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훈민정음의 이론적 배경〉 훈민정음의 제자(制字) 및 그 결합의 철학적 배경은 성리학적(性理學的) 이론인 삼극지의(三極之義)와 이기지묘(二氣之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삼극은 천 ·지 ·인 삼재를 말하고, 이기(二氣)는 음(陰) ·양(陽)을 말한다. 성리학적으로 이 삼재와 이기로 우주일체의 사상(事象)을 주재하는 기본이념으로 이해되고, 이 삼재와 음양을 떠나서는 우주일체의 사상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성음(聲音)도 그것이 개념을 표상(表象)하는 그릇이므로, 근본적으로 삼재와 음양의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며 말소리의 체계는 삼재 ·음양의 체계와 반드시 합치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언어관(言語觀)이었다. 따라서 훈민정음은 그 음(音)의 분류에 있어서나 제자 원리에 있어서 그 철학적 이론은 모두 이러한 언어관에 입각하고 있다. 성리학에 따르면 모든 사상은 음양(陰陽) ·오행(五行) ·방위(方位)의 수(數)가 있으므로 음의 분류도 오행의 수에 맞추었다. 오행 ·방위, 그리고 초성에 있어서의 춘하추동,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중성에 있어서의 천 ·지 ·인, 일 ·이 ·삼…(一 二 三…)의 수와 같은 것은 모두 성리학적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음의 특징은 음성적 특징과 성리학적 특징의 양면에서 기술되어 있다.
〈창제 동기와 목적〉 훈민정음의 창제 동기와 목적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이름 자체에도 나타나 있지만 세종이 직접 서술한 훈민정음 본문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서문은 다음과 같다. “국어가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일반 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자가 많은 지라,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드나니 사람마다 쉽게 학습하여 일용(日用)에 편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國之語音 異乎中國與文字 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使於日用矣).” 첫째, 한국어와 문자가 일치하지 않는 데서 오는 여러 가지 모순과 불합리를 제거하자는 데 그 창제 동기와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한자(漢字)는 원래 중국어에 의하여 발생, 발달해온 글이다. 따라서 그것은 중국어를 표기하기에 합당한 글자이지, 구조적으로나 음운체계를 달리하는 한국어의 표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글자이다. 그러므로 한국어의 구조와 음운체계에 맞고 배우기 쉬운 글자를 만들어, 우리의 음운과 의사를 그대로 표기할 수 있을 때 한국은 보다 적극적으로 민족문화를 육성,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둘째, 모든 백성에게 문자 이용의 혜택을 균등하게 입게 하자는 데 동기와 목적이 있었다. 한자의 체계는 그 구조 ·형식 때문에 기술적(記述的)으로 대단히 복잡하고 특수한 훈련이나 기술(技術)이 없으면 익히기 매우 힘들고 또 그것을 완전히 익히려면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중국 자체에서조차 이 한자를 완전히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일부 소수의 지식 ·귀족계급에 한정되었다. 그러므로 특히 한국의 경우에도 그것이 귀족 ·지배 계급의 문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전체 백성을 위한 서민의 문자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문자는 문화의 소산이며 문화의 매개체이다. 문화는 전체 백성의 것이지 결코 일부 지배계급의 특권적 소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 훈민정음 창제를 주도한 세종의 의도이며 이상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이상 실현은 문자생활로 그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개방하는 것이 당연한 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 해례 서문을 쓴 정인지도 그 글에서 “문자가 언어와 불일치하기 때문에 학자와 서생(書生)은 그 뜻을 밝히기가 어렵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옳고 그름을 가려내기가 어렵다”고 개탄하였다. 따라서 학문의 연구나 국가의 정사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셋째, 선진문화 섭취에 도움을 주자는 데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은 훈민정음의 제정과 동시에 《동국정운》의 편찬과 《홍무정운(洪武正韻)》의 역훈(譯訓)을 시작하였다. 전자는 한국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하려는 것이었다. 후자는 중국음의 표준을 정하자는 데 있었다. 이 《동국정운》의 편찬은 자주적인 입장에서 중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섭취하기 위한 방편에서 나타난 것임을 뜻한다. 《홍무정운》을 역훈하게 한 것도 빈번한 중국과의 접촉에서 중국어 습득이 불가피한 만큼 중국어에 대한 표준적인 운서를 정함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이 두 책에 수록된 한자음을 정확하게 표기하기 위하여는 재래의 반절식(反切式)으로도 불충분하고 또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여기에서 훈민정음과 같은 표음문자(表音文字)의 제정이 절실히 요청되었던 것이다.
