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명으로 풀어본 한국사
● 송파구 송파동의 유래
-홍수로 잠겨버린 마을-
송파동松坡洞은 "사전도보다 연파곤淵波昆이 물살이 빠르지 않으니 나루터로 하겠다는 경기 관찰사의 진언 이후 연파곤이 소파곤으로 변음하였다가 소파리疎波里로 된 것이 차츰 송파진으로 불리워졌다는 설과 옛날에 한강변(송파 나루)을 가려 면 소나무가 빽빽하게 서 있는 언덕을 넘어 갔기에 '소나무송松, '언덕 파坡자를 써서 송파라 했다고 한다.
한편 옛날에 이곳에 사는 어부가 매일 한강변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였다 하루는 물위에서 고기 배를 타고 낮잠을 자던 중 이곳의 소나무가 서 있었던 언덕 한쪽이 패어 떨어지는 바람에 잠이 깨고 난 뒤로 이곳을 송파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송파 마을은 원래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선 리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 이곳에 시장도 섰는데 어느 때인가 홍수로 현재 암사동인 바위 절의 독포禿浦, 곧 미음美陰혹은 하진참下津站으로 이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1647년(인조 25)과 1823년(순조 23)에 큰 홍수를 만나 다시 수재를 입자 석촌호 남쪽인 삼전도 동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송파는 1925년 대홍수 이전까지 지금의 송파나루공원 남쪽에 위치한 한강변의 부촌으로 약 270호가 살고 있었으나 홍수로 물에 잠겨버렸기 때문에 구송파라 한다. 이로써 주민들은 현재 송파동 지역인 가락리(가락동 410번지)로 피신하여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전에 살았던 곳의 이름을 잊지 못하여 송파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일명 신송파라 하였다. 지금의 위치는 송파1동 59번지 일대다.
홍수로 수재를 입기 전까지의 송파는 포목과 우마를 사고 파는 거래처였으며 삼남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세의 환전을 호조에 공납하던 곳이었다. 송파와 삼전도 일대는 외방의 상품이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이 되었으므로 일찍부터 장시가 발달하여 독자적인 큰 상설 시장이 형성되었고 15대 향시鄕市중의 하나인 송파장이 있던 곳은 현재 석촌호의 서호 남쪽 언덕에 있었다. 이곳은 한강을 오르내리는 수운으로 선원들이 운집하여 장날이면 송파 나루터에 80여 척이 정박하였으며, 육상 운재運載로는 전국에 돌아다니던 말 행상들이 몰려들었다. 송파장에서 물건을 실은 배는 주로 서빙고와 마포로 갔으며 또한 일제 강점기에 송파장은 우시장牛市場으로 유명하여 3남 지방에서 소장사들이 소를 끌고 올라와 이곳에서 거래하였다. 이때 서울의 정육업자들은 소를 사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들었는데 일제가 1929년 동대문 밖 숭인동 현 숭인초등학교 자리에 도축장을 신축하면서 송파 우시장은 쇠퇴하고 말았다.
송파장이 번창할 무렵에는 시장의 번영을 위해 매년 대소 명절과 장날에 씨름대회, 광대 줄타기, 산대놀이를 공연하였으며 송파산대놀이'는 1973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특히 송파산대놀이는 상업지역에서 성행하였던 탈꾼패 놀이로 볼 수 있다.
-도미나루에 전하는 도미와 아랑 이야기-
송파동에는 백제 초의 금슬 좋은 부부였던 도미와 아랑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부터 약 1850년 전 삼국시대 초기 백제의 제4대 개루왕 때 백제의 서울 위례성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에 신혼의 도미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 도미는 목수로서 비록 자체는 보잘 것 없지만 사람됨이 준수하고 의리를 알았으며 아내 아랑은 용모가 아름답고 언행에 품위가 있으니 두 사람은 의좋은 부부이자 품행 있는 젊은 남녀로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행복한 그들 부부에게 뜻밖의 불행이 닥쳐왔다. 아랑의 뛰어난 미모가 백제 온 나라 안에 퍼져 모르는 이가 없게 되자 이 소문은 여색을 좋아하는 개루왕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개루왕은 아랑을 보고자 그녀를 부르도록 명한 것이다. 그러나 아랑은 왕이 보낸 사자에게 벼루에 먹을 갈아 왕에게 올리는 글을 썼다.
"왕은 백성의 부모라 어찌 부르시는 명을 거역하오리까마는 소첩은 남편이 있는 몸이라 남편의 허락이 없이는 부르시는 왕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개루왕은 아랑의 편지를 읽고 더욱 그녀를 자기 손아귀에 넣고 싶었다.
