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끼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사나이 그이름은 고재봉 성난 고재봉"
"도끼로 찍어대는 고재봉 ~ 이것이 다이나마이트"
내가 어릴때인 60년대 아이들은 이런노래를 자주 불렀다. 고재봉 그는 오랫동안 살인마의 대명사로 지금까지도 연쇄살인사건이 날때 마다 회자되고 있다. 그런데 오늘 신문기사를 보다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어 관련내용을 요약해 보았습니다
매년 7월 7일 충주시 신니면 동락초등학교 교정에서는 6.25전쟁 당시 북괴군 15사단예하 48연대 병력 2,000여명을 아군 6사단 7연대 1개 대대병력이 섬멸한 6.25 최초승전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 속에는 북괴군 일망타진에 결정적 기여를 한 당시 동락국민학교 김재옥 여교사와 7연대 2대대 이득주 소대장과 관련하여 "전장과 여교사"라는 영화의 소재뿐만아니라 희대의 살인마 고재봉이 연루되어있다는 가슴아픈 과거가 숨어있다.
김재옥 교사는 1931년 3월 12일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서 태어나 음성여자중학교를 거쳐, 1950년 5월 20일 충주사범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같은 해 6월 20일 충주시 신니면의 동락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그러나 교사로 부임한지 5일 만에 6∙25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휴교령이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배운 사명감으로 피난을 가지 않고 학교를 지키고 있던 김재옥 교사는 7월 6일 오전 늦은 시간 북한군의 선두부대 2,000여명이 학교에 밀어닥치자 침착하게 ‘국군은 이미 철수했다’라는 말을 하고 북한군이 무장을 풀고 목욕을 하는 등 휴식을 취하도록 만들었다. 이를 확인한 교사는 국군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무기를 든 수 많은 북한군들의 눈을 피해 몰래 빠져 나와 걷기 시작했다. 길도 없는 험한 산속을 4km이상 헤매던 교사는 가까스로 부용산 한 암자에서 이동 중이던 6사단 7연대 2대대를 만나 북한군의 상황을 자세하게 전하고 마을과 학교를 구해달라고 호소하게 된다.
당시 우리 국군은 300여명으로 북한군에 비해 턱 없이 적은 숫자였는데 김재옥 교사의 용기덕분에 북한군이 쉬는 틈을 타 과감하게 기습공격을 할 수 있었고, 1개 포병대대와 1개 장갑차 중대, 사이카 부대로 증강된 북한군 48연대 전투단 2,000여명을 거의 전멸시킬 수 있었다.
이후 김재옥 교사는 이부대의 병기장교였던 이득주 소위와 결혼해 강원도 인제군에서 어론초등학교, 군인 교회 등을 설립하는 등 지역주민에게 봉사하는 군인가족으로 생활을 하였는데 1963년 어처구니 없는 사건으로 인해 일가족이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
전장과 여교사(1966, 김진규 엄앵란 주연)
1963년 강원도 인제의 군부대에서 대대장 당번병으로 복무중인 고재봉은 사택의 장작을 패고 물을 긷고 청소하는등 잡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목이 말라 물 마시러 사택안으로 들어갔다가 작은 물건 하나 (군화라는 설이 있다) 를 들고 나오다가 식모 (지금의 가정부로 저 당시에는 주로 십대후반의 소녀로 식모라고 불렀다) 에게 들키고 만다
그 식모는 그동안의 도난사건이 모두 그의 짓이라고 단정하고 대대장에게 말하겠다고 팔팔 뛰자 화가 난 고재봉은 들고 있던 도끼로 죽여버린다고 협박을 했고 그결과 살해협박죄까지 뒤집어 쓰고 육군형무소에서 7개월을 복역해야했다
우리 군의 60년대초 육군형무소 복역이 얼마나 혹독했을지... 작은 실수로 그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했던 고재봉은 복역내내 복수의 이를 갈았고 출소후 새벽에 박중령 사택으로 찾아가 박중령과 부인 어린 아들 딸 가정부까지 모두 무참히 살해했지만 어이없게도 그가 교도소 복역중에 박중령은 다른 부대로 전속가고 그 사택에는 엉뚱한 이득주중령 가족이 살고 있다가 억울하게 도끼에 난도질 당했다. 그후 그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형무소장의 눈을 손으로 찌르는등 악행을 계속하다 죽기전 종교에 귀의하여 이중령의 어머니에게 참회의 편지를 보내고 1964년 총살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Pardonne Moi - Nana Mouskou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