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석리 - 성 손선지 베드로와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의 고향 |
성지 주소는 충남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 368-1.
조선시대에는 임천현에 속했는데 임천현은 이웃 부여현, 석성현, 홍산현과 함께 종6품 현령이 다스렸던 고을이다. 지석리(支石里)는 일명 괴인돌이라고 불렀는데 물론 이는 고인돌을 이른다. 고인돌의 한자 명칭은 지석묘(支石墓)이며 청동기 시대의 무덤이다.
현재 충화면사무소에서 서쪽 1.7km 지점 팔충사 경내에 고인돌 3기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마을 이름을 한자로 지석(支石), 또는 석촌(石村)이라고 부르다가 1914년부터 지석리라 불렀다.
이 고인돌에 대한 전설도 있다. 백제시대의 삼충신이 나라를 지키려 사비성으로 갈 때 이 바위를 하나씩 가져다 놓고 충성을 맹세했다고 하여 일명 표충암(表忠岩)이라고도 불렀는 것이다.
이 작은 마을에서 박해시대 천주교를 용감하게 증언하다가 순교한 두 분이 태어났으니 바로 성 손선지 베드로와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다.
1백여 년 박해사에서 가장 혹독했던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두 성인은 관가에 끌려가 팔이 부러지고 살이 터져 나가는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았고, 형장에서도 오히려 축복의 순간을 맞는 기쁨에 용약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두 성인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치명했으며 유해는 지금 천호 성지에 묻혀 있다.
두 분 모두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두 분의 약전을 살펴본다.
성 손선지(손선지) 베드로(1820-1866)
성 손선지 베드로(Petrus)는 충청도 임천 지방의 고인돌(지석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남달리 신앙과 품행이 뛰어났다. 어른이 되자 샤스탕(Chastan)신부는 그를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결혼하여 슬하에 두 자녀를 두었던 그는 인자한 가장으로서 자녀 교육에 힘쓰며 사소한 일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아 모범적인 신자 가정을 이루었다. 그가 거처하던 집은 마을의 공소였기 때문에 더욱 세심한 주의와 노력으로 언제나 신자들을 위하여 봉사하며 살았다. 그가 47세가 되던 1866년 추수기에 접어들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좀 완화되는 듯하다가 얼마 후 더욱 혹심한 박해로 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의 공소 예절에서 그는 신자들을 보고 “곡식이 익으면 바람결에 날리어 땅에 떨어지는 법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가올 박해에 나 같은 사람도 당신 곳간에 가두시려는 모양이군요.” 하며 자기는 순교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무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피신하라고 당부하였다. 그해 12월 3일 저녁 그는 가족과 함께 기도를 하고 있는데 집 밖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자, 즉시 상황을 알아차리고서 재빨리 가족들에게 피하라고 말한 뒤에 자신이 교우임을 자백하여 순순히 체포되었다. 포졸들은 그를 구진포리 주막까지 데리고 가 먼저 이곳에 붙잡아 온 다른 신자들과 함께 밤을 지내게 하였다.
그 사이 손 베드로의 어머니는 마을 원님을 찾아가 아들을 좀 구해달라고 애걸하였다. 또 손 베드로의 아들이 감영에 수시로 드나들며 아버지의 구명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아들의 효심에는 감동하였으나 크게 꾸짖고는 “나에게는 큰 유혹이 된다. 내 말을 듣는 순간부터 그런 짓을 다시는 하지 말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감영에 오지 말라”고 하면서 일을 중지시켰다.
다음날 그는 전주 감사 앞으로 압송되었다. 그가 전교회장이라는 것을 알고 고문과 주리를 잔인하게 가하다 못해 그의 팔까지 부러뜨렸다. 그가 처형장으로 나설 때 남아서 기다리는 다른 신자에게 자기 옷을 주면서 “나는 이제 죽으러 가오. 이 옷은 더 이상 내게 소용이 없으니 이 옷을 입으시오”라고 말하였다. 이윽고 사형장에 도착한 그는 하늘을 향해 ‘예수 마리아’를 부르고 기도했는데, 희광이가 칼로 그의 어깨를 내려치자 그는 머리를 쳐들고 “장난하지 마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는 전주 숲정이에서 1866년 12월 13일에 순교하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1801-1866)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는 충청도 어느 양반집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많이 하여 원님까지 지냈으며, 학식과 교양과 인격을 겸비한 사람으로서 영세한 후부터는 모든 관직을 마다하고 오로지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박해로 인하여 마을을 떠난 그는 전라도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다가 만년에야 전주의 대성 지방 신리골에 정착하게 되었다. 신리골에 살면서 그는 신자들에게나 비신자들에게나 차별 없이 상대했고, 또 교리를 밝혀 소상하게 가르쳐 주었을 뿐 아니라 예의범절도 잘 가르쳐 주었음으로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았다. 그런데 전라도 일대에도 박해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자, 그는 심부름꾼으로 오사영을 전주로 보내어 정세를 알아보게 하였다. 오사영은 비신자인데다가 고을의 관직에 있는 자였으므로 전주 포청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고, 또 자원하여 신자들을 도와 성심껏 협조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떠난 지 이틀이 지나도 아무런 전갈이 없자 정 바르톨로메오는 조금은 안심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수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12월 3일 저녁 포졸들이 두 패로 나눠서 한 무리는 성지동 마을로 들어가 조화서 베드로와 그의 아들 조윤호 요셉 그리고 이명서 베드로를 체포하고, 다른 한 무리는 대성 마을로 침입하였다. 그래서 그는 다른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근처 주막으로 끌려가 성지동에서 체포된 다른 세 명과 만나게 되었다. 다음날 일곱 사람은 지방 감사의 집까지 압송되어 갔는데, 그들 모두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 감사 집에 도착해서는 즉시 창고에 갇혀 있다가 얼마 후 불려나와 고문을 받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정 바르톨로메오가 유혹에 넘어가 배교할 듯 했었는데, 조화서 베드로가 격려하여 다시 생각을 돌리고 마음을 잡아 평온한 마음으로 순교에 임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정 바르톨로메오는 순간적이나마 마음이 약해졌음을 참회하면서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용감한 마음으로 온갖 고문을 잘 이겨냈다. 그는 전주 숲정이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치명했다. 이때가 1866년 12월 13일이요, 그의 나이는 66세였다.
