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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펜실베니아 주 여자고등학교 치어그룹 경연대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어 행사기간 동안 눈요기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
7월 30일(월요일) 맑음
시차적응이 아직 안 됐는지 간밤에는 잠을 매우 설쳤다. 엊그제는 긴 여행과
새로운 환경에 접해 피곤함이 그대로 잠에 묻혀 아침까지 푸근한 잠을 잘 수
있었지만 엊저녁은 사정이 달랐다. 평소 불면기가 재발한 것 같다.
말똥말똥해 진다. 엊저녁에 읽다만 안내 책자를 펴 들었다. 그리고
깜박 졸았다.
사람과 세면을 하는 사람들이 아침 한때 공존하는 공간이다. 용변 칸이 4개,
세면대가 4개, 용변 칸과 세면대 사이는 두 사람이 겹쳐 설 수 있는 좁은
공간이다. 벽 전면이 거울로 덮여있어 옆 사람 뒤 사람 움직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필자가 8일 동안 기거한 기숙사 건물.
건물 주위에 조경이 아름다워 한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다. 100kg 정도는 되어 보이는 유난이 머리통
큰사람이 양치질을 하고 있다. “굿모닝!” 하고 수인사를 나눈다. 언뜻 보니
물컵이 안 보인다. 엊그제 불편을 느껴 물컵을 사야겠다고 생각을 했었으나
깜빡하고 말았다.
먼저 온 사나이가 그 큰 머리통을 세면대에 처박고 수도꼭지에서 물을
마시려고 애를 쓰지만 꼭지가 워낙 짧아 뜻대로 잘 안 된다. 보다 못해
한마디 거든다.
“여보시오, 친구! 이런 때는 당신 부모님이 만들어 주신 핸드컵을 사용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핸드컵이라는 신조어에 다소 의아해 하던 그 사람이, 내가 두 손을 모아
물 받는 시늉을 하니, 따라 하며 빙긋이 웃는다. 동양 사람은 역시 잔수에
강하거든.
잠시 후, 화장실은 세면 객과 용변 객으로 붐볐다. 갑자기 귀가 울릴 정도의
굉음이 터졌다. 누군가 용변 후 후레쉬 버튼을 누른 모양이다. 좁은 공간에서
터진 굉음은 깊은 진동을 일으키며 화장실 전체를 꽉 채웠다.
이 굉음은 어찌나 소리가 요란했던지 행사가 끝날 때까지 여러 번 경험했으나
그때마다 깜짝깜짝 놀라 좀처럼 익숙해 지지 않았다. 특히 고요한 밤 혼자
용변을 볼 때는 기숙사에서 자고 있는 모든 사람을 깨울 것 같은 불안감마저
느꼈다.
동양 사람들이 처음 미국 화장실을 접해 보면 누구나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동양의 화장실은 어느 정도 외부 사람과 격리되어 있어 용변을 보는 동안
긴장을 풀 수 있지만 미국 화장실은, 독방 화장실을 제외하면, 대부분 아래 위가
노출된 구조이다. 앉은 자세로도 옆칸 사람의 신발이 다 보인다. 이 사람이 지금
소변을 보는지 대변을 보는지도 금방 알 수 있다. 옆칸 사람의 방귀소리는 물론,
숨소리까지 들린다.
또한 용변 후 후레쉬 버튼(물 내리는 단추)을 누르면 물 내려가는 소리에
찔끔한다. 수압을 최대 한도로 높여서 조용한 공간에 굉음이 진동을 한다.
이런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동양 사람들은 오히려 긴장하게 된다.
400석이 넘는 구내 뷔페식당. 캠퍼스 내에는 이런 식당이 3개나 있다.
오전 7시 30분. 식당에 들어서니 권영국씨가 먼저 와 있다. 뷔페식으로 된
식당에는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다. 다음 주에 이곳에서 열리는 치어그룹
경연대회에 참가하는 유니폼 차림의 여학생들도 이 곳에서 같이 식사를
하도록 되어 있다.
쟁반에 식기를 채우려면 줄 따라 한참을 가야 한다. 진열된 식찬은 간단하다.
빵 종류와 콘 후레잌 와풀, 햄, 소시지, 스크럼불 에그 감자범벅 그리고 야채와
샐러드 정도다. 후식으로는 과일과 케익. 그러나, 음료수는 다양하게 준비했다.
