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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 (85)
2026.09.09
<신사참배와 개신교 분열 1935 - 1945>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하나의 장로교총회를 세웠지만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는 약 300개 가까운 분열을 보였다. 수백개로 세포분열을 한 배경에는 교회 권력자들의 탐심과 이기심이 바탕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지만 최소한 첫 분열이 없었다면 이렇게 쉽게 나뉠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강요의 늪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일제는 국가권력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문제는 ‘신사’라는 곳이 다신론적 자연숭배 종교시설로 신사참배는 종교행위라는 데 있었다. 일제는 신사를 종교가 아닌 국민도덕으로 포장했지만 기독교 신앙과 교리에 위배되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는 사실이었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천주교와 감리교가 가장 먼저 신사참배를 결의했고 장로교 제27차 총회에서도 신사참배안건이 통과됐다.
-교단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강한 저항운동이 시작됐다. 백석대 이상규 석좌교수는 신사참배 저항운동에 주목하며 해방 후 친일청산으로 이어진 교회의 역사를 되새겼다. 다만, 신사참배로 비롯된 장로교회의 분열은 역사의 아픔으로 남아있다.
-일제는 국가권력으로 신사에 참배할 것을 강제하였고, 한국교회는 오직 믿음으로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싸우며 저항했다. 이 사건은 당대만이 아니라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속적인 영향을 주었고 교회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분열을 초래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140년의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사(神社, 神祠)는 신도(神道) 의식을 행하는 종교시설물이다. 신도란 일본의 원시종교로서 다신론적이며 자연숭배적인 종교인데, 일본인은 국조신(國祖神)이라고 하는 천조대신(天照大神)과 그 이후의 종신(宗神)을 섬기며, 또 천황(天皇)을 현인신(現人神)으로 섬기는 일종의 토착적 민족종교라고 할 수 있다. 신도란 일본의 원시적 자연숭배 종교로서 민족적 성격을 띤 국교화 된 종교였다.
-그런데 명치유신(明治維新, 1868)에 의해 새로 성립한 정권은 천황제 국가로서 신도를 기본이념으로 하였다. 그리고 신도를 국가적 종교로 전 국민에게 참배토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국가에 보은하는 국민도덕’이라고 규정하였다. 신사참배를 국가적 의식으로 강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신도의 종교적 성격을 배제하고 ‘비종교화’(非宗敎化) 한 것이다.
-그런데 일제는 1930년대부터 자국과 식민지민에게 신사에 참배할 것을 강요했다. 1930년대 일본에서 군국주의자들이 득세하게 되자, 천황 중심의 황도주의 이념으로 소위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위한 국민정신 통일이라는 취지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사참배만이 아니라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하도록 요구하는 동방요배(東方遙拜)를 강요했다.
-신사참배 강요는 전쟁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이념적 토대로 강요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한국교회를 분열시키고 그 힘을 약화시킬 목적이 있었다. 신사참배를 요구하면 찬반 논쟁이 일어날 것이고 이로써 교회와 선교부 간의 갈등을 유발하여 식민정책에 대항하여 공동전선을 형성하지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1935년 11월 평안남도 지사 야스다케 타다오(安武直夫)는 공·사립학교 교장회의를 소집하고 기독교학교에 신사참배를 요구했다. 숭실중학교 교장 윤산온(G. S. McCune), 숭의여중학교 교장 선우리(V. L. Lee) 등은 기독교 교리에 위배됨으로 참배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교장회의가 끝난 후 “신사참배는 국민교육 상의 요건이므로 앞으로 참배를 거부할 때에는 단호한 조치를 취한다”는 공문이 각급 학교에 발송됐다.
-그러나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에 해당함으로 남장로교선교부, 호주장로교선교부는 참배를 거부하고 학교 폐쇄를 선택했고, 찬반양론으로 분열되어 있던 북장로교도 결국 학교 폐쇄를 결정했다. 반면 캐나다장로교나 감리교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신사참배를 받아들였다.
-1936년 8월, 우까기(宇垣) 총독 후임으로 미나미(南次郞)가 취임하면서 신사참배를 더욱 강요했고, 교회와 기독교 기관에도 참배를 강요하기에 이른다.
-1937년 7월에는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했고, 9월 6일을 애국일로 정해 일본국기 게양, 동방요배, 신사참배를 요구하였고, 10월에는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제정했다. 그해 12월에는 천황 사진을 각급 학교와 기관에 배부하고 경배를 요구했다.
-무엇보다도 ‘일면일신사’(一面一神社) 정책을 수립해 도처에 신사를 건립하고, 1938년 2월에는 전쟁 수행을 위해 특별지원제도를 제정했다. 3월에는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조선어(한글) 사용을 금지시켰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됐다. 천주교, 감리교는 일치감치 일제에 굴복하고 신사참배를 수용했다. 침례교는 끝까지 저항했고, 성결교는 교단이 해체됐다.
-장로교는 처음에는 강하게 반대했으나 강요가 심해지자 반대 의지가 점차 약화되어 1938년 9월 이전까지 당시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일제의 강요에 굴복했다.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모인 장로교 제27차 총회는 비록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신사참배안을 가결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신사참배를 강하게 거부하는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지역적으로는 평양과 부산 경남이 중심이었다. 박관준, 손명복, 손양원, 이기선, 이원영, 이현속, 주남선, 최덕지, 최상림, 한상동 등이 거부운동 지도자들이었다. 한부선(Bruce F. Hunt), 마라연((Dr C. McLaren), 태매시((Miss Tate), 하밀돈(F. E. Hamilton) 등 선교사들도 참배를 거부하거나 거부자들을 지원했다.
