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6일(월) <가상칠언 첫 번째 말씀>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 용서의 삶 |
오늘의 말씀 / 누가복음 23:32~38오늘의 찬송 / 135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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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형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가장 극악하고 잔인한 형벌입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죄수들은 그 엄청난 고통을 견디다 못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온갖 저주의 말들을 쏟아내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비범한 죄수의 마지막 말은 저주의 말이 아닌 용서의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로마 군병들에게조차 놀라운 충격이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은 용서를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갚는 세상, 아니 나아가 ‘두 배, 세 배’로 보복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믿는 사람들이 억울한 피해를 당하고도 그냥 참고 용서해야 한다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통해 진실로 그 분이 이 땅에 용서하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 분의 삶은 진정 용서하시는 삶이었습니다(주님은 십자가상에서 이미 전에 말씀하셨던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를 그대로 실천하셨습니다.). 바로 그 분에게서 용서를 받아 새로운 삶을 시작한 우리라면 주님처럼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은 다 용서를 어리석다 하여도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만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하며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첫째로, 용서해야 할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용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것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를 위해서 충분히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원수를 향해서도 중보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중보기도를 잘 하지 못합니다. 기껏 해봐야 기도의 범위가 자기 자신과 가족을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기도의 범위가 좁아질수록 기도의 능력도 작아집니다. 기도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기도의 능력도 커집니다. 그래서 중보기도의 능력은 위대합니다.
특별히 중보기도를 하면서도 자신의 가족 혹은 나와 가깝거나 호의적인 사람만을 위해서 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원수들을 오히려 염려해주고, 오히려 용서해주고, 오히려 그들을 부탁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하신 것입니다. |
삶을 위한 묵상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나와 가깝거나 친하지 않은 사람, 심지어 나에게 아픔을 주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중보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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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인간의 무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알았더면 저들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무리들은 예수님이 인간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고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 분의 사랑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어찌 그들이 감히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웃들의 잘못을 정당화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무지 때문에 별 수 없이 행하는 그 잘못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지금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죄악과 멸망의 길로 빠져 가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
∙혹시 다른 사람들 때문에 고통을 당하거나 해를 입은 적이 있습니까? 혹시 지금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에게 해를 주고 아픔을 주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보십시오. 특별히 그들의 무지(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무지)를 이해한다면 한결 용서가 쉬워질 것입니다. |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용서한 것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달리게 함으로서 용서의 사명을 실천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용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
∙용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따라서 용서하지 못하는 삶은 불순종입니다. 오늘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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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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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올해 교회 표어 :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되도록, 모든 성도들이 하나 되고 증인 되도록
∙성금요일 예배를 위해
∙부활주일예배와 총동원 출석주일 행사를 위해 (한 성도가 한 영혼을!)
∙환자들을 위해 : |
4월 7일(화) <가상칠언 두 번째 말씀>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구원의 삶 |
오늘의 말씀 / 누가복음 23:39~43오늘의 찬송 / 137장 |
삶을 위한 묵상 |
예수님의 가상칠언 두 번째 말씀은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구원의 말씀입니다. 이 구원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의 성격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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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구원은 예정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정설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예정된 것이고 계획된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두 강도 사이에 매달린 그 사건조차도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700년 전에 이미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예언하신 바 있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사 53:12). 이 말씀은 예수님이 두 강도 사이에서 죽어갈 것과 한 쪽 편 강도를 용서할 것을 미리 예언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의 구원이 미리 계획되고 예정된 것임을 확신하기 바랍니다. 한낱 살인강도의 구원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미리 예정되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의 구원은 놀랍게도 이미 창세 전에 계획된 것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
∙여러분은 우리의 구원이 이미 창세 전에 예정된 사실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놀라운 구원과 인도의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발견하고 감사와 감격이 넘쳐 살아간다면 언제나 우리 삶 속에 은혜와 능력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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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구원은 현재적인 것입니다.
“구원” 하면 죽은 다음에 천당 가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을 구원의 미래성이라고 합니다. 물론 죽은 후에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에 못지 않게 구원의 현재성을 강조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은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마지막 순간에 회개한 강도는 예수님께 이렇게 구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강도는 미래의 구원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가 죽으면 낙원에 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즉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는 그 순간에 이미 천국에 들어가고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늘 구원이 네 집에 이르렀다.”
