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시 신월동. 여순사건의 발생지. 당시 국방경비대 14연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1948년 10월 19일 밤, 제주 4.3 진압을 위한 출동명령이 내려지자, 그 부당함에 항명한 군인들이 저항을 시작했던 곳. 현재는 한화 여수공장이 있는 곳(예전에는 한국화약)에 순례단이 모였다. 광주에서 강정채 은빛님이 오셨고, 도법스님도 함께 했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비극적인 역사가 있는 곳이지만, 지금은 그런 과거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푸르른 숲과 한화여수공장의 건물만이 고적하게 서있었다. 한화라고 쓰여진 건물 뒤로 보이는 굴뚝만이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공장굴뚝이라고 했다.
주철희 선생님의 안내로 여수안내를 방공호와 무기고였던 곳으로 들어가는 순례자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시설로 일본해군이 사용했다. 이곳에 무기고와 탄약고가 있었는데, 14연대에서 봉기를 일으킨 군인들이 이곳을 먼저 점령했다고.그들은 애국인민에게 호소함이라는 성명서에서 동족상잔 절대반대와 미군즉시철수를 주장하였다.
차갑고 음습한 지하벙커. 방위시설이 있는 곳이라 시민들의 관람이 제한되어 있는데, 개방의 방법을 찾아서 시민교육장으로 활용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리고 여수서초등학교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주철희 선생님의 본격적인 여순사건 설명이 있었다.
... 10월 26일날 완전하게 여수시내 대부분 지역이 토벌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시내 한복판도 27일에는 완전히 점령되었다. 이 일은 대한민국 최초의 육해공 합동작전이었다고 한다.
여순사건 진압 이후 광풍처럼 몰아닥친 피바람. 여순사건 진압을 완료한 진압군과 경찰은 27일부터 시민들을 가까운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게 해서 동조자 색출작업에 나서게 된다. 이 서초등학교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여순사건 동조자를 가려낸다는 명목으로 실시된 부역자 심사가 시작되었다. 일명 "손가락 총" 한 방에 일가친적이 죽어가고 이웃은 적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적대적인 구도,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웃이 서로 반목하고 배신하도록 강요했던 가장 비인간적인 일들이 이렇게 시작되었고,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운동장에서 초등학생들이 체력단련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도한다.
"부디 이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만은...!"
10월 26일, 27일 이틀간의 무차별적인 화재로 여수시내 전체가 불에 탔고, 사람들은 아비규환에 휩싸였다.
군산이나 목포와 같은 항구도시와 달리 여수에 일제강점기 시설이 없는 이유는 바로 이때의 화재 때문이라고 한다. 그때 유일하게 주춧돌만 남아있던 건물이 있는데, 제일은행건물. 이후 50년대에 새로 지어진 건물인데, 그 건물에 조선식산은행이라고 쓰여져 있다 보니, 사람들이 일제시대 건물로 오해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그 잘못된 정보로 지금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까지 되어 있다고.
서초등학교를 나와 봉기군과 경찰이 최초로 총격전을 벌였다는 충무지서, 당시 여수우체국과 금융조합 등이 있던 여수시내 중심지로 걸었다. 제14연대 병사들이 여수역으로 향하던 길을 따라 걸었다.
아래는 진남관앞이다. 조선시대 객사건물로,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사용하던 진해루라는 누각이 있던 곳이었는데,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없었고, 이후 삼도수군통제사로 왔던 이시언이 75칸의 거대한 객사를 지어 진남관이라 이름짓고, 수군의 중심기지로 사용했다고 한다. 보수공사중이었다.
이어서 순례단이 도착한 곳은 여수중앙초등학교. 여순사건을 조사하면서 악명이 높았던, 5연대장 김종원의 부대가 주둔하면서 무참한 학살을 자행했던 곳이다.
