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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박병욱 목사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무엇이었습니까? 원하는 대학을 합격한 순간? 원하던 직장의 첫 출근날? 결혼한 순간? 자기 집을 처음 장만한 순간? 아이를 출산한 순간? 아니면 여행지에서 환상적인 경치를 본 순간입니까? 사랑하던 사람과의 이별의 순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의 순간? 아니면 자신의 치명적인 질병을 아는 순간입니끼?
이렇게 우리가 어떤 사실을 아는 것, 특정한 사건을 겪는 것, 특정한 삶의 조건들의 변화 등은 우리 생에 깊은 각인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보다도 더 중요한 사건이 있다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나는 사건은 우리 삶의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영적으로 거듭남의 경험은 단순히 가치관의 변화와 인생관과 세계관의 변화뿐만이 아니라, 나의 온 존재가 새로워진 경험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개인의 인생 전기뿐만이 아니라, 역사가 새롭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역사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이미 연대기에서 중심일 뿐만 아니라, 구속사적 의미에 있어서 중심인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의 중심인 예수님의 강림 사건이 어떻게 준비되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전파하며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엄청난 사건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질문이 생겼습니다. 이 요한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여 졌습니다. 혹시라도 메시야는 아닌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서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입니까?” “아닙니다.”
“당신은 엘리야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당신은 예언자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신을 외치는 ‘사람’도 아니고 외치는 사람의 ‘소리’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자신의 인격 보다도 자신의 사명에 더 큰 강조점을 둔 대답입니다.
광야
세례 요한은 실제로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라고 외치는 광야의 소리였습니다. 왜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쳤습니까? 광야의 현장은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광야는 예루살렘과 대조되는 장소입니다.
예루살렘은 인간의 제도가 우상의 자리에 앉아 있는 곳, 문명의 장소, 권력의 장소, 기득권과 부로 가득찬 곳, 화려한 곳, 부패한 곳, 인간의 신화가 가득한 곳입니다.
광야는 이와는 반대로 가난과 결핍의 장소, 비문명과 야만의 장소, 시험의 장소, 아무런 기득권이 없는 곳, 황폐한 곳, 시련과 고난과 절망의 장소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출애굽 때 광야는 훈련의 장소요, 모세에게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고, 예수님에게 광야는 시험의 장소였습니다. 야훼 종교는 광야의 종교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인간의 권력으로 하늘을 막아버린 곳이고, 광야는 하늘이 열린 곳입니다. 그래서 도리어 광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사람의 눈을 거짓 아름다움으로 속여서 참 아름다움으로부터 눈멀게 하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인간이 금으로 치장한 궁전이 있는 곳이고 인간이 화려하게 장식한 성전이 있는 곳이지만, 광야는 들의 백합화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바로 이 광야에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라고 외치는 소리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은 예수살렘 도시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이제는 그 성 밖으로까지 밀려나 광야로 쫓겨난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광야로 내 몰린 인생들에게 빛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그리하여 광야는 진정한 영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곳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외친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소리를 외칩니다.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외치는 것은 온 몸으로 소리치는 것입니다. 속삭이는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을 조용히 속삭일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승리다. 승리다. 우리가 이겼다” 하고 외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소식은 조용히 전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 하늘의 천군 천사가 온 우주에 가득한 소리로 찬양했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이 우주적인 합창을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온 우주에 울려퍼지는 천사의 찬양을 듣습니까? 이 우렁한 우주적 찬양을 듣는 우리가 어떻게 침묵할 수 있습니까?
외치는 내용 (이사야 61장)
과연 어떤 소식이기에 온 우주에 가득찬 함성으로 합창을 불러야 할 노래입니까?
세례 요한은 이사야가 예언한 그 예언을 이루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의 말씀은 소명 받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에게 성령을 부으셔서 일하게 하십니다. 기름 부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직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직책은 메시야로서의 직책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야의 소명을 받은 종이었습니다.
이사야 61장은 메시야 사명을 ‘8가지 소식’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일.
2.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는 일.
3.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일.
4.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는 일.
5.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는 일.
6.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는 일.
7.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게 하는 일.
8.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는 일.
세례 요한은 이 모든 8가지 소식이 예수님의 강림 사건에 모두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압니다.
세례요한은 이 일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보고 소리를 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메시야적 소명을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메시야적 삶이란 수고의 삶입니다. 고난의 삶입니다. 희생의 삶입니다.
가난한 자를 부유케 하기 위해서 누군인가가 가난해져야 했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는 자가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려고 자기의 자유를 제한하였습니다. 갇힌 자를 놓으려고 자기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상처나고 병든 곳을 고치기 위해 스스로 채찍에 맞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메시야적 소명입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4-6).
이 고난의 종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대림절은 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성탄의 계절은 이 메시야가 오심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의 삶에 진정한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임하기를 간구하는 계절입니다.
광야의 영성
오늘날 바로 이런 삶을 따라가는 것이 성령받은 자의 삶입니다. 이런 삶이 기름부음 받은 자의 삶입니다. 소명 받은 자의 삶입니다. 성령받은 사람은 메시야적 소명을 실현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과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광야의 교회입니까? 예루살렘의 교회입니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광야로 나가는 교회입니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기를 원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부와 권력에 안주하며 가끔은 호기심으로 당신이 메시야입니까 하고 질문을 던지기는 하지만 결코 진심으로 믿지는 않는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인간의 부와 권력과 교만과 위선이 있는 곳이지만, 광야는 인간의 부와 권력과 교만과 위선과 우상을 다 버리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인간의 죄악도 다 내버리고 순수한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는 장소입니다.
