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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답 시 讚歌 5편 (추가)
●10. 광화문 솟대
( 윤동주의 시 '참회록'의 회답 시)
인묵/김형식
세워 세워
너 자신을 세워
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우자
저 솟대 끝에
새 한 마리 앉아 있는 것 보이는가
볍씨주머니
솟대높이 달아매 놓은 것도 보이는가
새여
이 땅의 기운을 하늘에 전하라
씨알이여
인류의 생명을 살찌게 하라
9천 년
민족의 역사를 품어 안고
비상을 꿈꾸고 있는 솟대
세워 세워
너 자신을 세워
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우자
경거망동하지 말라
대마도는 우리 땅
독도는 대한민국의 땅
세워 세워
너 자신을 세워
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우자
경거망동하지 말라
솟대가 서있은 곳은
모두 다 우리 땅 대한민국의 땅
세워 세워
너 자신을 세워
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우자
광화문에 솟대를 세우자
~~~~~
ㅡ. 참회록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ㅡㅡㅡㅡㅡ
2016년 10 월 윤동주의 흔적을 찾아 인묵 김형식은 일본국 후쿠시마 감옥 근처를 헤매다가 지친 몸 벳부온천에 부리고 시 '윤동주'를 남긴다.
윤동주
인묵 김형식
물 건너
벳부온천은
계란 썩는 빨래터
동방국
화개동은
호리병 속에 별천지
물에 비친
이 사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 일본 벳부온천에 발을 담그니 계란 썩은 유황냄새가 코를 찌
른다. 물에 비친 내 얼굴이 왜 이렇게 부끄럽고 미워지는지, 지리산 화개동을 호리병 속의 별천지라 노래했던 신라의 최치원(崔致遠),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울부짖으며 70년 전 이곳 후쿠시마 감옥에서 죽어갔을 민족시인 윤동주(尹東柱)님이 어른거린다. 님은 또 자화상에서 "어쩐지
(우물에 비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했습니다. 벳부 유황온천에 발을 담그고 있는 나는 일본을 인정할 수 없어 물 건너"라고 적는다. 님을 생각하니 가슴 아프다.
또 어떤 시인은
그 어느 즐거운 날에
윤동주 시인이 쓴 한 줄의 참회록을 보지 못함이 참으로 안타깝다고 했다.
만 24세의 윤동주 시인은,
비록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라 잃은 슬픔과
그 암울한 시대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 참회하는 모습이..
그 어느 즐거운 날에,
하루하루를 별 볼일 없이 보내고 있는, 40대의 나를 부끄럽게 한다.
무슨 인생을 바라 살아왔던가.
나는 소망한다.
내일이나 모레나 어느 더 즐거운 날에,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가...,
라고 말할 수 있기를...
윤동주 시인의 시에는
시대의 아픔이 잔뜩 묻어있으면서도,
뜻대로 되지 않는 삶에 대한
나약한 인간의 고뇌도 사무치게 느껴지는 것 같아, 참으로 좋다고 했다.