-신사참배 반대 방법은 개인적인 반대, 조직적인 신사불참배 운동, 정계 요로(要路)에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호소하거나 진정서 등이 있었다. 참배를 반대한 이유는, 하나님의 계명에 반하는 우상숭배, 개인의 양심과 신교(信敎)의 자유에 대한 억압, 그리고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신사참배 거부로 2,000명 이상이 투옥됐다.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치안유지법, 불경죄, 보안법 위반, 육군형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투옥시킨 것이다. 이중 주기철(장로교), 박봉진(성결교), 전치규(침례교) 등 50여 명은 순교했고, 200여 교회가 폐쇄됐다. 신사참배 거부로 마지막까지 투옥되어 있던 26명이 해방을 맞아 8월 17일 출옥했다.
-해방 후 신사참배 회개와 친일청산 문제로 부산경남지방에서 교회쇄신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와중에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전개되자 김길창 목사는 1949년 3월 기존의 경남노회를 이탈하여 별도의 사조(私租) 경남노회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한국장로교회 분열의 시작이었다. 1951년에는 고려신학교 측의 경남법통노회가 총회로부터 축출되어 1952년 고신총회로 분열되었다. 이렇게 볼 때 신사참배 강요와 거부 사건은 지난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주남선 목사 1888 – 1951>
부산 고신대학교를 설립하고 이사로 활동한 장로교 목사이다.
주남선(朱南善)은 1888년 9월 14일 경상남도 거창군 읍내면 동동 28번지에서 태어나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러다가 1908년 친구 오형선(吳亨善), 조재룡(曺在龍)과 함께 호주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들은 1909년 10월 10일 거창교회를 설립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했을 때는 거창교회 중심인물인 오형선 장로, 고운서(高雲瑞) 등과 3월 20일 독립 시위를 주도하여, 이덕생(李德生), 김태연 등 13명과 함께 1921년 1월 검거되었다. 징역 1년의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21년 12월 29일 부산감옥 진주분감에서 가출옥하였다.
-1920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주남선은 거창교회 전도사[1922년 1월~10월], 거창 지방 권서인으로 일하면서 수학하여, 1930년 3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해 10월 목사가 된 이후 거창교회 담임 목사로 일하게 되었다.
-1935년부터 일제가 신사 참배를 강요하자 이를 우상 숭배로 간주하여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일로 1938년 9월 12일 거창교회를 사면하였으나,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던 중에 1940년 7월 16일 체포되었다. 그 후 5년간의 투옥 생활 끝에 1945년 8월 17일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출옥한 주남선은 다시 거창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하였다. 비록 거창에 정주하였으나 한상동(韓尙東) 목사와 더불어 부산에 고려신학교[현 고신대학교]를 설립하고 1946년 9월 20일 이사로 활동하였다. 1945년 11월 3일에는 부산진교회당에서 열린 제47회 경남노회에서 노회장으로 추대되어 부산 지방과 경상남도 지방 교회를 관장하였다.
-주남선은 신실한 목회자, 독립운동가 이자 설교자였고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6·25 전쟁 기간에도 피난을 거부하고 교회와 신자들을 보살폈던 주남선은 1951년 3월 23일 간암으로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주남선은 성경은 부분과 전체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과 성경의 무오성[inerrancy], 그리고 성경의 최종적 권위를 확신하였던 보수주의자이자 개혁주의 목회자였다.
-그는 자유주의적인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에 한국 교회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확신 때문에 부산에 고려신학교를 설립에 동참하고, 이 학교의 발전을 위해 이사로 활동하며 학교를 후원하였다.
-주남선은 개혁주의 신학의 신봉자였다. 저술로 몇 편의 단문과 설교문이 있는데, 『거창교회와 주남선 목사』에 실려 있다. 1977년에 건국공로훈장이, 1990년에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춘원 이광수 1892 - 1950 >
1892년 3월 4일 평안도 정주목 갈지통 광동리의 몰락한 양반가에서 소작농이던 아버지 이종원(李鍾元, 1850 ~ 1901)과 어머니 충주 김씨(忠州 金氏) 사이에서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으로 부모님을 포함한 모든 가족을 잃고 고아가 되었다.
-동학의 농민들에게 발견된 그는 곧 동학에 들어가 서기가 되었으나 당국의 탄압으로 동학이 해체되자 1904년에 수도 한성부로 상경하였다. 상경한 직후 친일파 송병준이 그의 문학적인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이 운영하던 친일 단체 일진회에 그를 추천했다.
-그는 일진회의 후원으로 1905년 일본으로 유학했는데 다이세이(大成)중학교를 거쳐 메이지가쿠인으로 편입하였고 메이지가쿠인에서 수학하면서 시와 평론을 발표했다. 메이지가쿠인은 일본 도쿄 미나토구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 메이지가쿠인대학(明治学院大学)을 뜻한다.
