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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 감독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는 이렇게 끝납니다.
‘이소룡’과 그의 ‘절권도’가 무림을 평정한 70년대 고등학교를 다닌 주인공이
극장에 새로 걸린 성룡 주연의 ‘취권’ 간판을 보고는 ‘성룡이 누꼬?’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장면이죠.
이소룡의 시대가 저물고 ‘성룡 세대’가 열리는 과도기라고나 할까요.
이들이 ‘이소룡 끝물 세대’라면 전 ‘성룡 끝물 세대’에 해당할 겁니다.
추석 때마다 극장과 TV 곳곳에서 성룡의 얼굴을 봐왔으니까요.
추석, 그리고 영화, 이 조합에 어울리는 인물을 한명 선정하라면
아마도 한국사람의 80%는 ‘성룡’이라고 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이후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지만 올해도 ‘성룡 영화’가 추석에 극장가를 찾아왔더군요.
‘80일간의 세계일주(감독 프랭크 코라시)’라는 코미디 영화인데,
성룡, 영국 배우 스티브 쿠건, 프랑스 배우인 세실 드 프랑스 등
출연진 면면만 봐도 예전의 ‘성룡 영화’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른 ‘글로벌 영화’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보아하니 반응이 대단한 건 같진 않습니다만, (저도 아직 못 봤습니다)
작품 수준이 어떻든, 성룡이 선전하길 바라는 마음이 늘 있습니다.
비단 성룡 세대여서가 아니라, 그저 같은 동양인의 입장에서 말이죠.
사실 언제적 성룡입니까. 1954년생이니 우리나이로 만 쉰 살의 장년 배우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들고 날고 뛰어넘고 넘어지는 액션을 직접 다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얼굴에 주름이 많이 늘긴 했지만,
한결같이 발랄한 그의 액션 코미디 연기를 보고 있자면
별로 나이 먹은 것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지요.
우리는 나이를 먹고 갈수록 걸음이 느려지고 있는데,
변함없이 의자와 탁자 사이를 뛰어다니며 소년 같은 무술을 보여주는
성룡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요.
성룡을 흉내내던 유년시절, 혹은 학창시절의 추억이 있는 사람들에겐,
성룡은 ‘피터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할 겁니다.
그러나 성룡 그 자신의 유년시절은 그다지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호주로 이주한 뒤
일곱살 난 성룡은 홍콩에 홀로 남아 기숙학교를 다녔습니다.
경극배우를 육성하기 위한 일종의 종합예술학교였는데,
말이 예술학교지 ‘패왕별희’에 나오듯 혹독한 신체단련훈련을 시키는 서커스단 같은 곳입니다.
성룡 영화를 보면 일반인이 보기엔 ‘고문’에 가까운 어려운 신체동작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주로 학교에서 스승에게 벌 받을 때 취하던 동작들이라고 하지요.
이곳에서 매를 맞아가면서 무술과 연기, 곡예, 노래 등을 배운 것이
성룡의 유년시절과 사춘기의 유일한 기억이었습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지금까지도 성룡은 글을 잘 읽고 쓰지 못합니다.
그대신 7~8세때부터 조연 또는 단역으로 영화에 수없이 출연하기 시작합니다.
지금도 홍콩은 영화를 빨리 ‘찍어제끼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 당시 제작관행이야 말할 것도 없었겠지요.
1971년 학교를 졸업한 성룡은 곡예사나 영화 스턴트맨으로 일했습니다.
그 당시 홍콩엔 이런 류의 단역용 스턴트맨들이 많았기 때문에,
성룡은 일자리를 찾아 우리나라 액션 영화에서 스턴트를 하기도 했습니다.
한국말도 예전엔 웬만큼 알아듣곤 했는데 이제는 거의 다 까먹었다는군요.
그래도 지금도 ‘한국’하면 반가워합니다.
지난 여름 칸 영화제에서 ‘80일간의 세계일주’ 출연진들의 기자회견이 열렸는데
제가 질문에 앞서 “I’m Ja yeon Lee from Seoul.."하고 소개하자
“오 서울!”하면서 다른 어느 나라 기자보다도 반가워하더군요.
