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6차 ‘학음 심원열의 울산살이’ 강의를 듣고/안성환
일시: 2024. 11. 26(화)
강사: 엄형섭(부산대학교 한문학과)
주관: 사)울산문화아카데미
오늘은 엄형섭교수의 ‘학음 심원열의 울산살이’ 특강이다. 먼저 전체적인 느낌은 학음선생은 실험적이고 경험 중심적인 소재와 사유를 다양한 문학 장르에 구사했다는 느낌이다. 이런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작품들을 개인적인 성향에서 발로한 것으로 보이며 교유관계도 매우 좋은 듯하다.
먼저 학음 심원열의 생에 대하여 조금 알 필요가 있다. 학음은 1792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1866년, 75세에 세상을 떠난 분이다. 당시 나이 64세에 울산부사(시장급)로 부임할 정도이니 장수한 관료로 보인다. 선생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본관은 청송이고 호는 학음이다. 증조부는 정조 때 노론 시파의 대표적 인물이자 사헌부장령과 제주목사를 역임한 통훈대부 심낙수이다. 그의 가계는 일찍이 증조부가 노론 시파의 대표적 인물로 거론될 만큼 명문가였으나, 증조부 사후의 정치적 격변 속에서 가문의 쇠락과 잇따른 가정의 불우, 그리고 그 자신의 유배생활로 인해 그리 순탄치 않은 삶을 겪었다. 하지만 지방외직과 유배생활은 학음에게 당대 현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과 아울러 다양한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인다. 그는 여러 벼슬을 거쳐 1855년에 울산부사로 임명되었고 뒤이어 1857년 정월에 진주목사로 부임하였다가 그해 8월에 울산으로 유배를 온 좀 특이한 관료이다. 학음의 일기에 보면 ‘즉기지정배則其地定配’ 글이 나오는데 이 말은 ‘법에 따라 도호부사로 지냈던 자리로 유배 간다.’라는 뜻이다. 정리하면 ‘자기가 도호부사로 지냈던 자리로 귀양 보낸다.’란 뜻이다. 아마 피를 토하고 싶을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의 시속에 당시의 마음을 이렇게 적어 놓았다. ‘울산사람들 보기가 부끄러우니, 마치 시장에서 매를 맞는듯하여 자다가도 놀란다. 라고 했다.
학음의 많은 시 중에 몇 점을 소개한다. 여우를 잡는 ‘포호기’라든지 전복을 따는 ‘채복설’ 그리고 태화강 둑의 버드나무를 모두 베어버린 ‘벌류소기’ 등등 모두가 구체적인 경험과 체험중심으로 잘 정리하였고 서사적 측면에서는 약간의 과장도 보이었다. 서술적 측면에서는 현실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해결하고자 고심하는 진보적인 면까지 지니고 있어 강의는 더욱 흥미 있었다. 2시간의 강의지만 학음의 시 속에는 그때그때의 현실을 솔직하게 기록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았다. 중국 원굉도는 ‘옛날은 옛날일 뿐이고, 지금은 지금일 뿐이다.’라고 했다. 몇 점의 작품으로 보아 학음은 지극히 옛것을 답습하지는 않아 보였다. 지금 여기에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원굉도의 말처럼 옛것을 고집스럽게 따르지 않고 현재의 주체에 꼭 맞는 것을 추구한 사유방식으로 보인다.
끝맺으며
이번 강의를 통해 학음의 의식세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의 ‘학음산고’에는 공금횡령 죄목이 부당하다는 반론과 당시 암행어사의 불법적 감찰, 즉 당시에도 암행어사의 부정부패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는 어사 박문수와 이몽룡으로 미화된 ‘정의의 사도 암행어사’ 신화를 깨트리는 중요한 느낌으로 받았다. 즉 어사 제도의 부정적 측면을 밝혀 기존 인식의 한계를 지적한 그것으로 보인다. 학음 심원열이 울산부사 부임과 유배 생활, 울산으로 유배하게 한 암행어사 감찰의 내용, 그리고 당시 암행어사들의 불법과 부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쩜 이 시대와 닮은 점이 많을까.
유배 생활! 당사자에게는 힘든 세월이지만 후손들에게는 큰 유산을 남겨준 보물인 것 같다. 학음 심원열의 울산 유배 중 학음산고 외 수많은 작품들.... 유배가 아니면 이런 작품을 상상이나 해 볼 수 있었을까.
2024년 11월 27일 안성환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