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도 비밀한 뜻도 모두 자신에게 있다
<65> 조대제 도부에게 보낸 대혜 선사의 답장 ①-2 (끝)
사무치게 공부해야 근기 둔함 알아
마음으로 익힌 공부는 자신만 안다
[본문] 결단코 금생에 쳐서 사무치게 하려면 부처도 의심하지 말고 조사도 의심하지 말며, 삶도 의심하지 말고 죽음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결정적인 믿음과 결정적인 뜻을 갖추어서 순간순간마다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일과 같이 하십시오. 이와 같이만 공부를 지어가서 쳐서 사무치지 못할 때라야 바야흐로 근기가 둔함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당장에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근기가 우둔해서 금생에 쳐서 사무치지 못한다. 우선 부처의 종자나 심어서 인연을 맺겠다’고 한다면 이것은 가보지도 아니하고 이르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절대로 옳지 않습니다.
[강설] 선불교에서 말하는 화두를 들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한 뒤, 깨달음을 성취하는 일은 수많은 불교공부 중에서 가장 어려운 공부다. 화두를 드는 순간에는 부처도 의심하지 말고 조사도 의심하지 말고 생사도 의심하지 말고 오직 결정적인 믿음과 결정적인 뜻이 갖추어 져야 한다. 자신이 우둔하다든지 영리하다든지 하는 생각도 있어서는 안 된다.
처음에는 조용한 환경에서 시작하여 익숙해지면(靜中一如) 다음에는 조용하고 시끄러움에 아무런 차별이 없이 화두일념(動靜一如)이 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꿈을 꿀 때도 화두가 일념(夢中一如)이 되어야 한다. 다음으로는 심한 병고를 앓을 때, 즉 마취 없이 수술을 하거나 심지어 팔을 자르고 배를 갈라도 화두가 일념(病中一如)이 되어야 한다. 최후로는 깊이 잠이 들었을 때나 깨어 있을 때도 일념(寤寐一如)이 되어야 한다. 나아가서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의식할 수 없는 경지(生死一如)까지 이르러야 비로소 화두를 제대로 든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수 십 년을 공부해도 하루에 10분이나 20분 정도 화두를 드는 둥 마는 둥 하고, 나머지 시간은 온통 세속적인 번뇌 망상과 졸음으로 세월을 보낸다면 이것은 공부가 아니다. 반드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리라. 차라리 대혜 선사가 꾸짖은 말씀과 같이 부처의 종자나 심고 복이나 지으며 공덕이나 쌓는 일이 오히려 낫지 않을까도 생각해 볼만하다.
[본문] 내가 매양 이 도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공부하는데 힘이 점점 덜리는 것을 깨달을 때가 곧 불법을 배우는데 힘을 얻는 것이다”라고. 자신이 힘을 얻은 것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며, 또한 힘을 잡아내어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노행자(盧行者)가 도명상좌(道明上座)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대가 만약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반조하면 비밀한 뜻은 모두 그대에게 있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비밀한 뜻이란 것은 곧 일상에서 힘을 얻는 것이며, 힘을 얻는 것은 곧 힘이 덜리는 것입니다.
[강설] 사람이 마음으로 익힌 공부는 자신만이 안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도 없으며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갈 수도 없는 것이다. 육조혜능 대사가 행자시절에 있었던 사건을 예로 들었다. 오조홍인 대사에게 인가를 받고 그 신표로 가사와 발우를 받아서 대중들 모르게 절을 빠져나왔는데 그것을 빼앗으려고 가장 먼저 달려 온 사람이 도명상좌였다.
도명상좌와 마주친 노행자는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不思善不思惡). 바로 이러한 때에 어떤 것이 그대의 본래 면목인가?”라고 하였다. 그 말에 도명상좌는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이제 하신 그 비밀한 말씀과 비밀한 뜻 밖에 또다시 어떤 비밀한 뜻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그대가 만약 자기의 본래면목을 반조하면 비밀한 뜻은 모두 그대에게 있다”라고 덧붙인 법문이다.
깨달음도 비밀한 뜻도 모두가 자기 자신에게 있다. 나 자신 외에 다른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도리이다. 그러므로 전해주느니 전해 받느니 하는 말은 모두가 편의상 부르는 말일뿐이다.
[출처 : 불교신문 2891호/2013년 2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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