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부갓네살의 꿈과 다니엘의 해석 성 경: 단 2:36-43 | ||
신상의 부위 | 다니엘의 해석 | 역사적 성취 |
정금으로 된 머리 | 느부갓네살이 다스리고 있는 바벨론 왕국 | 신 바벨론 제국(B.C. 605) (B.C 612-536) |
은으로 된 배와 가슴과 팔 | 보다 열등한 한 나라 | 메대, 바사(페르시아) 제국 (B.C. 539-331) |
동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 | 온 세계를 다스리게 될 제국 | 그리스제국 (B.C.331- B.C 176) |
철로 된 다리 | 철같이 강한 왕국, 뭇 나라 들을 쳐부수고 정복함 | 로마 제국 (B.C. 7세기 - A.D. 476) |
철과 진흙으로 된 발과 발가락 | 왕국의 분열, 강대국들과 약소국이 공존함 | 로마제국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나라들 (A.D. 476 - 현재) |
뜨인 돌 |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원한 왕국으로 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파하고 영원히 서게 될 것임 |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재 림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로 이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 와 주권은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 땅위에 임하였으니(already)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완성, 즉 새 하늘과 새 땅, 영생 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의 재림 때 비로소 성취될 것이다(not yet) |
(2) 로마의 정치적, 지리적, 문화적 복음전파와 관련된 사항들(예언이 끊어진 후 400년의 기간) 당시의 도로 군사 정치 문화 지리적 특성과 복음 전파 당시 로마지도와 바울의 3차 선교여행지도, 오순절 모인 지도
(3) 로마의 역사 개관1 (다음 백과사전 참조) 개요~베스파시아누스까지(BC 6세기-AD192)
개요
로마 공화정 초기(BC 6세기~BC 264)
로마의 이탈리아 통일
로마의 탄생과 공화정 초기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으나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전하는데, 그 가운데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들이 숨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BC 12세기에 트로이 장군 아이네아스가 로마 주변 라티움에 자리 잡았고, 500년 뒤에는 라틴족인 로물루스가 로마 시를 세웠다고 한다(로물루스와 레무스). 아이네아스 이야기는 청동기시대 말기에 동방에서 항해자가 찾아온 사실(史實)을 에트루리아족이 아이네아스라는 인물과 접합시켜 만든 듯하고, 로물루스 이야기 또한 BC 8세기 팔라티누스 언덕에 라틴계 유목민이 모여 살게 된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 뒤 로마는 서서히 도시의 틀을 잡아가다가 BC 7세기에 에트루리아족의 세력 아래로 들어갔고, BC 550년경에는 에트루리아족에게 직접 통치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로마는 빠르게 성장하여 라티움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도시로 발돋움했다. 로마인은 종교와 문화에서 에트루리아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특히 그들에게서 알파벳을 배웠다.
로마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씨족(gens)이었는데, 씨족 아래에는 강력한 가부장이 거느리는 가족이 있었다.
그러나 혈연관계 없이 부조(扶助)와 지원을 받기도 하고 보호자에게 매인 예속자들도 있었다. 왕정시대에 파트리키우스(귀족)와 플레브스(평민)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로마의 종교적 구조는 일찍부터 확립되었으며 왕정시대에는 왕에게 종교적 권위가 있었다. 그러나 공화정시대에는 그 권력이 종신 사제 1명에게 넘어가 사실상의 종교적 권위는 제의를 행하는 사제, 점을 치는 아우구르[卜占官], 성스러운 지식을 지키고 알리는 신관(神官)들이 가지고 있었다.
왕정시대에는 왕이 정치적·군사적 권력을 갖고 있었다.
임페리움(imperium)이라고 하는 이 권력은 원래 군대지휘권에서 나왔지만, 종교 영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로마 왕정은 세습제가 아니었다. 왕은 로마 시민을 세 트리부스(부족)로 나누었는데, 1개의 트리부스에는 10개의 쿠리아가 있었다. 모두 합쳐 30개가 되는 쿠리아는 코미티아 쿠리아타(쿠리아회)를 구성했는데, 이 회의체는 왕을 뽑고 여러 가지 입법권과 사법권을 행사했다. 이러한 통치구조는 안정된 동시에 융통성도 갖추고 있어 로마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해주었다.
로마 공화정 초기(BC 6세기~BC 264)
에트루리아 왕조가 BC 509년에 로마에게 무너진 뒤 공화정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공화정의 성립은 일정한 수의 가계가 왕의 군사 지휘권, 왕의 사법적 권한, 왕의 제사적(祭司的) 기능을 이어받은 것을 뜻한다. 원래 왕이 가졌던 권력은 프라이토르 막시무스(praetor maximus)라는 행정관에게 넘어간 듯 하지만 그 뒤 2명이 임기가 1년인 콘술(집정관)로서 권력을 갖게 되었다. 원래는 평민도 콘술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으나, 귀족이 곧 콘술직을 독점했으며 4세기 중엽에야 콘술 가운데 하나는 반드시 평민 출신이어야 한다는 법 규정이 나왔다.