-1910년 경술국치가 발생한 직후 일제의 회유로 메이지가쿠인 대학을 졸업하고 일시 귀국하여 잠시 교편을 잡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는 1915년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 선언 당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 데 참여했다는 이유로 학업을 그만두었다. 한편 1917년에는 결핵에 걸려 고생했는데 이때 그를 간호했던 당시 동경여자 의학전문학교 학생 허영숙과 사귀었다.
-1917년 신한 청년당에 가입한 그는 신한 청년당 활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최초의 장편소설인 무정을 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에 연재했다. <무정>은 다음 해 단행본을 내어 1만 부가 팔렸다. 지금이야 1만 부가 대단한 부수가 아니지만, 경성부는 1926년까지도 전 인구의 99%가 문맹이었으며 1930년에 이르러서도 70% ~ 80% 이상이 문맹이었다. 즉, 글을 읽을 줄 아는 5만-8만 명 가운데 1만 부가 팔렸다는 것이다. 당시의 책은 사면 서너 명이서 번갈아 보고 헌 책방에서 바꿔 보는 게 예사였음을 감안하면 초특급 베스트셀러였다. <무정>의 스토리 전개로 독자들이 젊은층과 노년층으로 나뉘어서 논쟁도 했다고 할 정도다.
-무정의 성공으로 당시 문인으로서 그의 인기는 단연 톱이었고 육당 최남선, 벽초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 문인으로 꼽혔다. 그는 여운형의 추천을 받아서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해 독립신문의 발행을 맡았고, 이어 임시정부에서 발간한 한일관계 사료집 주필이 되어 편찬을 주도했다.
-그러나 자금난으로 압박받고 과로로 육신이 피폐해진 그는 1921년 2월 16일 애인이자 한국 최초의 산부인과 여의사인 허영숙을 만난 후 안창호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1년 4월 허영숙을 따라서 귀국을 택했다. 두 사람은 귀국한 지 한 달이 지난 1921년 5월에 결혼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인물임에도 귀국한 뒤 총독부로부터 체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 사이에서는 일제의 스파이 아니냐는 의혹이 크게 돌았다
-1922년 5월 월간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은 발표되었다. 민족개조론은 상·중·하로 구성된 장편 논문이며 글머리에는 변언(辯言), 끝에는 결론이 붙어 있다. 민족개조론 상(上)에서 이광수는 민족개조의 원리, 역사상으로 본 민족개조 운동, 갑신이래의 조선의 개조 운동을, 중(中)에서는 민족 개조는 도덕적일 것, 민족성의 개조는 가능한가, 민족성의 개조는 얼마나한 시간을 요할까, 하(下)에서는 개조의 내용, 개조의 방법을 다루고 있다.
-민족개조론의 핵심은 하(下)의 내용을 보면, 첫째, 각 사람으로 하여금 거짓말과 속이는 행실 없애기. 둘째, 공상과 공론은 버리고 옳다고 생각하는 바, 의무라고 생각하는 바를 부지런히 실행하기. 셋째, 표리부동과 반복함이 없이 의리와 허락을 철석같이 지키는 충성되는 신의 있는 자가 되기. 넷째, 고식, 준수 등의 겁나(怯懦)를 버리기. 다섯째, 개인보다 단체를, 즉 사보다 공을 중히 여겨, 사회에 대한 봉사를 생명으로 알기. 여섯째, 보통 상식을 가지고 일종 이상의 전문 학술이나 기예를 배워 반드시 일종 이상의 직업을 가지기(이상 지육(智育)방면). 일곱째, 근검 저축을 상(尙)하여 생활의 경제적 독립을 가지기(이상 경제방면)였고, 이 밖에 청결, 운동 등 덕·체·지의 3육(三育)과 부의 축적, 사회 봉사심의 함양 등을 개조의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발표되자마자 민족개조론은 지사적 계층과 청년들의 맹렬한 비난과 분노에 직면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독립을 외면한 개조의 방법론이 갖는 허구성이 청년층의 분노를 유발하였다. 둘째, 개조론이 재외동포 중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주장은 투쟁론을 주장하던 해외 망명객들을 심하게 모독하는 발언으로 받아들여졌다. 셋째, 3·1 운동 참가자를 무지몽매한 야만인이라고 하여 3·1 운동을 비하한 모멸적 발언이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3·1 운동 이후 1920년대 중반에 오면 국내의 민족운동이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크게 양분되며 이를 통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1927년 신간회 조직으로 나타났다.
-민족 개조론은 안창호의 이론에서 출발하긴 하였으나 안창호의 이론은 조선인의 민주의식을 기르며 착실히 대비해서 결정적 순간을 노리고 결과적으로는 독립 전쟁을 준비하자는 내용이다. 이광수의 동족혐오에 가까운 민족 개조론과는 다르다.
-1924년 민족개조론에 이어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을 기고했다가 크게 물의를 빚고 그는 동아일보에서 쫓겨났다. 이후 동아일보에 <재생>, <마의태자>, <단종애사>, <흙> 등 많은 장편 소설들을 연재했으며 결국 1926년에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다시 복직했다.
-1931년에 동아일보를 퇴사하고 조선일보로 옮겼다. 이후 조선일보에 장편 소설들을 연재하고 글을 썼다.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직에 취임해서 1934년까지 지냈다. 그렇게 잘 지내나 싶었는데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제가 그를 투옥하였다.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친일 행위를 하기 시작하였다. 1939년 친일 어용 단체인 조선 문인 협회 회장을 맡으며 스스로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전국을 돌며 강연을 하며 일제의 학도병으로 나갈 것을 독려하는 내용으로 연설하였다.