~~~~~
※. 시. 광화문 솟대'는 인묵 김형식의 윤동주 시 '참회록'의 화답 시며 김시인의 제3시집 표제시다. 이 시집을 접하고 필자는 염통에서 찬바람이 빠져나가는 충격을 받았다. 우리 민족사를 돌아보면
우리 민족은 931회나 타민족의 침략을 받았다. 그중에 200여 회의 무력충돌이 있었으며, 전국토가 전화에 휩싸였던 때도 20여 회나
된다. 시인들이여,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했단 말인가. 부끄럽다. 김형식 시인은 뚜렷한 민족시인이다. 자랑스럽다. 민족시인 윤동주 님의 시 <참회록>은 저항(抗)의 시다. 님이 거울이라는 시적 대상으로 민족사를 조명하는 성찰의 시를 썼다면 김형식의 시 <광화문 솟대는 자존의 시다. 우리 심장의 피를 뜨겁게 달구는 시다. 솟대라는 시적 대상으로 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워 나가는 희망의 시를 쓴 것이다. 민족의 시인 김형식은 마침내 우리들의 민족광장 광화문에 드높게 솟대를
우뚝 세워 주었다. 고맙다, 詩人이여. "천년 민족의 역사를 품어 안고 비상을 꿈꾸고 있는 솟대/ 세워 세워 너 자신을 세워 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것. 그렇다. 일제에게 짓밟히고 빼앗기고 잃어버린 한민족사를 다시 찾자고 김형식은 우리들 가슴마다 광화문 솟대'를 세워 주었다. 그러면서 “세워 세워 너 자신을 세워/ 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우자"라고 목청껏 외친다. 암 세워야지, 광화문 한복판에 우리 저마다 솟대를 우뚝우뚝 세워야지. - <문학평론가 홍윤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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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윤동주 시인의 언덕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일제 강점기 저항 시인 윤동주(1917~1945) 시인을 기리는 이 언덕은 서울 종로구 청운동 인왕산 자락 청원공원 내에 자리해 있다. 시인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1941년 종로구 누상동에 있는 후배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했었는데 그는 이때 청운동과 누상동 일대를 산책하며 시상을 가다듬으면서 <서시>, <별 헤는 밤>, <또 다른 고향> 같은 대표작을 썼다고 한다. 청운동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들어선 이유이다. 저녁 무렵 하숙집 근처 이 언덕에서 해지는 서울 풍경을 바라보며 조국의 어두운 현실에 가슴 아파하면서 시상을 떠올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서시의 시비를 비롯해 가수 이승환과 그의 팬들이 기증한 소나무 10그루, 시인의 주옥같은 시를 새겨 넣어 눈으로 감상할 수 있게 한 돌계단 등으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서시의 시비 앞에는 ‘서울 밤 경’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데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야경 보기 좋은 곳임을 안내하고 있다. ‘윤동주 소나무’로 불리는 소나무가 위치 한 곳도 해넘이 구간으로 일몰을 감상하며 사색하기 좋은 곳으로 이름나 많은 사람들이 혼자서도 찾는 곳이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은 2012년 7월 용도 폐기된 청운 수도가압장을 리모델링해서 조성한 윤동주문학관과도 이어져 있으며, 맞은편에 창의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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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明東村):
동방을 밝히는 곳
이라는 이름의 마을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1945년 2월 16일)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아호는 해환(海煥)이다. 1917년 12월 30일 동간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함경북도 청진 시 포항동 76번지이다. 명동촌은 동간도의 척박한 땅이었지만 1899년 함경도 출신의 김약연, 김하규, 문병규 등이 140여 명의 식솔을 이끌고 동간도로 집단 이주한 후 윤동주의 조부인 윤하현 등이 합류하면서 '동방을 밝히는 곳(明東村)'이라는 뜻을 지닌 동간도 최대의 한인촌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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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약력
일제강점기에 짧게 살다 간 젊은 시인으로,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고민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그의 얼마 되지 않는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윤동주
출생-사망 1917.12.30 ~ 1945.2.16
활동분야문학
출생지북간도(北間島)
주요 작품〈서시(序詩)〉,〈또 다른 고향〉,〈별 헤는 밤〉
본문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으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아버지는 윤영석(尹永錫), 어머니는 김룡(金龍)이다. 1931년(14세)에 명동(明東) 소학교를 졸업하고, 한 때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大拉子) 학교를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자 용정에 있는 은진(恩眞) 중학교에 입학하였다(1933).
