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71. 흉노의 역사와 안서 유림석굴
막고굴 못잖은 유림석굴
41개 굴 벽화,불상 황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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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석굴> |
사진설명: 유림하를 사이에 두고 양쪽 언덕에 41개의 석굴이 개착돼 있다. 내부 벽화와 불상은 돈황 막고굴 못지 않게 아름답다. |
돈황 막고굴, 명사산과 월아천 등을 샅샅이 살펴본 다음날인 2002년 9월28일. 돈황을 뒤로 한 채, 안서 유림굴(楡林窟)로 향했다. 막고굴 동쪽 유림하(楡林河) 양안(兩岸)에 있는 유림굴엔 41개의 석굴이 현존한다. 당나라 시기 3개, 오대 시대(907~979) 8개, 송나라 시기(960~1277) 13개, 서하 시대(西夏. 1032~1277) 4개, 청나라 시기 9개로 개착 시기가 각각 다르다. 41개의 굴 안엔 100여 위(位)에 달하는 소상(塑像), 1000㎡에 이르는 벽화가 있다.
차를 타고 돈황 시내를 빠져 나갔다. 시내를 빠져나가자 들판이 나왔다. 들판엔 양떼와 탁타들이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간간이 말 떼 들도 보였다. 자유로이 돌아다니며 풀을 뜯는 말들을 보자 불현듯 한 때 하서주랑 지역의 주인이었던 ‘흉노’가 떠올랐다. 하서주랑 지역을 놓고 한 나라와 수백 년간 다퉜던 흉노. 하서주랑을 한 나라에 빼앗기자마자 흉노는 점차 세력을 잃고, 한족(漢族)에 동화돼 갔다. 흉노는 어떤 민족일까.
사마천이 지은〈사기〉‘흉노열전’에 의하면 흉노족은 하후씨(夏后氏)의 자손으로 순유(淳維)로도 불렸다. 북방 지역에 거주한 그들은 가축을 방목하며 생활했다. 말·소·양 드물게 탁타, 당나귀, 노새, 버새, 도도(말의 일종), 탄혜(말의 일종) 등을 길렀다. 물과 풀을 찾아 이동하고, 성곽과 거주지는 없으며, 농사도 짓지 않았다. 그러나 각자가 소유하는 땅은 있었다. (중략) 원거리용으로 활을 사용하고, 백병전에서는 칼과 창을 사용했다. 군왕 이하 모두가 가축의 고기를 먹으며 짐승 가죽을 몸에 걸치고 털로 짠 옷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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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유림석굴에서 창마석굴로 가다 본 들판. 그 옛날 하서주랑 일대는 흉노족들이 지배했다. |
흉노와 중국의 관계가 역사책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전국시대인 기원전 4세기. 실제로 흉노가 중국과 적국으로 대치했다는 기록이 처음 보이는 것은 만리장성이 축조되던 때였다. 기원전 215년. 진시황이 황제에 오른 지 6년째 되던 해, 그는 장군 몽염에게 흉노 토벌의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오르도스 일대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흉노족들은 멀리 북쪽으로 쫓겨 갔다. 오늘날의 섬서성 북부에서 내몽골자치구에 걸쳐 있는 오르도스 지방은 황하의 완곡부(婉曲部)로 둘러싸인 지역. 흉노를 몰아낸 진시황은 서쪽 감숙성에서 시작해 동쪽으로 한반도 북부지역에 이르기까지 방어벽(만리장성)을 축조했다. 진시황 당시 흉노의 군주는 선우(單于)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탱리고도선우’가 정식 명칭인데, 〈한서〉에 의하면 ‘탱리’는 ‘하늘’, ‘고도’는 ‘아들’, ‘선우’는 ‘넓고 큰’이라는 의미다. ‘탱리고도선우’는 바로 ‘광대한 천자’라는 뜻. 진시황 때는 ‘두만(頭曼)’이라는 선우가 흉노 일족을 이끌었다. 그에겐 묵특(冒頓)이란 아들이 있었다. 묵특이 바로 한 제국과 대항한 선우였다.
만리장성 축조 중국-흉노 대치
사실 두만 선우는 묵특 보다는 막내아들을 더 좋아해, 그를 선우에 앉히고 싶었다. 묵특을 이웃 나라인 월지(月氏)에 인질로 보내고, 그런 다음 월지를 공격했다. 월지와 묵특 둘 다 없애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묵특은 월지의 말을 훔쳐 타고 도망쳐 나왔다. 아버지 두만도 묵특의 쾌거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마지못해 묵특을 기병대장에 임명하고 1만의 병사를 주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병력까지 획득한 묵특은 ‘선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철저한 계략을 꾸몄다.
어느 날 아버지 두만과 함께 사냥을 나간 묵특은 자기 아버지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그 기세를 몰아 묵특은 계모와 동생들, 자신에게 반기를 든 대신들도 모두 죽여 순식간에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이 때가 기원전 209년, 진의 제2대 황제 호해가 즉위한 바로 그 해였다. 기원전 206년 묵특은 주변의 동호 등 다른 민족을 제압하고 일대에 세력을 구축했다. 206년은 전한 고조 유방이 황제가 된 해. 한 제국의 성립과 동시에 북쪽에 강대한 유목 민족 국가 흉노가 탄생된 것. 한과 흉노 양국의 200년에 걸친 공방의 역사가 개막될 모든 준비가 완비됐다.