-1945년 8월 16일 서울 근교 사릉 인근에 살면서 해방을 맞이했고 8월 18일에는 군중들 사이에 '친일파 이광수 타도' 같은 구호가 나붙기도 했다. 전술한 친일 행위 때문에 먼저 자식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고 1946년에 가족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당대 풍습까지 어겨 가면서 아내와 합의이혼을 하고 8촌 친척인 운허의 도움을 받아 봉선사에 은거하기도 하였다. 1949년 반민특위 체포자 제2호로 연행되었지만 아들이 혈서를 쓴 덕과 고혈압 증세가 심화되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어쨌든 그는 해방 후 명성은 땅바닥에 떨어졌고 폐결핵에 시달리던 상황이라 건강이 나빴는데 1950년 6.25 전쟁 당시 유명세로 인하여 조선인민군에게 소위 모시기 정책의 일환으로 끌려갔다. 이광수 또한 한반도에 이름을 날렸던 유명인이다 보니 북한이 그 이름값을 활용하려고 사실상 납북한 것이다.
-이미 건강이 좋지 않던 차에 맹추위까지 겹치던 와중에 무리하게 강계로 이동하여 병이 악화되었는데 그의 건강상태를 전해 들은 벽초 홍명희가 한때의 친분을 생각하여 김일성에게 부탁해 강계에서 근처에 있던 인민군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이미 상태가 호전되기에는 늦었던지라 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 김일성은 그를 혐오했는지 1955년 12월의 유명한 '주체연설'에서 "리광수는 또 조선사람은 일본제국주의자들과 《동조동근》이라고 떠벌이던 놈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자를 내세운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절대로 못한다고 막았습니다."라고 마구 욕했다.
- 이광수가 북한 당국에게 자강도 강계로 이송되던 중에 동상이 심해져 10월 25일 사망했다고 공식적으로 확인했으며 2005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작가회의에서 최후의 제헌 국회의원 최태규가 강계의 인민군 병원으로 후송 중에 폐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2006년 발견된 미국 CIA의 기밀문건에서도 그의 행적이 확인되었는데 평양 교도소에서 10월 10일 석방되었던 농학자 신동기가 자신이 석방될 당시에 이광수가 평양 교화소에 수감되어 있었다고 증언했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신동기는 납북된 이후 북한 측에 전향 권유를 받았지만 거부하자 평양 교화소에 수감되었다가 10월 10일에 석방되었고 자신이 석방될 때 이광수와 김동인의 이복동생으로 제헌국회 부의장을 지낸 김동원,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심계원장 명제세 등이 수감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증언과 문건들을 종합하면 이광수는 10월 10일까지도 평양 교화소에 수감되었지만 건강이 악화되자 이를 보고받은 홍명희가 김일성에게 부탁해 국군이 평양을 수복한 10월 20일 이전에 임시수도 강계의 인민군 병원으로 이광수를 후송시켜 달라고 부탁하여 만포병원으로 이송하던 중 병원까지 가지도 못하고 차안에서 사망했다.
-사망한 후 자강도 만포군에 그대로 시신을 묻었는데 폭격으로 무덤이 평지가 된 후에 그 위로 그대로 아파트를 올려서 한동안 무덤조차 없는 신세였으나 이광수를 다시 안장하라는 지시가 내려오면서 아파트를 철거하고 이광수의 유해를 발굴해서 재북인사릉에 묻었다. 북한에서도 문학적인 재능을 인정한다는 얘기다.
-이광수는 어떤 변명으로도 사면될 수 없는, 한국문학사에서 대표적인 친일문학인이다. 통계에 따르면 그는 민족개조론부터 시작해 해방될 때까지 108편의 친일 작품을 이곳저곳에 발표하였다. 친일문학과 관련해서는 독보적으로 많은 작품 수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찍이 조선의 계몽과 독립을 문학의 사명으로 여긴 선각자였다. 1910년대 《무정》을 통해 민족계몽의 기치를 들었고, 3·1운동에도 가담했으며, 상해로 망명해 도산 안창호와 함께 대한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시선은 독립이라는 이상에서 ‘현실적 생존’으로 옮겨갔다. 조선은 스스로 설 수 없다는 패배적 역사인식, 지식인으로서 느낀 무력감, 제국의 질서 속에서라도 민족의 ‘문화적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를 친일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했을 것이다.
-1941년 발표한 〈국민문학론〉은 그 변화의 절정이다. 그는 조선 문학이 ‘대동아공영권’에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후 《조선의 열녀》, 《사랑》, 《이순신》 등을 통해 일본이 요구하는 충성, 효, 헌신의 이데올로기를 문학으로 치장했다. 그의 문장은 아름다웠지만, 그 문장 너머에는 일제의 전쟁을 옹호하고 조선인의 황국신민화를 독려하는 장치가 깃들어 있었다. 춘원은 자신이 ‘조선을 위한 선택’을 했다고 자위했으나, 그 방법마저 우리가 수긍할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은 식민통치의 이데올로기 전파에 기여한 셈이 되었다.