국가가 비상사태인 때에는 2명의 콘술 중 1명에게 딕타토르(독재관)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며, 이 딕타토르는 최고 6개월 동안 임페리움(국가의 최고 권력자)이 되었는데 실제로 딕타토르가 임명된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처음에는 콘술만이 임페리움을 행사했으나 BC 386년경에 콘술보다는 격이 좀 떨어지나 역시 임페리움을 지닌 프라이토르(법무관, 뒤에는 집정관)직이 창설되었다. 프라이토르는 원래 로마 시에서 사법행정을 맡았는데, 뒤에 로마가 팽창해 속주(屬州)들이 생겨남에 따라 점점 그 수가 늘어났다. 또한 켄소르(감찰관)는 5년마다 2명이 선출되었는데 이들은 인구와 재산을 조사하고, 도덕이 문란해지지 않도록 감찰하는 일을 맡았다.행정이 차츰 복잡해지자 재정을 담당하는 콰이스토르(재무관)와 공공건물을 관리하고 축제행사를 책임지는 아이딜리스[造營官] 등 더 많은 관리직이 신설되었다.
로마인은 아주 일찍부터 법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BC 8세기 무렵 이미 전쟁에 관한 법이 있었다고 하며, BC 5세기 중엽에는 로마 최초의 성문법(成文法)인 이른바 12표법(十二表法)이 제정되어 12개의 청동판에 새겨졌는데, 이것은 모든 법의 원천으로 간주되었으며 더할 나위 없이 중요했다. 이 법은 그때까지 법이 구전되어오던 것을 행정관들이 멋대로 적용한다고 비난해온 평민의 요구에 따라 콘술 대신에 BC 451년과 BC 450년 두 차례에 걸쳐 뽑힌 데켐비리(10인 위원회)가 만든 것으로 보인다.
공화정에서 드높은 권세를 누린 원로원(세나투스)은 왕정시대의 원로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콘술이 소집하고 또한 콘술의 협의에 따르는 기관이었으나, 실제로는 공화정에서 가장 안정된 최고권력기관 이었다. 원로원은 원래 유력한 씨족들의 우두머리로 구성되었으나 곧 모든 전임 행정관들도 원로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원로원 의원은 처음에는 콘술이, 뒤에는 5년마다 1번씩 켄소르가 임명했다. 임기는 종신이었고 의원들의 서열은 그들이 지냈던 직책의 등급에 따라 정해졌다. 원로원은 민회에서 이미 표결된 법률들을 비준할 뿐이었으나, BC 4세기 후반부터는 민회에 법률을 제안하는 권한까지 가졌다. 또한 원로원은 행정관에게 조언을 했는데, 행정관들은 대체로 그 조언을 따라야만 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법 효력을 갖게 되었다.
공화정 말기에는 속주를 다스릴 행정관을 배치하는 중요한 기능도 맡았다. 원로원에게는 그밖에는 외국으로 보낼 사절을 뽑는 권한도 있었다. 원로원은 종교문제에도 관여해 인습적인 의식과 제식을 유지시켰으며, 국고(國庫)를 도맡아 공공재정을 운영했고, 지출과 과세를 최종 결정했다. 이처럼 원로원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므로 로마 공화정은 사실상 과두정부였다. 대토지를 소유한 원로원 의원들은 유능한 행정가들이었다. 그들의 진정한 어려움은 이민족을 정복한 이후 넓은 제국을 통치해야 하는 책임을 떠맡게 된 데 있었다. 이러한 체제 아래서 플레브스(평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공화정의 첫 2세기 동안 그들은 참정권을 얻어내 파트리키우스(귀족)만의 특권을 하나씩 잠식했다. 싸움은 경제문제에 있어서도 플레브스들은 정복으로 늘어나는 국유지를 자신들도 점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들은 공화정 초기의 BC 493~492년 전쟁에서 돌아오다가 무장한 채로 성산(聖山)으로 몰려가 플레브스의 권리를 보호해줄 정부관직을 창설하라고 원로원에 요구했다(성산사건). 그 결과 만들어진 신성불가침의 트리부누스(호민관)는 행정력의 남용으로 피해를 입는 플레브스를 도울 수 있었으며 콘술이나 원로원·민회의 결정을 거부할 권한도 가졌다. 플레브스 계급의 조직은 코미티아 켄투리아타[兵士會]처럼 재산에 따라서가 아니라 주거지에 따라 조직된 평민회(Concilium Plebis)가 생겨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로마의 이탈리아 통일
그러는 가운데 로마는 대외적으로 팽창해갔다. 에트루리아족이 라티움에서 밀려났으나, 아직 힘이 약했던 로마는 라틴 동맹에 가입해 동맹이 결정한 정책을 따라야 했다. 그러나 로마는 로마 특유의 문제 때문에 동맹과 별개로 행동했다. BC 5세기에 로마는 아펜니노 산맥 중부에 살던 여러 종족의 침략을 물리쳤고 동시에 에트루리아인의 도시 베이를 마침내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뒤 로마는 켈트족의 침입을 받아 로마 시가 함락당하는 재난을 입었다. 다행히 얼마 안 되어 켈트족은 북쪽으로 물러갔고 로마가 함락당할 때 전혀 도와주지 않았던 라틴 동맹이 내분을 겪자, 로마는 이를 틈타 라티움의 이웃 도시들을 제압했다.