이 성지가 조성된 것은 1984년 두 순교자가 성인 반열에 오른 후였다. 당시 지석리에는 손선지 성인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는데, 시성식 이후 가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손선지 성인의 시성 기념비라도 세워 달라고 홍산 성당에 밭을 기증했다. 그래서 순교사적지를 관리하고 있는 홍산 성당은 두 성인의 생가터를 정확히 확인할 수 없자 동네 땅 일부를 매입해 1988년 12월 13일 현 위치에 두 성인의 출생 기념비와 50여명 정도가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야외제대와 기념비, 안내표지석를 세웠다. 2014년에는 두 성인의 출생 기념비를 새로 세우고 성지 표지석과 약간의 주차공간을 마련하는 등 주변 조경공사를 마무리해 새롭게 단장했다.
오후 3시 도착. 성지는 도로변 나지막한 산 아래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입구에 컨테이너로 간이 휴게실이 있었고 그 벽에는 성지 안내문이 붙어 있다. 안내문에 의하면 1984년 성지 부지를 홍산 성당에 기증한 사람은 손 선지 성인의 백부의 4대 후손이라고 한다. 이후 1988년 성당에서 기념비를 건립했다. 그리고 관할 성당인 홍산 성당 제대 뒤편 감실 아래 유해대에 유해가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성지 양쪽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둘로 나누어 배열되어 있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성구가 새겨진 제대 뒤편에 커다란 출생기념비가 서 있다. 출생기념비의 오른편엔 성모상이 서 있다. 그리고 왼쪽 도로변에는 1988년 홍산성당에서 세운 나지막한 안내표지석이 있다.
3시 20분 산막골 성지로 이동.
산막골 성지 - 서천 지역 신앙 선조들의 피땀어린 삶과 죽음의 자취 |
성지 주소는 충남 서천군 판교면 금덕길 81번길 119
내포(충청남도 서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서천 지역은 박해시대를 거치면서 처형된 신자가 57명이나 된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천주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특히 천방산(千房山, 324m) 일대의 산막골 공소, 작은재 공소, 독뫼 공소, 불무골 교우촌, 도앙골, 서짓골, 한티 등은 대표적인 교우촌이었다.
당시 신앙 선조들은 1839년 기해박해를 겪은 후 관가의 체포령이 미치지 않는 이곳 산간벽지에 숨어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주교와 페롱(Feron, 1827-1903)신부가 산막골 교우촌을 방문해 사목을 하였던 때도 이 시기였다. 특히 페롱 신부는 이곳 산막골에서 1858년 9월 24일과 25일, 1859년 9월 27일 등 총 6통의 서간문를 작성하기도 했다. 내포지역에서 사목하던 조안노 신부도 1862년 11월 4일 한차례 산막골에서 서간문을 작성한 기록도 전한다.
또한 이곳은 황석두(黃錫斗, 1813-1866년) 루카 성인 일가가 충청북도 연풍에서 이 지역에 이주해 와 1866년 병인박해가 있기 전 10여 년 동안 머물면서 참회와 보속의 삶을 살았던 뜻깊은 곳이기도 하다. 아마도 황석두 루카는 독신으로 지내면서 양자인 황천일과 형과 조카 황기원 등을 이끌고 연풍에서 삽교로 이주하여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고, 루카 본인은 이곳 산막골에서 사목하던 다블뤼 신부의 복사로 활동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밖의 신자로는 김 가브리엘, 김 요셉, 김 안드레아, 전춘서(田春西, 안드레아), 김 서방, 김필선 (金必先, 요셉), 김성첨(金成添, 베드로), 강호경(姜浩景) 등이 있다.
