아니라 철기시대의 주거 건축구조와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고고자료로 평가되고 있다고 사실을 우리는 중시해야 한다. 속초는 조양동에 3천년 전, 청호동에 2만년 전부터 1,600년 전에 삶의 터를 자리 잡은 선인들의 숨결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겠다.
이런 우리들의 옛 조상이 터 잡은 곳이 속초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왜 아이파크아파트를 건립할 당시 속초의 뿌리이며 선인들의 생활 터전이고 낙원인 흔적을 발굴하면서 보존하지 않고 흔적을 지웠을까? 후기 구석기시대의 유물과 유적, 철기시대의 주거건축 구조와 생활상의 중요한 역사학적 자료이며, 속초의 삶의 터전의 원천으로 가장 살기 좋은 생활공간이었던 것을 보존치 못하고 흔적을 지운 아쉬움에 그 당시의 행정당국과 건설 책임자, 조사 발굴을 맡았던 역사학자들에게 묻고 싶을 뿐이다. 지금이라도 청호동유적이 발견된 청호동 아이파크 아파트의 어느 한 곳에 축소된 흔적과 모형 유물을 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여 속초를 배우는 터전으로서 속초 역사학의 원조인 2만년 전의 뿌리가 살아 숨 쉬게 하여 속초 미래행복의 동행으로 삼았으면 하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개진하여 본다.
이상집
속초문화재지킴이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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