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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1926-1932)[3권 합본 1938]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제7권, 1850년후 19세기, 20세기,788-1021
제3장 변형론, 진화론, 실증주의 - Transformisme, Evolutionisme et Positivisme 800
제1절 라마르크와 다윈 - Lamarck et Darwin
18세기와 19세기 초에, 자연적 계열(la série)의 관념이 사람들을 유혹했다. 이 자연계열은 살아있는 형태들[생명체들]을 배열해 볼 수 있게 한다. 여기서 계열이란 직관적으로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행을 파악하게 하는 방식이다.이 형태들의 연속성이란 용어는 종들에서 위에서 아래로 실재적으로 대대로 이어지는 혈통(la descendance)[가계 filiation]과 매우 다르며, 형태의 연속성이 결코 혈통으로 귀착하지 않는다. (800)
이것이 바로 라마르크(Jean-Baptiste de Lamarck, 본명 Jean-Baptiste-Pierre Antoine de Monet 1744-1829)가 1800년 개강 강연에서, 그리고 1809년의 그의 작품 동물철학(Philosophie zoologique 1809)에서 이런 귀결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것은 반대로 경험이 유기체의 조직화라는 자연적 전형들에 연관해서 확인되었던 별종들(les anomalies, 기형. 이형)이었다. 이 전형들의 각각은 결정된 방식으로 분배된 ‘정해진 기관들’의 수량을 함축한다. 예를 들어 척추동물의 전형은 대칭적인으로 위치한 두 눈, 이빨들의 수[정해진 수], 운동의 수단으로서 네발들이 그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수많은 경우들을 확인했다. 이 경우들에서 척추동물들의 기관들은 달리 분배되어 있거나, 또는 위축되어 있거나, 또는 전적으로 빠진 것도 있다. 이 별종들의 각각은 게다가 다른 방향에서 일어난다. “동물들의 유기체화는, 가장 불완전화 되었던 유기체화 이래로 그것을 증가하는 구성에서, 불규칙적인(규칙이지 않은)단계적 증가(une gradation irréguilière, 점증)를 제공한다. 이 증가가 확장됨에 따라서, 동물의 다양함에서 질서라는 어떤 모습도 갖지 않는 [유기체들의] 간격들이 넓어진다고 한다.” 라마르크는, 자연의 자발적이고 정상적인 진행처럼 [되어]있는 규칙적인 점증을 부정하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점증에서 매우 다른 다수의 상황들을 - 규칙성을 연속적으로 파괴하는 경향이 있는 많은 상황들을 - 추론하면서, 이 간격을 설명하기를 제안했다. 이 상황들은(les circonstances), 기후, 영양 등의 환경의 상황들이다. 이 상황들은 여러 가지 다른욕구들(les besoins, 필요들)을 일으키고, 그리고, 이번에는 이 욕구들이, 다음 차례로 거기에 만족하기 위해 지탱해야할 노력들(les efforts)이, 그 결과로서 기관들을 변형하게 하고 심지어는 욕구들의 만족이 그 변형을 필수적이게 할 때, 기관들을 이동하게 한다(déplacer). 예를 들어, 여기에서 평평한 물고기[가자미]의 눈들의 비대칭이 나온다. “이들의 삶의 습관은 이들에게 평평한 평면 위에서 헤엄치도록 강요한다.…이런 상황에서 아래보다 위에 더 많은 빛을 받으면서, 그들의 위에서 일어나는 것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게 할 특별한 욕구[필요]를 갖는다. 이 욕구는 그들의 눈의 하나를 이동을 감당하게 강요했고, 넙치(les soles)와 가자미(les turbots) 등의 눈들에서 알고 있는 매우 특이한 입장(la situation)을 취하게 강요한다.” 생트 뵈브(Charles-Augustin Sainte-Beuve, 1804-1869)가 관능(Volupté, 1835)에서 주목한 바에 따르면, 라마르크는 “세계를 최소한의 요소들, 최소한의 위기들, 가능한 가장 긴 지속들로 구축했다”고 한다. 변화들은 습관 덕분에, 즉 보존하는 힘 덕분에 고정되었다. 그 보존하는 힘이,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노력에 의해서 그려진 초벌 형태를 한정적인 특징들로 그려 놓았다. 사람들은 환경의 영향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를 안다. 그것의 영향은 항상 별종[기형]의 생산자이다.프랑스 철학자인 베르틀로(René Berthelot, 1872-1960)가 주목했던 대로, “환경의 작용은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대로 진화의 본질적 원인이기는커녕, 오히려 교란하는 요소이다.” (801)
챨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을 변형주의(le transformisme)로 나가게 했던 몇 몇 기형들(des anomlies, 별종들)에 대한 관찰이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1859)). 결국 그의 출발점은 인간에게 유용한 다양한 종들을 얻기 위해서 사육자들이 실행했던 선택이다.이 선택이 가능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 이유는 동물들에게는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많은 “우발적 변종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변종들의 원인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사육자는 이 변종들의 지배자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변종들 중의 몇 가지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고정시킨 것이다. 이것이 선택이론이며, 이 단어는 의지적이고 반성적인 절차를 지칭한다. (801)
그런데 다윈에 따르면, 사육자들의 절차는 자연이 종들을 생산하는 절차와 같다. 자연선택은 자발적으로 인위적 선택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우선, 사실상 가축으로 기르는 종들 안에서처럼 자연적 종들 안에도 적어도 의심할 바 없이 변종의 능력(une puissance de variation)이 있다.그러나 변종의 능력은 상당히 오랫동안 그 효과들을 축적한 것이다. 이 능력은 종들의 조상들과는 아주 다른 후손들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이 변종들은 전혀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으며 진실로 우발적이다. 따라서 이 변종들은 완전히 여러 갈래의 방향으로 일어난다. 결국 다윈은 맬더스(Malthus, 1766-1834)의 법칙을 수용하면서, 그는 이것을 모든 동물세계에 확장하였고, 그리고 [변화하는] 실질적 수단들은 동물의 개체 수 보다 훨씬 느리게 증가한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동물 세계에는 현존을 위한 투쟁이 일어난다. 맬더스는 이런 투쟁을 인간 세계에서도 매우 암울한 필치로 묘사했다. 이런 것이 제기되어서, 사람들은 어떻게 자연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는 지를 생각하게 된다. 우발적 변종들 중에서 생존 투쟁에서 어떤 것들은 불리한 것이고 다른 어떤 것들은 유리하고 이로운 것이 된다. 변종들은 유리한 동물들만이 잔존한다. 이러한 것이 최적자 생존의 원리이다. 이 원리는 새로운 적응 수단에 의하여 특성화된 새로운 종들의 끊임없는 형성을 마치 당연한 귀결처럼 갖는다. 이러한 것이 종의 진실한 기원이다. 여기에 인간 종도 예외가 아니라고 인간의 유래와 성의 선택(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 1871)에서 썼다. 인간에 고유한 특성들, 즉 지적 발전, 도덕적 능력들, 종교 등을 다윈이 마치 유용하고 그 자체적으로 보존되는 한 생물학적인 변종처럼 생각했다. (802)
소위 말하는 종들의 고정(fixité, 고착)이란 착각이라 여긴다. 그 착각이란 즉 종들이 변형에서 느리다고 여기거나 또는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 시대 동안에는 진화의 특징이 지체하고 있다 여기는데 기인한다. 게다가 이 느림은 평가하는 인간적 수단들에 상대적일 뿐이다. 코페르니쿠스(Copernic lat. Nicolaus Copernicus 1473-1543)의 체계가 세계의 장벽들을 허무는 것처럼, 변형주의(la transfomisme)[진화론]도 한 시대의 전망을 열었다. 이 학설의 역사적 지속, 전통적 사유에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시간은 [현재로서는] 단지 미세할 뿐이다. 게다가 그의 견해는 지질학과 고생물학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802)
다윈주의의 정신은 라마르크주의 정신과 아주 다르다. 다윈은 변종들을 설명할 수 없는 생경한 재료들로서 간주했고, 반면에 라마르크는 변종들을 내재적 필요의 연습(l’exercice)[노력]에 연관 있으며, 그 연습[노력]의 결과로서 습관에 의해 고착되었다고 생각했다. 다윈에게서 변종들은 어떤 방향(un sens quelconque)으로 일어나는 데 비해, 라마르크에게서는 변종들이 항상 최상의 적응의 방향(sens) 속에 있다고 한다. 따라서 다윈주의는 본질적으로 기계주의이며, 동물의 생명 속에 개입하는, 그리고 목적론을 완전히 배격하는 요행들(les hasards)의 결과물로만 본다. 이와 동일한 특징이 스펜서의 진화론(l'évolutionisme)에서 다시 발견될 것이다. (803)
정신적, 도덕적, 사회적 기능들에도 적용된 다윈주의에 의하면, 인간의 개념도 변형된다. 종의 발생과 기원의 문제들은 이전에는 구조의 문제로서 젖혀두었거나, 또는 다소 모호한 형이상학적 또는 종교적 문제 저 너머로 던져놓았는데, 이제는 적어도 원리상으로 실증적 해결이 가능한 문제들로 여긴다. 이런 기능들이 생겨나게 되었던 원인들은 우리 눈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게 되는 기능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 원인들이 오랜 세월동안 작용하여 왔고, 그리고 매우 복잡한 형태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원인의 결과들을 축적하면서 적용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한다. 더욱이 훨씬 더 중요한 변화도 있다. 기능들이 그 자체로서는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 같으나, 주어진 환경에서 기능들의 적응 역할에는 상대적으로 의미를 갖는다. 사람들은 정신 전체에도 생물학적 의미를 부여한다.다윈 자신도 인간과 동물에서 감동의 표현(The Expression of the Emotions in Man and Animals 1872)에서 변형론적 심리[영혼]학의 한 예를 든다. 감동을 동반하는 [신체의] 운동들 대부분에서 적응된 행위들의 미완성의 밑그림을 제시하려고 애썼다. 도덕적 감정에 대한 변형론적(진화론적) 설명에 관해서는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독일 철학자] 레(Paul Rée, 1849-1901)의 작품, 도덕 감정의 기원(Der Ursprung der moralischen Empfindungen 1877: L'Origine des sentiments moraux)과 양심의 발생(Die Entstehung des Gewissens 1885: La Genèse de la conscience morale)을 인용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은 니체(1844-1900)의 성찰의 출발점들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게 있어서 선택의 결과는 동물들로부터 물려받았던 이타주의 감정들을 약화시키는 것이고, 이기주의 감정들을 강화하는 것이다. (803) (45SMI) (57TLG)
제2절 허버트 스펜서와 진화론 Herbert Spencer et l'évolusionisme 803