김 가브리엘과 김 요셉은 형제간으로 비인서 오래 살다가 1866년 전부터 산막골로 이주하여 1866년 12월 3일 경포에서 체포될 때까지 거주하였는데, 김 요셉은 페롱 신부 전교 때 본 공소 회장으로 열두 공소 소임을 겸했다고 한다.
또한 임천에서 살다가 산막골로 이주한 김 안드레아는 1866년 12월 3일 김 요셉 회장과 함께 경포에게 체포될 때까지 산막골에 살았으며 본디 금산 사람으로 산막골로 이주한 전춘서는 1866년 12월 28일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고 풀려나 남포 습의면(習衣面) 간재로 이사할 때까지 산막골에 살았고, 김 서방은 치명일기 129번에 황천일(요한)과 함께 잡혀 서울로 가서 치명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1866년 12월 15일 황천일과 함께 체포될 때까치 산막골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산막동 사람으로 1865년 가을에 황천일에게 배워 요셉이라고 본명을 지은 김필선은 1867년 1월 체포될 때까지 산막골에서 살았다. 본디 산막동 사람으로 1865년 봄에 황기원에게 배우고 베드로라고 본명을 지은 김성첨은 1867년 1월 체포될 때까지 산막동에 거주했고 홍산 판교 사람으로 1866년 봄 박해 이후에 산막골의 천주교 신자가 살다가 도피한 빈 집으로 이주한 강호경은 같은 해 12월에 체포될 때까지 산막골에 살았다
이러한 사실들은 2010년 호남교회사연구소 서종태 박사(전주대학교 교수)가 발간한 “박해기 서천지역 천주교회사에 대한 연구” 라는 논물 자료를 통해 밝혀진 것이다.
이처럼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박해시대 서천 지역 신앙 선조들의 숭고한 터전들이 하나씩 드러나게 된 때에 대전교구 서천 본당 주임으로 정성용(鄭成溶) 요한 신부가 부임하였다. 그는 부임하자 이 지역을 성지로 가꾸는 일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서천 본당은 2010년 11월 13일 천방산 고갯마루에서 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산막골 · 작은재 줄무덤 터 현양미사’를 봉헌했다. 독뫼 공소와 작은재 공소 터에 기념비를 세워 순례객들의 교우촌 순례길을 돕고 있으며, 작은재 줄무덤 터에도 기념비를 세워 천주교 백색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있다.
2018년 10월 14일 서천 본당은 작은재에서 산막골 · 작은재 순교사적지 재단장을 기념하는 야외미사를 봉헌했다. 2010년 성지 선포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과 내포 성지 개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서천 본당은 자체 봉헌금과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성지에 대한 정비 작업을 시작했다. 작은재 표지석 위쪽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상을 세우고, 성지로 오르는 길목에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했다. 작은재 초입 독뫼 공소 터 앞에도 예수님상을 설치했다.
산막골에는 예수님상을 중심으로 황석두 루카 성인상과 돌제대, 십자가의 길 14처와 순례자를 위한 작은 쉼터도 마련되었다. 서천 본당은 두 순교사적지를 잇는 옛길 3.5km를 순례길로 복원하고 있고, 서천 지역 교회사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통해 순교사적지로서 지속적으로 가꾸어 나갈 계획이다.
◆ 페롱(Feron, Stanislas, 1827∼1903)
프랑스의 세즈(Sez)에서 태어나 그 곳 대신학교를 나와 사제 수품. 1854년 10월 1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년간 수련한 다음 1856년 1월 23일 프랑스를 떠나 14개월 만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베르뇌(Berneux) 주교가 성직자 회의를 소집하여 다블뤼(Daveluy) 신부를 그의 후임으로 삼았을 때였다. 그는 경상도 서북부지방을 맡아 전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곧 박해의 불꽃이 타올라, 2명의 주교와 7명의 성직자가 순교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요행히도 살아남게 된 페롱 신부는 한국 교회의 장상이 되어, 하나밖에 남지 않은 동료인 칼레(Calais) 신부를 중국으로 피신시키고 스스로는 한국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본국으로 송환된 그는 1870년 인도(印度)의 퐁티세리로 파견되었고, 그 뒤 30년간을 그곳에서 사랑의 복음을 전하다가, 젊은 시절 그가 봉사했던 한국 교회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나는 걸 보고 만족해 하면서 1903년 6월에 77세의 고령으로 선종하였다.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프랑스 아미앵(Amiens)에서 출생하였다. 성 술피스 신학교(St. Sulpice Seminary)를 다녔으며 1841년 12월 18일 신부로 서품을 받았다. 1843년 다블뤼는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선교사가 되었고 1844년 2월 6일 해외선교를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1845년 10월 12일 김대건 신부와 함께 충청도 강경(江景)의 황산포로 처음 조선에 들어왔다. 주로 경상도 지방에서 전교활동. 1856년에는 충청도 제천(堤川)의 배론 [舟論]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를 세웠다.
1866년(고종 3)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어 3월 8일에 참수되자 그 뒤를 이어 제5대 조선교구장이 되었다. 하지만 교구장으로 임명된 3일 후인 11일 충청도 보령에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 끝에 3월 30일 그도 갈매못에서 참수되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저서에 《신명초행(神命初行)》, 《회죄직지(悔罪直指)》, 《영세대의(領洗大義)》, 《성찰기략(省察記略)》이 있고, 역서에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 《천주성교예규(天主聖敎禮規)》, 《천당직로(天堂直路)》가 있다.