그 다음 로마가 삼니움족과 전쟁을 하자(제1차 삼니움 전쟁) 라틴 동맹은 로마에게 싸움을 걸었지만 그들을 물리친 로마는 동맹을 해체하고 라티움을 지배했다. 삼니움족이 계속 욕심 내던 캄파니아에 로마가 세력을 뻗치게 되어 제2차 삼니움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번에도 승리를 거둔 로마는 중부 에트루리아로 진격했다. 에트루리아족·켈트족·삼니움족이 연합해 로마와 맞섰지만(제3차 삼니움 전쟁) 또 로마가 이겨 BC 263년 에트루리아 전역을 손에 넣었다.
로마가 남쪽으로 팽창하자 마그나그라이키아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였던 타렌툼은 자극을 받아 에페이로스(에피루스)에 원조를 요청했다. 에페이로스는 로마군을 오래지 않아 패배시키고 당시 로마에 우호적이었던 카르타고에게서 시칠리아의 여러 도시를 빼앗았지만 얼마 안 가 퇴각해야만 했으며, 타렌툼은 마침내 로마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로마는 지중해의 큰 세력으로 급속히 발돋움했고, 포에니 전쟁이 벌어지기 바로 전까지 헬레니즘 세계의 광범위한 경제 유통망에서 큰 몫을 차지해 그리스 세계로부터 경계심을 살 만큼 중요한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제정 수립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로마의 초대황제, 동상,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부여 받음 BC 63생 27-AD 14년 재위
이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지배권을 쥐고 로마의 첫 황제가 되었다.
이집트를 합병해 재정이 넉넉해졌으므로 그는 마음대로 재건사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그가 계획한 정치체제는 군사독재가 아니라 자신의 지휘가 보편적으로 인정받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이 문제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는 많은 군대를 해산하고 콘술을 정기적으로 뽑게 했다. 그는 자기가 콘술로 선출되자 사퇴하려고 했지만 원로원은 오히려 그의 사퇴를 거절하고 10년 동안의 히스파니아(스페인)·갈리아·시리아 통치를 위임했으며, 아우구스투스(Augustus:존엄한 사람)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군사력을 독점한 데 이어 콘술이 됨으로써 군사(軍事)와 민사(民事)를 모두 손에 넣었다. 그러나 콘술직을 계속 맡는 것은 원로원의 반발을 살 염려가 있어 그는 BC 23년 콘술직을 사퇴하고 호민관의 권한(tribunicia potestas)을 비롯해 원로원과 민회를 소집·주재할 권한도 얻었다. 호민관직은 전통적으로 시민을 보호하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반감을 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임기가 1년이긴 하나 계속 중임할 수 있었다. 한편 그가 다스리는 속주와 군대 통수권도 법률적으로 뒷받침되었다. 원로원이 프로콘술의 임페리움을 그에게 부여했던 것이다. 이는 시한적이었지만 그 기간이 자동으로 갱신되었으며, 동시에 이탈리아와 로마 안에서도 유효했고 다른 어떤 임페리움보다 우월한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지위를 확고하게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임페리움이었다. 따라서 그뒤로는 아우구스투스가 공화정 시대에 가질 수 있었던 예외적 권력의 직책들(딕타토르, 종신 켄소르, 콘술)을 차지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는 명예로운 제의를 받아들여 콘술이 지닌 몇몇 권한을 획득하고(BC 19), 폰티펙스 막시무스가 되었으며(BC 12), 1년 중 8번째 달을 그의 이름으로 부르도록 하고(BC 2), 조국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아들였다. 그의 이름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뒷날 황제를 가리키는 칭호가 되었으나, 그와 그의 뒤를 이은 4황제에게는 칭호가 아닌 이름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지닌 칭호 가운데 하나인 프린켑스(제1시민)는 비공식적인 것이었는데, 그가 만들어낸 통치체제는 이 이름을 따서 프린키파투스[元首政]라 부른다.
원로원은 전과 다름없는 위엄과 권한을 지닌 듯했으나 실권은 없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실질적으로 군사와 재정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특히 원로원 의원직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원로원을 전통과 여론을 대변하는 기관으로서 높이 평가했고, 원로원에 정책 자문을 구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행정관을 임명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원로원을 존중해 원로원 의원과 에퀴테스로 이루어진 특별위원회가 프라이토르와 콘술을 뽑게 했고, 코미티아 켄투리아타[兵增]는 자동적으로 그것을 승인하도록 했다.