오늘이 바로 구원의 시간입니다. 오늘이 바로 회개해야 할 시간입니다. 오늘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야 할 시간입니다. 바로 오늘이 하나님의 낙원을 경험해야 할 시간입니다. |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오늘이 바로 은혜 받을만한 시간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시간, 은혜의 시간을 놓치지 마십시오.
마귀가 가장 즐겨 쓰는 전략이 바로 “내일 하자, 다음에 하자”는 마음을 사람들 속에 집어넣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마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받는 것을 가장 강력하게 방해합니다.
바로 지금,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
*셋째, 구원받아 가는 낙원은 어디일까요?
구원받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낙원”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낙원은 어떤 곳일까요? 어떤 부흥사가 간증한 것처럼 온갖 보석과 아름다운 집, 화려한 치장이 가득해서 낙원입니까? 질병도 아픔이 없는 곳이라 낙원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에 낙원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주이시며 내 찬송의 대상, 기도를 응답하시는 주님이 그곳에 계셔서 낙원입니다. 구원의 궁극적인 상태는 낙원에 가서 주님과 더불어 함께 거하는데 있습니다. |
∙여러분은 이미 이 땅 위에서 낙원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직장이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곳이 되고 그곳을 주님이 다스리신다면 그곳이 바로 낙원입니다. |
*넷째, 구원받은 강도는 누구일까요?
두 강도가 십자가에 매달린 이유는 예수님이 달리신 이유와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나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하지만 두 강도는 정말 십자가에 달릴만한 죄를 지어서 달린 것입니다. 정말 용서 받을 수 없는 흉악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큰 죄를 짓고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 중 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왜일까요? 바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주님께 용서와 구원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는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우리들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죽을 죄인이라도 주님께 나아가면, 회개하고 용서와 구원을 구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존심이나 고집이나, 강퍅한 마음 때문에 구하지 아니하면 멸망과 죽음뿐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구원받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여러분 자신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임을 인정하십니까?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주님과 함께, 주님을 위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 존재임을 인정하기 바랍니다(갈 2:20).
그리하면 우리도 구원받은 강도처럼 예수님의 긍휼과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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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 성도들 모두가 바른 자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성금요일 예배를 위해
∙부활주일예배와 총동원 출석주일 행사를 위해 (우리 구역의 장기 결석자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의 영혼을 위해)
∙환자들을 위해 : |
4월 8일(수) <가상칠언 세 번째 말씀>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 사랑의 삶 |
오늘의 말씀 / 요한복음 19:25~27오늘의 찬송 / 139장, 복음성가 “그 때 그 무리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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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는 인륜의 가장 근본이 되는 아름다운 미덕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조상들은 효(孝)를 가장 중요하고 첫째 되는 덕목으로 삼아왔던 것입니다. 구약의 십계명에도 보면 1~4계명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계명이요, 5~10계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계명인데 그 첫째 되는 5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 2절에서도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예수님의 가상칠언 세 번째 말씀은 바로 이 인륜의 기본인 효에 대해 가장 감동적인 한 장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
*첫째, 예수님의 타인에 대한 사랑과 관심
예수님은 이미 가상칠언 첫 번째 말씀에서도 타인, 심지어는 원수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두 번째 말씀에서도 저 잔악한 강도의 구원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관심을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로 돌립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밑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또 그 곁에 있던 제자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이제 자신은 죽음을 맞게 되지만 대신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긴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비록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해 목숨을 버리지만 육신의 어머니에 대한 극진한 관심과 사랑을 보인 것입니다. 여기에 단순한 효나 육신의 인정을 뛰어넘는 본질적이고 기독교적인 아가페의 사랑이 드러납니다. 타인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과 관심, 소중한 배려 말입니다. |
삶을 위한 묵상
∙우리는 타인(이웃, 성도들, 새 가족, 불신자 등)에 대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현재 그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배려하는 자세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뽑아보고 우리 개인과 교회의 부족한 부분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또 어떻게 보완할 수 있는지도 생각해 봅시다. |
*둘째, 요한의 응답이 귀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부탁에 대해 요한은 어떻게 응답합니까?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27절)고 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평생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신실히 섬겼다고 합니다. 주거지를 에베소로 옮긴 후에도 요한은 마리아를 평생 봉양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에 가면 요한이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던 집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부탁에 응답하여 평생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섬기며 산 요한... 우리는 그에게서 사랑을 배워 실천하는 참된 제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교회를 통해 사랑을 배우지만 실제로 얼마나 정성스럽게 실천하고 있습니까? |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습니까? 사랑은 피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지극히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 정성스러운 자세를 가질 때만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모양으로 실생활에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고 있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
