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날씨가 조금씩 더위를 느끼게 합니다만 산색이 너무 싱그럽고 계절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의 함허(涵虛) 설의(說誼)에 나오는 게송이 생각나서 먼저 소개합니다.
花笑山前洩天機 화소산전설천기
산 앞에 꽃이 웃어 천기를 누설하고
예로부터 천기 누설한다는 말이 있지요. 이 세상에는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것이 있는데 불교에서는 다라니(陀羅尼)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라니(陀羅尼)란 아무도 모르는 비밀로 남아 있어야 되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밀교(密敎) 수행에서 진언을 수지독송합니다. ‘꽃이 산 밑에 피어서 천기를 누설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鳥歌林外話無生 조가림외화무생
숲 밖에 새가 울어 무생을 말해 주네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경지를 ‘무생(無生) 얻은 경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화엄경(華嚴經)』에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하였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것을 증득(證得)해야 합니다. 체험해야 합니다. 마음을 깨우친 사람은 몸이 태어나고 죽는 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건강에 대해서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세속적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하겠지만 불교는 출세간법이기 때문입니다. 출세간법의 경계에서 보면 세간법이라는 것은 꿈 속의 몽중 경계(夢中 境界)입니다. 몽중 경계(夢中 境界)란 잠이 깨면 감동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가 숲 밖에서 울면서 무생(無生)을 말해줍니다. 무생(無生)은 결국 불생불멸(不生不滅)입니다. 우리는 생겨나고 없어지는 생멸(生滅)을 따라가고 있는데, 불교는 출세간법으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을 깨닫자는 것입니다. 리는 생겨나고 없어지는 생멸(生滅)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이것만이 내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면에서는 단견(斷見)으로 보는 것입니다. 단견(斷見)은 ‘끊어서 보는 견해’라는 뜻으로 단견(斷見)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사람 몸에서 몸 전체를 다 보아야 몸을 다보는 것인데 몸 전체를 다 보는 것이 아닌 무릎, 얼굴.. 등으로 일부만 각각 따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 그 때 나타나는 객관 경계 모습을 감각적으로 부분만 보며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체를 보고 나면 참으로 무한한 뜻이 있습니다.
頭頭自有無窮意 두두자유무궁의
모든 것에 스스로 무궁한 뜻이 있으니
물건마다 스스로 꽃이 피는 꽃송이 속에 우주의 신비가 숨어 있습니다. 새가 우는 숲속의 새 울음 소리 - 저는 요즘 새벽마다 새 우는 소리를 듣는 즐거움을 누리고 지냅니다. 4시만 되면 창 밖에서 새가 웁니다. 어떤 때에는 제 폰으로 사진을 찍어 보기도 합니다. 그것이 이 게송에서는 無生(무생)을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無生(무생)을 말하는 법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내가 죽으리라는 사실을 압니다. 이것은 無生(무생)을 모를 때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도인(道人)들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경계를 누리기 때문에 죽음의식이 없습니다. 죽는 것도 살아있는 상태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한 때 서양에서 유행하던 말 중에‘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있습니다.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입니다. 옛날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외치게 했다고 합니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인데,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 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 이런 의미에서 생겨난 풍습이라고 합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말은 우리말로 ‘운명애(運命愛)’라고 해석됩니다. 내게 주어진 어떤 외부 경계가 나타나도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병이 들어도 병을 거부하지 말고 이것을 감수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것을 극복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극복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복싱선수들도 링에 올라서 상대방과 한 판 겨루자는 심정으로 시합에 임하는 것과 같습니다. 피하려면 링에 올라갈 이유가 없듯이 자신이 처해있는 모든 현실 경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는 것이 ‘운명애(運命愛)’입니다.
불교에서 문제 삼는 것은 생사(生死)입니다. 타종교에서는 생사를 문제 삼지 않고 죽어서 천당에 간다는 것이 이상(理想)입니다. 불교는 천상에 가더라도 다시 타락하여 생사(生死)의 굴레를 면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생사(生死) 자체가 없는 무생(無生)의 경지를 터득하자는 것입니다. 이 무생(無生)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頭頭自有無窮意’의 뜻은 나도 무한한 뜻을 가지고 있고 모든 것이 무한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존재의 의미나 다른 것들이 가진고 있는 존재의 의미가 똑같다는 것입니다. 새가 우는 의미나, 꽃이 피는 의미가 똑같다는 것입니다. 나뭇잎이 무성하여 녹음이 짙어지는 의미나, 산골짜기에서 냇물이 졸졸졸 흐르는 의미가 모두 똑같습니다. 모두 무한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는 나도 깨달음을 가지고 있고 너도 깨달음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깨달음을 자기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데 다만 업에 의해 생각이 잘못 일어나기 때문에 그 깨달음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가르침을 듣고 생각을 바꾸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새롭게 창의적으로 살아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세속의 타성·매너리즘에 빠지면 자기발전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세속적으로 돈을 벌고 나아가 경제적으로 여유 있게 살른지 모르나 그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항상 시작이 있으면 끝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죽을 때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본래 생사가 문제가 아닌데 중생 업보 경계에서 생사 문제를 가지고 삽니다. 살아가는 문제와 같이 죽는 문제도 똑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철학자들은 “죽음도 삶의 일부”라고 합니다. 죽는 것도 삶의 한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불교적 인생관입니다. 모든 것이 다 똑같은 본래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내게도 이 세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대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모두 동등합니다. 이런 근본 뜻에 입각하여 장자(莊子)는 ‘만물동근(萬物同根)’이라 하였습니다. 만물의 뿌리가 같다는 것이 동양의 사상입니다. 동식물도 만물에 속합니다. 우리가 삶이 나무와 같다고 하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근본으로 볼 때에는 똑같습니다.