주철희 선생님의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중앙초등학교 건물 뒤로 오른쪽 뒷편으로 건물이 더 보이는데, 이곳은 여수여중이다. 다음은 주철희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
당시 뉴스보도를 잘 살펴보면 이 사건을 정부가 어떻게 왜곡해서 다루었는지를 알 수 있다. 즉 처음에는 제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도했는데, 그렇게 되면 군인반란이 되니 그 책임이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10월 27일 이후 보도내용이 달라졌다. 전남지역 좌익분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일부(!) 군인들이 동조했다고. 그것은 반란의 주체가 민간인 좌익분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왜곡을 믿게 하려고 정부는 반란의 총지휘자로 여수여중 송욱 교장을 지목하여 온갖 고문을 자행했고, 끝내 그는 행방불명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공작정치의 끝판왕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여순사건과 이 현장을 지켜봤던 당시 여수여중 국어교사였던 전병순이 여순사건을 그린 <절망 뒤에 오는 것>이란 소설을 썼다고 한다. 여순사건과 관련된 노래도 소개해주셨다. 우리 나라 최초의 금지곡인 남인수의 <여수야화>, 그리고 여수경찰인 강석호가 작곡한 '여수부르스', 전북 경찰인 정성수가 작곡한 '산동애가'라고 한다. 경찰의 신분이었지만 현장에서 사건의 진실을 본 이들은 어떻게든 진실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옛동굴처럼 보이는 마래터널을 지나 만성리로 갔다. 여수 마래터널은 암반을 쪼아내어 만든 터널인데, 일제 강점기 주민들을 강제동원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마래터널을 지나 조금만 가면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특이한 것은 위령비의 뒷면이었다.
"1948년 10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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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19일"
보통은 비를 세우게 된 이유와 경위 등이 적히게 마련인데, 점6개만 찍혀 있다. 사연은 이랬다. 2009년 여수시가 위령비를 세워주면서 '학살'이라는 단어를 금지했기 때문에 유족들의 못다한 말과 한을 점6개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위령비에서 조금 더 걸어가서 계단을 오르면 만성리 형제묘가 있다. 얼른 생각하면 형제가 묻혔나 싶은데 그게 아니었다. 당시 군인들은 부역자로 지목된 민간인 125명을 이곳으로 끌고 와서 학살한 후 시체를 불태웠다. 산위에서 몰래 이 현장을 지켜본 어머니가 있어서 그때 상황을 증언했다고 하는데, 아들이 죽임을 당하고 불태워지는 장면을 어찌하지도 못하고 지켜봐야 했던 어머니의 마음은 상상조차 힘들다.
이렇게 무참한 학살사건이 지나간 후, 유족들은 시신을 수습하려고 했으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지내라는 뜻으로 비석을 세우고 '형제묘'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곳도 비석의 뒷면이 특이했는데, 비문이 없이 아래쪽에 '이정최문자쓰다'라는 글자만 있었다.
처음에 세워진 비석 뒷면에는 희생자 125명의 이름 새겨져 있었는데, 희생자 유족 가운데 한 분이 평생 좌익불순분자 집안으로 낙인찍혀 배척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희생자 이름을 지워버렸다고 한다.
형제묘에서 내려와 '한반도평화, 피어라'를 외쳤다. 다시는 이땅에서 전쟁은 안 된다. 그 이유를 증명해주는 여순사건 진실의 길을 걸으면 또 다시 새기는 결론이다.
순례에 함께 한 세 분의 은빛님. 좌로부터 이삼열, 강정채, 도법 은빛님.
여수블루스,노래를 배경으로 여순사건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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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식사를 마치고 도착한 곳은 신기동에 있는 갤러리카페 <가배목>. 벽에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주철희 선생님이 <여순항쟁과 국가>라는 주제로 오늘의 순례현장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못다했던 이야기들을 정리해주셨다.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자 하는 성심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열정적인 강의와 안내에 깊이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삼열 은빛님의 평화체제 구축의 길에 대한 강의로 전쟁이 없는 평화공존의 길을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고, 도법스님은 과거문제를 다루는 자세와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남북정상회담을 보세요. 만약 문재인 대통령이나 김정은 위원장이 과거문제에 대해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이것이 해결되어야만 대화하겠다고 했다면, 과연 남북 정상회담이 가능했을까요?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인내와 관용이 있어야 합니다.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감동하고 기뻐하는 것만으로는 평화가 오지 않습니다. 내안의 평화, 일상의 평화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통일이 된들 그게 평화로운 새길이 되겠어요.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 모두가 가족, 이웃, 지역사회에서 '우리안의 정상회담'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