또한 콘술의 임기는 6개월로 줄었는데, 이는 더 많은 원로원 의원이 고위직에 오를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콘술의 책무가 대체로 의례적인 것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보수를 받는 직책들은 대부분 에퀴테스에게 돌아갔고 그들은 제국 안에서 강력한 계급을 이루게 되었다. 동시에 그들은 원로원 의원이 되기도 했는데, 에퀴테스는 로마나 이탈리아에만 한정되지 않고 제국 전역에 걸쳐 퍼져 있었으므로 원로원은 점차 로마와 이탈리아의 틀을 벗어나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일반적인 로마 시민에게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인민에게 식량을 배급하고 오락거리를 제공했지만 실제 권력은 허용하지 않았다. 민회는 이따금 회의를 열어 이미 결정된 사항을 형식적으로 승인할 뿐이었다. 이때문에 이탈리아의 로마 시민과 속주민 사이의 구별은 불분명해졌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이탈리아의 우위를 강조해 곡물공급을 보장하고 도로건설을 비롯한 공공사업을 벌이며 재정과 통화를 안정시켜 이탈리아의 경제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가 이룬 더 큰 업적은 로마의 기풍을 되살리고 나라를 통합시킨 것이었다. 그는 공화정 말기의 반목과 타락을 뿌리뽑고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가치와 종교를 부활시켰으며, 이탈리아를 로마와 완전히 하나가 되게 했다.
오래전부터 있던 속주들은 공공(公共) 속주라 하여 원로원이 통제했으나, 편입한 지 얼마 안 되는 그 밖의 속주들은 황제가 통제했다. 황제는 그가 통제하는 속주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속주 총독직에는 원로원 의원뿐만 아니라 에퀴테스도 임명했다. 속주는 직접세와 간접세를 로마에 바쳤으나 기본적으로는 각각 자체의 민회와 참사회, 관리를 거느린 키비타스(civitats)를 단위로 자치가 이루어졌다. 속주의 상황은 제정 때 속주에 파견된 관리의 수준이 높아졌고 감독이 강화되었으며 평화가 정착되어 더 나아졌고 로마 시민권을 받으면서 무니키피움으로 승격되었다(무니키피움). 이러한 평화에 대해 많은 사람이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가문을 숭배함으로써 감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그의 실질적인 권력기반은 바로 그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서약한 군대였다. 군대는 레기온(군단)·변경주둔군·황실근위대·제국함대로 이루어졌다.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 황실근위대의 병사는 대개 이탈리아인이었으나, 많은 레기온과 거의 모든 변경주둔군의 병사는 주로 황제가 다스리는 서부 속주 출신이었는데 이러한 추세는 점점 더 증가했다. 그러나 레기온은 입대하는 날로, 변경주둔군은 제대하는 날로 시민권을 얻었고, 더구나 변경주둔군에서 제대한 병사들은 종종 그들이 주둔했던 속주에 정착했으므로 이는 제국 전역을 로마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뒤 평화정책을 펴는 듯했으나 오래지 않아 자연적인 국경을 확립하기 위해 많은 전쟁을 벌였다. 그는 많은 지역을 정복했으나 로마화가 비교적 쉬운 지역만을 속주로 병합해 도로를 건설하고 역참(驛站)제도를 시행한 반면, 로마화가 어려운 지역은 위성국가로 만들어서 방어에 따르는 비용을 줄였다. 그러나 영토를 확장하는 더 쉬운 방법으로 전쟁보다는 위성국가를 만든 뒤 속주로 병합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라비아 사막, 사하라 사막, 아틀라스 산맥을 남쪽 경계로, 대서양을 서쪽 경계로, 유프라테스 강과 아라비아 사막의 북쪽을 동쪽 경계로, 도나우 강과 엘베 강을 북쪽 경계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유프라테스 강 북쪽으로는 자연 경계가 없었고 특히 아르메니아를 확보하지 못했으므로 동쪽 경계는 매듭짓지 못했으며, 북쪽 경계도 도나우 강은 겨우 유지되었으나 엘베 강은 아주 불안정해 라인 강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변경 지역 이외에는 평화가 유지되어 해적이 진압되고 도로가 놓였으며 통화가 안정되어 교역이 크게 발달했다. 이에 따라 지중해 세계는 전에 없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아우구스투스 때 로마는 매우 선명하게 이탈리아적인 성격을 띠었고 이는 문학과 예술에도 나타났다. 로마의 문학과 예술은 그리스를 모방했으나 내용은 이탈리아적인 것이었다. 그 시대의 문화수준은 높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소박한 덕목들을 강조해 지적인 창조성과 도덕적 정열은 얼마간 사라졌다.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 때도 있었던 직책들을 오랫동안 겸임하며 사실상 황제가 되었으나 군사독재를 시행하지는 않았다. 그는 원로원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대체로 온건하고 효율적인 통치를 했다. 더구나 그는 56년 동안 통치하며 그동안에 이후 200년 가까이 존속할 입헌정부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제위계승의 원칙이 없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일찍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군대는 부자상속에 정통성을 두었으므로 그는 왕조를 세우려 했으나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가까운 친척들도 그보다 먼저 죽었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하고 호민관의 권한을 주었다.
AD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뒤 티베리우스가 자동적으로 제위에 올랐다.