내 마음을 잘 써서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밝은 쪽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가 됩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도 좋은 땅을 만나야 합니다. 씨앗이 땅을 잘 만나야 싹을 틔워 잘 자랄 수 있고 수확할 수 있습니다. 좋은 씨앗도 모래밭에 뿌리면 자라지 않습니다. 거름성분이 없는 박토(薄土)에 씨엇을 뿌리면 수확이 잘 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람도 좋은 인연을 만나야 합니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나에 좋은 것이 있지만 우리는 업에 의해 충동된 마음으로 좇아가다 보니 모르고 삽니다. 이 시간이 나에게 이로운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여기 가는 것이 좋은지 저기 가는 것이 좋은지 분별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업에 의해 충동된 좋지 않은 마음으로 다니기 때문입니다. 씨앗이 좋은 땅을 만나야 잘 자라게 되는 명확한 이치를 사람의 마음 쓰는 용심(用心)이 공부가 안되면 용심(用心)이 잘못 되어 집니다.
오늘 반야암 법회에도 서울에서 오신 거사님들, 부산에서도 김성태회장님을 위시한 박교수님과 거사님들, 창원에서도 오신 거사님들이 계십니다. 이처럼 오시게 된 것은 나름대로 와야 하는 인연이 있는 것입니다. 그 인연이 나에게 무엇인가 플러스가 됩니다. 그 인연이 좋은 쪽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을 믿는 것이 불교 신앙입니다. 놀러가는 것이나, 술집에서 술 한 잔 먹는 것이나, 찻집에 가서 차 한 잔 마시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 세상의 깊이는 안팎을 잘 살펴 보면 중생이 보고 듣는 경계를 판단할 때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합니다. 어리석어 지혜가 없는 사람은 안좋은 것을 좋다고 하고, 좋은 것을 좋지 않다고 거꾸로 판단합니다. 이것이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말하는 전도몽상(轉倒夢想)입니다. 이 전도몽상(轉倒夢想)을 없애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행이 필요합니다. 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닦아야 합니다. 아파보아야 건강의 소중함을 느끼듯이 인생의 여러 가지 시련도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몸이 아파서 죽을 고비를 넘겨 본 사람이 그러한 경험이 없는 사람보다 건강이 소중하다는 것을 더 절실하게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깊이 느낄 수 있는 계기를 불법을 믿는 신앙정서를 통해 한번씩 느껴보아야 합니다.
세상은 항상 나를 도와주는 인연이 많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일이 틀려져서 업장의 장애를 받아서 안 좋은 경계가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앞서 말씀드린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말처럼 내게 오는 모든 현실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면서 거기에서 내가 지혜로운 마음을 자꾸 쓰면서 극복하여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설하신 『아함경(阿含經)』은 부처님 법문을 가장 원형적으로 성문화하여 만든 경전으로 한역(漢譯)으로 『장아함경』, 『중아함경』, 『잡아함경』, 『증일아함경』으로 나뉩니다. 『아함경(阿含經)』뿐만 아니라 소의 경전에서는 가장 많이 하신 말씀이 ‘무상(無常)’입니다. 모든 경전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상(無常)’과 ‘인연(因緣)’입니다. 인연은 연기(緣起)와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무상(無常)을 염세적(厭世的)으로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라는 뜻에서 한 말이 아니고 무상(無常)을 뛰어 넘으라는 것입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전쟁에 승리하여 개선문을 지나온 영광에 도취되어 있으나 언젠가 죽음이 온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영광에 도취되어 있으면 안됩니다. 『금강경(金剛經)』의 무주상(無住相) 법문입니다. 상에 도취되어 있으면 부처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 되지 못합니다.
항상 불법 인연 속에서 좀 더 좋은 인연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씨앗이 땅을 잘 만나야 싹을 틔워 잘 자랄 수 있듯이 지혜로운 마음으로 좋은 인연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좋은 인연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은 제로(0)가 아닙니다. 인연도 수(數)를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인연에 의해서 좋은 공덕을 성취하고 그로 인해 좋은 과보를 누리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불교 믿는 사람들의 신심을 단련하는 근본 자세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로써 간략히 마칩니다.
첫댓글 ㅎㅎ 일요법회 법문과 함께 그와 관련된 노래까지.... 공덕행과 정진력에 감사드립니다^^
그냥 좋아서, 그리고 모르는 게 많아서 머리 나쁜 제가 좀더 새기려고 하는건데요 뭘...
늘 칭찬에 힘이 납니다 _(())_
감사합니다.
직접 법회에 참석한 듯 법향이 그대로 전해져옵니다.
메멘토 모리, 아모르 파티를 늘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생멸이 없는 무생의 경지도,
천기를 누설하는 유월의 꽃들도요.
멋지게 요약 정리해주셨군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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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예 고맙습니다 _()_
아휴~~
큰스님 법문을 직접 듣고
다시 이렇게 글로 옮겨 주신법문을 읽으니까 쏙쏙 와 닿네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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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야 그저 듣고 정리만 할 뿐입니다
다행히 좋게 봐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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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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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_()_
스님감사합니다._()()()_
고맙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