-그로서도 내면의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괴로움도 있었을 테다. 그런 상황 때문일까, 춘원은 1944년 봄, 아내와 자식들을 서울에 둔 채,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 사능리(오늘날의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 143-2)에 작은 농막을 짓고 은거하기 시작했다.
- 이곳에서 직접 밭을 일구며 자급자족을 모색했다. 그가 사릉으로 간 까닭은 그곳으로부터 십리 남짓 떨어진 곳에 있는 봉선사에 주지로 있던 운허 스님(속명 이학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운허 스님은 명망 높은 독립운동가였으며, 해방 뒤에는 고려대장경을 한글로 옮기는 초석을 놓은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춘원은 사릉에 살면서도 그해 6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으로 문학자 총궐기대회를 주최했고, 11월에는 난징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여하는 등 일제와 완전히 절연하지는 못했다. 그런 행동이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 확인할 길이 없으나, 여하튼 일제하의 교묘하고 끈질긴 요구를 뿌리치지 못했다.
-해방이 되고 춘원은 친일변절자, 반민족행위자로 낙인이 찍혀 갈 곳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내면적 고통이 작지 않았던 것 같다. 이때 운허 스님은 춘원을 봉선사에 머물게 했다. “봉선사 절 담 옆에 방 하나를 마련해 6촌 형 춘원 이광수를 머물게 했다. 형은 이곳에서 법화경을 탐독하며 《돌벼개》 등을 집필하였다.” 운허스님은 그 방 이름을 다경향실이라 정하고, 추사체로 ‘다경향(茶經香)’ 액자를 걸었다. 그 집은 일전에 헐리고 한옥을 새로 지어 조실스님채로 쓰이고 있다. 이런 내용은 돌벼개 서문에도 나온다. “〈산에서〉는 내가 봉선사에 들어가 있는 동안의 일기다. 나는 오랫동안 세상을 떠나서 수도생활을 할 작정으로 꽤 크고 비장한 결심을 가지고 봉선사로 간 것이었다.
-《돌벼개》에는 해방 후 춘원의 고뇌가 들어 있다. 다른 여러 작품들이 많이 있으나 그의 내면의 일단을 그린 것이 수필집인 《돌벼개》이다. 춘원은 “손님 앞에 내어놓으려 필요한 단장을 한 것은 아니요, 일상생활의 모습 그대로다”라고 했다. 혹자는 이 작품마저 가식이라고 비판하지만,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과거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 오히려 전적인 부정은 살아남기 위한 또 다른 가식일 수 있다.
《돌벼개》에서도 자신의 친일에 대한 변명류의 문장들이 등장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돌벼개》는 도시와 사회의 번잡함을 떠나 자연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은거자의 일기와도 같다. 춘원은 사릉과 봉선사를 오가며 농사, 나무하기, 손수 밥 짓기와 같은 일상을 글로 옮겼고, 그 안에서 인생, 도(道), 자아의 수양 등을 내밀하게 사유했다. 《돌벼개》는 문학사에서의 평가를 떠나, 춘원이 자신의 내면을 어느 정도라도 솔직하게 드러낸 작품집이 아닌가 한다.
“돌을 베고 눕노라니, 도시의 소음이 멀어지고, 마음이 맑아져 빗소리도 노래처럼 들린다.”(돌베개)
“백로는 나보다 더 깊은 고요 속에 잠겨 있다. 그 고요야말로 존재의 본질이 아닐까.”(〈백로〉)
“소가 웃는다더니 정말 그렇다. 굴레와 멍에 아래서도 그들은 자유롭다.”(〈우리소〉)
-그는 잊혀지고 싶었고 자유롭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왜 자신이 그런 길을 걸었는지 돌아보았을지도. “날은 저물고 길은 바쁘다. 나는 내가 이 세상에 나을 때에 가지고 온 심부름을 잊어버린 것 만 같다. 내가 무엇 하러 왔던고? 좋은 청춘의 세월을 다 허망하게 보내고 백발이 성성한 오늘에 와서 호주머니를 뒤져 본다는 것도 기막힌 일이다..
<한상동(韓尙東) 목사 1901~1976>
그는 1901년 7월 30일 경상남도 김해에서 태어났다. 한상동의 활동은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는데, 첫째는 일제하에서의 신사 참배 강요에 대한 저항과 반대 운동[1936년~1945년], 둘째는 8·15 광복 후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교회 쇄신 운동[1945년~1952년], 셋째는 초량교회·삼일교회를 중심으로 한 목회 활동[1946년~1972년], 넷째는 고려신학교를 설립과 신학교육 활동[1946년~1974년] 등이었다.
-일제는 소위 대동아 공영권 확보라는 이름 아래, 전시 체제로 돌입하고 한국인에게도 신사 참배를 요구하였는데, 한상동 목사는 이를 우상 숭배 강요라고 보아 반대하였다.
-1937년 10월 24일에 “현 정부는 정의 및 신의(神意)에 위반한 우상인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데, 참배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1940년 7월 3일 체포되어 경상남도 경찰부 유치장에 투옥되어 5년간 옥중에서 투쟁하였다.
-1945년 8월 17일 평양감옥에서 석방된 한상동은 이듬해 3월 월남하였고, 부산·경상남도 지역, 곧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친일 청산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 정화와 쇄신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위해 1946년 9월 20일에는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고 목회자를 양성하여 교회 개혁을 시도하였다. 한상동이 가장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인 것은 교회를 돌보는 목회 활동이었다. 즉 1928년부터 경상남도 고성군 하일면 학림리에서 개척 전도자로 일하기 시작하여 평양신학교[1933년~1937년]에서 수학한 후 부산 초량교회, 마산 문창교회에서 목사로 일하였다.