당시 성룡이 스턴트맨으로 출연한 많은 영화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당시 최고 스타였던 이소룡(브루스 리)이 출연한 1972년 ‘정무문(精武門·Fist of Fury)’이었습니다.
당시 누구나 그랬듯 성룡 역시 이소룡의 열렬한 추종자였고,
이소룡의 눈길을 끌고 싶다는 일념으로 중국 영화 역사상 가장 높은 곳에서
점프(말이 좋아 점프지 실제론 추락)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합니다.
1973년 이소룡이 요절한 뒤에야 성룡은 이소룡의 뒤를 잇는 홍콩 영화의 차기 스타로 부상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너도 나도 이소룡을 따라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브루스’라는 영어 예명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고 하네요.
그래서 관객을 헛갈리게 하기 위해 영화 포스터마다 브루스 왕, 브루스 장 등의 ‘브루스’라는 이름을 내세웠는데,
성룡이 언젠가 인터뷰에 나와 하는 얘길 들어보니
자기가 출연하는 영화 포스터에도 ‘돌아온 브루스 리’ ‘차세대 브루스 리’ 이런 글자가 크게 쓰이고
‘성룡’이란 글자는 잘 안 보이게 조그맣게 표시되곤 했다는군요.
결국 성룡은 이소룡과 작업했던 감독 겸 제작자인 나유(Wei Lo)와 함께
1970년대말에 쿵푸 영화를 찍기에 이르렀지만 대부분 실패합니다.
그때쯤 성룡은 ‘이소룡 따라하기’ 수준을 넘어 자신만의 고유 캐릭터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코미디가 결합된 액션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온갖 신체적 묘기에 스턴트가 결합된 특유의 코믹 쿵푸영화가 탄생하게 됩니다.
탁자, 의자, 사다리, 우산 등 주변 살림살이를 총동원해 벌이는 성룡식 ‘쿵푸 코미디’는 단번에 인기를 끌었습니다.
(1976년에 쌍커풀 수술을 했다는데, 설마하니 그 영향은 아니겠지요.)
1978년 ‘사형도수(蛇形刀手·Snake in the Eagle’s Shadow)에 이어 개봉한
‘취권(醉拳·Drunken Master)’으로 홍콩 영화계를 주름잡게 됩니다.
이후 ‘사제출마·The Young Master)’로 이소룡 영화를 만들었던
홍콩 최고의 영화사 ‘골든 하베스트’와 첫 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리곤 홍콩에서 개런티를 가장 많이 받는 배우로,
또 아시아 전체에서 각광 받는 국제적 스타로 자리잡지요.
성룡은 단순히 주어진 대본 대로 연기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동작을 고안하고 감독과 상의해 이에 어울리는 스토리를 창작해냈습니다.
1980년대 초, 아시아 스타 자리에 권태를 느낀 성룡은 드디어 할리우드에 진출합니다.
골든 하베스트 영화사가 제작한 ‘베틀 크리크(The Big Brawl·1980)’에 기대를 걸었지만 대실패했죠.
할리우드는 아시아와 달라 동양인들 외에는 아무도 성룡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서양인들은 자막 영화에 익숙지 않아서
자막을 읽어야 하는 영화를 싫어하는데(문맹이라 잘 못 읽는 사람들도 많고)
중국어도 까막눈이었던 성룡이 영어로 영화를 찍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코넌 볼 런’ 시리즈에 출연해
버트 레이놀즈의 상대로 눈에 안 띄는 조연을 맡기도 했습니다.
좌절감을 느끼고 다시 홍콩으로 돌아온 성룡은
‘프로젝트A(1983)’ ‘폴리스 스토리(1985)’ ‘용형호제(Armor of God·1986)’ 등에 출연합니다.
(제가 극장 간판에서 성룡을 보고 듣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인 것 같습니다.)
이어서 ‘성룡의 미라클(Mr. Canton and Lady Rose·1989)’ 등이 히트를 쳤고,
1986년에는 ‘골든 웨이’라는 자기 자신의 제작사를 하나 차리기에 이릅니다.
그는 또한 자기 영화에 캐스팅할 재능있는 신인들을 발굴하기 위해
‘재키스 앤젤스(찰리스 앤젤이 아닙니다)’라는 모델 에이전시도 설립합니다.