1935년에 평양의 숭실(崇實) 중학교로 전학하였으나, 학교에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폐쇄당하고 말았다.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光明) 학원의 중학부로 편입하여 거기서 졸업하였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쿄[立敎]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1942), 다시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1942).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43. 7),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나 복역 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유해는 그의 고향 용정(龍井)에 묻혔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으나, 그의 생은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고뇌하는 심오한 시인이었다. 그의 동생 윤일주(尹一柱)와 당숙인 윤영춘(尹永春)도 시인이었다. 그의 시집은 본인이 직접 발간하지 못하고, 그의 사후 동료나 후배들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의 초간 시집은 하숙집 친구로 함께 지냈던 정병욱(鄭炳昱)이 자필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발간하였고, 초간 시집에는 그의 친구 시인인 유령(柳玲)이 추모시를 선사하였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첫 작품으로 <삶과 죽음> , <초한대>를 썼다. 발표 작품으로는 만주의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가톨릭 소년(少年)》지에 실린 동시 <병아리>(1936. 11), <빗자루>(1936. 12), <오줌싸개 지도>(1937. 1), <무얼 먹구사나>(1937. 3), <거짓부리>(1937. 10) 등이 있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닐 때에는 《조선일보》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교지 《문우(文友)》지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이 있다. 그리고 그의 유작(遺作)인 <쉽게 써진 시>가 사후에 《경향신문》에 게재되기도 하였다(1946).
그의 절정기에 쓰인 작품들이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되었다(1948).
그의 짧은 생애에 쓰인 시는 어린 청소년기의 시와 성년이 된 후의 후기 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청소년기에 쓴 시는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 대체로 유년기적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겨울> <버선본> <조개껍질> <햇빛 바람> 등이 이에 속한다. 후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성인으로서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한편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깊이 있는 시가 대종을 이룬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써진 시> 등이 대표적인 그의 후기 작품이다. 그의 시비가 연세대학교 교정에 있다.
●11.歲慕에 붓을 세우다
(梅軒 윤봉길의사의 春雪甚寒
춘설 심한 <춘설에 몹시 추워서>의 화답 시)
인묵 김형식
새벽 찬
봄기운에
깨어나는 여 여명
아직도
동면인가
고목도 꽃을 내는데
세모에
붓을 세우니
홍안이 분분하도다
冬至가
지났으니
이 땅에 봄은 온다
조국은
꽃샘추위
임산부는 산통 중
기다리고
있습니다
呱呱의 그 울음소리
국토는
남북으로
국론은 좌와 우로
풍랑 속
일엽편주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대로는
안 됩니다
백 년을 내다봅시다
침묵하는 자
수수방관하는 자는
부역자요 부역자의 후손 들인가
껍데기 벗어던지고
빛을 향해 조국을 위하여
다시 태어나자
풍랑 속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설원에
붓을 세우니
梅軒이 현현하였도다
(2025년, 乙巳年 세밑 정문골 토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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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春雪甚寒 [춘설 심한]
(춘설에 몹시 추워서)
매헌 윤봉길
酷冷侵肥臘沍添 [혹랭침비랍호 첨]
好生天理是何嚴 [호생천리시하엄]
살을 에는 혹한에 섣달 추위가 더하니
천리는 호생이라더니 왜 이리 매서운고
堅氷己作琉璃界 [견빙기작유리계]
積雪洽如水晶鹽 [적설흡여수정염]
견고한 얼음은 이미 유리 세계 만들고
쌓인 눈은 흡사 수정 소금처럼 보이네
老嫌寒氣封門戸 [노혐한기봉문호]
我厭孤唫退筆尖 [아염고금퇴필첨]
노인들은 찬 기운을 싫어해 문을 닫는데
나는 혼자 읊는 게 싫어서 붓대를 치웠네
未解春陰雖慄烈 [피해춘음수율 열]
固持本色叟蒼髥 [고지본색수창염]
봄의 음기 아직 풀리지 않아 추위 매서워도
소나무는 본래 색을 굳건히 지키누나
ㅡㅡㅡㅡㅡㅡ
◇. 매헌 윤봉길의 약력 요약
윤봉길(1908.6.21 ~ 1932.12.19) 의사는
충청남도 예산에서 아버지 윤황(尹璜)과 어머니 김원상(金元祥)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매헌(梅軒)이다. 10세 되던 해인 1918년 덕산(德山) 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다음 해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정신의 영향으로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한다. 동생인 윤성의(尹聖儀)와 함께 한학을 공부하였고, 1921년부터는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한문학을 계속한다. 한문학 공부를 마치고, 1926년부터는 농민계몽·독서회운동ㆍ 문학가로 농촌사회운동을 펴나간다.