〈제정의 경과〉 세종의 훈민정음 제정이 언제부터 구상되었고 착수되어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는지에 대하여는 기록이 전혀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의하면 세종 25년 12월조에 “이달에 상께서 언문 28자를 친히 제정하였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라고 기록했을 뿐, 그 경과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다. 다만, 처음에는 세종 단독으로 구상하였다 하더라도 여러 신하의 중지(衆智)를 모아 상당한 기간에 걸쳐 추진되었을 것으로 추측될 따름이다. 이리하여 훈민정음이 제정되자 문자 창제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집현전과는 별도로 궁중에 언문청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의 보급과 이에 부수되는 문헌의 간행 등을 추진하는 한편, 해례와 같은 원리면의 연구도 여기에서 나온 듯하다. 이후 훈민정음과 관련된 기사는 44년 2월 《운회(韻會)》를 언해하고 같은 달에 최만리(崔萬理) 일파의 반대 상소에 부닥친다. 반대의 골자는 한자를 버리고 새 문자를 만듦이 사대모화(事大慕華)에 어긋날 뿐 아니라 선인이 만들어 놓은 운서를 뜯어 고치고 언문을 다는 것이 모두 무계(無稽)한 짓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45년 4월 《용비어천가》가 완성되고, 이듬해 3월 《석보상절(釋譜詳節)》의 언해를 명하였으며, 그 해 9월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이 이루어져 반포되고, 47년 9월 《동국정운》의 완성 및 《용비어천가》의 반포, 48년(세종 30) 11월 《동국정운》 반포, 55년(단종 3) 봄에 《홍무정운》 역훈(譯訓) 완성 등, 사업은 매우 의욕적으로 추진되었다. 먼저 《운회》를 번역한 것은 곧 《동국정운》의 편찬을 뜻하므로 그 사업은 이 무렵부터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훈민정음 해례의 작성은 아마도 1444년 최만리 일파의 반대 상소가 있은 직후부터 착수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 동안에 중국 운학(韻學)의 이론을 연구하고, 한편으로는 《용비어천가》와 《석보상절》 등의 찬정(撰定)을 통하여 그 실제적 효용성을 실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훈민정음 해례 본문에 나타나는 모든 자류(字類)를 추려 보면 처음 1443년에 제정하였던 28자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그것은 그 동안 운서 편찬과정에서, 또는 국어 표기를 통해서 거기에 필요한 자류가 더 요청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더 많은 글자를 만들어 내는 방법을 강구하였던 까닭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훈민정음은 더욱 갈고 다듬어졌으며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흠이 없는 것이 되었다고 믿기에 이르러 언문청에서 곧 간행에 착수, 46년(세종 28) 9월에 완성 ·반포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원본의 발견〉 반포 당시의 해례가 붙은 《훈민정음》 원본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1940년 7월에 경북 안동(安東)에서 발견되어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책은 첫 장과 둘째 장이 떨어져 나간 것(세종 御製 서문과 例義의 일부)을 복원하였다. 그 전까지는 세종 어제 서문과 예의만이 전해 왔으며, 《세종실록》에 실려 있는 한문 <실록본>과 《월인석보》 권두에 수록된 <언해본(諺解本)> 초간본으로 추정되는 판본이 최근 발견되어 서강대학에 보존되어 있고, 박승빈(朴勝彬)이 간수한 단행판각본(單行板刻本)으로 된 언해본, 그리고 일본 궁내성 도서료에 있는 사본인 <궁내성본>, 가나자와 쇼사부로[金澤庄三郞]가 간수하고 있는 사본인 <가나자와본>이 있다.