티베리우스(14~37 재위)는 대체로 유능한 황제였지만 인간적인 신뢰는 얻지 못했다. 그가 죽자 친척인 가이우스,
즉 칼리굴라(37~41 재위)가 뒤를 이었다. 칼리굴라는 동양적 전제 원로원을 모욕하며 낭비를 일삼는 등 과대망상적인 폭군이 되어 결국은 암살당했다. 칼리굴라의 숙부로 그다음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1세(41~54 재위)는 정부의 중앙집권화를 크게 진척시켰고 대외팽창에 많은 관심을 보여 브리튼을 합병했으며 서부 속주들의 로마화를 촉진시켰다. 그는 전제정치를 해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재무관리를 강화하고 재판제도를 개혁했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16세밖에 안된 의붓아들 네로(54~68 재위)였다. 네로는 가족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을 살해하고 그리스도교를 최초로 박해했지만 반란이 일어나자 자살했다.
제국의 성장
네로가 죽은 뒤 내란이 벌어졌고, 이 내란의 마지막 승리자인 베스파시아누스(69~79 재위)와 두 아들이 플라비우스 왕조(69~96)를 이루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내란으로 약해진 변경수비를 강화하고 재정을 튼튼하게 했으며 원로원에 대해 정중하지만 단호한 태도를 보이면서 원로원을 행정관 배출 기구로만 취급했다. 그의 아들 티투스(79~81 재위)는 많은 인기를 누렸으나 얼마 안 가 죽었고, 뒤이어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81~96 재위)가 제위에 올랐다.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로마의 황제, BC 69~79년
그는 유능하지만 고압적(高壓的)인 인물로서 군대의 충성을 확보하고 제국의 복지를 증진시켰다. 그러나 그의 전제로 말미암은 불만 때문에 96년 암살당함으로써 플라비우스 왕조는 막을 내렸다. 플라비우스 왕조는 변경주둔군을 그들의 출신 속주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배치했고, 레기온을 일정한 장소에 주둔시켜 변경주둔군과 비슷한 성격을 부여했다. 이 군대로 그들은 브리튼에서 지배 영역을 넓히고 라인 강 유역을 되찾았으며, 실패로 끝났으나 도나우 강 지역도 회복하려 시도했고 동쪽 변방도 강화했다. 도미티아누스를 암살한 자들은 군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96~98 재위)를 황제로 추대했다. 네르바의 가장 중요한 시책의 하나는 구빈계획(救貧計劃 alimenta)으로서 이는 이탈리아의 소농민을 돕고, 가난으로부터 구제해 출생률을 높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2가지 약점이 있었다. 즉 아들이 없었고, 군대의 인망을 얻을 만한 군사적 경험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군인인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98~117 재위)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세웠다. 속주 출신의 첫 황제인 트라야누스는 법규를 준수하고 겸손해 인민과 군대 모두에게서 인기를 얻었으며, 제국 전체의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원로원까지도 거리낌 없이 무시하면서 독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지방자치 쇠퇴와 비대한 관료체제를 낳게 되었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도나우 강 지역과 동쪽 변경을 평정하는 업적을 남겼으나 중동에서 반란을 진압하다가 죽었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117~138 재위)였다. 그는 다재다능했으며 영토 팽창에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해 변경수비 강화에 치중했다. 그는 속주를 지킬 주둔군을 그 속주 자체에서 충원했고 레기온과 주둔군의 차이를 없앴으며, 군대를 감독하기 위해 자주 몸소 시찰을 다녔다. 한편 레기온이 이처럼 주둔군과 다름없어지자 기동작전을 위해 새로운 부대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 부대는 많은 경우 제국 주변의 이민족으로 충원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민사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그의 치세 때 관료제가 정착되었는데, 그의 법률적 업적 특히 영구고시록(永久告示錄 edictum perpetuum:법무관의 고시에 따라 해석되는 법)의 법전화는 현저한 것이었다. 또 새로운 형식의 라틴 시민권을 창설해 이 권리를 얻은 도시의 모든 지방 원로원 의원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어 로마 원로원의 많은 성원이 속주의 귀족으로 보충되었다. 아들이 없었던 그는 AD 136년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새로이 양자로 삼았다. 안토니누스 또한 처의 조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베루스의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를 양자로 삼았다.