허버트 스펜서의 진화론은 1860년에서 1890년 시기에 영국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학설들 중의 하나였다. 다윈의 변형주의[진화론]와 결합했던 스펜서의 진화론은 여러 측면에서 철학의 정신을 변화시켰다. (803)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는 우선 기술자의 직업을 준배했다. 그리고 1842년에서 1850년에는 정치학과 경제학의 주제들에 전념했다. 그는 통일령 반대파(Nonconformist)로서 초기 논문들 중의 하나, 즉 「정부의 고유한 영역에 관하여(On The Proper Sphere of Government, 1842)」에서는 개인주의를 표현했고, 국가의 개입에 적대적이었다. 이런 견해들은 그의 학설에서 영속적 특징으로 남게 되었다. 진화의 관념은 그 논문들에서도, 그리고 1852년에서 1857년까지 나온 심리학 원리들(The Principles of Psychology, 1855)에서도 밝힌다. 따라서 이 작품은 다윈(1809-1882)이 1859년에 출판 했던 종의 기원(L'Origine des espèces, 1859)보다 앞섰다. 그러나 1860년에 그는 종합적 철학 체계의 프로그램의 도식을 만들기로 했고, 그는 그것을 자기의 생각도 초기의 도식도 변경함이 없이 문자 그대로 끝까지 실행해 나갔다. 차례로 제1원리들(First Principles 1862), 생물학 원리들(Principles of Biology, 1864-1867), 심리학 원리들(The Principles of Psychology, 1870-1872)(2권), 사회학 원리들(The Priciples of Sociology, 1876-1896), 윤리학의 원리들(Principles of Ethics 1879-1892)로 썼을 뿐만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논문들도 썼는데 그중에 「학들의 분류(Classification des Sciences 1864)」, 「교육(Education 1861)」 등을 썼다. 그리고 그가 죽고 나서 바로 출판된 자서전(Autobiography, 1904)은 그의 작품에 대한 도덕적 상황을 제시한 것이다. 말하자면 거기에는 일단 발견된 원리 같은 것에 관해서는 절대적인 보장이 있다. 이 원리들을, 그는 이를 대비시키지도 또는 이를 비교해보지도 않고서 타협 없는 독단론과 함께 유지한다. 그는 말하길, 자기 자신의 관점과 낯선 관점들로부터 출발하는 책을 읽는 것은 그로서는 항상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거기에는 삶에 기여될 수 있는 세부적인 개선을 하는데 있어서 끊임없이 각성되게 하는 비판적 호기심도 있다. 마지막으로 거기에는 단호한 반통일령주의가 있다. 그는 본능적으로 모든 권위 또는 판에 박힌 관습, 즉 장례의 예식들, 궁정(법정)의 과시들, 대학 학위들 등을 의심하였다. (804)
스펜서에 있어서 하나의 형이상학이 있는데, 그 형이상학의 기원과 영감에 의하면, 그의 형이상학은 그의 진화론과 별개의 것이다. 그것은 불가지론의 이론이다. 여기에서 그는 해밀턴(William Hamilton, 1788–1856)과 맨셀(Henry Longueville Mansel, 1820–1871)에 의해 알려진 논증들을 자신의 생각으로 다시 받아들인다. 해밀턴처럼 그는 이 학설에서 종교와 과학을 조화시킬 수 있는 수단을 보았다. 그러나 해밀턴과 반대로 그는 불가지론의 개념은 순수하게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만일 그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모든 긍적적 특성들을 잘라내었다고 하더라도, 남는 것은 공통근거인 온존재(l'Etre)이다. 이 온존재는 “무한정한 의식”의 대상이다. 그것이 바로 “불가지론”(l'Inconnaissable)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그자체로 아주 분명한 두 측면으로 표현되었다. 한편으로 한계들을 표시하는 한 생각은 과학에게 종교에 비추어서 완전한 독립을 부여한다. 진화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실재성은 과학의 영역에 속한다. 불가지론의 학설에 의해 마지막으로(une foi pour toutes, 딱한번) 만족되었던 종교는 종교자체의 영역이 아닌 영역에서 보아야 할 것이 실재성이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그리고 그 영역은 사회와 도덕을 포함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불가지론은 사물들의 바탕(le fond)을, 즉 온힘(la Force)을 지칭한다. 진화에 복종된 온힘의 실재성은 하나의 현현(une manifestation)이다. 이 불가지론의 측면에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Kant)의 누멘(le nounène)과 같은 어떤 점이 있다. 스펜서는 실재론자이다. 그는 우리의 감각적 인식은 불가지적은 것의 기호(symbole)이라고 믿었다. 물질은, 버클리 전통에 반대고 밀(Mill)에 의해 지지받았던, 의식의 사실들에 환원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제 곧 보게 될 것이지만, 불가지론의 이 둘째 측면은 그의 진화론의 필연성으로부터 온다. 그의 진화론은 영속적 힘의 관념 없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진화론자는 역사가도 아니고 생물학자도 아니다. [역사의] 발전과 [진화의] 증가의 직접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학문들에 대해 그는 약한 부분이 있다. 사람들이 라이프니쯔(Leibniz)로부터 헤겔(Hegel)에 이르는 독일에서 특별히 발견하는 이 발전 또는 진화의 개념들은 생명의 내적 직관과 뗄 수 없는 것이다. 생명의 유기화된 존재들이, 즉 역사와, 더 깊이 말하면 종교가 그 예시들이다. 스펜서는 형이상학자, 오히려 균형의 조건들에 관해서 성찰하는데 익숙한 기술자이다. 그는 성운들의 발전에서 역학의 법칙만을 개입하게 하는 라플라스(Laplace)의 우주발생론(la cosmogonie)과 같은 우주발생론들에 후원을 구하였고, 또한 무기물의 유기화에 환경이 작용하도록 하는 변형론에 후원을 구했다. 이리하여 그는 보편적 진화론의 정식을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그 진화론에서 기계적 법칙들에 의해 지배되는 물질적 이전들만이 개입한다. 이 진화론은 “물질의 모임(une intégration 집결)과 운동을 동반하는 흩어짐(une dissipation), 이 집결 동안에는 물질이 그 운동을 무한정하고 비정합적인 동질성으로부터 한정되고 정합적인 운동으로 이행하며, 이 흩어짐 동안에는 유보된 운동은 평행하는 변형을 감당한다.” 그러한 동질적인 성운(la nébleuse)은 열의 분산에 의하여, 전적으로 이질성을 가지고 태양계를 생산한다. 스펜서의 의도에서 목적성이 힘의 보존의 결과를 단순하게 표현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한다면, 정합(cohérent)이란 단어는 이러한 정식에서 사라지게 될 목적성의 흔적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을 것 같다. 또한 이 힘의 보존이란 유일한 원리로 제시된 것이다. 게다가 이 결과는 분해라는 반대결과에 의해 또는 이질성에서 동질성으로 이행에 의해 보상될 수 있다. 기계적인 관점에서 이것은 동일한 자연의 두 개의 사실들이다. 마치 교대하는 시기들 마다 뒤바뀌는 기계처럼, 그 둘 중에서 때로는 하나 때로는 다른 하나가 지배적이다. 온힘의 보존의 법칙으로부터 진화의 원리의 연역은 부정확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만일 사람들이 이것을 인정한다면, 그 정식의 보편성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정확히 반대 문제가, 즉 진화론 보다 앞선 모든 이론들이 제시했던 문제들의 반대문제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을 것이다. 앞선 이론들에서, 동력인 것(le dynamique) 또는 생명적인 것(le vital)은 제1 실재성이고, 기계적인 것(le mecanique)은 설명해야할 항목이다.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 플라톤까지, 라이프니츠로부터 헤겔까지 문제가 제기되었고, 그 문제는 두 번째 부류의 실재성을 기계적인 것에 일치시키면서, 또는 심지어 둘째의 부류를 착각으로 만들면서, 해결되었다.
여기서 반대로, 하나의 정식 속에 다시 들어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정식에서 기계적인 작용들(des actions)만이, 즉 생물학적이고 심리학적이고 도덕적이며 사회적인 진화가 나타난다. 그러한 환원은 비유들의 수단으로 그리고 인위적인 동화의 수단으로 가능할 뿐이다. 이리하여 심리학에서는 고유한 의미에서 물질과 운동이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으며, 삶들은 흄(Hume)의 방식에 따라, 의식을 원초적인 요소들의 모자이크로 환원함으로서 출발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분석을 통해서 감각들의 저너머로 갈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감각들이 요소적인 충돌들(chocs)로 분해될 것이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 충돌들 각각은 진동들의 각각에 해당하며, 물리학은 감각적 성질들을 이 진동들로서 분해할 것이다. [진동(파장)에 의해 색깔을 구별할 수 있다고 하듯이] 이리하여 우리는 진실한 정신적 물질을 갖게 된다. 그 물질[진동]의 “집적”(集積 l'intégration 집결)은 충돌들의 조합이 되고, 감각은 이 조합들의 조합들이다. 이렇게 하여 사람들은 점 점 더 많이 집적되고 점 점 더 이질적인 복합체[유기체]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을 정신의 다양한 활동(l'opération)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다양한 활동이란, 감각들, 이미지들, 개념들, 판단들 추론들이다. 이 조합들을 통일하는 관념연합의 법칙은 의식의 사실들 속에서 진화의 보편적 법칙이 취하는 측면이다. 마찬가지로, 사회학에서 아주 잘 알려진 사회적 사실들은, 즉 보다 완전한 노동분업이 동반되는 도시들에서 인구 밀도의 증가와 같은 사실은,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을 물질에 동화시키는 조건에서, 수반되는 이질성과 더불어 물질의 집적으로 인정될 수 있다.
더욱이 스펜서의 정식(la formule)은 아마도 수수하게 기계적이라기보다 처음에 그에게 나타난 것이 더 기계적이었다. 만일 첫 부분(물질의 모임과 운동을 수반하는 흩어짐)은 물질에 더 잘 설명될 수 있고, 둘째 부분(동질적인 것에서 이질적인 것으로 이행)은 보다 더 자연적으로 상위적이고 생물학적, 도덕적, 사회적 사실들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노동분업도 상위적 사회적 사실을 의미한다. 스펜서는 아마도 헛되이 두 부분들을 통합하려 애썼다.
다윈의 변형론의 본질적 개념, 즉 종의 진화를 계도하는(commander) 최적자 생존의 개념은 전적으로 스펜서의 의해 채택되었으며, 스펜서는 그것으로부터 생물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심리학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귀결들을 끌어냈다.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우월성[탁월함]이란 동물이 자신의 환경에 반작용함에 있어서 점점 더 완전하게 정확함과 적합함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든 도덕적 방황들을 젖혀둔다고 하더라도 선(le bien)이란 환경의 조건들에 맞게 조절하는데 있다. 이런 정의(定義)는 그자체로 이해되고, 또한 공리주의자들의 정의를 설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쾌락은 유기체와 환경 사이에서 균형을 동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의 법칙들 자체는 자발적으로 존재를 그의 선(善)으로 향하게 이끌어 간다. 사람들이 목표에 도달하게 될 절대적 도덕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절대적 도덕에서 완전하게 진화된 인간은 선과 악 사이에 선택해야할 필요가 더 이상 없다. 이 절대적 선에 해당하는 것은 완전한 사회적 상태이다. 그 진화의 끝에 도달한 동물사회들에는, 마치 개미들의 사회에는 완전한 사회적 상태의 관념을 부여할 수 있다. 이 순간에, 주저하고 있는 의식자체는, 반작용이 점점 스스로를 고정시키게 되면서, 사라질 것이다.
스펜서의 자연주의는 다윈에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그 자연주의가 진화론에 알맞은 스펜서의 주제와 조화될 있을까? 환경의 관념은 진화론이 우리에게 그려놓은 존의 내적 발전에 완전히 낯선 것이다. 그래도 역시 증명되는 것은, 이질성으로 된 진보란 존재를 존재의 공간에 더 잘 적응시키는 변주(la variation)라는 것이다. 증가하는 복잡성이라는 것은 아마도 존재를 더욱 연약하고 취약하게 할 수 있으며, 무한정하게 새로운 불균형을 생겨나게 한다.