*셋째, 요한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렇다면 요한이 이렇게 마리아를 극진히 섬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요한은 주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주의 사랑하는 제자’로(요 13:23, 19:26 등) 예수님의 관심과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은 제자입니다.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이 쓴 요한1서에서도 이렇게 증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하나님)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주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사람은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둘째로, 요한도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 받은 사람은 그 사랑을 되돌려줄 의무가 있습니다.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랑의 빚을 나를 사랑한 그 사람에게 되 갚는 것이 아니라 제3자, 다른 사람에게 갚을 때 더욱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법입니다. 요한은 주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 사랑의 빚을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갚았습니다. 또한 나중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과 주님의 사랑을 전함으로 갚았습니다. 이렇게 사랑의 순환(cycle)이 계속될 때 사랑은 큰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자로서 어떻게 그 사랑의 빚을 갚고 있습니까?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갚고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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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부모사랑은 어떤 모습입니까? 단순히 물질적으로 육신적으로 편하게 해드리는 차원이 아닌지요. 진심으로 부모님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 분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을 채워드리고 있습니까?(예를 들면 말벗이 되어드리는 일, 불신 부모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일 등) |
*넷째, 진정한 부모 공경은 무엇일까요?
진정한 부모 공경은 부모가 필요한 물질을 공급하고 육신을 편하게 해 드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바로 부모님을 진심으로 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물질적으로 풍요하게 도와드리지도 못했고 공생애 이후 계속해서 집을 떠나 있느라 어머니를 편하게 모셔드리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관심은 참으로 컸습니다.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한 것입니다. 어머니를 귀하게 여기고 진정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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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 교회가 지원하는 국내외 선교지와 목회자들을 위해
∙성금요일 예배를 위해
∙부활주일예배와 총동원 출석주일 행사를 위해 (불신 가족과 친척들의 영혼을 위해, 그들을 전도할 수 있는 능력을 사모하며)
∙환자들을 위해 : |
4월 9일(목) <가상칠언 네 번째 말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고독의 삶 |
오늘의 말씀 / 마태복음 27:45~46오늘의 찬송 / 141장, 복음성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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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울프라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삶의 중심 되는 목적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고독한 삶을 치유하여 사랑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예수님의 삶 자체가 고독한 삶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고독을 치유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의 삶 자체가 지극히 고독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고백도 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 참으로 고독한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마지막으로 향해 갈수록 점점 더 고독해 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난이 다가올 때 제자들이 하나 둘 그 곁을 떠나간 것입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 16:32). 참으로 깊은 고독이 배어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가상칠언 네 번째 말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처절한 고독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러한 처절한 고독과 고뇌를 느껴야만 했을까요? |
*첫째,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인데도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온 인류의 죄를, 온 세상의 죄를 다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 순간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단 한 번도 교제가 끊기지 않았던 그 아들을 향해서 고개를 돌리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주님의 입술에서는 이 피맺힌 절규가 토해져 나온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왜 이 거절과 배신을 경험하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나요? 나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
삶을 위한 묵상
∙우리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십니까? 주님께서 이 죄를 대신 지고 돌아가신 사실을 고백하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절규가 바로 나 자신 때문임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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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 때문이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죄는 언제나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죽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 전 인류의 죄가, 세상의 죄가 예수님에게 매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기에 그 분의 분노를 쏟아 붓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고 있습니다. 이 심판과 진노의 한 복판에서 주님의 절규가 터져 나왔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어떤 고독도, 어떤 고통도 이 고독, 이 고통과 비교될 수 있을까요?