4시경 도착. 마당에 이르니 성모상이 한쪽에 서 있고 옆에 까만색의 산막동 성지 표지석이 있다. 내용은 이곳에 신앙터로서의 의미를 부여한 분들로 황석두, 패롱 신부를 들고 있고 이곳에서 순교한 분들을 소개하고 있다.
계단 위 좀 높은 곳에는 아담한 두 칸짜리 건물이 있는데 벽에는 성지 사무실, 순례자 쉼터라고 종이에 쓴 안내문이 붙어 있다. 아마도 임시로 사용하는 건물이라고 여겨진다. 우리가 도착하는 것을 보았는데 남,녀 두 분이 마치 영접이라도 하려는 듯이 다가온다.
인사를 나누고 보니 한 분은 이 성지를 담당하는 신부님이고 한 분은 여성 봉사자였다. 신부님은 이 성지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했다. 흔히 신부님이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을 때 가장 꺼리는 것은 성전 건물도 없는 신설 성당이거나 빚 많은 성당이라고 한다.
정말 이 산막골 성지가 그런 경우다. 아직 성전도 없이 천막 성당으로 시작하니 아득한 마음이 들 것이다. 미사 안내가 11시로 되어 있어 몇 명이 미사 참례하느냐고 물으니 딱 두 명이라면서 웃으신다. 그래도 이 성지에 대한 설명은 길게 이어진다. 이미 온 김에 여기서 차로 10분만 가면 불무골 교우촌 터도 있고 작은재 교우터, 독뫼 공소터도 있다고 권한다. 하지만 아직 우리가 갈 곳은 3군데가 남았다고 하니 그럼 빨리 서둘러야겠다며 인사하고 발걸음을 돌린다.
신부님 말씀대로 시간 여유만 있다면 찬찬히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남은 일정에 쫒겨 천막 성전에도 참배할 시간이 없어 야외 시설만 돌아보고 발걸음을 돌렸다. 지금 시설이라곤 성 황석두 루카 상과 제대, 그리고 십자가의 길 정도뿐이다. 앞으로 성지가 조성될 날은 멀고멀다. 잘 이루어지길 기원하며 우리도 발걸음을 돌렸다.
황석두 루카상 옆에 커다란 산막골 성지 기념탑이 서 있고 잔디밭 둘레에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안내 표지판엔 작은재 성지와 독뫼공소 가는 길을 화살표로 안내하고 있으나, 아직 가야할 곳이 3곳이나 있어 도저히 갈 수가 없다. 서짓골 성지로 출발.
서짓골 성지 - 갈매못 네 순교성인의 유해가 머물다 간 교우촌 |
성지 주소는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438-3
기꺼이 순교를 받아들인 다섯 성인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조선 땅에 입국한 다블뤼(Daveluy) 주교는 이듬해 김대건 신부의 순교 이후 최양업 신부와 함께 박해시대 교우 사목을 위해 분골쇄신하였다. 베론 신학교를 세우기도 한 그는 1866년 3월 7일 제4대 조선교구장이었던 베르뇌(Berneux) 주교가 새남터에서 순교하면서 교구장직을 승계해 제5대 조선교구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불과 4일 만인 11일 다블뤼 주교는 자신의 복사였던 황석두 루카와 함께 내포 지방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남진을 막아주고 선교의 자유를 얻으려는 대원군과의 접촉이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더 박해가 심해져서 마구잡이로 교우들이 처형되자 교구장 다블뤼 주교는 신자들의 더 큰 희생을 막고자 스스로 체포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고 다른 선교사제들에게도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쓴 후 붙잡혔다.
이때 자수했던 오메트로 오 신부, 위앵 민 신부, 그리고 다블뤼 주교의 복사였던 황석두 루카는 다블뤼 주교와 같이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순교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에 고종과 명성황후의 국혼(國婚)이 임박한 관계로 한양 도읍지에서 죄인 처형을 못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서울에서 250여 리 떨어진 충청수영이 있는 보령까지 죽음의 행진을 하게 되었고, 중간에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인 장주기 요셉 회장도 동행하게 되었다. 병인년 3월 29일 주님 만찬 성목요일에 처형장 근처에 도착하여 포졸들이 다음날 이웃 읍내를 돌며 사형수들을 구경시킬 계획을 짜자, 다블뤼 주교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순교하고자 했던 경건한 열망으로 이를 거부했다. 그 강경한 자세와 위엄 있는 어조에 포졸들과 군사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충청수영(忠淸水營)이 있던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바닷가 갈매못에서 다블뤼 안(安) 주교, 오메트르 오(吳) 신부, 위앵 민(閔) 신부,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 회장 등 다섯 명과 5백여 명의 이름 모를 교우들이 자신들의 붉은 피로 모래사장을 붉게 물들였다,
서짓골에 묻히기까지
이렇게 다섯 순교자들은 주님 수난에 동참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 놓았고, 포졸들은 붉은 피가 흩뿌려진 모래밭에서 군문효수형에 처해진 순교자들의 목을 하나씩 장깃대에 꽂아 깃대를 똑바로 세워놓았고, 목이 잘려진 몸은 그대로 두어 세상 사람들이 천주교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3일 후인 1866년 4월 2일 수영의 지시에 따라 비신자들이 장대에 달린 순교자들의 머리를 내려 각각의 시신과 함께 인근 모래사장에 묻었다. 이곳이 갈매못 다섯 순교자들의 첫 번째 무덤이자 임시매장지였다. 이때 비신자들은 프랑스 선교사 3명의 시신을 한 무덤으로, 조선인 2명의 시신을 또 한 무덤으로 만들고 그 위에 잔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다. 목이 잘려진 부분의 일치 여부를 확인해 순교자들의 신원을 확실히 한 후 시신마다 안가(다블뤼 주교), 민가(위앵 신부), 오가(오메트르 신부), 황가, 장가라고 쓴 명패를 달았다.