-8·15 광복 후에도 약 5년간 초량교회[1946년~1951년]에서 일하였고, 1951년 10월에는 삼일교회를 개척하여 1972년 은퇴할 때까지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1976년 1월 6일 부산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상동의 신학은 정통주의 신학이었다. 이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대안으로 인식되었다. 한상동은 경험적으로 정통 보수 신학을 신봉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신사 참배가 요구되었을 때에 자유주의 신학은 매우 순응적이었다. 즉 한상동은 자유주의 신학은 현실 타협적인 신학으로 보아 이를 배격한 것이다. 이 점은 고려신학교 설립 때 발표하였던 ‘고려신학교 설립 취지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
-한상동은 자유주의 신학은 불신앙의 신학으로, 정통 신학은 성경 진리의 신학으로 간주하였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옥중 경험을 기록한 『주님의 사랑』[1954]이 있고, 여러 편의 논설 혹은 설교가 남아 있다. 편집된 설교집으로는 『신앙 세계와 천국』[아성출판사, 1970], 유고집 『고난과 승리』[고려신학대학, 1980]이 있다.
<전영창 교장 1916 – 1976>
화장실 청소를 자원한 학생 (1938년)
전영창은 1916년 12월 26일 전북 무주군 적상면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성경을 암송하며 자랐다. 1936년 전주 신흥학교를 졸업하고 무주의 초등학교 촉탁 교사가 되었지만, 조선 역사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나는 일을 겪는다.
-이후 1938년, 신흥학교 시절 그를 눈여겨보았던 교장 린턴 선교사의 배려로 일본 고베의 중앙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가 신흥학교 재학 시절 화장실 청소를 자원해서 하던 모습이 교장의 눈에 띄었다는 일화는 지금도 전해진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가장 낮은 자리를 택하는 것. 훗날 그가 만든 '직업선택 십계명'의 원형은, 사실 이 화장실 청소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2.신사참배 거부(1941~1945년)
1941년 12월 2일, 일제는 그의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독립운동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체포된다.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감옥에 수감되었으나, 복역 1년 만에 고향 무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주거 제한 처분과 함께 집행유예 5년으로 풀려났다.
-신사참배는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첫 번째 계명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문제였다. 많은 사람이 현실과 타협하던 그 시절, 그는 감옥이라는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그 경계선을 넘지 않았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서울로 올라온 그는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미군 군목 브라운 소령의 통역관으로 일하게 된다. 훗날 그가 학생들에게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고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이미 가장 가기 싫은 곳—감옥—을 신앙 때문에 걸어본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3. 웨스트민스터에서 만난 개혁주의 신앙
-1947년, 그는 브라운 소령의 도움으로 한국 최초의 유학생 여권을 발급받아 미국으로 떠난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거쳐 웨스턴 신학교로 옮겨 수학한 그는, 이곳에서 단순한 신앙심을 넘어 세계관으로서의 기독교를 배운다.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1929년 존 그레샴 메이첸이 세운, 철저한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본산이었다.
-그가 특별히 마음에 새긴 것은 네덜란드(화란)의 개혁자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이었다고 전해진다. "교육의 개혁 없이는 교회도 세상도 바꿀 수 없다"는 카이퍼적 확신은, 훗날 그가 목회자의 길이 아니라 교육자의 길을 택하는 신학적 토대가 된다.
-이 시기 그의 룸메이트가 훗날 미국에서 크리스탈 교회로 유명해진 로버트 슐러 목사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두 사람의 인연은 20여 년 뒤 거창고등학교의 새 교사(校舍) 건립으로까지 이어진다.
-"조국이 위기에 처했는데 학위가 무슨 문제입니까" (1950~1951년)
1950년,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에 그는 6.25 전쟁 소식을 듣는다. 학장 뮬러 박사를 찾아가 즉시 귀국을 통보하는 그를, 학장은 2주만 기다리면 졸업시험을 치를 수 있다며 만류했다. 그는 조국의 위기 앞에서 학위를 받고 안 받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다고 답했다. 그의 뜻에 감동한 뮬러 학장은 결국 귀국 하루 전인 1951년 1월 8일, 졸업시험 없이 졸업장을 수여했다.
-1월 9일 미군 수송기 편으로 조국을 향해 떠난 그는 1월 15일 부산 수영비행장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날, 곧바로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를 조직하고 부산 영도의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피란민 구호 활동을 시작했다.
4. 복음병원의 숨은 설립자, 그리고 장기려 박사와의 인연 (1951~1953년)
-여기서부터는 어쩌면 전영창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 시작된다. 부둣가에서 병든 아이에게 젖을 먹이던 피란민 여인을 목격한 그는 병원 설립을 결심한다. 미국에서 모금해 온 5천 달러와 노르웨이 의료지원단의 도움으로, 1951년 1월 15일 작은 진료소를 세웠다. 이것이 오늘날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의 시작이었다.