한편, 흉노의 수장 선우 아래엔 좌현왕과 우현왕의 두 현왕을 필두로, 좌·우 곡려왕, 좌·우 대장, 좌·우 대도위, 좌·우 대당호, 좌·우 골도후가 있었다. 좌·우현왕 이하 대 당호까지는 1만기에서 수천 기의 병사를 거느렸고, 각기 영토를 부여 받았다. 좌·우현황에는 선우의 가까운 친족이 임명됐는데, 좌현왕에는 보통 태자가 임명됐고,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렸다.
선우가 있는 본영을 ‘선우정(單于庭)’이라고 하는데, 흉노가 내몽골 일대를 지배할 묵특선우 시대의 본영은 현재의 ‘후허하오터(呼和浩特) 지역’에 있다가 뒤에 오르콘강 상류의 ‘카라코룸’으로 옮겼다는 것이 정설이다. 선우정을 중심으로 동쪽이 좌현왕, 서쪽이 우현왕의 영토였다. 사료에 따르면 전성기 때 흉노의 총인구는 100만 이상, 병사 수는 30만~40만 정도였다.
한 고조 유방이 제위에 올라 장안을 수도로 정한 것이 기원전 202년 10월. 이 때 흉노는 이미 북방의 장성을 넘나들고 있었다. 기원전 201년 음력 10월. 유방은 병사 32만(대부분 보병)을 이끌고 흉노 정벌에 나섰다. 묵특 선우의 교묘한 전법에 걸려 ‘비참하게 패배(평성의 치욕)’하고 “한은 흉노 선우의 비로 한 황실의 여인을 보낸다, 한은 매년 일정량의 솜 비단 술 식료품을 흉노에게 바친다, 한과 흉노 양국은 형제관계를 맺는다”는 내용의 화친조약을 맺고 간신히 장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무제 때 흉노 하서주랑 잃고 쫓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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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돈황에서 유림석굴로 가다 본 기련산. 흉노족들이 말에게 풀을 뜯어 먹이던 산이다. |
시간이 흘러 한은 고조, 혜제, 소제를 지나 문제 치세로 접어들었다. 흉노도 거의 34년간 계속된 묵특 선우의 시대가 끝나고 기원전 174년(문제 6년), 노상(老上)이 새로 선우의 자리에 올랐다. 그 사이에도 한의 흉노에 대한 굴욕 외교는 변함없이 계속됐다. 그러던 기원전 141년. 한의 6대 황제 경제가 죽고 황태자 유철이 16살의 나이로 제위를 계승했다. 중국 역사상 명군에 포함되는 무제가 등장한 것이다.
무제는 흉노와 일전을 벌일 만반의 준비를 했다. 노심초사하기 수 년. 기원전 129년 무제는 거기장군 위청, 경거장군 공손하, 기장군 공손오, 효기장군 이광 등 장군 네 명에게 각기 1만의 기병을 이끌고 흉노 토벌에 나서게 했다. 네 명 중 위청(무제의 황후인 위황후의 동생)만이 괄목할 성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 때 시작된 흉노 토벌은 기원전 119년까지 모두 10차례나 계속됐다. 이들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둔 인물이 바로 위청과 곽거병이었다. 곽거병은 위청의 누나이자 위황후의 언니인 위소아가 낳은 아들이었다. 하서주랑 일대의 흉노는 서서히 세력을 잃고 고비사막 이북으로 도망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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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유림석굴 입구 들판에서 본 낙타. |
흉노는 결국 고비 사막의 북쪽, 현재의 울란바토르 근처로 쫓겨났고, 고비사막은 양국의 국경이 됐다. 흉노에겐 기련산맥과 북쪽의 하서주랑 일대를 잃은 것이 가장 큰 타격이었다. 기련산맥의 물이 만들어 내는 좁고 긴 모양의 초원지대는 말의 방목지로 최적의 장소였다. 방목지를 잃은 흉노의 기병은 점차 힘을 잃었고, 군사력도 약화돼갔다. 반면 땅을 획득한 한은 점점 더 안정된 힘을 얻고, 강성해졌다. 하서주랑을 잃은 흉노들은 비통에 잠겨 이런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기련산을 잃어,
이제는 양과 소와 말과 함께하는 삶이 없네.
우리는 언지산을 잃어,
이제는 처자의 볼에 바를 연지가 없네.
흉노족들의 슬픈 역사를 생각하는 동안 차는 계속 달려 유림굴에 도착했다. 강물을 사이에 두고, 양 계곡에 석굴들이 일렬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유림굴을 대표하는 석굴은 성당(盛唐)시기 개착된 제25굴이다. 안내인을 따라 굴 안으로 들어갔다. 학자들은 제25굴이 776년에서 781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하는데, 주실은 방형이고, 전실은 횡장방형. 중간에 길고 넓은 용도가 주·전실을 서로 연결하며, ‘고(古)’자를 뒤집어 놓은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주실 중앙에 사각형 모양의 불단이 설치돼 있지만, 부처님 상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32굴 등 공개되는 11개의 굴을 모두 둘러본 뒤, 석굴에서 나왔다.
석굴에선 나왔지만, 석굴 속에 봉안돼 있는 화려한 벽화와 다채로운 소상들이 여전히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막고굴 못지않은 석굴이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막고굴만 찾는데, 유림굴 역시 반드시 가보아야 할 곳으로 여겨졌다. 석굴 사이에 흐르고 있는 강변에 앉았다. 양쪽의 석굴들을 보며 다시금 불교의 역사를 떠올렸다. 흘러가는 강물처럼, 성(盛)의 극(極)을 달렸던 불교 역시 구름처럼 물처럼 그렇게 흘러가고 만 것일까. 다시는 성세(盛勢)가 돌아오지 않을까. 강물을 보며 불교가 다시금 이 지역에서 꽃필 날을 그려보았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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