그러나 황석두의 시신은 임시매장 직후 조카이자 양자인 황기원 안드레아와 그 아우인 황천일 요한 등 일가에 의해 홍산 삽티(현 부여군 홍산면 상천2리)에 안장했다가 1982년 8월 25일 고향 인근 연풍 성지로 천묘(遷墓)하여 고 노기남 대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다.
갈매못에 다블뤼 주교, 위앵 ·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회장의 시신만 남게 되자, 장주기의 아들 장노첨이 다른 곳에 순교자들의 시신을 안장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청양 다락골 신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동의를 얻지 못했다. 시신 이동에 적지 않은 자금이 필요할 뿐 아니라 발각될 경우 죽음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다.
장노첨은 다시 남포 서짓골에 사는 이화만(일명 이사심) 바오로를 찾아갔고 그의 적극적인 동의를 얻는 데 성공했다. 이리하여 신자들은 1866년 5월 21일 갈매못 임시매장지에서 순교자들의 목과 시신을 일치시키고 염을 한 뒤 10리가량 떨어진 오포리의 야산(일설에 콩밭)에 암장하였다. 이것이 갈매못 순교자들의 두 번째 무덤이며 하나의 봉분을 쌓아 만들었다. 이 무덤은 이후 신자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그러던 중 순교자들의 무덤이 여우에 의해 훼손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첫 번째 이장을 주도했던 이화만이 1866년 6월 직접 무덤 상태를 확인하고 홍산 도앙골 교우촌(현 부여군 내산면 금지1리)에 살던 김순장 요한과 두 번째 시신 수습 및 이장을 의논했다. 두 사람은 이장 비용을 신자들에게 추렴하고 이장 장소는 남포 서짓골 이씨 집 뒤편 골짜기 담배 밭으로 결정했다. 신자들은 비신자 최가의 배를 삯 내고 역시 비신자인 서성학 형제를 사공으로 고용했다. 이장은 1866년 7월(음력)에 이뤄져 서짓골에 안장되기까지 10-15일이 소요되었다. 갈매못 인근 두 번째 무덤에서 서짓골 세 번째 무덤까지의 이동 경로에 대해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루카 소장은 다음과 같이 고증했다.
여수애(현 보령시 오천면 오포리의 여수해) → 가패 → 슬섬(현 보령시 주교면 송학리의 솔섬) → 녹안이뿌리(현 보령시 웅천읍 독산리 독대섬) → 완장내(현 보령시 웅천읍 대창리) → 곰재(현 보령시 주산면 동오리) → 서짓골.
서짓골 이후의 이장 과정
서짓골의 세 번째 무덤은 1866년 7월 25일(음력)부터 1882년 1월까지 15년 6개월 동안 그대로 보존되었고, 그 결과 순교자들의 피와 살, 잔뼈들이 진토가 된 거룩한 땅이 되었다. 그럼에도 순교자들의 유해가 길이 보존된다는 보장이 없자 후손들은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안전하다고 판단하여 1882년 11월 6일 일본 나가사키 오우라 성당 내 조선대목구 대표부로 보내져 약 12년 동안 안치되었다. 성인의 유해가 얼마나 소중히 여겼으면 외국에까지 이장했을까? 그후 1894년 5월 23일 유해가 다시 돌아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모셔졌다가 6년 뒤인 1900년 9월 5일에는 명동 성당 지하묘역에 옮겨진 후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시복식(1968년 10월 6일)을 1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로 다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줌의 유해가 보존되기까지 그 과정이 어쩌면 이리도 기구한가? 옛글에 “석자 무덤에 돌어가기 전에는 100년 한 몸 보존하기 어렵고 석자 무덤으로 돌아가서는 100년 무덤 하나 보존하기 어렵다.” (未歸三尺土 難保百年身 已歸三尺土 難保百年墳)는 말이 실감이 난다.