-그해 6월, 그는 한상동 목사와 함께 제3육군병원에서 근무하던 한 의사를 찾아가 진료소 원장을 맡아달라고 청한다. 그 의사가 바로 장기려 박사였다. 전영창의 자본과 실행력, 장기려의 인술, 한상동의 신앙이 만나 '복음의원'—지금의 복음병원—이 탄생했다. 실제로 장기려 박사는 1976년 한 신문 회고록에서 "복음의원의 설립자는 전영창 선생"이라고 직접 밝힌 바 있다.
-전영창은 복음의원의 설립 목적을 네 가지로 제시했다.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고, 피란민과 극빈자를 무료로 치료하며, 정직한 진료로 신용을 얻고, 병 치료법을 가르치는 것. 전도와 구제와 의술과 교육—이 네 가지는 이후 그의 생애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된다.
-하지만 이 헌신은 뜻밖의 결말을 맞는다. 1953년 가을, 그는 교단 내 일부 지도자들과의 갈등 끝에 부정축재자라는 누명을 쓰고 복음병원에서 축출당했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3일간의 단식으로 항변했지만, 결국 힘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세운 병원에서 쫓겨나는 경험. 이것은 단순한 인사 갈등이 아니라, 그가 평생 붙들었던 정의와 진실이라는 가치가 시험대에 오른 순간이었다.
5. 다시 미국으로, 그리고 거창으로 (1953~1956년)
-복음병원을 떠난 그는 그해 가을 다시 도미하여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컨콜디아 신학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1955년 12월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 귀국하는 그의 가방에는 한남대학교 설립자 린턴 박사가 보낸 부학장 초빙장이 들어 있었다. 서울의 큰 교회 담임목사직 제안도 있었다.
-하지만 1956년 4월 12일, 그는 이 모든 안정된 자리를 뒤로하고 개교 3년 만에 빚더미에 앉아 폐교 직전에 놓인 거창고등학교(1953년 개교)의 제3대 교장으로 취임한다. 두 번이나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이미 한 번은 병원을 세우고도 억울하게 쫓겨나 본 사람이 다시 택한 곳은 이번에도 가장 낮고 가난한 자리였다.
6. 학교의 이름을 건 기도 (1958년 겨울)
-학교를 인수한 뒤 학생들은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였고, 매주 월요일 아침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일주일에 한번은 성경공부를 하고 그리고 학생들이 학교 농장에서 농사체험을 하였다. 재정난이 극에 달했던 1958년 겨울, 그는 산속 초막에 들어가 사흘간 금식하며 기도했다. "하나님, 이 학교가 무너진다면 조국의 아이들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리고 정확히 필요한 액수의 후원금이, 예고 없이 미국에서 송금되었다.
-이 사건을 단순히 '기적' 이야기로 넘어가기보다, 그 기도의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안위나 학교의 존속 자체를 구한 것이 아니라 "조국의 아이들"을 구했다. 기도의 중심이 자신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있었다는 것, 이것이 이 이야기의 진짜 핵심이다.
7. 학교 교훈, 그 자체가 성경 말씀
거창고등학교의 학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이는 잠언 1장 7절을 그대로 옮긴 것이며, 산상수훈의 '빛과 소금'이 교육 목표로 함께 자리 잡았다. 그는 학교를 인수할 때 이 구절을 교육의 출발점이자 최종 목적지로 삼았다.
8. 교육 안에서도 계속된 신앙의 실천
-거창고 교장 재임 20년 동안 그의 신념은 학교 운영 곳곳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교복과 두발을 자율화하고, 무감독 시험을 도입하고, 수준별 이동수업으로 학생 개개인의 존엄을 존중했다.
-1969년에는 3선 개헌 반대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의 처벌을 교육 당국이 요구하자 끝까지 거부하다가 거창 교육청은 그를 교장직에서 해임시켰다. 그는 교장 해임은 부당하다는 내용으로 행정 소송을 통해1971년 대법원에서 승소해 복직했지만, 그는 학생을 지키는 일 앞에서 자신의 자리를 걸었던 사람이었다.
9. 전영창 교장이 학생들에게 남긴 '직업선택 십계명'은 다음과 같다.
1)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장래성이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사회적 존경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라.
이 십계명은 지금 읽어도 세상의 상식과 완전히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이 근거 없는 역발상이 아니라, 마태복음 7장 13~14절의 말씀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전영창 교장은 이 말씀을 은유가 아니라 실제 삶의 좌표로 받아들였다. 대학의 부학장직과 대형 교회 담임목사직이라는 '넓은 문'을 실제로 두 번이나 거절하고, 심지어 자신이 세운 병원에서마저 쫓겨나 본 사람이었기에, 이 계명은 관념이 아니라 그의 생애 자체였다.
10. 무소유로 마감한 삶 (1976년)
-1971년 그는 학교 시설 확장을 위한 모금 차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고, 1973년 1월 로버트 슐러 목사의 후원으로 새 본관과 강당이 준공되었다. 옛 룸메이트와의 우정이 20여 년의 시간을 건너 학교의 벽돌 하나하나로 남은 셈이다.
-1976년 5월, 네덜란드 교회 연합회의 후원으로 직업훈련관을 건립하던 중, 그는 과로로 인한 담석증과 패혈증 합병증으로 대구동산병원에서 수술 치료를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59세였다. 그가 남긴 재산은 통장에 단돈 몇만 원이 전부였다.