하드리아누스가 죽은 뒤 제위에 오른 안토니누스(138~161 재위) 때 로마 제국은 세계주의의 성격을 뚜렷하게 띠면서 조용한 번영을 누렸으나 동시에 변경지역이 침략을 당하고 반란이 일어나 위험스러운 징조를 보였다. 그의 뒤를 이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재위)는 루키우스 베루스를 공동 황제로 지명해 하드리아누스의 뜻에 충실히 따랐으나 이는 제국의 동서 분리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의 치세에는 이민족이 강력하게 침략해왔다. 동쪽 변경에 밀어닥친 위험은 무마시켰으나 게르만족의 도나우 강 지역 침입은 동부에서 벌어진 반란과 함께 오랫 동안 아우렐리우스를 괴롭혔다. 그는 게르만족을 진압하는 도중에 죽었고, 뒤를 이어 황제가 된 그의 아들 콤모두스(180~192 재위)는 무능하고 변덕스러우며 쾌락만 추구하다가 암살당했다
(4) 로마의 역사 개관2; 세계의 제국 로마 (까페 복음사랑의 꿈꾸는 믿음님의 글을 그대로 옮김(ㄱ-ㅂ)(BC 8세기-AD 313)
(ㄱ) 로마역사 요약
중부 이탈리아에는 주전 삼천년 전부터 인도-게르만 일족인 이탈리키인이 정주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8세기부터 라티니의 후족인 라틴인의 촌락이 세워졌고 천년 동안 로마제국의 수도로 발전되었다. 또한 기독교의 중심지가 된 곳이다. 왕정(B.C.753~509)은 전설상의 왕조와 에투루리아인의 시대다. 7대로 유지 계승하였고 끝의 몇몇 왕은 에투루리아인이었다. 6세기 말에는 라틴족이 전제 군주정으로 독재를 행하던 에투루리아 왕을 몰아내고 왕정을 폐하였다.
라틴인은 공화정 로마를 주전 509년에 세우게 되었고 위대한 로마의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태리 반도와 지중해 통일시대인 공화정(B.C.509~27)에 이어 Pax Romana와 기독교 시대인 제정시대가 열렸다. 제정로마는 세계 동포주의 사회 구조를 형성하였다. 원수정 시대는 옥타비아누스의 탁월한 정책을 기반으로 로마의 평화시대가 구현된다. 주후 3세기 말엽까지 군대가 황제를 임의대로 폐위하는 소위 군인황제시대를 통해 제국은 해체 직면에 놓이게 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이후 권력싸움이 시작된 로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황제로 즉위한다. 그 후 로마는 통일되고 도읍을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또한 제국통일의 방편으로 기독교 사상을 지향함으로써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사상적 지주로 나타나게 되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로마제국을 동서로 이분하여 두 아들에게 상속하였고 이로서 제국의 약화가 초래되었다. 서양고대역사에 화려한 번영을 이루던 로마는 하루아침에 몰락하였다. 기독교와 로마의 동반은 서양 유럽에 새 기독교 사상을 정립함으로 인간의 근본적 본질과 목적을 이 땅 위에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계기를 제공하는 역사성을 보여주었다. 중부 이탈리아에서 발흥한 라티니의 후손인 라틴족이 세운 로마와 유대 적 배경을 가지면서도 유대주의 몰락을 통해 변방의 팔레스틴에서 발흥한 기독교는 근 3백년의 기나긴 역사 안에서 함께하게 되는 서양역사의 모체가 된다.
(ㄴ) 기독교의 발흥
나사렛 예수와 함께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바벨론이 주전 538년에 페르시아에 멸망되자 포로들이 귀환하였다. 그중에 남은 자들은 후에 기독교가 유럽에 전파될 때 용이하게 사용되어지는 회당 형태의 예배를 드렸다. 이 시대는 구약의 선지자 시대가 끝났고 구약의 성경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고 율법의 사본을 대량으로 복사하였다. 이런 사건들은 기독교 발전을 위한 계시적 사건이 되었다. 희랍의 도시국가는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함으로 헬라주의를 성립시켰다. 알렉산더는 지중해 세계와 오리엔트세계를 통합한 문화세계를 형성시켰다. 프톨레미 왕조의 식민지인 유대는 자유로운 정치종교생활을 영위하였다. 기독교 발흥의 배경은 당시 로마종교의 종교성과 로마종교가 다신교적 형태와 혼합주의 사상으로 타종교에 관용을 취했다는 것이다. 후기 유대교는 팔레스타인 유대교와 디아스포라 유대교로 양분되며 하나님을 삼위일체적 유일신이라는 기독교적 신 개념으로 발전할 수 있던 사상이다. 또한 교리적으로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내파라는 율법주의자들을 양산함으로 기독교적 사상이 전달될 수 있는 사상적 텃밭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유대는 주전 63년 이후부터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로마인들은 유대인에게 악의와 증오감을 갖게 되었고 예수는 예언대로 많은 박해를 받았다. 타 종교와 비타협적 자세를 취한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종교정책과 충돌하게 되었다. 스데반 순교이후 박해로 인해 신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흩어져 복음을 전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초기 기독교 전파자들은 로마제국이 주는 이점을 잘 활용했다. 로마에 의해 닦여진 도로로 통행했고 단일화폐를 사용했다. 복음서 내용역시 기독교 전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초기 기독교의 로마 전파와 확장은 오순절 성령 사건이후 로마로부터 온 디아스포라의 귀향,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그리고 바울과 베드로의 선교 열정이 한데 묶여서 나타난 결과라고 추측할 수 있다.