주님은 진노와 심판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침묵 가운데서 버림받아 절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 삯을 대신 지불하게 만드는 그 순간이었습니다. |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주님이 대신 지셨습니다. 내가 받을 심판과 고통을 주님이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매일 느끼며 살아가십니까? 이 고난주간에 그 고통과 은혜를 깊이 묵상하며 지내십니까? |
*셋째, 우리의 구원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 무서운 진노와 심판을 견디시고 최후의 핏방울을 떨구는 순간, 우리의 죄의 삯은 지불되었습니다. 이제는 생명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 분은 이 심판과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을 한 몸에 지고 그 아픔을 견디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 분은 고통과 고독의 절규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아직도 고독하다고 느끼며 살고 있습니까? 그 고독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고독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 있다면 참으로 고독을 아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가는 길뿐입니다. 예수님은 이 고독의 원인이 죄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그 고독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절규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와 고독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
∙아직도 인생의 고독과 고민 가운데 방황하십니까? 이 모든 문제를 주님이 대신 지고 가셨음을 깨닫기 바랍니다. 아직도 해결 안 되는 무거운 문제가 있습니까?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 분 앞에 모든 무거운 짐과 고민을 내려놓으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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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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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
∙교육 : 교회학교를 위해
∙성금요일 예배를 위해
∙부활주일예배와 총동원 출석주일 행사를 위해 (내가 전도해야 할 태신자를 위해)
∙환자들을 위해 : |
4월10일(금) 새벽 <가상칠언 다섯 번째 말씀> |
“내가 목마르다” : 고통의 삶 |
∙오늘의 말씀 / 요한복음 19:28~29∙오늘의 찬송 / 144장, 복음성가 “주님 가신 길” |
삶을 위한 묵상 |
“딥소”(dipso). 우리말에는 “내가 목마르다”라는 두 마디로 되어 있지만 헬라어에는 ‘딥소’라는 단 한 마디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고통의 신음소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깊은 신음소리를 내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이었습니다. 트루맨 데이비스라는 의사가 쓴 현대 의학으로 본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나침반사)이라는 책에서 그 고통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피땀을 흘리시다(눅 22:44) : 극도의 감정적인 과로상태에서 실제로 작은 모세관이 땀샘에서 파괴되어 피와 땀이 섞일 수 있습니다(히마티디로시스 현상)
∙조롱과 모욕을 당함 : 대제사장 가야바의 사환에게 뺨을 맞고 성전 경비대원들에게 조롱과 침 뱉음과 구타를 당함
∙채찍질을 당함 : 납덩이와 뼈 조각 등이 달린 가죽채찍으로 39대의 매를 맞아 살이 패이고 극심한 출혈을 당하고 등의 살가죽이 너절너덜해짐. 심한 경우 뼈까지 드러난다고 함
∙로마 군병들에게 조롱을 당함 : 로마 군병들이 조롱하며 자색 옷을 입히고 손에는 왕의 홀(笏) 대신 갈대를 쥐어주고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씌움.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내리침
∙자색 옷을 벗김 : 온 몸에 흘러내린 피가 자색 옷에 응고되어 들어붙어 있다가 옷을 벗기자 마치 상처를 감싼 외과용 붕대를 마구 잡아뜯는 것 같이 상처에서 심한 출혈이 시작됨
∙골고다에 오르심 : 무거운 십자가의 가로대를 예수님의 어깨에 가로질러 묶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감. 거친 나무와의 마찰로 인해 다시 출혈은 시작되고 예수님은 그 심한 출혈의 충격으로 십자가 가로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계속 쓰러짐
∙십자가에 못 박히심 : 골고다 언덕에 도착해 옷을 모두 발가벗긴 후(엄청난 수치) 무겁고 네모난 단철 못을 손목을 뚫어 가로대에 박고, 이 가로대를 세로대에 달아 올려 고정한 후 발에도 못을 박음. 머리 위에는 죄목을 담은 죄패를 세움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심 : 세 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려 주님은 손목과 발목에 박힌 못의 고통, 근육경련과 발작 현상, 횡경막이 눌려 극심한 호흡 곤란을 느끼고 거친 기둥에 기대 몸을 밀어 올릴 때 찢겨진 살이 마찰되는 고통, 심장이 내리 눌리고 심한 탈수현상으로 인해 가슴 깊은 곳에서 엄청난 목마름을 느끼게 되는 등 여러 가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제 주님은 이런 모든 고통의 마지막 단계에서 심한 목마름을 느끼고 이렇게 외치게 됩니다. “내가 목마르다!” 주님이 이렇게 피맺힌 절규를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참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왜 이런 극심한 고통을 당했을까요?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참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고통을 겪으신 것입니다. 배고픔과 피곤함, 목마름과 병들어 아파함, 외로움과 시험, 오해와 배신 등을 거쳐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을 참아내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28절에 보면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사”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성경 말씀을 응하게 하신 것일까요? 바로 시편 69편 21절에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본문 29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신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라” 했습니다. 정확히 시편말씀을 성취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의 목마름과 십자가 고통 자체가 모두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고 그 계획을 정확하게 성취한 사건임을 말해줍니다.