【글자로서의 훈민정음】 앞에서 기술한 훈민정음 체계는 당시 국어의 전면적 표기를 위하여 마련되었다. 따라서, 한국의 고유 요소(要素)와 외래 요소까지를 고려에 넣은 체계였던 것이다. 국어에서의 외래 요소는 주로 한자어였으므로 이 한자음의 표기를 위하여 마련한 것이 《동국정운》이었다. 이 《동국정운》의 한자음 표기는 우리 음운체계에 동화한 대로가 아니라 원음에 충실하려 했기 때문에 고유 요소 표기와의 사이에는 약간의 어긋남이 있었다.
|
외국인도 극찬하는 한글의 우수성
미국에 널리 알려진 과학전문지 디스커버리 지 1994년 6월호 「쓰기 적합함」이란 기사에서, ‘레어드 다이어먼드’라는 학자는 ‘한국에서 쓰는 한글이 독창성이 있고 기호 배합 등 효율 면에서 특히 돋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라고 극찬한 바 있다.(조선일보 94.5.25). 그는 또 ‘한글이 간결하고 우수하기 때문에 한국인의 문맹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고 말한다.
또 소설 『대지』를 쓴 미국의 유명한 여류작가 ‘펄벅’은 한글이 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글자이며 가장 훌륭한 글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종대왕을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극찬하였다(조선일보 96.10.7).
그런가 하면 시카고 대학의 메콜리(J. D. McCawley) 교수는 미국사람이지만 우리 나라의 한글날인 10월9일이면 매해 빠짐없이 한국의 음식을 먹으며 지내고 있다고 한다(KBS1, 96.10.9).
몇 년전 프랑스에서 세계언어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학술회의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학자들은 참가하지 않았는데, 그 회의에서 한국어를 세계공통어로 쓰면 좋겠다는 토론이 있었다고 한다(KBS1, 96.10.9).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세계가 인정하는 우리 글의 우수성을 정작 우리 자신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1986년 5월, 서울대학 이현복 교수는 영국의 리스대학의 음성언어학과를 방문하였다. 그때 리스대학의 제푸리 샘슨(Geoffrey Sampson) 교수는 한글이 발음기관을 상형하여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도 독특하지만 기본 글자에 획을 더하여 음성학적으로 동일계열의 글자를 파생해내는 방법(‘ㄱ-ㅋ-ㄲ’)은 대단히 체계적이고 훌륭하다고 극찬하였다.
그러면서 한글을 표음문자이지만 새로운 차원의 자질문자(feature system)로 분류하였다. 샘슨교수의 이러한 분류방법은 세계최초의 일이며 한글이 세계 유일의 자질문자로서 가장 우수한 문자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지난 1997년 10월1일, 유네스코에서 우리 나라 훈민정음을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1. 훈민정음을 창제한 사람
아래의 기록을 보면 훈민정음을 집현전 학자들이 창제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견해는 기록을 믿지 않는 결과를 나타낼 뿐입니다.
(1) ㄱ.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是謂訓民正音.(세종실록, 세종 25년 계해 12월)
ㄴ. 是月. 訓民正音成……(세종실록, 세종 28년 9월 상한)
ㄷ. 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正統十一年九月上澣
(<훈민정음>원본의 정인지 꼬리글)
(1ㄱ)은 훈민정음을 세종대왕께서 세종 25년(1443) 12월에 친히 창제하셨다는 기록이고, (1ㄴ)은 세종 28년(1446) 9월 상한(양력 10월)에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이 <훈민정음>의 완성으로 한글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이 일을 두고 아래와 같이 '반포'라고 한 것입니다.
(2) "정통 11년은 세종 28년 병인 (1446)에 해당하고, 상한은 곧 상순인 즉, 늦어도 10일에는 반포
되었다 하겠은즉, 9월 10일로써 그 반포일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446년 10월 9일이 되니, 이 날로써 한글날을 삼을 것이다……"(최현배,《한글갈》, 정음사,
1940/197), 39쪽에서 옮김)
2. <훈민정음> 원본 발견
<훈민정음 예의본>에 관해서는 <세종실록>과 <월인석보 (月印釋譜)> 첫 권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어 널리 알려졌으나, <훈민정음 해례본>은 1940년 발견될 때까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훈민정음 원본)은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책이다.
훈민정음 원본을 입수한 전형필은 6·25전쟁 때 이 한 권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난을 떠났으며, 잘 때에도 베개삼아 베고 잤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 책은 지금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록되어 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 정인지 서문(1446.9.상한)
鄭麟趾 序
有天地自然之聲 則必有天地自然之文. 所以古人因聲制子 以通萬物之情
以載三才之道 而後世不能易也. 然四方風土區別 聲氣亦隨而異焉.