"내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씀처럼, 그는 이 땅에서의 축적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남긴 것은 통장 잔고가 아니라, 지금까지도 거창고 강당 뒷벽에 걸려 졸업생들의 가슴에 새겨지는 열 가지 계명이었다.
-전영창 교장의 이야기를 유튜브에서는 '헌신적인 교육자로 전했지만, 그 헌신을 가능하게 한 뿌리는 명확히 신앙이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감옥에서도 지켰던 첫 계명,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다진 개혁주의 세계관, 자신이 세운 병원에서 쫓겨나고도 다시 가장 낮은 자리로 향했던 순종, 그리고 금식 기도를 지나 자기 삶으로 완성한 마태복음 7장의 좁은 문. 그는 성공의 언어가 아니라 성경의 언어로 삶을 설계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가 세운 복음병원에서 함께 일했던 장기려 박사 역시 무소유와 헌신의 삶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그러나 같은 믿음의 결과로 이 땅에 살았던 두 사람의 인연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될 만하다
<장기려 박사 1911-1995>
1911년 10월 5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운섭이며 어머니는 최영세(崔永世)의 딸이다.
-송도고등학교,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경성의전 외과 조수로 입문하고 나고야제국대학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이후 스승 백인제는 장기려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고 대전도립병원(현 충남대학교병원) 외과장 자리를 추천하였다. 당시 조선인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는 자리였고, 아마도 백인제는 자신이 퇴임한 후 경성의전 외과학 교실을 장기려가 이끌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이나, 장기려는 일본인들과 일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세브란스 외과 이용설의 추천으로 평양연합기독병원 외과장으로 부임한다.
-1948년 7월 7일, 북조선인민위원회로부터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동시에 최고과학기술평의회 성원으로 위촉되었다. 그 이후 평양의학대학, 김일성종합대학의 외과 교수를 지내던 중 6.25 전쟁 중 차남 장가용(張家鏞)과 단신으로 월남하여, 피란민들로 가득한 부산에서 복음병원을 세웠다.
-김일성을 수술해준 인연 덕에 장기려는 북에서 매우 우대받았는데 모범근로자로 선정되어서 포상도 자주 받았고 여러차례 상도 받았다. 장기려의 명성은 높았고 북에서의 지위도 높았다. 심지어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교회에도 가고 예배를 할 특권도 주어졌다. 게다가 그가 월남했을 때도, 북에서는 그가 월남한 것이 아니라 남측에 납치된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 덕분인지 이북에 남은 아내와 딸들과 아들들은 화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평양 철수로 월남한 직후에는 북에서 우대받은 일로 인해 자주 방첩부대에 끌려가서 문초를 당했는데, 다행히 한 미국인 선교사가 신분을 보증해줘서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때부터 외과의사로 살아왔고, 그의 아래에서 일한 제자들은 모두 다 외과 전문의이긴 하나 해방이후 국가가 주관하는 첫 외과전문의 시험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한외과학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부산에서 현 고신의료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세워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했다. 이외에도 청산리병원을 비롯한 부산에 설립한 의료시설이 많다. 부산 지역 대학병원 외과의 뿌리는 장기려로 시작되거나 직간접으로 연관되어있으며, 심지어 장기려 박사가 제2대 원장 겸 의과대학장으로 재직했던 부산대학교 병원에는 장기려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초량동에 정식으로 장기려 기념관이 세워졌다.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에 지병인 당뇨병에 의한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84세. 독실한 개신교인으로 매우 청빈한 삶을 살았으며, 향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사망할 때까지 본인의 개인 사택 없이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의 옥탑방에서 기거했으며, 향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1968년 청십자 의료보험을 창설, 많은 사람에게 골고루 나은 의료혜택을 입도록 한 것이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1977년 의무의료보험조합이 출현하기 이전에 유일하게 성공했던 임의 의료보험조합으로 전국적으로 의료보험조합 설립운동인 청십자운동을 일으키는 계기와, 의료보험조합의 필요성에 대해서 국민들에게 큰 인식의 전환을 마련시켰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전 국민 의료보험 도입에 영향을 미친 것에 대한 것에는 이견이 없다. 이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현행 의료보험의 기초가 되었으며, 의료보험 도입으로 인한 의료환경변화의 여파를 생각한다면 그가 한국 의료계에 끼친 영향은 독보적이라고 한다.
-반면, 의료보험연합회는 1997년 발간한 "의료보험의 발자취"에서 청십자의료보험에 대해서는 1968년 이후 시작된 임의가입의료보험조합 중에서 유일하게 성공했던 사례로 격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1977년 의무의료보험조합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공백기를 매웠다고 평가한다.
-그는 의료보험을 도입한 의료행정가이기 이전에 유능한 외과의사였는데, 이러한 공적으로 장기려는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1979년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부문)을 받았으며, 1995년 인도주의 실천 의사 상 등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상을 받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후 상을 거절하며 환자의 치료에만 몰두했다. 노년에는 당뇨병에 시달리면서도 백병원 명예원장으로서 집 한칸 없이 협소한 옥탑방에서 지내면서 마지막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박애와 봉사정신으로 인술을 펼쳐 한국의 성자로 칭송 받고 있다. 1943년 국내 최초 간암 환자의 간암 덩어리 약 70%를 간에서 떼어내는데 성공하여 한국 간암 수술의 개척자로 불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