남긴 시문집으로 「한시집(漢詩集)」·「임추壬)」·「명추鳴)」·「옥타(玉)」가 있다
「한시집」은 칠언율시 202수, 칠언절구 5수 등 210수의 한시와 산문 4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추」에 칠언율시 43수, 오언율시 13 수로 56수의 시가 실려 있다.
「명추」에 칠언율시 16수, 육언율시 1수 등 20수가 실려 있다. 시 春雪甚寒 (춘설 심한) <춘설에 몹시 추워서>은 명주에 실려있다.
ㅡ. 1930년 3월 6일 윤봉길 의사 출사표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사내대장부 집을 떠나노니, 살아서 돌아오지는 않겠노라)
ㅡ.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날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등을 즉사시키는 거사를 치르고 현장에서 체포
ㅡ. 동년 12월 19일 아침 7시 27분경 일본 이시카와현 (石川県) 가니자와(金澤) 교외 미츠코지산(三小牛山) 육군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묶인 채 양미간 인당(印堂)에 정사수가 쏜 1발 총알을 맞고 절명(絕命),
향년 24년 6개월, 날수로는 8천948일, 순국(5초 침묵), 직후 일본군이 시신을 이시카와현 가나자와 '노다야마 전몰자 묘원'(野田山 戦没者 墓苑) 인근 공동묘지 내 통로에 평장으로 암매장
ㅡ. 1946년 김구선생의 주선으로
효창공원 삼의사 묘에
조국광복을 위해 몸 바친 이봉창ㆍ윤봉길ㆍ백정기 의사 안장하다.
묘 왼편에는 중국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으면 안장하고자 마련한 빈 무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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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동지부冬至賦 예찬
(기봉岐峰 백광홍白光弘선생의 동지부에 화답 시.)
인묵 김형식
뵙고 싶습니다
기봉백광홍岐峰白光弘선생님
주역周易의 바다에 낚시 던져 놓고
君王과 서경書經을 논하고 계신 선생님을 떠 올려 봅니다
사마천이 역사를 서술할 때
그 옆에 書經과 詩經을 들고 서 계신 어른의 모습 그리며 경의를 표합니다
어느 聖王인들 감탄하지 않고
총애하지 않았겠습니까
冬至賦,
天氣 풀어 손에 쥔 장원
보리뿌리 기침起寢하는 冬至,
陽의 기운 十方世界로 뻗어 가는데
어찌 그리 35세 젊은 나이로 가셨습니까 스승 일제이항一齋
李恒 선생은 '' 대우大祐(기봉의 자)는 재주와 덕이 그 짝을 보기 드물었는데 능히 그 뜻을 크게 펴지 못하고 갔으니 애석하는구나'' 하고 애통 해 하였으나
이제 보니 선생님은 8백 년을 살다 간 팽조彭祖 보다 더 오래 살고 계십니다
일찍이 유이劉履(1317~1379)가 풍아익風雅翼을 편찬한 것은 선생과의 인연을 예견하고 있음이어라
동지부 날개 달고 비상하는 봉황새
벽오동 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고
예천의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 선생님의 그 자태
님은 임금께
''요순을 공경히 본받으소서
한 마음 잡아 지킴 유념하셔서
높은 덕 밝히심에 힘 쏟으소서''하며 직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요즘세상 이 땅에 岐峰 어른 같은 가신 없음을 슬퍼하노라
ㅡㅡㅡㅡㅡㅡㅡ
ㅡ. 동지부冬至賦
기봉岐峰백광홍白光弘
하늘땅 아래 위서 자리 정해
음양이 오가면서 풀무질하네.
소멸함이 있으면 다시 자라고
또한 이미 깎여도 돼 사라 나네.
네 계절의 운행이 다 하여가니
다만 홀로 동지 때에 느낌이 인다.
뭇 음陰이 이때에 지극 하다가
한 양陽이 시작될 조짐 있었지.
律歷은 黃鍾의 절기 응하고
별자리는 두병의 견자이라네
태양은 남두에서 운행 다하고
달은 흑도에서 다스림을 곧게 한다.