盖外國之語 有其聲而無其字. 假中國文字以通其用 是猶 鑿之 也.
豈能達而無 乎. 要皆各隨所處而安 不可强之使同也. 吾東方禮樂文章 擬華夏.
但方言之語 不與之同. 學書者患其旨趣之難曉 獄者疾其曲折之難通.
昔新羅薛總 始作吏讀 官府民間 至今行之. 然皆假字而用 或澁或窒.
非但鄙 無稽而已 至於言語之間 則不能達其萬一焉.
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象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犀七調. 三極之義 二氣之妙 莫不該括
以二十八字而轉換無窮 簡而要 精而通.
故智者不終朝而會 愚者可浹旬而學 以是解書 可以知其義.
以是聽訟 可以得其情. 字韻則淸獨之能辨 樂歌則律呂之克諧.
無所用而不備 無所往而不達. 雖風聲鶴 鷄鳴狗吠 皆可得而書矣.
逐命詳加解釋 以喩諸人.
於是 臣與集賢殿應敎臣崔恒 副敎理臣朴彭年 臣申叔舟 修撰臣成三問
敦寧府注簿臣姜希顔 行集賢殿副臣撰李塏 臣李善老等 謹作諸解及例
以敍其傾槪. 庶使觀者不師而自悟.
若其淵源精義之妙 則非臣等之所能發揮也. 恭惟我殿下
天 之聖 制度施爲超越百王. 正音之作 無所祖述 而成於自然.
豈以其至理之無所不在 而非人爲之私也. 夫東方有國 不爲不久
而開物成務之大智 盖有待於今日也歟.
正統十一年九月上澣. 資憲大夫禮曹判書集賢殿大提學知春秋館事世子右賓客
臣鄭麟趾拜手稽首謹書.
〈鄭麟趾序 解釋〉
(세상에)천지자연의 (이치에 맞는)소리가 있다면 반드시 천지자연의(이치에 맞는) 글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중국에서는) 옛 사람이 (그)소리에 따라서 (거기에 맞는) 글자를 만들어서, 그리하여 (그것으로써) 온갖 사물의 실상(實相)과 통하게 하였고, (그것으로써) 삼재의 도리를 책에 싣게 하니, 후세 사람이 능히 (이를) 바꾸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계는 기후와 토질이 (서로) 나누어져 있으며, 말소리의 기운도 또한 (이에)따라서 서로 다르다. (그런데) 대개 중국 이외의 나라말은 그 말소리는 있으나, 그 글자는 없다.
(그래서) 중국의 글자를 빌어서, 그리하여 그 사용을 같이하고 있으니, 이는 마치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낀 것과 같이 서로 어긋나는 일이어서 어찌 능히 통달해서 막힘이 없을수 있겠는가? 요컨대 (글자란) 모두 각자가 살고 있는 곳에 따라서 정해질 것이지, 그것을 강요하여 같이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동방은 예악(禮樂),문장등 문물제도가 중국에 견줄만하나 다만 방언 이어가 (나라말만은) 중국과 같지 않다. (그래서) 글 배우는 이는 그 뜻의 깨치기 어려움을 근심하고 법을 다스리는 이는 그 곡절의 통하기 어려움을 괴롭게 여기고 있다.
옛날, 신라의 설총이 처음으로 이두글자를 만들었는데, 관청과 민간에서는 이제까지도 그것을 쓰고 있다. 그러나, 모두 한자를 빌어서 사용하므로, 어떤 것은 어색하고 어떤 것은 (우리 말에)들어맞지 않는다. 비단 속되고 이치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말을 적는데 이르러서는 그 만분의 일도 통달치 못하는 것이다.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비로소 정음 28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의(例義)를 들어 보이시고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지으셨다. 이 글자는 상형해서 만들되 글자 모양은 고전(古篆)을 본떴고, 소리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였으므로 음은 칠조에 맞고, 삼재의 뜻과 이기(二氣,陰陽)의 묘가 다 포함되지 않은 것이 없다.