한편 네 순교성인들의 시신 이장에 앞장섰던 이화만과 그 아들들은 그 해 가을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병인년 12월 12일 ‘무참히 맞아 죽어 시신이 버려졌다는 간단한 기록과 구전만 전해질 뿐 시신의 소재를 찾지 못했다. 또한 황석두 성인의 시신을 홍산 삽티에 안장해드린 조카들 역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이 또한 얼마나 참혹한가? 황석두 성인의 후손들은 자신의 조상이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이화만의 가족들은 남의 무덤을 보존해주려다가 참혹한 죽음을 당해야만 했을까?
이화만의 증손인 이우철 시몬(1915-1984년) 신부는 이화만의 부인인 정 마리아의 묘(부여군 충화면 천당리 소재) 묘비를 직접 써 이화만 삼부자의 순교 내력과 시신을 발견하지 못한 경위를 기록했다.
성지 개발 과정
서짓골은 부여 금사리 본당 제3대 주임인 정규량 레오(1883-1952년) 신부가 1925년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식을 기념하며 그 위치를 확인하였지만 이후 교회사에서 잊힌 땅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2007년부터 부여 만수리 공소에 윤종관 신부가 상주하면서 다블뤼 주교의 주된 사목지이며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가장 많은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하부내포 지역이 알려지게 되었고, 2012년 1월 대전교구에서 하부내포 지역을 성지로 선포하며 윤종관 신부를 전담으로 임명하면서부터 본격적인 교회의 조명을 받게 되었다. 윤종관 신부는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루카 소장 등과 함께 위치 고증과 학술적 연구 성과를 축적하면서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2013년 10월 31일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현지 순교사적지에서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서짓골 성지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서짓골 성지는 같은 해 5월 미산면 평라리 일대 886㎡(268평) 크기 시유지에 6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부지를 정비하고 화장실과 정자, 주차장 등 기반을 조성한 후 야외제대와 순교자 현양비, 성지안내 표지석 등 시설공사를 마치고 이날 봉헌식을 가졌다. 무게가 50톤이나 되는 제대석은 오석을 3.6×1.7×1.35m 크기로 잘라 만들었으며, 전면에 서짓골에 묻혔던 네 성인의 이름을 새겨 성인 무덤 모양으로 형상화했다.
4시 반쯤 도착. 서짓골 성지는 한 곳에 집약적으로 조성되어 순례하기도 간단했다. 지석리 성지, 문경 진안리 성지와 같이 도로변에 있어 한 눈에 다 볼 수 있다. 성지 전체를 돈이원(敦伊園)이라 이름했다. 안돈이는 다블뤼 주교의 한국식 이름이다. 입구를 들어가면 무인 안내소가 있고 시멘트 광장 맞은편에 정자 건물이 서 있는데 당호가 안돈정(安敦亭)이다. 물론 다블뤼 안돈이 주교 이름에서 따왔다. 그 앞에 순교자 4분의 이름을 새긴 야외제대가 있다. 오른편에는 높이 솟은 순교자 현양비가 있고 왼편에는 순교 4성인 면례(緬禮)기념비가 있다.
좌대 포함 8m 높이의 순교자 현양비에는 光榮爲主致命(영광스럽도다, 주님을 위해 바친 목숨)이라는 한자 구절을 새겼다.
면례기념비의 내용은 전반부는 순교성인 4위의 면례(이장) 내력을 기술했고, 후반부는 일본 나가사끼 오우라 성당에서 12년 간 봉안 후 국내에 돌아온 내력이다. 당시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와 나가사끼 대교구장 요셉 타가미 미츠아끼(高見三明) 간의 협의 후 이곳 서짓골 안장지에서 출토한 석재로 오우라 성당에 기념비를 세웠다. 광장 한쪽에는 갈매못 - 사짓골 순례길 안내게시판이 서 있다.
벌써 오후 4시 40분 삽티 성지로 이동.
삽티 성지 - 황석두 성인의 유해가 머물다 떠난 교우촌 |
성지의 주소는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 491
삽티(揷峙)는 ‘삽고개’라고도 불리는데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와 내산면 금지리 사이의 경계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이 고개를 사이에 두고 양쪽 계곡에는 조선시대에 천주교도들이 몰래 교우촌을 이루어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 마을 역시 삽티라고 부른다.
1850년대에 충북 괴산 연풍에 살던 황석두 루카 성인은 천주교도로 마을에서 배척을 받아 가족을 이끌고 홍산(鴻山, 하부내포, 부여지역)에 와서 양자인 황천일 요한과 조카인 황기원 안드레아를 삽티에 살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이웃 마을 산막골에서 페롱신부를 보필하면서 하부내포의 산골 교우촌을 다니며 신자들을 돌보았다.
병인박해로 인해 1866년 3월 30일 황석두 루카 성인은 다블뤼 주교와 페롱 신부와 함께 갈매못에서 순교하였고, 처형장 인근에 가매장되어 있던 그의 시신을 황천일과 황기원이 수습하여 그해 5월 삽티에 안장하였다. 하지만 그해 가을 황천일과 황기원이 황석두 루카 성인의 시신을 안장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홍산현에 체포되어 절두산에서 치명했다. 이로 인해 황석두 루카 성인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어 성인의 시신이 안장된 정확한 위치를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1922년 4월 6일 황석두 루카의 시복조사 재판에서 72세 황기원의 딸이 16세였을 때 이장한 사실을 목격한 사실을 아래와 같이 증언하였다.