스펜서의 근본적 특징인 그의 개인주의는 거꾸로 다윈주의와 진화론에서 동등한 만족을 발견했다. 그는 자연을 신앙으로 믿는 첫째 사람이었다. 이 신앙은, 최적자 생존의 법칙과 결과에 족쇄를 씌우기 위한 모든 인간적인 개입을 단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비를 배푼다는 것도, 자기 행위에서 얻어지는 자연적 귀결들에서 개인을 벗어나게 하는 어떤 종류의 개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 진화의 법칙이 그에게 가르쳐 준 것은, 사회에서 기능들은 분명하게 구별된 기능들에 의해 점 점 더 전문화되어 시행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의 기능은 침략들을 예방하는 것이다. 거기에 만족하지 않는 것은 정부의 본성에 반대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스펜서의 학설이 어떤 이질적이고 아주 잘못 연결된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 지를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설로부터 아주 힘찬 매력이 분간되어 나온다. 즉 우주의 리듬의 탐구가 우주 실체의 탐구를 대체한다는 것, 특히 이 리듬으로부터 역학의 일상적 법칙들에 의해 과학적 설명이 주어진다는 희망, 이런 것이 그의 관념이다. 그를 따랐던 다음 세대 동안에 이 관념으로 사람들은 즐거워했다.
제3절 영국에서 실증주의자들과 진화론자들 Positiviste et évolutioniste en Angleterre 808
1850년에서 거의 1880년까지 결과적으로 소위 말하는 실증정신이 표명되었다. 철학에서, 르위스(George Henry Lewes 1817-1878)가 말한 대로, 모든 “초월경험적”(métempirique) 요소들 쓸어내고 있었다. 이것은 사회 실천의 관심에서 18세기와 19세기 초의 경우처럼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정확한 인식을 통하여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서 였다. 영국에서 르위스는 꽁뜨의 실증철학(Comte's Philosophy of the positive sciences, 1853)을 써서 실증주의 철학을 소개 했다. 또 문헌적 철학사(The Biographical History of Philosophy 1846)를 써서 꽁뜨 자신의 동의를 받았고, 그리고 그는 생명과 마음의 문제들(The Problems of Life and Mind)(3권 1875-1879)을 써서 이런 정신을 잘 표현하였다. 그가 실증적 해결을 시도했던 철학적 문제들 중의 하나는 의식과 유기체 사이에서 관계의 문제였다. 그의 해결은 물리적 과정과 정신적 과정 속에서 동일한 실재성의 두 측면을 보는데 있었다.
영국 생물학자인 헉슬리(Thomas Huxley, 1825-1895)는 자연 속에서 인간의 지위(Man's Place in Nature 1863), 시론 선집(Collected Essays 1894), 생애와 편지(Life and Letters, 1900)(그의 아들이 출판) 등의 작품을 내면서, 어떤 형이상학적 가설과 연관하여 과학적 인식의 독립을 매우 정확하게 표현하여 알렸다. 그는 이렇게 썼다. “사변적 철학에 대한 나의 근본적 공리는, 유물론과 유심론이 돌다 동일한 부조리(l'absurdité)에 대립되는 두 개의 축이다. 이 두 축은 그 어떤 정신의 것이든 또는 그 어떤 물질의 것이든 우리에게 인식하게 한다고 상상하는 부조리이다.” 심지어 과학은 인과성과 같은 원리의 보편성을 전혀 강요하지 못한다. 신앙의 작위(l'acte)는 과거를 우리 미래의 예견으로 간주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간다. 그런 신앙의 작위가 그 열매들[결과물들]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이 검증의 영역을 넘어서 가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도덕성이란 어떤 보편적 신앙에도 더 이상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자연적 질서를 믿는 생생한 신앙에는 의존한다. 자연적 질서는 불멸성에 이르는 귀결로서 사회적 붕괴를 부여한다.
다른 학자들에게서 실증주의는 과학들에게 지지들 받기보다 오히려 순수하게 직접적인 경험에 지지를 받는다. 강독과 시론들(Lectures and Essays 1879)이란 책을 낸, 영국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클리포드(William Kingdon Clifford, 1845–1879)의 경우에 그러하다. 심성적 물질(la matiere metale, an. mind-stuff)에 대한 그의 이론은 특징적이다. 이 물질의 조각들은 서로 통일되는 것을 허용되어 있고, 그러면 우리는 의식과 정신을 갖는다. 여러 정신들은 자신들이 재통합하는 심성적 물질의 공통부분에 의해 부분적으로 일치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타인의 의식의 부분적 인식을 갖는다. 클리포드는 이런 의식에게 “에젝트”(eject)란 이름을 부여했다. 결국 여러 의식들에 모여지지 않았던 심리적 물질은 계속해서 그 자체로 남는다. 그리고 이 연속성의 감정은 “우주적 감응”(une émotion cosmique)인데, 이것은 종교적 감정의 기초이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클리포드는 “사회적 의식”의 현존(l'existence)을 연역했다. 그 사회적 의식이란 “부족(部族)적 자아”(un moi tribal)이기도 하며, 즉 각 인간을 지배하는 일종의 인류의 공통적 삶이기도 하다. “역사의 여명기에서부터 또 각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우리의 아버지의 모습을 한 온인간(l'Homme)은 영원한 젊음의 불꽃으로 우리를 쳐다본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여호와에 [시간적으로] 앞서서 나는 존재한다” 르낭(Renan, 1823-1892)의 실증주의 사상과 닮은 이러한 사상들은 실증과학들의 실증과 전혀 같지 않다. [인문의 실증(자료 les donnees)과 자연과 실증(les donnees)는 다른 영역의 자료들이다. 이들의 차이는 차히를 지닌다. 전자는 인간과 관계 속에서 후자에는 대상으로서 인간과 관계 없이도 자료이며 재료이다.(45TKF)]
동일한 뉘앙스를 우리는 영국의 역사가이며 철학자인 리드(William Winwood Reade, 1838-1875)의 작품, 인간의 순교(Martyrdom of Man, 1872)에서 보게 된다. “만일 우리가 생명을 하나의 원자로부터 고려한다면, 모든 것은 잔인성과 혼동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류성을 하나의 인격으로 고려할 때, 우리를 인류성을 점점 더 고상하고 점점 더 신적인 것이 되는 것을 본다.”
이리하여 스펜서의 진화론은 꽁뜨(Comte 1798-1857)의 인도주의(l'humanitarisme)에 의해 변형되게 된다. 동시에 그 진화론은 쾌락주의적 공리주의와 내밀한 연결을 상실한다. 이리하여 영국의 작가이며 비평가인 스티븐(Leslie Stephen, 1832–1904)은 윤리라는 과학들(Sciences of Ethics 1882)을 쓰면서, 진화가 사회체를 실현시켰듯이, 사회적 신체[사회체] 속에서 개인으로부터 도덕성의 척도를 보았다. 건강, 힘, 사회체의 생기력(vitalité) 등과 같은 것이 진실한 목저이지 행복이 아니라 한다. 쾌락의 계산은 순간적인 인상에 의존하지만, 필연적으로 목적과 일치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진화의 용어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순수하게 기계적 특징을, 즉 스펜서가 자졌던 기계적 특징을 급속히 상실한다. 예를 들어, 다윈주의(Darwinism 1879)와 인간의 운명(The Destiny of Man 1884)을 쓴 미국 철학자이며 역사가인 피스크(John Fiske, 1842–1901)에서, 사람들은 진화란 내재적 목적론을 감추고 있다는 생각을 보이게 된다. 왜냐하면, 진화란 지성과 의식을 발전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하여 세계의 영혼이라는 내재적 신을 인식한다.
미국 물리학자이며 지질학자인 르콘트(Joseph LeConte 1823–1901)는 진화: 진화의 역사, 진화의 명증, 진화와 종교사상과의 관계(Evolution: its History, its Evidences, and its Relation to Religious Thought, 1888)을 썼는데, 그는 또한 자연 속에서 신의 생명을 보았다. 그리고 인간 정신 속에서 작은 양의 신적에너지를 보았다.
캐나다 출신으로 영국 진화생물학자, 생리학자, 비교 심리학자인 로맨스(George John Romanes 1848–1894)는 유신론의 솔직한 검토(A Candid examination of theism 1878)쓰면서, 한 사상가의 특징적 표본을 제시했다. 그 사상가는 적응이라는 다윈개념으로부터 지적 목적성의 개념에 이르렀는데, 그 목적성은 생명을 보존하는 상황들의 결탁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약간 이 다음의 시기에, 영국 사회학자인 키드(Benjamin Kidd, 1858–1916)에게서는 진화론이 개인주의와 분리되어 있다. 사회 진화(Social Evolution, 1894)을 쓴 키드는, 마치 옛 공리주의자들처럼, 지적능력은 계산하는 능력이며 여전히 개인의 이익들에 봉사한다고 인정하였다. 다른 한편 다윈주의는 진보가 자연선택에 의해서만 가능한다는 것을 그에게 가르쳐준다. 이 자연선택은 종의 이익에서 작동되고 또 종종 개인의 이익을 희생시킨다. 결론적으로, 이 진보는 권능 있는 비합리적 요소의 개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 요소는 이성에 맞는 이익의 계산을 궁지에 몰리게 한다. 이요소를 대리하는 것은 종교이다. 종교가 설파하는 이타주의는 생존투쟁의 결과들에 방해하는 것이기는 커녕, 그것들을 유리하게 한다. 왜냐하면, 분류들의 한계를 파괴하는 경향이 있는 생명은 이 생존 투쟁에서 모든 인간들에게 평등하게 놓기 때문이다. (45TKH)
제4절 리트레와 실증주의 Littre et le prositivisme 810
“개방된 질문들을 결코 남겨 두지 않는 것은 오귀스트 꽁뜨가 경멸한 것들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존 스튜어트 밀(J.S. Mill)이 단순주의에 관해서 썼다. 그 단순주의로 꽁뜨(A. Comte)는 과거에 신학적 문제를 거부했다. 실증주의는 사전편찬자로 잘 알려진 에밀 리트떼(Emile Littré 1801-1881)에서 발전되는 데, 결국 이 실증주의는 꽁뜨의 부정들을 결정적인 획득으로 간주한다. 리트레는 보수, 혁명, 실증주의(Conservation, révolution et positivisme, 1852)에서 “자연 법칙들의 불변성(l'immutabilité)은 초자연적 개입들을 도입했던 신학과 반대이다. 제한된 사색적 세계는 무한과 절대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에 반대이다. 그러한 것이 실증철학이 근거하는 이중 토대이다.”라고 썼다. 신문 국가(Le National 1844: 1849-1851)의 기사들을 통해서 리트레는 하나의 학설을 확산시키려 많이 노력했다. 그는 실증과학 속에서 사회적이고 지적인 안정성을 지닌 담보물을 발견했다고 특히 생각했다. 거기서 보수주의는 진보의 정신에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그는 사회적 개혁이 지적 개혁에 앞서게 하는 것이 필연적이라고 선언했다. 참조: 철학의 관점에서 과학(La Science au point de vue philosophique, 1873), 철학의 조각글들과 현대 사회학 (Fragments de philosophie et de sociologie contemporaine, 1876). 그리고 또 리트레는 자신의 실증적 신앙을 세 가지 상태들의 법칙에 기대고 있다. 실증적 상태에서 인식하는 주체는 논리적이고 형식적인 주체적 조건들에 환원된다. 모든 내용은 대상의 측면으로부터 온다고 한다. 참조: 오귀스트 꽁뜨와 실증철학 (Auguste Comte et la philosophie positive, 1863)(1877년 3판, 656쪽). 리트레는 꽁뜨의 과학들의 목록표 속에서 단지 빈칸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 정치경제학, 인식의 조건들(비판학)을 연구하는 한에서 철학적 심리학, 그리고 도덕학, 미학, 심리학을 다시 세웠다(같은 책 659쪽).