(게다가)이 28글자를 가지고도 전환이 무궁하여 간단하고도 요긴하고 정(精)하고도 통하는 까닭에,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 아침을 마치기도 전에 (이를) 깨우치고,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 이 글자로써 한문을 풀면 그 뜻을 알 수 있고, 이 글자로써 송사를 심리하더라도 그 실정(實情)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한자음은 청탁을 능히 구별할 수 있고, 악가(樂歌)의 율려(律呂)가 고르게 되며, 쓰는 데 갖추어지지 않은 바가 없고,(어떤 경우에라도) 이르러 통달하지 않는 곳이 없다. 바람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일지라도 모두 이 글자를 가지고 적을 수가 있다.
드디어 (세종께서) 저희들에게 자세히 이 글자에 대한 해석을 해서 여러 사람들을 가르치라고 분부하시니, 이에 신(臣)은 집현전 응교 최 항, 부교리 신 박팽년, 신 신숙주, 수찬 신 성삼문, 돈녕부 주부 신 강희안, 행(行)집현전부수찬 신 이개, 신 이선로 등과 더불어 삼가 여러 해(解 )와 예(例)를 지어서 이 글자에 대한 경개를 서술하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우치도록 바랐사오나, 그 깊은 연원이나 , 자세하고 묘한 깊은 이치에 대해서는, 신들이 능히 펴 나타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인으로서 지으신 법도와 베푸신 시정 업적이 백왕(온갖 임금)을 초월하여, 정음을 지으심도 어떤 선인(先人)의 설을 이어 받으심이 없이 자연으로 이룩하신 것이라.
참으로 그 지극한 이치가 들어 있지 아니한 데가 없으니, (이는) 어떤 개인의 사적(私的)인 조작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대저 동방에 나라가 있음이 오래 되지 않음이 아니나, 문물을 창조하시고 사업을 성취시켜 주실 큰 지혜는 대개 오늘을 기다리심이 계옵셨구나!
정통 11년 9월 상한, 자헌대부· 예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지춘추관사· 세자 우빈객,신 정인지는 두 손 모아 절하고 머리 조아려 삼가 씀.
●훈민정음의 창제 배경, 동기, 목적
(1) 시대 배경
조선은 고려의 여러 폐단을 개혁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국가 지도이념으로서 '규교'를 책택. 한편으로 사당주의(事唐主義)에서 탈피, 숭명정책(崇明政策)으로 전환했다.
세종조에 이르면 유교의 확고한 기반이 갖추어인다. 세종은 집현전(集賢殿)을 설치(세종2년 3월)하여 유교교육과 새로운 제도의 조사 연구에 힘을 쏟았다. 이 때의 정치와 학문의 기본은 명실공히 유교이념(儒敎理念)과 성리학(性理學)이었다.
유교에 대한 관심의 고조는 필연적으로 한문에 대한 연구를 수반했다. 아울러 國字가 없었던 시기에 나랏말의 필요성도 느끼게 되었다.
(2) 이론적 배경 : 운학(韻學)과 성리학, 역(易) 사상
조선의 국어.국자에 대한 연구가 동양의 근본 사상이었던 역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는데, 이는 모든 문자 및 음성의 생성과정을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으로 풀이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근본 사상은 훈민정음 해례의 '제자해(制字解)'에 잘 나타나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중국의 운학이 창제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당시 세종은 운학의 대가였을 정도로 이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 중국 운서를 수입하기도 하고 이를 복각하기도 했다.
---운서(韻書)는 그 시대의 한자음을 기준 -- 자모와 운모(韻母)별로 분류 정리한 일종의 한자발음사전
대표적인 운서는 [홍무정운(洪武正韻)]으로 세종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명은 정책적으로 운학 연구를 중시했고, 이에 칙명으로 [홍무정운]을 편찬한 것이다.
당시 조선의 운학 연구를 왕성하게 한 원인은 유교정책이었다. 정책의 구현 방책으로서 운서를 수입하고 연구했던 것인데 여기에 세종의 호학(好學)과 더불어 하나의 시대적 연구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 [동국정운(東國正韻)] (--- <동국정운>)이다.