‘폴리스 스토리’를 찍는 동안 너무 많은 스턴트맨이 부상당하면서 성룡 영화 출연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성룡은 ‘재키챈 스턴트맨협회’도 만들어 치료비를 부담해가며 직접 스턴트 교육을 하기에 이릅니다.
물론 스턴트 대역 없이 모든 액션을 직접하는 성룡의 몸 역시 온통 골절상 투성이었지만요.
코가 세번 부러졌고, 양쪽 광대뼈가 다 한번씩 부러졌을 정도로, 손은 안 부러진 손가락이 없다는군요.
‘용형호제’ 촬영중에는 40피트 높이의 건물에서 뛰어내리다가 나무 가지에 부딪혀 두개골에 금이 가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그는 연기 영역을 확장해 이전에 안 해본 멜로드라마 스타일의 영화에도 도전하고,
‘폴리스 스토리’와 ‘취권’ 속편들도 찍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미국에서도 인기가 급상승하게 됩니다.
1995년 ‘펄프 픽션’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MTV 영화상에서 성룡에게 ‘평생공로상’을 수여하기에 이릅니다.
아시아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고, 좋으면 표현하고 싶어 사족을 못 쓰는 타란티노 감독은
당시 성룡에게 “상 받으러 안 오면 시상식 보이코트 하겠다”며 협박성 땡깡을 부렸다는군요.
1996년 뉴라인시네마와 골든 하베스트의 공동 제작으로
성룡의 다섯번째 영어 영화(사실은 더빙된 것)인 ‘홍번구’가 개봉돼 미국에서 처음으로 흥행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첫주말 1000만달러로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한 것이죠.
98년에는 ‘러시아워’에서 흑인 코미디언 크리스 터커와 함께 더듬거리는 영어로
‘중국인 경찰’ 역할을 실감나게 연기해 또한번 1위에 오르는 대성공을 거둡니다.
2000년에는 오언 윌슨, 루시 류와 함께 ‘상하이 눈’을 찍었고,
성룡은 완연한 할리우드 인기 배우로 자리매김합니다.
두 영화 모두 ‘러시아워2’와 ‘샹하이 나이츠’라는 속편으로 이어졌고,
150만달러+알파의 개런티를 받고 출연한 ‘러시아워2’는 1500만달러를 벌어들이는 대성공을 거둡니다.
할리우드 진출 이후 미국 배우와 투톱 연기를 주로 해온 성룡은
2002년 단독 주연작인 ‘턱시도’로 또한번 흥행몰이를 하고,
같은 해 드디어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손자국을 남기게 됩니다.
상대역도 코믹 남자 배우가 아니라, 백인 주류 여배우인 제니퍼 러브 휴이트로 바뀌었지요.
뭘로 보나 동양 출신으로 뒤늦게 할리우드에 진출한 사람 치고는 거의 최고의 스타인 셈입니다.
듣자하니 웬만한 미국 아이들 치고 성룡 좋아하지 않는 애가 없다는군요.
(그런 무술을 본 적이 없을테니 그럴 만도 하지요.)
스티븐 스필버그나 탐 크루즈도 성룡에게 “아들이 팬인데 사인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지요.
비슷비슷한 그의 액션이 때론 식상할 때도 있지만, 하회탈 같은 그의 넉넉한 웃음을 보면
누구도 도저히 그를 미워할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할리우드에서도 영화가 끝난 뒤 NG컷들을 에필로그처럼 붙이는 관행을 계속하고 있는데,
상대방이 대사를 잘못해 NG가 나거나 심지어 상대방의 실수로 부상을 입었을 때도 항상 웃는 태도에서
그가 얼마나 성격이 좋은지 알 수 있습니다.
영어도 이젠 의사소통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을 정도이니 존경스러울 정도입니다.
물론 딱딱한 발음은 어쩔 수 없고 가끔 말을 버벅거려서 NG를 내긴 합니다.
‘샹하이 나이츠’ NG컷 중에는 “걘 내 막내 여동생이야(She’s my baby sister)!”라고 말해야 하는데
“걘 내 애기 봐주는 사람이야(She’s my baby sitter)!”라고 외쳐놓고는
왜 NG가 났는지도 몰라 오언 윌슨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장면이 나오지요.