그러나 연약한 여인을 군사를 시켜 잡아오라고 하기에는 왕의 위신이 있는데다가 또 백성들의 웃음을 사기 쉬우므로 개루왕은 고심했다. 왕은 궁리 끝에 궁궐을 짓고 있는 아랑의 남편 도미를 불러들이기로 했다. 개루왕은 도미를불러놓고
"네 아내가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미인이라지."
하였다. 이 말에 도미의 가슴은 섬뜩했다.
"잘못 전해진 이야기로 알고 있습니다."
"범절이 바르고 지조가 굳다지."
더 이상 아무런 말이 없는 도미에게 개루왕이 말하였다.
"여인의 으뜸가는 미덕은 정절이지만 나는 절개가 굳은 여자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더욱이 미인일수록 유혹에 빠지지 않는 여인이 없으니 네 아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말을 마친 개루왕은 빙긋 웃으며 도미를 내려다보았다.
모욕적인 왕의 말과 행동에 젊은 도미는 당황하고 흥분하였다. 아랑에 대해 애매한 누명을 씌우는 것이 분했던 도미는
"사람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소인의 아내 같은 사람은 죽어도 두 마음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는 도미가 평소 아내를 믿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신 있게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도미의 아내에 대한 자신 있는 말은 도리어 왕의 불순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개루왕은 도미의 아내가 얼마나 아름답고 정결한지를 실제로 시험해 보고 싶었다. 도미에게는 궁중의 일을 맡겨 머물게 한 다음, 사람을 시켜 도미의 집에 왕이 거동할 것이라 알리고 군신을 시켜 왕의 곤룡포를 입게 하여 도미의 집으로 보냈다. 아랑의 정조를 시험한 것이다. 드디어 왕의 위의를 갖춘 가짜 왕이 밤에 도미의 집에 도착하여 아랑을 불러 말하였다.
"내가 너의 아름다운 모습을 전해 듣고 그리워한 지 오래 되었다. 오늘 내가 도미와 내기 장기를 두어서 이겼기 때문에 내일 너를 궁중으로 데려가게 되었다. 지금부터 너는 내 여자이니 나를 따라야 하느니라."
하면서 동침을 강요하였다 아랑은 의외의 일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임금님께서는 거짓이 없는 일입니다. 제가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안으로 들어가소서. 제가 의복을 갈아입고 들어 가겠습니다."
하고 가짜 왕을 방안으로 안내하였다. 아랑은 그리고는 한 여종을 단장시켜 하룻밤을 지내게 하였다. 슬기 있는 아랑은 기지를 써서 위기를 모면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튿날 이 사실이 알려지자 개루왕은 크게 노하여 도미에게 죄를 씌워 그 벌로 두 눈을 빼고 송파강松坡江으로 끌고 나가 작은 배에 실어 띄워 보냈다.
한편 아랑은 여종을 방에 들여보낸 후 바로 집을 나와 남의 처마 밑에서 밤을 지새우다 날이 밝자 궁궐을 짓고 있던 도편수에게 남편의 안부를 알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궁중에 들어갔다 나온 도편수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식을 들려주었다. 남편이 당한 일을 듣고 실신했던 아랑은 정신이 들자 도미를 찾아 송파 나루로 쫓아갔다.
그러나 도미의 소식을 묻는 바람에 아랑은 개루왕이 배치해 놓은 군사들에게 잡히고 말았다.끌려온 아랑을 보고개루왕은
“네가 네 죄를 알겠느냐?"
언성을 높이면서 도미가 중죄로 처벌된 사실을 알리고 아랑에게 궁중에 들어와서 궁인이 될 것을 명하였다. 아랑은 참으로 눈앞이 캄캄하고 정신이 아찔할 뿐이었다. 아랑은 개루왕에게
"왕명을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주인 잃은 몸이 의지할 곳이 없으니 어찌 혼자 살아가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염려하지 마소서. 다만 지금은 몸이 깨끗하지 못한 때이오니 며칠만 기다려 주시면 몸단장하여 들어오겠습니다."
말하였고 왕은 의심 없이 내보냈다.
아랑은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면서 송파강가로 나가 호천통곡하였다. 강에는 물결이 일렁일 뿐 남편은 없었다. 이때 배 1척이 상류에서 떠내려와 그녀가 서 있는언덕 아래 머물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랑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 배위에 올라탔고, 아랑이 배에 오르자 배는 강을 따라 흘러 내려갔다.
아랑을 태운 배가 닿은 것은 천성도라는 섬이었다. 지친 몸으로 섬에 발을 딛었을 때 푸른 언덕 위에 남편 도미가 있었다. 서로 알아본 두 사람은 얼싸안고 울다가 다시 배를 타고 내려가서 고구려 땅 산산蒜山아래 이르러 여생을 단란하게 보냈다고 한다.
송파나루공원(석촌호수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