*셋째, 우리가 목마르지 않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처럼 우리는 늘 목마름 가운데 있습니다(요 4장).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어도, 제 아무리 인간적 방법으로 몸부림을 쳐도 이 목마름은 가실 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그 목마름을 해결했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소생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허덕이고 아무리 애를 써도 해결되지 않는 목마름 속에 있던 우리 인간을 대신해 목마름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목마름의 고통을 아는 그 분 앞에 나가면 그 분은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십니다. |
∙주님의 고난을 묵상해봅시다. 우리는 이 십자가형에 대해 설명만 들어도 몸서리처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물며 실제로 그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고통은 어떠했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이 잔혹한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생각해봅시다. 죄 없는 그 분이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했을까요?
∙지금 목이 마르십니까? 아무리 인간적인 방법으로 몸부림쳐도 해결되지 않는 갈증이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이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몸소 고통을 체험하셨습니다.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목마름을 경험하셨습니다.
그 분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 분이 목마름의 절규를 외친 그 십자가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나의 모든 문제와 갈증을 그 분께 아뢰십시오. 주님은 십자가의 피맺힌 절규로 이미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
기
도
제
목 |
∙봉사 :
∙성금요일 예배를 위해
∙부활주일예배와 총동원 출석주일 행사를 위해 (교회에 등록한 새 가족들이 잘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도록)
∙환자들을 위해 : |
4월10일(금) 성금요일예배 <가상칠언 여섯 번째 말씀> |
“다 이루었다” : 성취의 삶 |
오늘의 말씀 / 요한복음 19:30오늘의 찬송 / 147장 |
삶을 위한 묵상 |
“다 이루었다!”
과연 세상에서 그 어떤 사람이 최후의 순간에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 임종 직전에 내가 할 일을 다 못했다고 후회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이렇게 내 할 일을 다 이루었다고 말하며 숨을 거두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이것은 성취의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33년의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게다가 모두가 두려워하고 천시하는 잔인한 십자가형에 처해져 끔찍하게 죽어갔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에 너무나도 당당히 이렇게 외친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사명을 다 성취하고 떠나간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33세의 젊은이는 그의 짧은 인생에서 무엇을 다 성취하였다고 외친 것일까요?
첫째,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그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 철저하게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 그 분의 삶, 그 분의 죽으심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의 동정녀 탄생이 이미 예언되었고 그의 혈통(다윗의 자손)과 탄생지(베들레헴), 그리고 이름까지 미리 예언되었습니다. 나아가 그의 성장(애굽 피신)과 예루살렘 입성(나귀를 타고), 은 30냥에 친구에게 팔리고 십자가라는 나무에 달려 범죄자 중 하나로 간주될 것, 그리고 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박는 이들을 향해 용서의 기도를 하고 그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께조차 버림을 받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칠 것까지 예언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애를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그래서 그 뜻이 마지막에 완성되는 순간 그 분은 고통의 절정에서, 그러나 기쁨과 감격으로 이렇게 외치신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둘째, 율법의 성취였습니다.