(ㄷ) 기독교와 로마의 갈등
기독교는 로마라는 도가니를 통해서 엄청난 박해와 시련을 겪게 되었다. 기성질서가 굳어진 전통로마사회에 이질적인 기독교 신앙이 전파, 수용되어 이에 대한 거부적인 대응이 야기되고 박해가 가해짐은 통례적인 역사전개의 한 양상이다.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복합적이며 종합적인 요인들이 상호작용 하에서 일어난 역사현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첫째, 전통사회의 변화를 초래할 독소성이라는 사회경제적 측면으로 로마대중의 혐오심과 와전된 기독교관, 신분제도의 타파이다. 로마의 중상계층민은 희랍의 사상과 종교철학에 영향으로 헬라전통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일반대중은 다신교의 제신관과 전통 지방종교를 신봉하였다. 에베소 신전 주위의 대중들은 신전경제에 크게 의지하였고 그것은 동방에서 오는 순례자들에게 작은 여신상을 만들어 팔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 색욕의 비밀제, 유아살해, 식인, 근친상간을 자행한다는 와전된 소문을 믿었다. 로마사회는 계층구조를 형성한 신분적 계급사회였다. 중상층의 계급사회는 비교적 자유로운 신분이었으나 하층민으로 구성된 계급사회는 자유가 제한된 노예들로 구성되었다.
둘째, 반국가적 정치혁명의 결과는 정치성을 지닌 정치적 측면으로 유대적 요소로 반기독교 국가관을 들 수 있다.권력 유지의 목적으로 권력의 신격화를 위한 황제 예배를 추진함으로써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기독교도와 정면 대립을 가져왔다. 이 양자의 대립은 힘을 배경으로 한 메시야와 사랑을 배경으로 한 메시야간의 대결이었고 기독교도에 있어서 황제 예배는 두 주인을 섬기는 일이므로 거부할 수밖에 없었으며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정치적으로 반역적인 행동이었다.
셋째, 사상의 전환이라는 종교적 측면에서 로마의 제종교와 종교관의 상호대립 등으로 그 요인을 찾아볼 수 있다.다신교 혼합주의인 로마의 종교관과 유일신 사상의 기독교와 사상적 교리적인 이해차이로 박해가 유발된 것이다. 이것은 다신교 교리적 관용과 유일신관의 배타성이라는 종교관의 피할 수 없는 대립이었다. 전통 로마 종교관에 기인하는 황제들의 귀의적인 종교성에서 근거한 보수성의 경향은 기독교가 새 가치체계의 수용이라는 반작용에 대해 종교 사회를 파괴하는 사교 사도체계로 간주한 역사성의 일면이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현상은 로마라는 정과 기독교라는 반의 대립과 모순 그리고 갈등 속에서 새로운 조화라는 종합의 역사 발전을 가져온 것이다. 이것은 후에 로마제국 안에 새 역사 사상을 잉태한 국가종교라는 역사적 실체였다. 로마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려졌지만 기독교는 서양 유럽에 있어서 영원한 정신적, 영적인 모체로서 인간에게 진정한 희망과 목적을 제공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ㄹ) 기독교의 시련과 신앙생활
신앙공동체 카타콤
기독교는 제국의 혹독한 박해를 피해 로마의 지하 도시로 신앙과 생활의 안식처를 옮긴 것이다. 그들은 구원과 부활을 상기하는 벽화로 표현하면서 서로 격려하고 신앙을 지켰다. 카타콤은 초기에 코메테리아라 불렀던 로마제국 전 지역에 산재한 지하 묘소다. 그곳은 가장 안전한 장소며 천국과 복음화를 바라는 그들에게 소망과 기쁨을 주었다. 벽화는 주로 프레스코화로 기독교 신앙의 확신인‘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내세’에 대한 희망과 영원한 구원을 상기시키는데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들은 지하의 어려운 환경과 지상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과 예술로 조화를 이루며 신앙을 생활화 하였다. 온갖 방법으로 박해를 하고 금지해도 순교자의 피가 뿌려진 땅 위에 싹트는 열매는 또 하나의 새 역사를 잉태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더 이상 로마제국이 박해를 통한 기독교 근절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카타콤의 신앙 공동체의 활동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가 승리한 것은 정신적 강인함 때문이었다.
카타콤 신앙공동체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지상으로의 뜨거운 열정을 품어 내었다.
이 열정은 인류의 진정한 목적과 역사 주관자의 뜻을 이행하기 위한 지상세계의 선교 열정이었다. 로마신분사회의 암울한 계층과 정신적 안위를 찾고자 하는 로마 대중에게로 향한 끝없는 복음의 전파였다. 특히 노예와 해방노예의 신분 상향적 유동속에 던져진 노력이 계속되었다. 이는 주님이 예언한 대로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영웅적인 신앙의 발로였다.
(ㅁ) 로마사회의 신분제도와 기독교의 선교
기독교도들은 로마제국의 혹독한 박해와 시련에도 카타콤에서 다져진 신앙심으로 선교의 열정은 꺼지지 않았다. 상층 계급 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계층에도 복음의 평등성을 강조하며 선교의 열정을 가졌다. 기독교가 전파된 초기 이후 3세기 초에는 기독교가 스페인과 브리튼에까지 확장됨으로 거의 로마제국 전역에 전파되었음을 볼 수 있다.