“병인년 4월 16일에 나의 백부가 가서 시체 가져왔다고 합니다. 홍산 살티에 묻었습니다. 지금은 자손이 없기 때문에 가더라도 찾지 못합니다.”(병인박해 순교자 시복재판기록 1차 6권 1095쪽과 1111쪽)
1962년 삽티 일대를 개간 작업하던 외교인들이 이 부근의 묘터에 묻혀 있는 항아리 속에서 십자고상과 성모상과 묵주 등 성물을 발굴했다. 그 발굴지점을 교회사학자들은 황석두 성인의 안장지라 믿고 있다. 그런데 그 지점은 1990년대에 타지인들의 문중 묘역으로 바뀌어 성지로 개발되지 못하였다. 당시 발견된 유물들은 현재 서울 절두산 성지의 순교자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10여년 후 2012년 대전교구 윤종관 신부는 성물 발굴지에서 분할된 지번의 산지를 매입하고 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2016년 성지 조성을 시작하였다. 2018년 부여군에서도 성물 발굴지점으로부터 100미터 거리의 봉우리에 대형 십자가를 세우고 황석두 성인의 안장기념 자리로 표시했다. 십자가를 향하여 순례자들이 기도하는 이 자리를 ‘황석원(黃錫園)’이라 칭하고 황석두 성인 안장 묘원을 꾸몄다. 또한 묘원 안에 대전교구의 역사를 함께하는 제대를 안치하여 ‘황석정(黃錫亭)’을 건립했고, 제대 뒤 비석에는 성인의 신앙 고백인 “나는 천당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비록 만 번을 죽더라도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를 새겨 놓았다. 현재 삽티 성지와 월명산 정상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도앙골 성지’를 잇는 도보 순례길이 마련되어 있어, 숨죽이며 신앙생활을 이어갔던 선조들의 마음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 성 황석두(黃錫斗) 루카 (1813∼1866)
‘재건’이라고도 불렸던 황석두는 충청도 연풍의 양반 가문에서 자라나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 시험을 치르러 상경하다가,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하였다.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하며 교리서를 탐독하였고, 이에 감동한 부친과 가족들도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덕행이 뛰어나고 교리 지식이 풍부하여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로,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고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고 독신 생활을 하였으며, 안 주교를 도와 교리서 번역과 교회 서적 출판에도 참여하였다. 1866년 3월에 먼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던 안 주교를 몇 십 리나 따라간 황석두는 결국 함께 체포되어,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5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5시가 훨씬 지나 삽티에 도착하여 먼저 경내의 기도의 집이자 경당인 성석당(聖錫堂)부터 갔는데 문은 잠겨 있었다. ‘聖錫’은 물론 황석두 성인을 뜻한다. 조립식 건물이었으나 상당이 규모가 컸다. 인근에 조성된 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 십자가의 길 동산이 있다.
성석당 건너편에 황석원(黃錫園)이 조성되어 있다. 그 중심은 높이 솟은 십자가와 황석정(黃錫亭)이다.
황석정 안 천정에는 성지 소개가 있고 천정 꼭대기는 별모양 십자가가 있다. 그리고 제대 아래쪽에는 제대 돌의 이력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제대 뒤에는 황석두 성인의 어록이 기록된 오석 석조물이 있다.
안내에 의하면 이곳의 제대는 25년간 대전교구 대흥동 주교좌성당의 성전 중앙 제대였다 이 제대에서 대전교구 제2대 교구장 황민성 베드로 주교를 비롯하여 역대 대전교구 주교님의 착좌식과 대전교구의 사제 서품식을 거쳤던 제대로서 1936년 내부 공사로 새로운 제대에 밀려 대전 시내의 작은 성당의 제대로 10여년 간 미사가 봉헌되었으며 또 다시 그곳에서도 새로운 제대에 밀려 18년간 성당 화단의 모퉁이에 버려진 돌처럼 방치되어 있었다.
2016년 윤종관 가브리엘 신부는 그 돌처럼 방치된 것이 안타까워 시편의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시편 118, 22~23)라는 구절의 의미를 살려 이곳 삽티로 옮겼다.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관계로 제대의 상판이 훼손되어 이곳의 제대는 위,아래가 뒤집힌 상태로 설치되었다.
벌써 어둑해지는 시간 마지막 도앙골로 향했다.
도앙골 성지 - 최양업 신부의 첫 사목보고서를 쓴 교우촌 |
도앙골 성지의 주소는 충청남도 부여군 내산면 금지로 302번지.