반대로 리트레는, 꽁트가 자기 생애의 마지막에 세웠던 것과 같은 인류종교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런데 꽁트의 종교는 삐에르 라피뜨(Pierre Laffitte, 1823-1903)에게서 완전한 찬동을 발견할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이며 실증주의자인 라피뜨는 인류의 위대한 전형들(Les grands types de l'Humanité 1875), 제1철학 강의(Cours de philosophie première, 1889)를 썼는데, 그는 꼴레쥬 드 프랑스에서 그의 강의를 통해서 이 학설을 전파했다. 이 단어의 엄밀한 의미에서 실증주의 학파는 계속해서 인류교를 제단을 유지하였다. 그 제단은 몇몇 외국에서 그리고 특히 브라질에서 분파들을 심었다.
그 다음 시기에, 실증정신은 생물학자이며 철학자인 펠릭스 르당텍(Félix Le Dantec, 1869-1917)에서 라마르크 진화론과 결합되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결정론의 신앙은 미래의 굳건한 예를 함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식 가능한 것의 한계들(Les limites du connaissable, 1903)(184쪽)에서 “사물들은 결정되어 있다. 그것은 분명하다. 자연법칙들에 예외는 없다. 우리들 모두는 이 법칙들에 종속된 꼭두각시들이다. 그러나 끈들이 너무 많아서 어떤 사람도 이들 끈들을 한번에 유지할 수 없다. 그러한 이유로 아무도 미래를 예견할 수 없다.”라고 썼다. 따라서 그의 실증주의는 특히 비판적이다. 그는 인간 종의 도덕적 지적 습관들 속에 유전적으로 전승되고 획득된 형질들 만을 보았다. 심지어 그에게 있어서 자연법칙들에 대한 신앙도 완전히 인간적 신앙이다. 그리고 실재성을 우리를 총체적으로 회피한다고 한다. 그의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생명의 새로운 이론(Théorie nouvelle de la vie, 1896), 무신론(L'athéisme, 1907), 이기주의, 오직 모든 사회의 기초(L'Egoïsme, seule base de toute société (1911), 형이상학에 반대하여(Contre la métaphysique, 1912) 등을 열거할 수 있다.
실증주의적 정신의 주목할 만한 발전은 프랑스 사회학자 오귀스트 꽁뜨(A. Comte), 독일 생물학자이며 철학자 헤켈(Ernst Heinrich Haeckel, 1834–1919), 영국의 철학자 스펜서의 결합의 영향으로 1850년부터 1890년에 이탈리아에서도 생겨난다. 여기서 특히 이탈이라 심리학자이며 철학자인 아르디고(Robert Ardigo, it. Roberto Ardigò 1828–1920)를 인용할 필요가 있다. 그는 1869년부터 1917년까지 11권의 철학적 저술을 내면서, 칸트(Kant), 꽁뜨, 스펜서에 관한 많은 연구를 했다. 특히 그의 열하나째 책은 긴 제목을 갖고 있다. 사변적 삶의 관념론과 실증적 철학의 실재론: 실증주의 영속성(L'idealismo della vecchia speculazione e il realismo della filosofia positiva: La perennita del positivsmo, 1917?).
이탈리아 실증주의는, 아르디고 자신에서와 마찬가지로 보다 특별하게 이탈리아 정치학자이며 범죄학자인 엔리코 페리(Enrico Ferri, 1856-1929)와 이탈리아 인류학자이며 범죄학자인 세자레 롬브로소(Cesare Lombroso, 1835-1909)에서도, 법률적인 문제에, 그리고 특히 형법에 적용되었다. 롬브로소가 주목하듯이, 만일 경범죄들이 비정상적 물리적 조건들에 의해서 규정되었다면, 책임과 형벌의 개념화 작업은 변경되어야 할 것이라 한다. 참조: 범죄 인간(L'homme criminel(tr.fr 1887) (45TLA)
제5절 르낭 Renan 812
“의지의 변덕스러운 운동성(mobilité) 즉 권능, 그리고 지성의 완고성” 그러한 것이 프랑스 문학비평가인 라세르(Pierre Lasserre, 1867-1930)에게서는 두 개의 특징이었다. 이 특징들은 부르타뉴 지방의 위대한 사상가들, 즉 아벨라르(Abélard, 1079-1142), 라메네(Lamennais, 1782-1854), 샤또브리앙(Chateaubriand),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르네스트 르낭(Ernest Renan, 1823-1892)에게까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이 위대한 사상가들은 13세기 또는 17세기처럼 정념이 조직화된 세기들 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12세기 또는 19세기처럼 진동하는 시기에 그들의 자연적인 자리를 발견했다. “그 시기에, 새로운 지식들의 세계와 인류의 새로운 배열들이 밀려와서, 옛 이념들과 제도들에게 타격을 입힌 진동이 똑같은 이념들과 제도들에서 연민(pitié)의 운동과 짝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 위대한 브르타뉴 지방의 사상가들 몇 몇에서 고정되고 최종적인 학설을 찾아봐야 헛된 짓이다. 이들 모두는 정신적으로 가치 있는 것의 세련된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정신을 물질적 이익들에 얽매이게 하는 것을 경멸했다. 또한 이들 모두는 정신의 침전물과 기관처럼 되기 위해서 아주 순수하게 실증적 실재성을 탐문하였다. 이것은 절망에 또는 아이러니컬한 환멸에 이를 수 있는 이 불안한 탐구였다. 르낭은 교육을 통하여 우선 카톨릭 신앙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역사적 비판이 그가 보기에 전통을 무로 만든다는 것을 제시하게 되자마자, 그는 자신을 그 신앙으로부터 분리시켰다. 1848년 말에, 그는 화학자 베르틀로(Marcellin Berthelot, 1827-1907)와 친구가 되었고, 그 덕분에 그는 과학의 미래(L'avenir de la science, 1890)를 1890년에 출간했다. 여기서, 과학은 그에게 있어서는 종교가 되었던 그 과학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과학만이 인류에게 학문을 부여할 것인데, 그 학문 없이는 인류는 살 수 없을 것이다. 즉 그것은 상징(un symbole, 기호)과 법칙(une loi)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리고 왜? 르낭은 무엇보다 역사적 과학과 문헌학의 과학을 생각했다. 그는 그 시기에 막 읽었던 헤겔(Hegel)과 헤르더(Herder 1744-1803)에 매우 가깝다. [르낭에 있어서] 문헌학은 정신적 사물의 과학이다. 이 문헌학은 인류의 발전 속에서 있었던 것을 인류에게 알게 한다. 이 문헌학 덕분에 그를 인도했던 무의식적 자발성이 의식적이 된다. 과학자들, 즉 철학자들은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최상을 표명하는 지적 엘리트이다. 왜냐하면 크리스트교는 매우 탁월한 정신적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 크리스트교의 기원들에 대한 탐구는 처음으로 그 역사가(르낭)에게 부과된 임무였다.
이것은 역설적이고 또 거의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종의 순환에 의해서 르낭은 종교로 귀착했다. 종교가 신의 기적적 개입을 인정하자마자, 종교 그 자체는 그에게 있어서 허황된(illusoire, 착각의)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기적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종교의 역사는 18세기에서처럼 착각의 역사이고 사기의 역사가 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특히 크리스트의 종교는 인간을 상스럼(vulgarité)을 벗어나게 한다. 이 경우 그것의 절대적 진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 생애의 말년에 쓴 책, 철학적 의식의 검토(Examen de conscience philosophique, 1889)에서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신과 영혼이 현존하고 있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 종교는 마치 에테르, 전류, 광선, 칼로리 흐름 또는 신경 흐름 심지어는 원자들처럼 수많은 가설들에 속한다. 우리는 이것들을 기호(symboles)처럼, 사실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편의 수단들로서 간주하고, 또 그것을 보존한다.