여섯 구멍 가관에서 재가 날리고
볕이 한 줄 나란히 도수 더하네.
현명의 위엄 점차 느슨해지고
얼음 신령 비로소 일 넘겨주네.
하늘마음 인을 펴는 실마리 되고
땅의 굴대 조금씩 기운이 솟네.
일원기운 움직임은 고요하건만
많은 싹의 생기가 모여드누나
운초는 싹이 트고 여초 움 돋아
온갖 초목 앞서서 절기를 맞네.
버들가지 움터나고 매화 벙글어
모두 새롬 나아가 옛것 바꾼다.
천둥소리 한밤 중에 환구 울리고
운화의 갖은 악기 연주 하누나.
옥패소리 자황전서 조회를 하니
군도가 더욱 유장해짐을 하례하누나.
동지는 한 해 역수 으뜸이 되니
삼백예순 날 한 해의 시작이 된다.
아! 하늘땅이 엇갈려 태괘泰卦가 되매
음양은 서로서로 오르내린다.
음은 하지에서 처음 싹트나
시월의 얼음에는 거세차지네.
아래위 모두 서로 굳게 닫히매
양의 기운 거의 다 시들어졌네.
하지만 종자씨마저 먹지는 않아
하루 밤에 한 줄기 조짐 있었지.
식은 화로 남은 불씨 입김 불어서
음의 틈새 엎드렸던 기운 일어나,
2월들자 점차 양기 감돌고
3월 지나 온화한 봄날씨 온다.
운초는 돋아나 부쩍 자라고
자옥하니 원기가 펼쳐지도다.
모든 양이 나타났다 흩어짐이니
원래 그 출발이 이로부터라.
위대하다 하늘마음 심원하여서
굳건히 운행하여 그침이 없네.
소장에도 운수 있음 느껴 알아서
의리의 끝없음을 깨달으리라.
인간만이 하늘 굳셈 땅의 순흥함 갖췄으니
본성 중에 건원과 합하는도다.
아! 사물에 얽매여 가리어지면
어지러이 사라짐에 이르잖음 드무나니.
궁금이 마음 하늘 꽉 막아 버려
욕심 물결 못물을 꽁꽁 얼게 해.
하지만 텅 비어 깨끗한 본성
그래도 한 실마리 남아 있어서,
밤 기운을 타고서 싹을 잘 틔워
우물 드는 아일 보고 슬퍼하였네.
이것이 마음의 冬至이거니
어찌 몸을 돌이켜 참가잖으리.
진실로 이로 인해 잘 보존하면
어이해 우산이 헐벗으리오?
마침내 활짝 펼쳐 사방 이르면
천하에 앞장 되고 남음 있으리.
한 이치에 접촉하여 잘 기른다면 나라에도 또한 징험 할 수 있으리.
세상 도리 지극히 비색함 만나
어리석음 빠지고 어둠에 묻혀,
어지러이 음한 무리 일을 꾸미니
북풍의 싸늘함이 안탑깝구나.
이때에 어떤 사람 벌떡 일어나
바른 기운 옳은 도리 품부 받아서,
열흘 추위 하루 볕을 들게 하여서
양기를 회복하길 바라는도다.
나라 운명 환히 밝게 이르게 하고
음기가 재앙 부림 끊어야 하리.
이야말로 군자무리 나아갈 바니
진실로 양이 돋는 한 시작이라,
참으로 하늘 사람 한 이치이니
어찌 이것저것 살피잖으리
때문에 선왕은 시작을 삼가
언제나 동짓날엔 관문을 닫네.
때를 따라 공경하여 일 처리하면
한 해 공은 이룸이 틀림없으리.
원컨대 성상께선 원기 채득해
종일 애를 쓰시고 저녁에도 삼가소서
<주역>에서 나고 듦을 곰곰 살피고
<제전>을 공경히 본받으소서
한 마음을 잡아 지킴 유념하셔서
높은 덕 밝히 심에 힘 쏟으소서.
미천한 신 또한 좋을 때 맞아
양덕의 밝고 환함 기뻐하리라.