광야는 인간이 입을 수 있는 화려하고 좋은 옷을 벗고, 더러운 추한 옷을 내던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옷을 입는 곳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속적 삶 속에서도 광야의 자리에 서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요즘 황우석 교수의 논문에 대한 진실을 놓고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2005년 12월 7일 생명과학을 전공한 서울대 젊은 교수 20여명이 황우석 교수의 논문의 진위 문제를 여론에 편승한 감정적 애국주의로 덮을 문제가 절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재검증을 요구했습니다.
과학은 진실만이 생명입니다. 과학은 과학으로 말해야 합니다. 과학의 문제를 여론에 편승해서, 사회적 논리로, 애국주의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과학의 증명은 과학의 광야에서 가능합니다. 모든 명예와 권위를 다 내려버리고, 겸손히 요구돠는 서류를 제출할 때, 모든 의혹이 해소될 수 있습니다.
학자는 박사학위를 받을 때 엄숙한 선서를 합니다. “나는 진리를 위해서 살겠습니다.” 진리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내버리고 광야의 자리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세상의 일도 이렇거늘 하물며 신앙인들의 삶에서야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오늘날 한국 교회는 광야
의 자리에 서기를 즐겨합니까?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이 즐겨 서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 성의 부유함에 도취되어 있는가? 그래서 제도와 보잘것없는 권한 속에서 도리어 메시야를 죽이기 위해 어린이들을 살해하는 잔인함을 행하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 내의 갈등, 세습 등으로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과연 그 곳에 진정한 성탄이 임할 것인가?
누구든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타락합니다. 타락한 사람은 광야로 나와서 회개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안동교회도 창립 100주년에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이 사회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아야 합니다. 100년전 역사적 고난과 미신으로 가득찼던 이 땅이 오늘에는 유물론과 물질만능주의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기복신앙 속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바알신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십자가는 성공의 상징으로 가려졌습니다.
광야의 영성은 미국식 패스트 푸드점의 닭고기 스프에 가려졌습니다. ‘영혼의 닭고기 스프’라고 이름지어져서 베스트 셀러가 된 책들처럼 아름다운 인간적인 이야기로 가득찬 한국 교회를 말합니다. 이런 책들을 처음 읽으면 정말 감동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도 여전히 인간적인 수준에만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들을 말합니다. 마치 닭고기를 어쩌다 먹으면 맛이 있는데 며칠을 계속 닭고기만 먹으면 옷과 코에 아예 닭 냄새가 배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한국 교인들의 코에서 미국식 영적 닭고기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이것이 도시의 영성입니다. 우리는 이 냄새를 떨치고 광야의 백합화 향기를 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들어오는 순간 눈에 보이는 물질적 공간을 넘어서서, 눈에 보이는 인간적 공동체를 넘어서서 영적 광야를 맛보아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시므온’이라는 예언자와 ‘안나’라는 여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비록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었지만 그 곳을 광야 삼고 오시는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의 영성을 간직했던 사람들입니다. 광야의 영성을 가진 자에게 주님은 나타나십니다. 주님은 영적인 광야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 주십니다.
모세는 광야의 불타는 떨기 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무한한 권력을 가진 파라오의 왕자로서가 아니라 모든 계획이 좌절된 목자로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배운 이집트의 높은 학문적 세계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도시의 대학에서 수사학을 배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더듬거리는 말버릇을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이것이 광야의 영성입니다.
인간의 모든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하는 것이 광야의 영성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이 주는 세 가지 시험을 이기시면서 인간적인 경제적인 포부, 종교적인 계획, 정치적인 계획을 포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인 계획과 목적을 포기하고 오직 골고다의 십자가만이 진정한 생명을 준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광야의 영성을 가진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며 마음이 청결한 사람입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이며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입니다.
광야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광야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광야의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주님의 오실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안동교회는 21세기에 메시야적 소명을 회복하는 메시야적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메시야적 영성에 눈 떠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메시야적인 직책을 이어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메시야적 삶의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광야에서 예수님의 오시는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해인 시인의 대림시 “길이신 이여 오소서” 일부를 소개합니다.
길이신 이여 오소서 <이해인 李海仁>
기름이 모자라고 쌀이 모자라고
모자라는 것 투성이의
이 춥고 메마른 땅에서
사랑의 기름이 모자라고 신앙의 쌀이 모자라는
우리네 가슴의 들판도 비어 있습니다
이 거칠고 스산한 황야의 어둠을 밝히시러
길이신 이여 오소서
슬픔을 딛고 일어설 희망을 주기 위해 오소서
죽음을 딛고 일어설 생명을 주기 위해 오소서
그러나 우리가 당신을 기다리기 전에
먼저
안으로 뿌리내린 미움과 원망과 불신의
어둠부터 몰아내게 하소서
당신의 뜻 대신 내 뜻으로 가득 찬
당신의 고통 대신 나의 안일함으로 가득 찬
당신의 겸손 대신 나의 교만으로 가득 찬
마음의 땅을 갈고 닦게 하소서
당신이 오실 길을 예비키 위해
자신을 내어던진 세례자 요한처럼
무엇보다 먼저 회심의 눈과 귀와 입을
열어 주소서
현대의 콘크리트 벽에 끼어 질식하는 나무들처럼
무디게 말라붙은 돌마음들을
예리한 기도의 칼로 깨뜨려 살마음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와 당신 사이에
나와 이웃 사이에, 이웃과 이웃 사이에
새 하늘 새 땅이 열리는 은총을 허락하소서
오소서
오소서
길이신 이여 오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