원래 이곳은 신유백해(1801)때 순교한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의 전교로 천주교가 전래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1780-1790년대에 이미 교우촌이 형성되었다고 짐작이 된다. 도앙골이라는 이름은 이 지역에 개복숭아 나무가 많다고 하여 도원골(桃園谷)에서 유래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곳은 무엇보다 최양업 신부의 첫 번째 사목서간문이 작성된 곳으로 의미가 있는 성지이다. 최양업 신부는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 내국인 신부이며, 김대건 신부의 순교 후 약 4년 뒤에 입국하였다. 사제가 절대 부족했던 당시에 최양업 신부의 역할은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1850년부터 이후 12년 동안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사목활동을 하면서 당시 교우촌의 실정을 신학교 때의 그의 스승 르그레즈 신부에게 편지로 보고했다. 이때 쓴 편지는 아홉 교우촌(도앙골, 절골, 동골, 배론, 소리웃, 불무골, 오두재, 안곡, 죽림굴)에서 쓴 9통인데 그 첫 번째 서간문의 발신지가 도앙골이었다. 1850년 이후 약 9개월 동안의 활동을 도앙골 서간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저는 교우촌을 순방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을 도와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들은 포악한 조정의 모진 학정 아래 온갖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동포들로부터 오는 박해, 부모들로부터 오는 박해, 배우자들로부터 오는 박해뿐 아니라 친척들과 이웃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험준한 산속으로 들어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초라한 움막을 짓고 2년이나 3년 동안만이라도 마음 놓고 편안히 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가장 큰 박해인 1866년 병인박해 때 이곳에도 순교자가 발생했다. 오 요한, 김사범, 김 루카, 김 비오, 오 시몬 등이 체포되어 공주에서 치명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사실은 당시 도앙골 신자였던 김순장 요한이 서젓골 신자들과 함께 갈매못에서 치명한 성 다블뤼, 성 패롱, 성 황석두 루카, 성 장주기 요셉의 유해를 수습하여 서짓골에 안장하였다. 이로 인해 4위의 성인의 유해가 지금 절두산 성지에 보존되어 있다.
1890년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 도앙골에 다시 신자들이 모여 공소를 형성하여 80년을 지속해 내려오다가 1970년 공소가 폐쇄되었다. 하지만 2011년 9월 대전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의 주례로 도앙골 ‘기도의 집’ 축복식을 봉헌하고, 같은 해 12월 22일 전임 교구장인 경갑룡 주교의 주례로 ‘탁덕 최양업 시성 기원비’ 제막식이 열렸다. 시성 기원비 옆에는 최양업 신부의 열정적인 사목을 기념하는 제대를 만들어 봉헌하였다. 또한 도앙골 성지 옆에는 삽티 성지가 있어, 두 곳을 잇는 도보순례길이 조성되어 있어 옛날의 의미를 살리고 있다. 신앙을 위해 산속에 숨어 어려운 삶을 이어갔던 선조들의 마음과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해 주지 못해 안타까움을 지녔던 최양업 신부의 모습을 묵상해 보기에 더없이 좋은 성지이다.
삽티에서 도앙골 성지로 오는 시간도 20분 이상을 걸렸다. 도착하니 17시 40분이 넘었다. 이제 땅거미가 내린 시간이라 사진도 제대로 담을 수 없었지만 일단 성지 스탬프부터 찌고 주요한 시설 몇 곳만 둘러보았다. 최양업 시성기원비와 기도의 집, 그리고 제대였는데 사실 이것이 전부였다.
2011년에 세운 탁덕 최양업 시성기원비는 규모가 엄청난데 일반적인 장방형 몸돌에 지붕돌은 마치 팔공산 갓바위 부처와 같이 자연석을 그대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제대는 역시 자연석 판석이고 좌우에 입석이 시위하고 있다. 그리고 제대 뒤엔 십자가가 모셔져 있다.
기도의 집은 두 채가 앞뒤로 나란히 있었는데 들머리의 첫 집은 기와집이고 뒤의 것은 지붕에 풀을 올린 특이한 형태의 건물이었다. 이 중에 어느 것이 2011년도에 세웠다는 기도의 집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를 일이다. 건립 당시는 아마도 그럴듯했을지 몰라도 지금으로 봐서는 도저히 기도하는 집으로 보이지 않는다. 기와집은 민가로 보이고 초가는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마치 민간신앙과 관련된 집 같은 인상을 준다. 정돈도 되지 않아 기도가 나올 것 같지가 않다.
당호는 上善堂이라고 걸렸는데 善은 옛 글자를 써서 읽기가 어렵다. 지붕 위에 세워진 수탉으로 보아 처음에 지을 때는 기도의 집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성전에 수탉을 그리거나 수탉 모형을 배치하는 것은 베드로가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한 것을 두고 베드로의 나약함과 회심을 깨우치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 시온산 언덕 베드로 회개 성당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나바위 성지 치유의 경당 지붕 위에도 수탉이 있었다.
서둘러 떠날 차비를 하고 차를 돌렸는데 이미 사방이 어두워 식별이 잘 가지 않는다. 라이트를 켜고 떠나오는 성지순례는 이번으로 그쳐야겠다. 오는 도중에 휴게소에서 식사를 하고 경주 귀환하니 밤 10시. 운전자 라파엘 형제에게 미안한 마음 금할 수 없다.(김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