그러므로 르낭에게는 실증과학의 방법에 굴복하는 지적 의식과 의식의 낭만적 열망들 사이에 충돌같은 것이 있다. 그는 철학적 대화와 단편들(Dialogues et fragments philosophiques, 1876)에서는 직접적으로 실험실이나 도서관으로부터 진행되지 않는 진리란 없다고 썼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자연과 역사를 통해서 안다. 단지 역사는 헤겔 방식에 따라서 인류 속에 일종의 정신 계시로서 생각되었다. 따라서 역사 속에는 실증주의와 정신성이 통합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낭은 헤겔주의자의 흔적이나 청년헤겔주의자의 흔적들을 전혀 따라가지 않았다. 독일의 신학자 스트라우스(David Strauss, 1808-1874)는 예수의 삶을 초기크리스트교 공동체들 속에서 자발적으로 발명된 신화라고 생각했다. [참조: 스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Das Leben Jesu, 1935)] 이에 비해 르낭은 처음에는 스트라우스를 따르는 듯했으나, 나중에는 그와는 단호히 멀어졌다. 그의 예수의 생애(Vie de Jésus 1863)는 예수를, 즉 “비할 나위 없는 이 인간”을 그의 공간과 그의 역사적 개인성 안에서 파악하기 위한 초기 시도들 중의 하나였다. 어째거나 르낭은 내적 변증법 대신에 엘리트적인 개별성들의 행동으로 대체했다. 여기서 내적 변증법이란 헤겔에 다르면 역사를 지배한다는 것이며, 엘리트란 성 바울, 예언자들을 말한다. 바울은 유태인의 제의주의(ritualisme)의 편협함으로부터 새로운 종교를 구출한 자이며, 예언자들은 유대라는 나라에서 제의도 없고 독단도 없는 순수정의의 종교를 발견한 자들이다. 이는 이 과학자이며 사상가들이며 종교인들인 엘리트(지도층)였다. 르낭이 보기에 이 지도층에서 만이 정신적 가치들의 기탁물(le dépôt 대대로 전승할 침전물)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정치적 견해들은 엘리트들이 간직하는 근심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철학적 드라마인 깔리방(Caliban 1878)와 철학적 대화와 단편들(Dialogues et fragments philosophiques, 1876)에서는 가끔, 그가 전 인류 속에서 정의의 실현을 절망하기에 이른다. 그래도 그는, 학문이 엘리트에게 부여해 준 굉장한 행동수단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공포(la terreur)를 통해서 엘리뜨들이 인간들의 대중에게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지적 도덕적 개혁(La Réforme intellectuelle et morale de la France 1871)에서 그는 민주정을 엘리트에 정부를 주는 귀족정의 헌정제도에 대립시켰다. 르낭은 우리의 산업적이고 평등의 문명이 정신을 점점 더 위험에 빠지게 한다고 느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반응한 것은 과거를 관조하는 꿈에 의해서 또는 체념된 아이러니에 의해서이다. (45TLD)
제6절 뗀 Taine 814
이뽈리트 뗀(Hippolyte Taine 1828-1893)는 스피노자(Spinoza), 꽁디약(Condillac), 헤겔(Hegel) 작품들을 잘 성찰하면서, 예지성(l'intelligibilité)의 개념에 도달했다. 예지성이란 1850년경에 지배했던 것처럼 우선 처음에는 실증적 선입견에게는 아주 낯선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독일 형이상학자들을 인정했다. 이들은 “단순한 개념들, 다시 말하면 분해할 수 없는 추상물들이 있다. 이것들의 조합들이 나머지들을 생겨나게 한다. 그리고 이것들의 통일 규칙들과 이것들의 상호 반대들은 우주의 초기의 법칙이다”라고 이해했다. 참조: 영국문학의 역사(Histoire de la littérature anglaise, 1864)(1878년 판, 412쪽). 마찬가지로 그는 꽁디약의 분석을 시인했다. 꽁디약은 감각 속에서 단순한 요소들을 찾았다. 그 요소들의 변양들(modifications)이 모든 인간적인 능력들(faculté)을 생산한다. 그리고 또한 모든 실재성의 유일한 생산적 실체와 더불어 스피노자(Spinoza, 1632-1677)의 윤리학(L'Ethique 1677)도 시인했다. 다른 한편 그는 경험 자료들의 무한한 복잡성에 대해 첨예한 의미를 가졌던 사람들에는 거의 속하지 않았다. “운동하는 이 굉장한 세계, 서로 마주치기도하는 사건들의 소란스런 이 혼란, 끊임없이 무한히 변화되며 다수화 하는 이 생명. 왜냐하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무한성에 의해 모든 측면으로부터 혼란스러워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래톱에 있는 하나의 조개처럼 또는 어느 산비탈 구석에 있는 한 마리 개미처럼 괴물스런 우주 속에서 던져져 있었다.”(같은 책, 408쪽, 412쪽) 뗀느에게서는 매우 풍부하고 매우 친화성 있는 감성과 철학적 문제를 창조하는 예지성의 정언적 요구와 사이에는 이항대립이 있다. 이 이항대립은 그의 스타일에게 일종의 내적 긴장을 즉 일종의 노력을 준다. 이 노력이란 때로는 건조한 것이 되기고 하고 때로는 이미지로 해결되기도 한다. 밀(Mill)의 철학과 같은 영국 철학과 헤겔 철학과 같은 독일 철학은, 이항 대립의 항들은 따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뗀느가 보기에, 비난받을 만한 것으로 보였다. 밀은 우리의 모든 인식을 사실들에 그리고 사실들의 집합에 환원시켰다. 그러나 하나의 사실은 “나의 감각과 나의 의식이 존재의 무한하고 연속적인 연결체 속에서 잘라놓은 임의적 단면일 뿐이다...., 임의적 덩어리일 뿐이다. 동시에 임의적 절단이다. 말하자면 인위적 집합(un groupe factice)이다. 이 인위적 집합이란 하나로 통일된 것을 분리하고 또 분리되었던 것은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헤겔이 말하는 이 “괴물같은 거대건물”(la gigantesque bâtisse)은 무너진다. 그 이유는 사실들의 세부사항을 연역한다는 그의 과장된 주장 때문이다.
무질서한 세계로부터 요소들의 세계로 이행하는 것, 복잡한 것에서 단순한 것으로 이행하는 것, 그러한 것은 뗀느가 철학에 할당한 분석적 임무였다. 그 임무가 무엇에 있는지를 아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그 임무의 분석적 절차에서 근본적 모호성이 있다. 뗀느는 모든 인식을 경험으로부터 도출하는 실증주의 원리에 충실하고자 원했다. 그리고 그는 본질들에 대한 지적 직관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본질에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절차는 추상작용의 절차였다. 추상작용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인위적 집합”(un groupe factice)을 요소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추상물(l'abstrait)이란 몫(une portion), 추출물(un extrait), 구성물(un composant)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제일의 생산적 특성(la propriété generatrice, 성질), 본질, 즉 원인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다른 여러 성질들이 연역된다. 이제 여기에서 뗀느를 따르는 것은 불편하다. 또 어떻게 한 부분이, 자신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전체의 생산자일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도 불편하다. 그가 스피노자에게서 빌려온 수학적 예(공[공球]의 생성적 특성으로서, 직경의 주위에 있는 반원을 회전하는 것)은 전혀 그럴듯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동일한 스피노자의 관찰에 따르면, 누군가 구의 개념을 이미 소유하는 경우에만 이 특성은 의미(de sens)를 갖는다. 또한 뗀느는 분석가의 절차를 동물학자의 절차에 비교한다. 동물학자는 한 동물 속에서 유기체화의 전형을 또는 형질들의 종합을 분간한다. 이 전형과 종합은 이미 상호적으로 가정되었던 것이다. 참조: 비평과 역사에 대한 시론(Essais de critique et d’histoire 1858)(1882, 8판 서문26쪽 1900). 여기서 추상작용이란 요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격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여기서 연결된 요소들 사이에 어떤 지적 연관도 없다. 이 연결은 단지 경험적 일반화의 덕분에, 즉 수많은 유사한 경우들의 확증 덕분에 알려진다. 이 확증이 없다면 추상작용은 어떤 의미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뗀느가 자신의 이런 방법을 적용했던 것은 인간 과학들에, 특히 문학비평에, 예술에, 정치의 역사에서 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체계가 아니라 오히려 작업사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는 두 개의 절차를 허용한다. 하나는 의존하는 것들의 탐구이고 다른 하나는 조건들의 탐구이다. [의존의 탐구 측면에서] “베르사이유(Versailles)의 소사나무 가로수, 말브랑쉬(Malebranche, 1638-1715)의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추론, 브왈로(Boileau 1636-1711)의 검증의 규범, 가설들에 관한 꼴베르(Colbert, 1619-1683)의 법칙, 말리(Marly)성에서 대기실의 불평, 신의 왕국에 관한 보쉬에(Bossuet, 1627-1704)의 판정(une sentence) 등과 사이에서 거리는 무한하고 뛰어넘을 수 없을 것 같다. 어떤 연결 방식도 명백하지 못하다. 사실들은 너무나 닮은 것이 없어서 첫째 관점에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다시 말하면 따로 떨어져 분리된 체 있는 그대로 판단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들 스스로 자기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집단들(des groupes)의 정의(définition)에 의해 소통하고 있다.”(비평과 역사에 대한 시론, xii 쪽). 사람들은 유기체의 전형 속에서 기관들의 의존과 유사한 상호의존을 보기보다, 17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부조화로운 사실들 속에서 추상에 의해 재발견하는 공통특성에 대해 더 중요하게 본다. 그러면 조건들의 탐구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탐구는 역사의 모든 단계들을 관통하여 발견되는 안정된 특성들의 탐구이다. 예를 들면, 영속적인 큰 힘들 중의 하나인 민족적 성격 같은 특성이 그것이다.
텐느의 학설은 지성에 대하여(De l'intelligence 1870)의 개론에서 주장된다. 이 저작은 병리학과 생리학의 탐구들에 부여한 위치상으로 시대의 의미를 지닌다. 그의 학설은 아래와 같이 몇줄로 완전하게 요약할 수 있다. “하나의 복합물의 요소들을 따로 떼어내어 관찰할 수 있는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은 이 요소들의 성질을 통해 한 복합물의 성질들을 설명할 수 있고, 몇몇 일반적 법칙들로부터 많은 개별적 법칙들을 연역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서 설명했던 것이다. 우리는 처음에는 인식의 마지막 요소들까지 정도상의 차이들에 의해 내려왔다가, 그리고 나서 가장 단순한 인식들에까지 단계적으로 올라가서, 거기서부터 가장 복잡한 것들에까지 단계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사다리에서 각 계단은 하부 계단에서 표출되었던 특성들을 중재로 해서 그 특성들에 연결 된다”(지성에 대하여(De l'intelligence 1870) 7판 2권 429쪽). 사람들은, 병리학이 현상들을 단순화하면서 또 신경생리학이 우리를 의식적 사실들의 세부조건들에 들어가게 하면서, 그 병리학과 신경생리학이 어떻게 의식보다 분석을 더 멀리까지 밀고 나갈 수 있게 하는지를 직접적으로 본다[안다]. 그런데 이 의식에 대한 관찰은 이미 훨씬 복잡한 현상들 그 아래로 더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정상적인 상태에서 이미지는 우리에게 내적으로 나타난다. 이 내재성은 감각에 환원할 수 없는 사실을 이미지로서 만들 것인데, “대항적 환원자”(réducteur antagoniste)에 기인한다. 이 대항적 환원자는 이미지를 외재화하게 되는 것을 막는다. 이 화원자는 감각들의 일체이다. 감각들과 더불어 이미지의 대상의 현존은 양립할 수 없다. [이미지(=관념)는 감각의 집합도 아니고 감각으로 이미지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대항적 환원자가 약화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환각(l’hallucination)이 솟아난다. 따로 떨어져 있는 이미지는 외적인 것도 아니고, 따로 떨어진 감각도 아니다. 또한 그것은 다른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다.
텐느의 심리학적인 많은 특성들 때문에, 주로 심리학적 현상들을 단순 요소로 분해하는 원자론적 특성들 때문에, 그의 심리학은 영국 심리학의 큰 흐름 속으로 되돌아간다. 이 심리학은 밀(Mill, 1806-1873)과 벤(Bain, 1818-1903)에 많이 빚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심리학은 주장하는 설명방식에서 이들과 구별된다. 무한소 감각들은 모두 닮았으며, 모든 정신적 사건들은 결국에는 이 무한소 감각들로 용해되는데(résoudre), 이 무한소 감각들은 그것들의 다양한 배열에 의해 다양한 정신적 현상들을 상상하게 된다. 여기서 또한 부분들은 전체의 생산자이게 될 것이다.