좋구나 이 좋은 날 경사 올리며
강구의 상서로움 송축하노라.
(동지부)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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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동지부冬至賦:
기봉岐峰 백광홍白光弘은 가정 임자년(명종 17년. 1552) 과거에 급제하고 그해 11월에 임금께서 영남과 호남의 문신들에게 성균관에서 재주를 겨루게 하였는데 공은 이 《동지부冬至賦》로 장원.
이는 기봉집 제1권에 수록함.
상으로 임금께서는 풍아익 선시 10권을 하사.
ㅡ. 풍아익風雅翼은 어떤 책인가?
이 책의 편저자 유이(劉履, 1317~1379)는 주자를 숭배하는 학자로 주자의 뜻에 따라 ‘문선’에 수록된 시에서 212편, 도연명의 시집을 비롯한 여타 서적에서 34수, 도합 246편의 시를 8권으로 편집하여 ‘선시보주’라 하였다. 요순이래 진(晉) 대에 이르는 옛 가요 42수를 뽑아 2권의 ‘선시보유’를 엮었다. 이어서 당송시대 시인 13명의 시 132수를 뽑아서 ‘선시속편’ 5권을 엮었다. 이 세 책에는 기존의 주석을 참고하고 부족한 부분은 자신의 의견으로 주석을 달고 이를 보주(補注)라 하였는데, 주석의 체재는 주자가 시경의 집전을 편찬한 방식을 따랐다.
조선시기 중요한 詩學 교과서
ㅡ. 주역周易:
단순히 《역(易)》이라고도 한다. 이 책은 점복(占卜)을 위한 원전(原典)과도 같은 것, 동시에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흉운(凶運)을 물리치고 길운(吉運)을 잡느냐 하는 처세상의 지혜이며 나아가서는 우주론적 철학이기도 하다. 주역(周易)이란 글자 그대로 주(周) 나라의 역(易)이란 말이며 주역이 나오기 전에도 하(夏) 나라 때의 연산역(連山易), 상(商) 나라의 귀장역(歸藏易)이라는 역서가 있었다고 한다. 역이란 말은 변역(變易), 즉 '바뀐다' '변한다'는 뜻이며 천지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현상의 원리를 설명하고 풀이한 것.
ㅡ. 서경書經:
대체로 보아 『서경』은 군왕과 대신 사이의 대화, 군왕에 대한 대신의 건의, 인민에 대한 군왕의 통고, 전쟁에 임하는 군왕의 맹서, 군왕이 신하에게 특권과 책임을 부과하는 명령 등 다섯 종류의 문건으로 이루어졌음. 사마천은 『사기』에서 중국 고대사를 서술할 때 『서경』과 『시경』에서 자료를 많이 취하였다
ㅡ. 시경詩經:
춘추 시대의 민요를 중심으로 하여 모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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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국역 岐峰集(86~92쪽) 白光弘 著 鄭 珉 譯
※. [岐峰 白光弘의 詩文學 硏究]
敍光 張喜九 박사 학위논문 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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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만천하에 고함
(윤봉길 의사의 조국독립을 위한 출사표의 회답 시로)
윤봉길의사 2015년 4월 29일 상하이의거 83주년 기념 일에 봉헌.=
인묵 김형식
윤봉길,
나 여기에
여기에 지금 서 있다
목숨 보다 더 소중한 내 조국을 선택한
젊은 피 대한의 남아가 여기에 이곳에 서 있다
9천 년
민족의 뿌리
동이의 홍산문화가
백두에서 한라를 걸어 일본땅 열도를 삼켜버린
그 도도한 저주의 불길을 90년 전 나는 이곳에서 분명히 보았노라
우리는
싸웠노라
그러나 지키지 못했노라
보았노라
통곡했노라
나라 잃은 그 서러움을
그 누구를 원망하랴 힘없는 내 조국을 원망한다
사랑하는
젊은이들이여
형제여 내 조국 대한 민국이여
이제는 다 용서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자
당당하게 일어서서 더 넓은 곳을 향해 나아가자
세상은
변하고 있다
국력을 키워야 한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걔들에게 자유를 가르쳐야 한다
나 윤봉길은 지켜보겠노라 남북통일의 그날을
나 윤봉길 지켜보겠노라 조국의 먼 앞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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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각주 1).