애플 주스, 오랜지 주스, 포도 주스, 콜라, 세븐 업, 우유, 커피, 티 등. 특히
애플 주스의 맛이 향기로워 행사기간 동안 애용했다.
전달 사항 그리고 개회선언을 기다리고 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준비가 미흡한 모양이다.
사건의 발단은 그때 일어났다. 벽에 붙어 있는 어제의 대국 결과를 지켜보던
필자에게 눈을 의심케 하는 일이 발생했다. 후란코이즈와의 대국 결과가
정반대로 표시된 것이다. 어제 필자가 낙승한 대국이 패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급히 별관 지하실에 있는 기록계로 달려가 잘못 표기되었음을 일러주고
즉시 시정 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바쁘다는 이유로 오후에나 시정이
가능하다고 한다. 필자는 당장 시정할 것을 거듭 요청하였으나 젊은
기록계는 들은 척도 안 한다. 만일 그대로 진행한다면, 필자는 1차전에서
이기고도 엄청난 점수를 읽게 되는 것이다.
스위스 산정 방식으로 하기 때문에 1차전에서 이긴 사람은 2차전에서
이긴 사람끼리 대국을 하기 때문에 좋은 점수로 진행이 되지만 2차 전에서
진 사람끼리 대국을 하게 되면 그 점수 차이는 엄청나게 벌어지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위스 산정방식은 첫번째 대국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조건 이겨야만 한다. 이겨야만 입상권에 들 수 있으며 첫 대국에서 지면
입상권은 이미 물 건너갔다는 의미가 된다. 특히 이번 경기의 시상은
각 단별로 우승과 준우승자에 제한되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모르는 젊은 기록계로서는 시정을 촉구하는 필자가 시간에
쫓기는 그에게 훼방꾼으로밖에 보이질 안았으리라. 상급자나 진행위원을
찾아헤매었으나 아무도 눈에 뜨이질 안는다.
할수 없이 대진표에 명시된 테이블로 돌아와
대국에 임했으나 그때 느낀 낭패감은 대국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본 행사가 끝날 때까지
대국시간만 되면, 마음 한구석에 큰 응어리가 되어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마주앉은 대국자는 17~8세로 보이는 중국계 미국 소년, Yang Jack.
뉴저지에서 여러 명의 친구들과 함께 왔다고 했다. 첫 판에서 같은
중국계와 대국하여 패하고 올라 왔다며 필자에게 누구와 대국하였느냐고
묻는다. 캐나다 선수와 대국하여 이겼다고 하자 의아한 표정이다.
(사진)
유리하게 진행되었으나 마무리 단계에 이르자 중국인들 특유의 버티기
작전에 말려들어 반면 6집승. 덤 제하고 1집 반을 패하고 말았다. 필자의
소비시간은 30분, 상대방은 2시간을 다 쓰고 초읽기까지 들어갔다.
필자의 대국은 항상 30분을 넘지 않는 속기다. 중요한 대국에서도 예외는 없다.
장고파와 대국을 하면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여 제풀에 꺾이는 경우가 많다.
평소 친구들과의 대국도 장고파와는 대국을 꺼린다.
장고파가 되기 위하여, 대국 때마다 마음을 다스려 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몰두 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급해진다. 속기는 이제 필자에게는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이 되어 버렸다.
점심시간이 되면 식당에서 만나 서로 대화를 나눈다.
(좌로부터 필자, 김명완 사범, 권영국 아마7단, 황성규 옹)
다 늦은 오후. 볼티모어에서 오신 황성규 옹(75세, 아마 초단)과 주최측 지도
사범으로 초청된 김명완 8단을 만났고, 곧 이어 시애틀에서 온 에디 킴
(20대, 아마4단), 그리고 타코마에서 온 솔로몬 최(최영완, 20대, 아마3단)를
만날 수 있었다.
황성규 옹께서는 실제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시고, 사교적이어서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주었다.
어제 만난 권영국 아마7단은 잉창치 교육재단에서 주최하는 북미주 잉 마스터즈
토너먼트 본선에 오른 유일한 한국인이며, 시애틀에서 온 에디 킴 아마4단은
김명완 사범이 잉 마스터즈 최종 결승전 공개해설을 할 때 보조 역할을 하였다.
(6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