---세종 26년. 2월, [고금운학거요(古今韻學擧要)]를 번역하는 데서 비롯됨
둘째, 송의 성리학이 배경이 되었다. 당시 성리학은 명 초기에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고려말에 안향에 의해 도입, 조선조에 그대로 계승되어 정치이념, 학문의 원리로서 역할을 다했다. 이때에 명에는 3대전(大全)이 있었는데, [사서대전(四書大全)], [오경대전(五經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성리대전]이었다. (강신항 교수 견해)
---[성리대전]은 1415년에 명의 제3대 성조때 출간, 4년 후 세종 원년에 전래된 책임
훈민정음 해례의 음성이론이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및 여기에 대한 여러 선비들의 주석과 일맥 상통하는 점이 많다. 해례의 음성이론 뿐 아니라 여러 운서의 서문(序文) 등은 일반적 이론에서는 주자 등의 이론을, 성음(聲音)이론에서는 앞의 [황]를 바탕으로 했다.
(1) 강신항의 견해
▲표면적 동기
1) 표기수단을 갖지 못했던 백성들에게 표기 수단을 만들어 주기 위해
2) 문자가 없는 국가적 체면을 생각해서
3) 이두(吏讀) 사용의 불편 해소
4) 애민정신(愛民精神)에서
* 표면적 이유를 뒷받침하는 문헌들
. [훈민정음] 어제 서문
. [훈민정음] 정인 지 후서(後書)
. 강희맹의 [보간재집(保間齋集)] 권 11 부록 행장(行狀)
. 최만리의 반대 상소에 대한 세종의 답변 내용
▲이면적 동기 : 한자음 정리를 위한 언어정책적인 면
1) 한자음의 혼란 언급 : [동국정운] 서(序)(신숙주, 1447)
於是 調以四聲 定爲 九十一韻 二十三字母 以御製 訓民正音 定其音 又, 於質勿諸韻 以影補來 因俗歸正 舊習 謬 至是而悉革矣
2) 세종의 한자음 정리에 대한 고민
* 운회(韻會) 번역 : 세종 26년 2월 14일
---세종 26년 2월 20일에 최만리(崔萬理)의 반대상소가 있었음
* 동국정운 편찬 : 세종 29년 9월
* 홍무정운 역훈(譯訓) : 세종 말 ~ 단종
* 사성통고(四聲通攷) 편찬 : 세종 말 ~ 단종
(2) 김완진(金完鎭)의 견해 : 훈민정음 서문의 신중한 검토 방법으로서 동기를 밝힘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
국어표기에 적합하지 못한 기존의 문자체계인 한자에 대체될 민족 문자로서의 훈민정음 제작을 의미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훈민정음]만으로 적은 문헌이 없다.
이를 이원론적인 언어.문자 정책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 즉 훈민정음만을 쓰겠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문자생활에 참여하지 못하는 백성을 참여시키자는 데 기본 의도가 있다.
* 龍飛御天歌 :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를 하지 않음
* 月印千江之曲, 釋譜詳節 : 종교적 내용의 서적으로 대중적인 배포가 목적이었으므로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표기함
---- 세종이 생각한 민족의 문자 생활은, 正音과 漢字의 조화로운 병용을 목적으로 했음
예) 한자음 개신(改新) 작업, 훈민정음 해례 합자해의 혼용
(3) 유창균의 견해 : [신고 국어학사](1985)
1) 언어와 문자의 불일치에서 오는 여러 모순을 제거함
(한자는 구조적으로 한국 언어에 맞지 않았으므로 고유문자 창제가 필요)
2) 모든 국민에게 문자 이용의 혜택을 고루 입게 하자는 데 있음
(한자는 지식인에게 적합했던 문자 체계였기에)
3) 선진문화의 섭취에 도움이 됨
( [동국정운]과 [홍무정운역훈]의 편찬 )
(4) 이기문의 견해 : 어제(御製) 서문(序文) 검토
1) 훈민정음의 창제는 '편민(便民)'과 '훈민(訓民)'에 있음
* 한자음 표기도 지금의 외래어 표기에 비유하여 국어표기의 일면으로 설명
예) 해례의 용자례(用字例)에서 국어표기에 필요한 'ㅸ'은 등장하나, 한자음 표기를 위한 'ㆆ '은 오히려 제거됨
2) 이두 번역의 불편함을 해소
: 세종 자신의 국자의 필요성에 대한 절실한 경험
(5) 강길원의 견해 : 훈민정음 창제의 당초목적에 대하여(국어국문학 55-57호, 19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