추상요소와 창조적 힘의 동일성은 텐느 형이상학의 핵심(le fond 심층)이었다. 그의 형이상학은 다음의 유명한 문장에서 표현되었다. “사물의 최고 정상에는 즉 접근할 수 없고 밝은 에테르의 가장 높은 곳에는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적이고 아직도 저 높은 곳에 천국이 있을 것이라는 착각(망상)에 빠져 있다] 영원한 공리가 표명되어 있고, 창조적 정식으로 이어지는 반향은 다 써버릴 수 없는 진동들에 의해 거대한 우주를 구성한다. 모든 형식, 모든 변화, 모든 운동은 이러한 작동(actes)들 중의 하나이다. 이 형식은 모든 사물들 속에 기초하고 있고, 어떤 사물에 의해 한계 지워지는(borner) 것은 아니다. 물질과 사유, 지구와 인간, 태양계의 성운 덩어리들과 곤충의 맥동들, 생명과 죽음, 고통과 환희 등은 그것을 표현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히 표현할 따름이다. 이 형식은 시간과 공간을 채우고, 시간과 공간 그 위에 남아있다. ... 무차별(l’indifferente), 부동(l’immobile), 영원(l’eternelle), 전능(la puissance), 창조자(la creatrice) [모두들 여성으로 표현했다], 이 모든 이름도 그것을 다 써버릴 수 없다. 그 여신의 청명하고 숭고한 모습이 벗겨질 때, 굴복하지 않을 인간 정신은 없으며, 그 인간 정신은 공포와 찬탄으로 놀라게 된다. 그 순간에 그 정신은 고양된다. 그 정신(인간)은 그가 생각하는 무한성의 공감을 통해 즐기고(jouir), 자신의 위대함에 참여한다.” 프랑스에서 19세기의 전형적 철학자들(Les Philosophes classiques du XIXésiècle en France, 1856)(p.371) 참조. 여기서 풍부한 이미지는 개별적 빈약함을 덮어 버리게 된다. 마치 문예비평에서처럼, 세익스피어(Shakespheare, 1564-1616) 또는 카알라일(Carlyle 1795-1881)에서 인물들의 살아있는 초상은 [실재]환경과 종족에 의한 이루어진 작품들의 설명이 불완전하고 추상적인 점을 지니고 있음을 을 감추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45ULG)
제7절 고비노 Gobineau 818
아르뛰르 드 고비노(Arthur de Gobineau 1816-1882)는 토크빌(Tocqueville 1805-1859)에게 1856년 9월 29일에 편지를 썼다. “만일 내가 카톨릭 신자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카톨릭신자이긴 하지만 아마도 나는 철학자였으며, 헤겔주의자, 무신론자였다. 나는 사물의 끝까지 가 보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마지막 문(la porte)[무신론]을 거쳐서 학설들로부터 벗어났다. 여기서 학설들이란 가치와 강도를 지닌 학설들로 되돌아가기 위하여, 빈 것으로 향하는 학설들을 말한다.” 참조 토크빌과 서신교환(Correspondance avec Tocqueville, 1908). 그의 저술 종족의 불평등에 관한 시론(Essai sur l'inégalité des races, 4권, 1853-1855)은 북방계 종족과 게르만 종족이 우수하다는 생각에서 신체적이고 실재론적인 토대를 부여하고자 하는데 있다. 이 우수성을 헤겔주의로서 관념론적 변증법 위에 기초한 것이다. 종족 그자체가 신체적 도덕적 우월성을 부여한다. 인간들 사이에 동화를 탐구하는 문명, 그리고 정신들의 깊은 동일성을 믿는 인본주의, 이것들은 퇴폐의 지표(indice)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문명과 인본주의) 이 종족들을 뒤섞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 혼혈족은 열등한 종족으로부터 항상 시혜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방의 사물들에 대한 직접적 경험을 통해서보면, 동방에는 인류문명이 불가능하다고 믿기에 이른다.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30여 년 전부터 세계의 다른 민족들을 문명화시키고, 이런 저런 민족에게 문명을 가져다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내가 잘 주시해보았으나 소용없다. 나는 지금까지 근대시대에서도 고대시대에서도 이런 종류의 어떠한 결과를 얻었다고는 것을 알지 못했다. ... 한 지방(pays 나라)의 인구(population)가 수적으로 말하자면 빈약하다고 할 때, 사람들은 아마도 그것을[인구를] 문명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인구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거나 그 인구를 뒤섞게이게 하면서 이다.” 아시아에서 3년(Trois ans en Asie, 1859)(p.473) 참조. 이 혼혈은 고상한 가치들의 파멸(destructeur)이다. 알렉산더시대 이래로 동방(Orient)과 혼혈이 그리스-로마 문명을 수준 낮게 하는 진실한 원인이었다.
고비노는 자기 나라에도 낯선자(inconnu, 이방인)가 남아있다고 불평하면서, 1856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기다려야만 하는가? 프랑스에서 나의 견해가 영국어 또는 독일어로 번역되기를 기다려야 하는가?” 사실상, 독일에서 특히 니체 이래로, 고비노는 평판과 성공을 얻었다. (45ULG)
제8절 헤켈 Häckel
1865년 예나 대학의 동물학교수인 에른스트 헤켈(Ernst Heinrich Philipp August Haeckel, 1834-1919)이 세계의 수수께끼(Die Welträtsel 1899)에서 부여한 세계의 이미지를 고려해 본다면, 사람들은 이오니아의 가장 오래된 철학자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믿게 된다. 무한 공간, 시초도 종말도 없는 시간, 도처에는 보편적이고 계속되는 운동으로부터 - 이 운동이 반복되는 운동을 주기적으로 이끈다는 - 활성화된 물질, 진화가 일어나는 매순간에 수많은 중심들을 생산하는 물질의 응집(condensation)에서 이루어지는 진화, 충격에 의해 이 물체들의 파괴, 그리고 이 파괴와 더불어 거대한 양의 열(량)의 생산, 이 열량은 새로운 형성 작용에서 생명적 힘이며, 바로 이런 점에서, 어쩌면 열역학에서 빌여 온 몇몇 특징들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며, 이 특징들은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 철학자들의 단편들 속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압축 일원론”(monisme pyknotique)은 기원전 6세기 이래로 제기되었던 문제들을 모르고 있었고, 그 일원론은 정신과 물체의 전통적인 이원론에 반대하는 전투무기였다. 이원론의 참여자들은 다윈의 변형주의의 확산에 대립하고 있었다. 종의 기원(1859)이 나온 이후로 헤켈은 유기체의 일반형태론(Generelle Morphologie der Organismen, 1866), 인간의 후손, 그리고 성관계의 선택(Die Abstammung des Menschen und die geschlechtliche Zuchtwahl, 1871)(fr. Descendance de l'homme 1871)을 썼고, 그리고 나서 자연적 피조물의 역사(Natürliche Schöpfungsgeschichte 1868)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후자의 작품에서 그는 변형론[진화론]을 인간의 기원에 적용했다. 그리고 1874년 인류 발생론(Anthropogenie)에서도 마찬가지다. 세계의 수수께끼(1899)에는 [칸트가 제시한] 신, 자유, 영혼불멸 등의 세계일반의 설명이 있는데, 여기서 그의 일원론은 새로운 학설에 근본적인 장애물들로 남게 되었던 신앙들을 무용한 것으로 만들 운명에 처해 있었다. 그 새로운 학설은 인간도 단지 물질과 에너지 집합(agrégat)일 뿐이라 한다.
그리고 헤켈의 일원론은 생명의 놀라움(Lebenswundern 1904)(Merveilles de la vie, 1904)에서 예기치 않던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 일원론은 이오니아의 일원론처럼 영혼론적(animiste 생기론적)이 된다. 모든 것은 생명을 간직하고 있는데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며, 심지어는 무기물(무생물)에도 생명을 간직하고 있다. 신은 세계와 동일하며, 종교는 진, 선, 미의 인식이며 존중이고, 말하자면 자연 법칙들의 존중이다. 이 사교성(sociabilité)은 인간 본성의 생명적 조건인데, 이 사교성으로부터 복음 같은 도덕의 규칙이 연역되다. 일원론은 인간의 종교적 사회적 삶을 자연법칙의 단순한 인식 위에 세우기 위해 만들어진 최종적인 시론들 중의 하나이다. 1906년 뮌헨에서 독일 일원론연맹(Deutsche Monistenbund)이 창설되어서 1912년 국제 학술회의에서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여러 과학들이 성공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과도하게 독단적이고 환상적인 용도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 운동이 자유로운 사상의 급진주의의 일반적 경향으로 나가게 되어, 사실상 사라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45ULJ)
제9절 독일에서 실증주의 Le positivisme en Allemagne 920
매우 다른 방향에서 독일 사상가들은 정통적 칸트주의를 가지고 1880년 독일에서 철학적 선입견들의 무용함을 선언하는데 동의했다. 이 정통칸트주의는 라스(Ernst Laas 1837-1885)의 통속적 실증주의 또는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으로 귀착되었다. 라스의 측면에서 보면, 그의 관념론과 실증주의(Idealismus und Positivismus, 1879)에서, 철학 사상의 모든 역사는 두 개의 학설의 충동에 의해 제기되었다. 하나는 플라톤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실증주의이다. 플라톤주의에서는 실재화된 개념, 선천적 관념들, 유심론, 최종 원인들 등이 있다. 그리고 이 체계는 유일한 절차로서 연역법을 사용한다. 이 연역법은 모든 인식과 모든 행동을 절대적 원리들에 귀속시키고, 이 원리들에서 초감각적이고 비시간적 원리를 찾으며, 자연적 매카니즘과는 다른 자발성을 인정하고, 생명은 천상의 영원성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플라톤과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셸링, 헤겔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오류와 착각(l'illusion)의 학설이다. 실증주의에서는주체와 대상의 상호관계를 인정한다. 대상은 의식의 내용의 자격으로 현존하고, 주체는 대상의 장면(scène) 또는 기초(substrat)로서 현존한다. 실증주의는 지각대상들의 영속적 변화성을 주장한다. 결국 실증주의에 있어서 과학은 감각과 동일하다. 사람들은 플라톤의 테아에테토스편에 나오는 프로타고라스의 세 가지 주장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라스는 결과적으로 꽁트(A. Comte) 보다 훨씬 더 프로타고라스에 접근했다. 또한 라스는 자체로 현존(즉자적 현존)하는 세상을 믿는 세속적 신앙을 가지고, 보편 메카니즘의 과학적 이미지를 플라톤주의 속으로(권능의 의지(Volonté de puissance) 속에 니체와 멀지 않는 방식으로) 되돌아가게 했다. 사람들은, 실재성으로부터 경험의 비사회적 부분들을, 즉 감정들, 의지적 작동들, 추억들을 모두 제거 하면서, 이 세계를 얻었다. 그 나머지는 과학의 세계이며, 허구적 가정일 뿐이다.
라스의 도덕론은 도덕적 가치들 시대적 관심에 의해 정의한다. 그 도덕론은 또한 “플라톤주의”를 완전히 벗어난다. 이 사회적 도덕론은 지글러(Theobald Ziegler, 1846-1918)와 조들(Friedrich Jodl, 1849–1914)이라는 추종자들을 발견하게 되는 데, 전자는 윤리학의 역사(Geschichte der Ethik, 1886)[1권: 그리스와 로마의 윤리(Die Ethik der Griechen und Römer 1881), 2권: 크리스트교 윤리의 역사(Geschichte der christlichen Ethik 1886)]를, 후자 또한 윤리학의 역사(Geschichte der Ethik, 1906-1912)를 썼다. 조들은 꽁트처럼 종교적 정식들을 해석하면서, 이 종교적 정식들[인류교]을 지키고자 하였다. “우리들 속에 있는 이상(l'ideal)과 우리들에 의해 이상의 실현을 믿는 신앙 ... 그 신앙은 초자연적인 권능과 연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과정에서 인간이 신이 되는 생생한 확신을 의미한다.”