나이가 들어도 어쩜 그리 귀여운지요.
앞서 말한 기자회견장에는 세계 각국에서 모인 100여명의 기자들이 북적거렸는데,
이들이 성룡을 친근해하면서도 성룡에 대해 잘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많은 기자들이 한심한 수준의 질문(“이번에도 또 쿵푸... 그거 하나요?” “대역 아니고 직접 찍은 건가요?” 등)을 던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질문에 아주 진지하고 성실하게, 또 유머러스하게 답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성룡은 이전에 늘 똑같은 코믹 무술 연기가 지겹다고,
더이상 이런 연기는 안 하겠다고 말했던 적이 있는데, 전 그게 정말인지 궁금했습니다.
코미디와 무술이 빠진 성룡영화라.. 상상이 안 가는 일이니까요.
이 질문에 대해 성룡은 사실이고, 다음 작품은 순수한 드라마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영화가 성공할지에 대해선 자신 없습니다만, 어쨌건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겠다니 좋은 일이겠지요.
분장 없이 보니 성룡은 상당히 늙고 초라해보였지만, 알려졌다시피 너무나 겸손하고 친절하더군요.
그리고 긴 기자회견이 끝났을 때 가장 많은 사람이 싸인을 부탁한 사람은...
바로 성룡이었습니다.
성룡이 웃으며 일일이 싸인과 사진 촬영에 응해주자 더많은 기자들이 달려갔고,
결국 다른 배우들이 다 나가버린 뒤에도 성룡은 거의 20여분에 걸쳐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웃으며 응했습니다.
저 정도 스타 중에, 아니 할리우드 배우 가운데
저렇게 100명 가까운 사람들을 일일이 상대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저도 늦게나마 달려가 함께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저 노릇이 지겹고 싫을 법도 한데 너무나 착해서 거절도 못할 게 뻔한 그가 안쓰러워서
저라도 안 하기로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좀 후회됩니다... -_-;;
P.S.
성룡의 아내가 누군지, 아들이 누군지 아시나요?
이렇게 국제적인 명성에 비하면, 성룡의 사생활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성룡은 82년 대만 여배우 임봉교(Lin Feng-Chiao)와 비밀결혼했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이 많죠.
한창때 성룡의 소녀팬이 홍콩에서만도 만명에 달했는데,
성룡의 결혼 소식에 소녀 팬들이 쇼크를 받아 자살 기도를 하는 등 파란이 일어났습니다.
(한명은 실제로 자살했습니다.)
(임봉교입니다)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성룡은 아내와 떨어져 살며 결혼생활에 대해선 극비로 해 왔습니다.
그때문에 당시엔 ‘결혼설’이 사실이 아니었다며 안심한 팬들도 많았죠.
지금 생각하면 이 무슨 해괴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성룡은 팬들을 위해 아내와 ‘가끔 몰래’ 만나는 엽기적인 결혼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때문에 성룡이 임봉교와의 사이에서 낳은 83년생 아들 진조명도 20년간 숨어 살았습니다.
(아들이 성씨가 아니라 진씨인 이유는 성룡의 본명이 진항생이기 때문입니다. '방조명'이라고도 하더군요.)
그러나 그동안 병적으로 가족에 대해 숨겨온 성룡은 최근 들어 슬슬 ‘오픈 마인드’하기 시작했나 봅니다.
2004년에는 영화 ‘트윈 이펙트2 - 화도대전(千機變2之 花都大戰)’에 아들과 함께 출연해 화제가 됐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영화 평은 그다지 좋지 않았죠.)
미국에서 살아온 진조명은 최근 "어린 시절 아버지를 1년에 한두 번 보는 게 고작이었으며
TV나 스크린을 통해 아버지 얼굴을 더 많이 봤다"고 '슬픈 가족사'를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룡이 아내를 통해 거의 매일 아들 이야기를 전해 들어
자주 만나진 못해도 아들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고 하네요.
아래 사진이 진조명입니다. 좀더 선이 가늘긴 하지만, 잘 보면 성룡과 닮았죠?
하여튼 유명인의 자녀로 태어난다는 것이 세상 살기 수월한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