시 《만천하에 고함》는
매헌 윤봉길의사의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에 대한 화답 시로
2015 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 제83주년 기념식에서, 동년 12월 19일 일본 가와자와 암매장지 추모식에서 봉헌 낭송 했던 시입니다.
이 시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2015년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 83주년 기념식 행사당일 식순을 건너뛰자는 사전 요청이 있었다.
이유인 즉 시어《9천 년
민족의 뿌리 동이의 홍산문화가》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보훈처의 우려.
당시 중국정부에서는
동북공정으로 혈안이 되어 있어 중국정부의 신경을 건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
더욱 히 83주년 기념행사는
중국정부에서 훙커우공원 윤봉길 기념관 짓고 준공식을 겸하는 행사라 중국 정부의 주요 요인들이 다수 참석하기 때문에 괜스레 심기를 건드려 국가 간 문제를 야기할 우려가 있다는 것.
본행사 후 봉헌 낭송의 기회를 가졌음.
동년 12월 19일 일본 가와자와 암매장지 추모기념식에서
일본 기념식 행사에서 봉헌 낭송 후
박현택 일본 기념사업회 회장 < 윤의사 시신을 수습 암매장하고 비밀리에 관리해 오신 분의 자제분>님께서 매년 행사 때마다 낭송하고 싶다는 간곡한 요청이 있어 일본 기념사업회에
횡서로 쓴 자필 한지 두루마리를 기증.
저의 시집 《그림자, 하늘을 품다》124,5쪽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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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조국의 독립을 위한 출사표
매헌 윤봉길
1).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매헌 윤봉길 의사)
장부가 집을 나가면 큰일을 이루기 전에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
2). 강보에 싸인 두 병정(아들)에게
/매헌 윤봉길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나이가 뜻을 세워 집을 나가니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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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1930년 3월 6일 윤봉길 의사 출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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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헌 윤봉길의 약력 요약
윤봉길(1908.6.21 ~ 1932.12.19) 의사는
충청남도 예산에서 아버지 윤황(尹璜)과 어머니 김원상(金元祥)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매헌(梅軒)이다. 10세 되던 해인 1918년 덕산(德山) 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다음 해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정신의 영향으로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한다. 동생인 윤성의(尹聖儀)와 함께 한학을 공부하였고, 1921년부터는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한문학을 계속한다. 한문학 공부를 마치고, 1926년부터는 농민계몽·독서회운동ㆍ 문학가로 농촌사회운동을 펴나간다.
남기신 시문집으로 「한시집(漢詩集)」·「임추壬)」·「명추鳴)」·「옥타(玉)」가 있다
「한시집」은 칠언율시 202수, 칠언절구 5수 등 210수의 한시와 산문 4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추」에 칠언율시 43수, 오언율시 13 수로 56수의 시가 실려 있다.
「명추」에 칠언율시 16수, 육언율시 1수 등 20수가 실려 있다. 시 春雪甚寒 (춘설 심한) <춘설에 몹시 추워서>은 명주에 실려있다.
ㅡ. 1930년 3월 6일 윤봉길 의사 출사표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사내대장부 집을 떠나노니, 살아서 돌아오지는 않겠노라)
ㅡ.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날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등을 즉사시키는 거사를 치르고 현장에서 체포
ㅡ. 동년 12월 19일 아침 7시 27분경 일본 이시카와현 (石川県) 가니자와(金澤) 교외 미츠코지산(三小牛山) 육군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묶인 채 양미간 인당(印堂)에 정사수가 쏜 1발 총알을 맞고 절명(絕命),
향년 24년 6개월, 날수로는 8천948일, 순국(5초 침묵), 직후 일본군이 시신을 이시카와현 가나자와 '노다야마 전몰자 묘원'(野田山 戦没者 墓苑) 인근 공동묘지 내 통로에 평장으로 암매장
ㅡ. 1946년 김구선생의 주선으로
효창공원 삼의사 묘에
조국광복을 위해 몸 바친 이봉창ㆍ윤봉길ㆍ백정기 의사 안장하다.