뒤링(Dühring)은 철학의 시초에서 현대까지의 철학사 비판(Kritische Geschichte der Philosophie von ihren Anfängen bis zur Gegenwart, 1869)를 썼는데, 이것은 철학 자체에 대해 그가 책 읽기를 해방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는 19세기의 진지한 사상가로서 포이에르바흐(Feuerbach, 1804-1872)와 꽁뜨(Comte, 1798-1857)만을 인정했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에 반대하고 또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크리스트교에 반대하고, 유대주의에 반대하며, 니체의 개혁처럼 철학을 정신적 개혁(réforme)으로서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링의 세계관은 유물론적 매카니즘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시작과 한계들, 마지막을 보았다. 생명적인 것(le vital)은 기계적인 것(le mécanique)으로부터 구별되고, 생명에는 시초가 있었다. 수의 법칙은 무한히 큰 것만큼이나 무한히 작은 것을 인정하기를 금지했다. 신도 창조도 자유도 없는 유한주의[유한성] 속에는, 모든 유신론의 대립뿐만 아니라, 또한 연속적 진화론의 대립도 있다. (45ULJ)
제10절 아베나리우스 와 마하 Avenarius et Mach 822
이 세기의 후반 세기에 사람들은 물리학자들과 생물학자들이 철학에게 전념하여, 자기들이 하고 있는 과학들의 방향에서 문제들의 새로운 제기와 해결을 찾으려는 방식, 즉 오래 전부터 예외적이었던 방식을 보았다. 이 과학자들의 개념작업들은 물리학의 관념(생각)에 집착하고 있었는데, 그 생각은 꽁트가 물리학자 푸리에(Joseph Fourier 1768-1830)에게서 빌려 온 것이며, 우리가 합법주의(légalisme)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리하여, 독일 물리학자인 마이어(Julius Robert von Mayer, 1814-1878)는 열의 기계적 평형에 관한 고찰(Bemerkungen über das mechanische Aequivlent de Wärme 1850)을 썼으며, 그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발견하고서, [그것에 관한] 현상을 완전하게 표현했을 때, 물리학의 임무는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1855년에 랜킨(William John Macquorn Rankine, 1820-1872)은 그의 저술 에너지학의 개론(Outline of the science of Energetics, 1855)에서 서술 물리학을 설명 물리학에 대립시켰다. 그 중에서 서술물리학들만이 진실한 과학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방식에서보면, 변화의 보편 과정을 설명하는 열역학이 보는[서술하는] 방법에 적합하다고 한다.
과학적 개념화 작업의 철학적 귀결들을 1877년 쮜리히 교수가 되었던 아베나리우스(Richard Avenarius, 1843-1896)가 순수 경험의 비판(Kritik de reinen Erfahrung 1888-1890)에서 끌어냈다. 그의 경험비판주의(son empiriocriticisme)는 사실들에 만족하기 위한 노력이다. 베르그송의 의미에서 무매개적 경험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생물학 자료로서 주체의 유기체를 환경과 관계에서 고려할 때, 주체 안에서 인식적 사실들의 일반적 방식(l'allure)에 만족하는 것이다. 주체의 발설들(les énonciations)(E), 그리고 중추신경체계의 변화(les changements)(C)를 고려해보자. 생물학자는 이 변화들(C)이 환경에 의해 조건지워 진다는 것을 안다. 이 환경이 영양섭취 환경(millieu nutritif)과 같은 것(S)이든지, 정보(renseignement) 물질 또는 자극제(excitant) 같은 것(R)이 든지. 사람들은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안다. (E)의 여러 다른 가치들은 (C)의 변화들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 변화들은 때로는 R(f(R))에 때로는 S(f(S))에 함수적 기능을 한다. 또한 생물학은 우리에게 함수f(R)과 함수 f(S)가 반대되는 과정이라는 점을, 다시 말하면 자극에 의해 생산된 것을 다써버리는 것은 영양섭취에 의해 보상된다는 점을 가르쳐준다. 함수f(R)과 함수 f(S)이 서로 동등성에서 멀어지는 경우에는, 파괴의 경향이 있다. [어느 한쪽이 과도하게 많다는 것은 유기체가 파손되는 경우이다.] 이 두 함수가 동등성에 서로 가까워지는 경우에는 [자기] 보존에 역행하는 경향이 있다. 최상의 조건 즉 평등은 환경에서 오는 변화들 때문에 채워지지 않는다. 보존을 허락하는 모든 진동들의 계열이 생명체(le vivant)의 연속성을 보증한다.
환경의 요소들 R 가운데, 그래도 몇몇은 끊임없이 되돌아오고, 반대로 다른 것들은 우발적이고 불안정하다. 두뇌가 발달되면 발달될수록, 더욱 더 쉽게 두뇌는 안정적 요소들에 의해 자극받고, 두뇌는 더욱더 적게 우발적 요소들로부터 자극받는다. 그 결과로 가치들 E는 끝내는 오직 안정적 요소들에 의해 거의 의존한다. 인상들의 흐름 대신에, 두뇌는 스스로 연속적인 현재 환경을, 지상의 사물들의 물리적 환경을, 인류의 사회적 환경을 생산한다. 친숙한 습관적 자극들은 안전하다는 감정을 생산한다. 세계는 우리에게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수수께끼는 친숙하지 못하다는 감정으로부터 생겨난다. 따라서 인식의 경향은 이 감정을 무화하는 경향이다. 이 경향은 동질성으로 향하고, “이질성을 최소한으로 향하게”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베나리우스는 비판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문제들은 ‘사물들은 나의 표상이라’는 쇼펜하우어적인 정식에 의존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우리가 우리에게 있지 않은 실재성에 도달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이 정식 자체는 절차를 생겨나게 한다. 아베나리우스는 이것을 내성적투사(l'introjection)이라 불렀다. 인간은 시작에서 자기와 닮은 것들[다른 생명체들]에서 자신이 아는 사물의 감각과 지각을 도입한다. 이 순간에서부터 경험된 사물은 우리와 닮은 것이 사물로부터 갖는 지각과 따로 떨어지게 된다. 효과적인 세계와 나의 닮은 것 안에서 이 세계의 반영이 있고, 즉 사물로 만들어진 외적 세계와 지각으로 이루어진 내적 세계가 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자신의 관점에 따라 동일한 작업을 수행하고, 그리고 그때에 실재성을 자기 속에 있는 현상과 분리한다. 이로부터 주관주의가 생겨난다. 인식의 모든 이론들은 주관주의를 극복하려 헛되기 애쓴다. 그리고 경험비판주의는 내성적 투사에 앞서서 위치하며, 그리고 경험 안에서 동일한 자격으로 사물과 자아를 배열을 제시한다. 가치들 E(R과 S 환경이 두뇌에 미치는 작용을 따르는 발설들)는 전적으로 많은 사물들만큼이나 사유들이다. 사물들이라 할 때는 가치들이 유기체의 주변에서 조건들에 의존할 경우이고, 사유들이라고 할 때는, 그 반대의 경우이다.
경험비판주의는 비판적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이루어졌던 많은 노력들 중의 하나이다. 에른스트 마하(Ernst Mach, 1838-1916)는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철학자이다. 그는 1867년 비엔나에서 물리학 교수, 그리고 1875년에는 철학 교수가 되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역학의 발전(Die Mechanik in ihrer Entwicklung, 1883: tr.fr. La mécanique), 감각의 분석과 신체와 영혼의 관계(Die Analyse der Empfindungen und das Verhältnis des Physischen zum Psychischen, 1886: tr.fr. Analyse des sensations, 인식과 오류(Erkenntnis und Irrtum, 1905: La connaissance et l'erreur) 등을 썼다. 그의 작품도 위와 동일한 결과에 이르렀다. 그의 작품은 생물학에 지지를 받기보다 물리학의 방법에 의지하고 있다. 그에게 본질적인 관점은 물리학이 인과성의 개념 없이도 이루어지고 수학적 함수의 개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함수(fonction)는 한 현상의 변수를 다른 현상의 변수에 연결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원인 개념과 더불어, 실체의 개념도(실체개념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감각적 성질들의 집합으로 대체된다), 물자체의 개념도, 자아의 개념도 무용하게 된다. 자아의 개념도 단지 신체와 그리고 신체에 관련된 추억들과 정서들로 이루어진 복합물일 뿐이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경험세계를 감각들과 감각들을 연결하는 함수들(les fonction)을 가지고 적분적 방식으로 서술할 수 있다. 물리학과 심리학 사이에 어떠한 심연도 없다. [예를 들어] 색깔이란 우리가 색깔을 다른 물리학적 현상들과 연계하여 고려할 때는, 물리적 실재성이다. 그리고 색깔을 망막에 의존하여 파악할 때는, 심리적 실재성이다.
[자연]과학에 있어서, 이런 [물리학적] 서술의 규칙은 생물학적 근원의 법칙에 연결되어 있다. 이 생물학적 근원은 경제적[아낌, 절약]의 법칙이다. 예를 들어 정치경제학에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일종의 축적 노동으로써 자본을 도구로 삼는다. 마찬가지로 과학적 법칙들도 무한한 경험들을 우리에게 절약하게 하는 운명을 지녔다. 우리가 사용하는 지수와 굴절법칙은, 입사각이 주어지면 굴절각은 계산할 수 있는 것처럼, 직접적으로 재는 것을 절약하게 하게 한다. 수학 그 자체는 계산을 지름길로 가게 하는 절차의 집합일 뿐이다.
사변적 경제과학의 개념화 작업은 열역학의 합법주의(légalisme)에 연계되어 있다. 따라서 독일의 화학자인 빌헬름 오스트발트(Wilhelm Ostwald, 1853-1932)에게서 이 두 학문들의 집합으로 합류하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는 자연철학 강의(Vorlesungen über Naturphilosophie 1902를 썼다. 이 에너지론 과학자(énergéticien)은 열역학의 법칙에 종속되는 에너지의 양태들(les modes 방식들)을 물질 속에서도, 영혼 속에서도, 심지어 문명 속에서도 보았듯이, 열과 빛 속에서도 보았다. 또한 그는 이 법칙들을 예견하는 수단들로서 간주했다. 이 법칙들은 우리가 경험을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게 하는 것을 피하게 해준다. [노력과 에너지를 절약하게 해준다] 철학자체의 목표는 사색가들의 작업을 쉽게 해주는 것이다. [그의 학문은 주지주의와 실용주의를 겸하고 있다. ]
베를린 대학의 정신과 교수이며 정신분석가이기도 한 테오도르 찌헨(Theodor Ziehen, 1862–1950)은 인식이론(Erkentnistheorie, 1912: 원제 Die Erkennung der psychopathischen Konstitutionen und die öffentliche Fürsorge für psychopatisch veranlagte Kinder, 1912)과 논리학 개론Lehrbuch der Logik: 원제 Lehrbuch der Logik auf positivistischer Grundlage mit Berücksichtigung der Geschichte der Logik, 1920)를 썼는데, 이 책들에서 실재물(le réel)의 서술을 시도했다. 그는 이 실재물을, 아베나리우스의 서술처럼, 물리학적인 것인 과 심리학적인 것의 이중성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는 감각과 표상을 구별했다. 그러나 그는 감각 속에 있는 두 개의 복합물(deux composants)을 구별했다. 하나는 “환원된 감각”(la sensation reduite)이며, 다른 하나는 심리학의 주체이다. 전자는 자연법칙에 복종하고 통속적으로 대상(l'objet)라 불리는 것을 형성한다. 이것은, 예를 들어, 물리학자에 의해 연구되는 장소와 공간의 규정들이다. [후자로서] 이 환원된 감각들 이외에 그 나머지 것은 통속적 의미에서 감각이며, 다시 말하면, 전자의 것과 독립적으로 변모하는 복합물이다(마치 바라보는 각도와 거리의 변화 따라 모양이 변하는 것처럼) 즉 이것이 심리학적 주체(le sujet)이다. 찌헨은 표상 속에서도 똑 같은 복합물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위 구성물들처럼 추억 속에는 우리가 상기하는 대상적인(objectifs, 객관적인) 사건들이 들어간다. 사람들은 그 실재물에 대한 일종의 수용을 더 이상 밀고 나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실재물이란 어떤 의문도 제기되지 못하면서 서술되고 이름 붙여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 방식에서, 관념론[비판론 선험론]과 실재론[경험론] 사이에서 매우 중요한 차이는 지워지고, 독일철학자 슈페(Wilhelm Schuppe, 1836–1913)의 관념론이 거의 아베나리우스의 실재론과 일치하기에 이른다. 그는 인식이론의 논리학(Erkenntnistheoretische Logik 1878), 논리학 개론(Grundriss der einen Logik 1894)을 썼다. 그는 아마도 자아 또는 의식을 의식 상태들의 복합물에 환원할 수 없은 것으로서 간주했다. 그는 모든 실재성이 의식의 내용물이며 사물들의 존재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사물들은 의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떤 조건하에서 지각될 가능성으로 항상 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에게 있어서 의식은 일종의 극장, 즉 [일종의] 그릇(contenant 포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영혼의 기능들과 활동성들과 같은 것은 아무거도 없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만일 그의 “내재주의”(immannentisme)는 의식의 개별성으로부터 생겨나는 보충적 난점들을, 즉 의식을 유아론(solipsisme)으로 가게 하는 것을 제기했다 하더라도, 그의 입장은 마하의 입장 또는 아베나리우스의 입장과 동일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슈페는 추상적 자아에 대해 버클리의 것과 같은, 모든 개인들에 공통하는, 일종의 가설을 인정하면서 유아론을 회피했다. 따라서 공간과 시간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이 된다. 왜냐하면, 보편적 자아에 의존하는 시간과 공간은 개별적 자아들에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매우 효과적인 역할을 하기에, 슈페의 학설은, 오스트리아 철학자 슈베르트솔데른(Richard von Schubert-Soldern, 1852 -1924)에서처럼, “인식이론의 유아론”에 이른다. 그 유아론은 의식 상태들의 흐름(le flux) 만을 보존하면서, 자아를 완전히 부정한다.
