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혹하여 지은 업이 과(果)를 받을 때에는 변해서 능히 익으므로 이숙이라 하니라. 과가 그를 따라 생기므로 이숙생이라 하며, 그 얻는 과가 원인과는 다른 종류로 익게 되므로 이숙이라 하니라.
惑所造業이 至得果時에 變而能熟故로 名異熟이니라 果從彼生일새 名異熟生이요 彼所得果가 與因別類而是所熟故로 名異熟이니라. [俱舍論 ; 大正藏 29 p. 9상]
이숙(異熟)이라는 것은 '변해서 익는다[變而熟]'라는 뜻입니다. 즉 원인은 선이나 악인데 과보는 선이나 악이 아닌 무기(無記)를 받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선이나 악을 지었는데 그 과보는 부귀나 빈천으로 나타나 인과가 서로 달리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사론은 소승불교의 논서로서 대승불교 유식계통의 논서는 아니지만, 이숙에 대한 설명을 유식학보다 먼저 하였으므로 그 사상의 근원을 보이기 위해 여기에 인용한 것입니다.
(4) 유가사지론
이 중에서 여러 식을 모두 심(心)과 의(意)와 식(識)이라고 한다. 만약 가장 수승한 아뢰야식에 의하면 심이라 한다. 왜냐하면 이 식이 능히 일체법의 종자를 모으기 때문이며 언제나 집수의 경계를 반연하고 알 수 없는 한 무리 기세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니라. 말나식을 의(意)라 하니 언제나 아(我), 아소(我所), 아만(我慢) 등을 집착하고, 사량을 성품으로 삼는다. 나머지 식을 식(識)이라고 하는데 경계에서 요별함을 특징으로 삼는다.
이와 같이 세 가지가 있는데, 유심위(有心位) 중에서는 심·의·의식이 언제나 함께 있으며 유전하느니라.
此中諸識을 皆名心意識이요 若就最勝阿賴耶識하면 名心이니 何以故오. 由此識이 能集聚一切法種子故며 於一切時에 緣執受境하고 緣不可知一類器境하니라. 末那를 名意이니 於一切時에 集我我所及我慢等하여 思量爲性이요 餘識을 名識이니 謂於境界에 了別爲相이니 如是三種이라. 有心爲中엔 心意意識이 於一切時에 俱有而轉하니라.
[瑜伽論 ; 大正藏 30, p. 651 중]
아뢰야식의 움직임이라는 것은 대단히 미세하고 난해하여 보통의 심식으로는 도저히 사량할 수 없고 분별할 수 없으며 지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알 수 없다[不可知]'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나식이 아(我)와 아소(我所)를 집착하고 사량함은 잠재적으로 사량하는 것을 말하며, 만약 드러나게 사량한다면 제6식의 작용에 의한 것이지 말나식의 성질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뿌리깊은 번뇌인 아(我), 아소(我所)와 아만(我慢)등을 집착하며 끊임없는 생각과 헤아림을 그 성품으로 삼는 것입니다. "유심의 가운데는 심·의·의식이 언제나 함께 있으며 유전하느니라"는 말은, 마음의 경계를 열지 못한 우리가 쉽사리 이해할 수는 없지만 여하튼 아뢰야식이 근본이 되고 말나와 의식이 함께 뭉쳐서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의식뿐이지만 그것을 내면적으로 운전하는 말나와 아뢰야도 언제든지 의식과 함께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때는 이와 같지만 발심수행하여 제8지 보살의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면 의식이 완전히 떨어지고 말나도 거의 떨어져서 제8 아뢰야만 혼자 남게 됩니다.
(5) 섭대승론
이 화합식이 일체 종자식이며 곧 아뢰야식이니라. 그러므로 이 화합식의 성취는 의식이 아니고 다만 이숙식이니 이것이 일체종자식이니라.
若此和合識이 是一切種子識이며 卽是阿賴耶識이니라 ......是故로 成就此和合識은 非是意識이요 但是異熟識이니 是一切種子識이니라. [攝大乘論 ; 大正藏 31 p. 126상]
여기에서 말하는 '화합'이란 일체종자의 화합을 의미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