주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7).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정죄되어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대신하여 그 율법을 지키심으로, 사람들이 율법을 깨뜨린 결과에 대해서 대신 저주를 받으심으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법을 깨뜨린 사람은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때에 법은 만족될 수가 있습니다. 율법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없었던 인간의 허물을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십자가에서 인류를 대신해서 그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이 “속량했다”는 말은 헬라어 “테텔레스타이”로 ‘빚이 해결되었다’, ‘완불되었다’는 뜻을 가진 상업적인 용어입니다. 죄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지고 있는 도덕적인 빚과도 같은 것입니다. 갚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인간에게는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바로 이 빚을 예수께서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해결하셨기에 마지막 순간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 구원의 성취였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죄의 대가인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이 완료된 바로 그 순간,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것입니다. 완성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보태거나 보충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셨기에’ 우리가 할 일은 더 이상 없습니다. 단 하나, 이 구원을 다만 믿음으로, 선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
∙우리는 과연 우리의 인생을 마칠 때 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 이루었다? 그래도 조금은 이루었다? 아니면 후회와 부끄러움에 가슴을 치며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겠습니까?
부디 우리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삶을 살지 않기 바랍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마지막 순간 하나님 앞에서는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삶이 되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다 이루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셨건만 아직도 율법적인 사고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 착하고 살았기에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공로주의), 교회에서 율법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고집과 독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바리새인들과 같은 율법주의를 고수하느라 변화를 거부하는 분위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자유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유케 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
기
도
제
목 |
∙영성훈련 : 우리들 자신의 예배생활, 말씀생활, 기도생활, 찬양생활이 날마다 성숙해지도록
∙성금요일 예배를 위해
∙부활주일예배와 총동원 출석주일 행사를 위해
∙환자들을 위해 : |
4월 11일(토) <가상칠언 일곱 번째 말씀> |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 신뢰의 삶 |
∙오늘의 말씀 / 누가복음 23:46 ∙오늘의 복음성가 /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
삶을 위한 묵상 |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가상칠언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이 기도는 정녕 그 분의 죽음이 승리의 삶의 결산인 것을 보여 줍니다. 이 승리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무엇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승리의 삶, 승리의 죽음을 맞이하게 한 것일까요? 우리는 그 비결을 바로 “확신”이라는 한 단어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에 대한 확신입니까?
첫째,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대한 확신입니다
주님의 생애는 짧았지만 그 분은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 속에서 사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늘 그 아버지와 동행하고 함께 하는 생을 사신 것입니다. 그 분은 공생애 동안 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고(산상수훈에만 무려 ‘아버지’라는 단어를 17번 사용하심)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함께 하심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확신에 찬 외침을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더라도 누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확신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며 나는 그 분의 자녀라는 확신이 있을 때,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감사와 감격, 새로운 소망이 넘쳐흘러야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내 인생의 걸음마다 순간마다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동안 늘 말씀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확신하고 시편 31편 5절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시 31:5).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이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붙잡고 생애 마지막 죽음의 강을 담대히 건너갈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스데반도, 저 유명한 폴리캅 감독도, 종교개혁가인 요한 후스도, 마르틴 루터도 생애 마지막 순간에 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생을 의탁하지 못할 때 내 생의 기초는 빈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하여 살다가 내 생이 끝나는 날 다시금 주의 말씀을 의뢰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확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면서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음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참새)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느니라”(마 10:29~31).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 사랑하는 자녀들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인생이 평안하고 즐거울 때도 마찬가지지만 특별히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변함 없이 전능하신 손으로 나를 붙들어 인도하심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의 손을 꼭 붙잡고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손길 앞에 의탁하시기 바랍니다. 삶을 의탁하십시오. 우리 자신을 맡기기 바랍니다. 한 평생 이 손을 붙들고 가시기 바랍니다. |
∙인생이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십자가의 주님이 늘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인도하고 보호하심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언제나 나의 손을 붙잡고 놓지 않으심을 믿기 바랍니다.
다음에 나오는 복음성가의 가사를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 도와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사람들은 누군가 든든한 사람이(이것을 세상에선 ‘빽’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보호하고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무척이나 든든해하고 용기도 갖게됩니다.
우리는 놀랍게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고 있습니다.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아버지 손에 인생을 맡긴 사람은 인생의 그 어떤 순간에도, 심지어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인생을, 내 가족의 인생을 우리 스스로가 책임지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맡아주시마 약속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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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희생의 삶 : 부활의 참 기쁨을 얻기 위해 먼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도 함께 질 수 있도록
∙부활주일예배와 총동원 출석주일 행사를 위해 (그 날에 교회 모든 예배가 차고 넘치며 은혜와 능력도 넘쳐날 수 있도록)
∙환자들을 위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