제11절 빌헬름 분트 Wilhelm Wundt 826.
1874년부터 1890년까지 대부분 출판된 분트(Wilhelm Wundt, 1832-1920) 많은 작품은 아마도 독일에서 철학방면에서 소위 말하는 철학적 고민을 나타내는 최저 수위를 표시한다. 분트(Wilhelm Wundt 1832-1920)는 1875년에 라이프찌히에서 교수가 되었는데, 물리학에서 출발하여 실험심리학을 거쳐서 철학에 이르렀다. 그의 사유는 항상 발전에 의해서라기보다 첨가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그의 작품은 그 깊이에서 보다 더 그 확장에서 주목할 만하다. 처음에 그는 심리학에서 실험적 탐구의 선도자 였다. 즉 그가 쓴 생리학적 심리학 원론(Grundzüge der physiologischen Psychologie 1874; fr. Eléments de psychologie physiologique, 1874)(1911년에 6판을 냈음)은 특히 헬름홀쯔(Helmholtz 1821-1894)의 방법에 따라, 반작용에 걸린 시간에 관한 탐구를 포함하고 있다. 그는 헬름홀쯔의 조교를 지냈었다. 우리가 주어진 자극에 반작용하는 시간은 우리의 심리학적 상태(주의, 산만, 감격 등)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분트가 이 시간을 측정하면서 상태들 중의 몇가지 상태를 특징화 하기에 이르렀다. 적어도 작업 가설상, 이 과정은 심리물리학적 평행론를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측정한 것은 신경과정의 지속일 뿐이고, 그 지속의 일부는 생리학적 현상의 지속과 일치하는 것으로 가정되기 때문이다.
그의 논리학: 인식원리의 탐구와 과학적 연구의 방법의 탐구(Logik: Eine Untersuchung der Principien der Erkenntniss und der Methoden Wissenschaftlicher Forschung, 1880, 1883)(2권)(1921년 4판을 냈음)은 그의 심리학의 연장일 뿐이다. 논리학은 연합론과 능동적 통각론 사이의 구별에 근거하고 있다. [관념] 연합론이란 사람들이 표상의 놀이에 게으르게 관여하는 것이고, 능동적 통각론이란 “개인적 표상작업을 새로운 표상작업들로 상호관련 짓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분트에 있어서 통각(l'apercetion)이란 그자체로서 고유한 심리적 작동(l'acte psychique)이며, 긴장의 감정을 동반하고 또 우리들 표상작용 속에서 보다 더 큰 구별을 만들어낸다. 논리적 사유란 단지 통각이 종합을 이룰 때에서부터 만 시작한다. 심리학적 종합은 이 특별한 특징을 갖는데, 그(종합)의 생산물은 항상 그것이 생산한 요소들의 첨가보다 더 많다. 이리하여 논리적 개념은, 사람들이 믿었던 대로, 표상의 계열 속에 있는 공통적인 것의 단순한 추출물이 아니다. “그것은 일련의 의존하는 표상들과 함께 개인적으로 지배력있는 표상(명사와 연결되어 있는 표상)에 대한 능동적 통각에 의해 완수된 종합이다.” 따라서 분트는 논리적 관계[추상적 논리 관계]들 자체 보다 정신의 논리적 삶[심리적 논리 연결]을 다루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품에서 매우 호기심 많은 것 중의 하나, 그것은 이전(déplacement, Verschiebung)의 이론에 의해 설명하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심리학적 기원에 관한 것이다. 사실상, 수많은 판단들이 있고, 그 판단 안에는 술어들이 주어의 다른 범주들에 속하며, 그 판단에서 술어는 예를 들어 어떤 상태 또는 어떤 성질(동사와 형용사)을 지시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지 대상적인 개념들과 포섭관계들[외연적 포함관계들]만을 인식한다. 이처럼 그는 논리적 사유의 특성인 어떤 경향성의 끝까지 갔다. 즉 연속적으로 대상적 개념들에까지 올라갔다. 이 사유는 감각적 직관에 의해 제공되는 매우 적은 수의 대상적 개념들에 의해 시작되고, 그리고 마치 사람들이 언어에서 그렇게 그러한 것을 보았듯이, 모든 개념들을 대상적 개념으로 변형시킨다. 언어에서 실사(le substantif)는 처음에는 형용사였고, 그리고 형용사는 기원적으로 동사의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모든 개념들은 서로서로 비교되게 되고, 형식적 논리학은 연속적이 될 수 있다.
윤리학: 인륜적 삶의 사실과 규범의 탐구(Ethik. Eine Untersuchung der Tatsachen und Gesetze des sittlichen Lebens, 1886)(1912년 4판)은 “사실의 윤리”이다. 이 윤리학은 많은 부분들에서 그 당시에 행동하고 있는 도덕적 동기의 분석에 할당하였고, 또 동기들이 종속되는 일반적 관점의 탐구에 할당하였다. 분트에 따르면, 사람들은 행동이 우호적인지 또는 정신적 힘의 자유로분 발전에 족쇄를 채우는지에 따라 선한 행동인지 또는 나쁜 행동인지를 판단한다. 이 자유로운 발전이 인간 사회의 최종 목표이다.
철학적 체계(System der Philosophie, 1889(1919년 4판)에서는 철학의 임무를 “세부적인 우리 인식들을, 이성의 요구들과 영혼의 필요에 만족시키는 세계와 삶의 직관으로, 재통합하려는” 것이라 한다. 이 책은 또한 이 임무를 “보편과학”이라 정의한다. “이 보편과학은 특수과학들에 의해 얻어진 인식들을 정합적 체계로 통일해야 하고 또 과학들 안에서 사용 중인 보편적 가설들을 그 원리들에 수렴해야 한다.” 우주의 정합성, 즉 이성적 원리가 총체성을 요청한다는 확실성, [이로부터] 경험은 그 총체성의 부분들만을 발견한다. 따라서 바로 이것(정합성, 확실성)이 철학에 부여된 순수하게 형식적 특성이다. 이러한 형식에 내용을 채우기 위하여, 분트는 또다시 심리학을 이용한다. 우리에게 무매개적으로 주어진 유일한 활동성은 우리의 의지활동(un vouloir)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낯선 존재의 효과에 의해 겪는다면, 그러면 우리는 의지활동으로서만 이 존재를 우리스스로 표상할 수 있고, 그리고 [의식 활동의] 모든 진화를 의지들 서로서로에 영향을 주는 상호작용에 기인하는 것처럼 표상할 수 있다. [이런 진화에서] 한 의지 활동이 다른 각성에 영향을 주고, 이 후자의 각성에서 활동성이 표상이 된다. 이제 의지와 표상 등은 라이프니츠에서처럼 존재의 속성들이다. 그러나 분트에게서는 이 속성들이 실체 전체를 만든다. 분트에게서 형이상학은 심리학은 확장(une extension)이며 결과적으로 그의 심리학은 현실주의적(actualiste)이다. 영혼 속에는 현실과정이외 다른 실재적인 것은 없다. 또한 그는 단자론에 적대적이다. 그에게 있어서, 의지의 단위들(des unité)은 하나의 종합으로 묶을 수 있어서, 보다 큰 하나의 단위(통일성)로 형성할 수 있다. 종합에 의한 존재들의 생산에 대한 주제는 분트를 우주의 유출적 이미지(l'image émanatiste)에 적대적이게 만들었다. 아마도 “창조적 결과물들”이라는 생각이 그의 형이상학에서 가장 값진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분트에 있어서 형이상학은 매개일 뿐이며, 그는 심리학을 다른 확장에, 즉 민족 심리학에 전념하였다. 민족심리학(Völkerpsychologie. Eine Untersuchung der Entwicklungsgesetze von Sprache, Mythos und Sitte 1900-1920)(초판 1904년에 2권, 3판 1920년에 10권)은 집단 심리학의 선언으로서 영속적인 거대 계층들을 다루고 있다. 즉 언어, 예술, 심화와 종교, 사회, 법, 문명등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19세기에 발전했던 모든 인문과학의 종합이다. 언어에 대한 그의 연구는 언어 진화의 연구로서, 원시 모방으로부터 추상관념들을 조작하는 최종사용까지를 다루고 있다. 신화는 순진한 의식에 속하는 통각의 특수성으로부터 도출한다. 즉 “통각이 사물들을 활성한다"는 것이다. 예술이 목표로 삼는 것은 미의 생산도, 미적 즐거움도, 사색적 성향도 아니고, 오히려 자기 전체의 삶의 표현이다. 그 표현에는 자신의 신중함, 유쾌함, 승화, 비천함, 불일치, 조화 등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으로 제도 속에서 파악된 삶이다. 이 삶에서 예술작품이 생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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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클러(Gerhard Wichler, s,d,), 영국(?), Charles Darwin: The Founder of the Theory of Evolution and Natural Selection, 1961
?-? 아콰론(Stanislas Aquarone, s.d.), The life and Works of Emile Littré, Leyden, 1958.
?-? 부비에(Robert Bouvier, s.d.), La pensée d'Ernst Mach, 1923.[1923 -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30 (3):]
?-? 핼러(Karl Daniel Heller, s.d.), 독일인(?) 미국 인민자?Ernst Mach, Vienne, New York,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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