3세기 중엽에도 북아프리카와 이집트 상반부에도 기독교가 확장되어 이교의 예배가 거의 중단되었다. 로마의 노예제도는 로마가 도시국가와 반도국이라는 지역적 성격을 벗어나 지중해와 그 연안지대를 정복하여 새로운 제국으로의 면모를 갖추어 가는 과정 속에서 발전하였다. 노예는 법적 권리가 없는 무 인격으로 취급받았으며 주인의‘생명이 있는 재산’에 불과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느 정도의 자유를 가진 존재였다. 로마제국은 엄격히 계층화된 계급사회였다. 이런 사회에서 태동한 기독교는 노예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그 결과는 어떤지 라는 문제는 많은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기독교는 인간을 또 다른 인간 아래 종속시키는 로마의 노예제도와 신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기독교의 이념사이의 대립관계에도 불구하고 전자의 형태를 인정해 왔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에도 노예제도는 그 뿌리가 뽑히지 않은 채 계속 잔존하였다. 초기 기독교의 노예관이 갖는 의미는 초기 기독교가 처한 시대 시대마다의 역사적 배경에 따라 평가 되야 하며 기독교가 초래한 사회적 변화의 문제는 그들의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당시 제국의 정치 문화 사회적 배경에 힘입어 활발한 선교를 할 수 있었으며 사회적 상황과 기독교가 전파한 복음의 내용은 당시 최하층에서 생활하던 노예들을 기독교의 신자로 흡수하였다. 모든 신분과 민족의 차별 없이 노예까지도 믿음 안에서 한 형제로 사랑할 것을 가르친 그리스도의 교훈과 스스로를 이 세상에서 외국인임과 나그네임을 시인했던 기독교는 당시의 제종교와 철학 등이 민중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던 터라 더욱 빨리 그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의 신자 중 상당수가 노예와 해방된 노예들로 구성되었다. 예수그리스도의 교훈 가운데 뚜렷하게 노예제도를 정죄한 적은 없다. 그는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가르침이 교회와 역사 가운데서 열매 맺기를 바랬다.
바울에게서 인간관계에 대한 보다 명확한 언급과 진전된 교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빌레몬서에서 도망한 노예 오네시모를 주인에게 돌려보내고 있다. 바울은 빌레몬에서 자기 자신을 맞이하듯이 오네시모를 용서하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노예제도를 정죄한 적은 없다. 교부들의 사상역시 마찬가지였다. 로마의 노예와 해방된 노예는 자유민에 비하면 법적 지위에서는 그 신분이 확실하게 열등했다. 그러나 노예로 확정된 신분체제라 할지라도 그 본래 상태가 변형되지 않고 장시간 유지되는 관례는 없었다. 상당수가 기독교도였던 노예들이 사회 각층으로 유동하게 됨으로써 기독교는 이 유동의 경로에 따라 각계각층으로 전파될 수 있었다. 이러한 유동성의 결과는 로마제국의 정치, 문화, 사회 모든 면에서 많은 기독교도가 나타나게 했으며 이런 요소들은 로마제국의 복음화라는 새 경향성을 만들었고 점진적인 승리의 조짐이 여러 영역에서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승리를 향한 새 일보가 시작된 것이다.
(ㅂ) 기독교의 승리
기독교는 약 3세기를 거치는 동안 로마의 기존사회의 전통과 종교적 반목에도 불구하고,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로마 황제는 기독교를 우호적 종교로 간주했고, 주후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반포함으로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이는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 밀라노칙령은 기독교의 공인과 발전이라는 점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종이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긍정적인 면으로 순수한 종교적 차원에서 교회와 제국 발전에 기여했다. 부정적인 면에서 대제의 공인과 개종은 다분히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교회와 영적인 가치가 아니라 정치적 가치를 더 우선으로 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국교로 인정받게 된 것은 약 80년 후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기독교의 세계화는 로마제국과 기독교를 공인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영향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것은 대제의 공인 목적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순수한 종교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기독교가 로마의 혹독한 정치적, 사회적 박해에도 불구하고 때가 차매 위대한 승리를 취한 것이다. 기독교는 정치와 분리한 순수한 영혼구원의 열정으로 세계화를 추구하고 로마는 위대한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초대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희랍의 헬레니즘 문화의 변혁 그리고 로마의 박해라는 도가니를 통해 로마 역사의 무대를 기독교의 가치관으로 변혁 수용했기 때문이다. 교회사학적으로 볼 때 역사 이면에서 주관하는 객관자의 주권 안에서 나타난 역사의 필연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즉 기독교가 로마 안에서 확장되고 세계적 종교로 발전한 것은 객관자 신의 뜻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와 로마는 긴 역사의 시간 속에 서로의 자기 실체를 역사 안에서 “인간 지상주의”와 “신적 영원주의”를 스스로 실증했던 두 개의 모델이었다. 그러나 전자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사라져 희미한 기억 속에 남겨진 반면 후자는 역사의 계속성을 통해 영원으로의 소망을 인류에게 전하는 한줄기 빛이었다.
(5) 로마의 역사에 대해 잘 정리된 두 편의 글을 통해서 로마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예수님 시대 로마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