묘 왼편에는 중국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으면 안장하고자 마련한 빈 무덤이 있다.
●14. 다시, 뚜벅뚜벅
(반칠환의 시 '새해 첫 기적' 화답 시)
인묵 김형식
12지 동물이
뛰어서
걸어서
기어서
날아서
섣달 그믐날 자정에 광화문 보신각에 도착했다
모두 살아서 돌아왔다
청용이 머리띠 풀어 푸른 뱀에게 건넨다
송구영신(送舊迎新)
제야의 종소리
가자!
우리 다시
○○年 빛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자
ㅡㅡㅡㅡㅡ
새해 첫 기적
반칠환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ㅡ. 반경환의 명시 감상 중에서.ㅡ
천체물리학자들은 우주에는 2천억 개의 별들이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이 우주가‘말의 우주’라는 사실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이 세계는 말의 우주이며, 모든 생명체는 말의 사물과 말의 생명체라고 할 수가 있다. 말의 해, 말의 달, 말의 별, 말의 대지, 말의 밭, 말의 논, 말의 바다, 말의 파도, 말의 백사장, 말의 금은보석, 말의 소나무, 말의 풀꽃, 말의 사랑, 말의 혐오, 말의 그리움, 말의 절망, 말의 찬가, 말의 연인, 말의 바람, 말의 비, 말의 눈, 말의 산소, 말의 수소, 말의 비타민, 말의 단백질, 말의 눈, 말의 코, 말의 입, 말의 귀, 말의 사과, 말의 앵두, 말의 문학상, 말의 그림, 말의 음악 등은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사유와 느낌과 감정마저도 말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말에 의해서 태어났고, 말의 밥을 먹으며, 말의 대화를 주고받는다. 말의 전쟁과 싸움을 하고, 말의 승리와 패배를 주고받으며, 말의 똥을 싸고, 말을 남기며 죽는다. 이 세상의 근본물질은 원자가 아니라 말이며, 모든 역사는 말의 투쟁의 역사이다. 우리가 그토록 엄청난 돈과 시간을 투자하며 공부를 하는 것도 말의 소유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며, 앎과 지혜는 최고급의 재화라고 할 수가 있다. 배가 고픈 것도 말이 고픈 것이고, 배가 부른 것도 말이 부른 것이다. 슬픈 것도 말이 슬픈 것이고, 기쁜 것도 말이 기쁜 것이다. 경제적인 소유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주인이 바뀔 수도 있지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또는 공자와 맹자처럼 말의 소유권은 천년, 만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축제는 말의 축제이며, 우리는 말의 축제를 즐기며, 이 말의 축제 속에서 죽어간다. 서울의 축제, 동경의 축제, 북경의 축제, 런던의 축제, 파리의 축제, 뉴욕의 축제, 중남미의 축제, 그리고 수많은 영화와 음악과 문학과 미술과 체육과 춤의 축제 등----, 이 ‘말의 축제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어렵고 힘든 세상을 살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황새는 날아서 말의 축제에 참여하고, 말은 뛰어서 말의 축제에 참여한다. 거북이는 걸어서 말의 축제에 참여하고, 달팽이는 기어서 말의 축제에 참여한다. 굼벵이는 굴러서 말의 축제에 참여하고, 바위는 앉은 채로 말의 축제에 참여하고, 모두들 다 같이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던 것이다.
시(말)는 눈부신 태양이고, 맑은 공기와 맑은 숨결이고, 언제, 어느 때나 행복한 삶을 살게 해 준다.
시의 기적은 새해 첫 기적이고, 새해 첫 기적은 모든 기적의 진원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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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두시 1편
ㅡ.애호박
인묵 김형식
어제 밤
은하에서
견우와 직녀가 만났다더니
지구별에 놀러 왔다가
풀숲에 애 하나 낳고 갔네
탯줄이 그대로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