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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지파 반의 귀환
(수 22:1-6)
1. 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2.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여 3.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4. 이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너희에게 준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되 5. 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6.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축복하여 보내매 그들이 자기 장막으로 갔더라
이 시간에는 “두 지파 반의 귀환”에 대한 말씀입니다. 두 지파 반 즉 루우벤과 갓과 므낫새 반 지파의 4만 군대는 서편의 아홉지파 반을 도와 7년간의 봉사를 마치고 여호수아의 칭찬과 축복 속에 요단 동쪽 자신들의 기업으로 귀환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지파 반의 그 충성되고 영웅적인 장면을 봅니다. 이들은 가나안 정복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들은 돌아가 후대 자손들에게 자신들도 서편과 동일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요단강 언덕에 큰 단을 쌓습니다(10-20절). 이것으로 아홉 지파 반의 오해를 사서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지만 진위를 파악하고는 그들은 더욱 견고한 공동체로 단결되게 됩니다(21-34절). 이것이 22장의 줄거리인데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영광스런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영광스런 교회란 어떤 것인가?
1. 주님을 머리 삼는 교회입니다.
1-3절 “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여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했습니다.
이처럼 두 지파 반은 가나안 전쟁 7년 동안 변함없이 충성했습니다. 두 지파 반, 즉 루우벤지파 갓지파 무낫새 반지파는 여호수아에게 맹세했었습니다. 수1:16-18에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우리는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 -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 했던 그 맹세대로 목숨 바쳐 충성했습니다.
그들은 시종일관 내 기업이 아니었음에도 하루도 쉬지 않고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삼년간 귀환명령이 내리기까지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이 얼마나 철저한 순복입니까?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 같았으면 전쟁이 끝났는데 왜 보내어 주지 않느냐? 우리는 가족도 없는 줄 아느냐? 당신들 뒤치닥꺼리 언제까지 해주어야 하느냐? 고 불만을 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 약속한 그대로 여호수아가 하라는 대로 순종했습니다. 유종의 미를 거뒀습니다. 그들이 불만을 품은 흔적이란 조금도 성경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에게 철저히 순복하는 곳입니다. 그리스도가 왕입니다.
그래서 엡1:22에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했고, 엡4:15에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엡5:26-27에도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사람이 왕노릇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세상보다 예수님을 높이고 순종하고 그 말씀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핍박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이지 세상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어떻게 예배를 쉴 수 있습니까? 어떻게 기도를 쉬고, 복음전도를 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예수를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기에 계속하다가 박해 받고 순교 당한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눅6:46에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고 책망 하셨습니다. 출 21장에 종이 평생 주인의 종이 되고 싶어 재판장에게 가서 종이 되기로 맹세하고 송곳으로 귀를 뚫림을 받았는데 그것은 이제부터 주인의 말씀만 듣겠다는 것입니다. 영광의 예수님을 주로 삼아 절대 순복하는 교회가 영광스러운 교회입니다.
2. 영광스러운 교회는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3-4절에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이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너희에게 준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되" 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여기서 여호수아는 두 지파 반과 아홉 지파 반의 관계를 형제 관계로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7년 동안 형제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가족이 얼마나 보고 싶겠습니까? 전쟁이 쉬운 일입니까? 그러나 여기서 도와 달라 하면 여기서 돕고, 저기서 도와 달라 하면 저기서 돕고, 어느 정복지에서 문제가 생겼다 하면 그곳으로 출동하고 낮에도 출동하고 밤에도 출동하고 이들은 어느 지파에도 자기 가정에도 묶이지 않고 어느 곳이나 출동하는 이스라엘의 특수부대였습니다. 사사기에도 보면 두 지파 반이 외세를 물리치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교회에서 형제라고 불러주는 것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하면서도 이상한 매력이 있었습니다. 요한3서에서 사도 요한은 자기를 장로(요삼1:1)라고도 소개하면서, 교인들을 내 형제(3절)라 혹은 내 자녀(4절)라고 불렀습니다. 사랑의 사도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형제보다 더한 형제애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형제는 영원히 함께 할 형제들입니다. 육신의 형제가 아프면 내 마음만 아플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형제는 영혼과 육체가 같이 아픕니다. 믿음의 형제자매가 어디가 아프면 나도 거기가 아픕니다.
믿음의 형제는 성령으로 한 몸이요 영원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형제도 사랑하되 믿음의 형제들에게 더해야 합니다. 요한이 형제 사랑을 강조하는데 거기 형제는 믿음의 형제입니다. 형제 사랑은 우리의 본분이면서 교회 부흥의 비밀입니다.
에베소교회를 향한 주님의 경고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십니다. 이 말씀을 역으로 해석하면 교회 발전과 부흥의 비밀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라. 그러면 부흥할 것이다. 문제의 사람이 있을지라도 사랑하면 최소한 그 사람이 나에게는 해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계3:9에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악인들도 교회 앞에 무릎을 꿇는 놀라운 역사입니다. 사랑하면 악인도 돕고, 세상 사람들이 더 나서서 교회를 돕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악한 세대에서 사랑으로 무장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가짜들이 거짓 사랑일지라도 그렇게 무장하고 접근한다면 그것도 상당한 위협이 됩니다. 그 가짜 사랑에 넘어갈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흉내만 내도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영광스런 교회는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3. 영광스런 교회는 천국의 훈련소입니다.
5절 “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가나안 동편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는 두 지파 반에게 여호수아가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이제 가나안 본토를 떠나 요단 동편으로 가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만큼은 변함없이 섬기라는 당부입니다. 이처럼 지상의 성도는 비록 지상에 속했지만 천상과 같이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만 않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변함없습니다.
엿새 동안은 부지런히 일하고 주일 하루는 하나님께 예배하며 매일 기도와 찬양으로 영광 돌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천국의 한 부분이요, 천국의 모형으로 천국 백성을 훈련하는 훈련소입니다. 천국에서 해야 할 삶을 지상 교회에서 똑같이 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천국에서 매일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처럼 그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꾸 믿자. 감사하자. 찬양하자. 사랑하자. 강조하는 것입니다.
눅15:7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지상의 어려운 상황에서 승리하며 신앙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지치고 연약한 몸과 마음을 이기면서 신앙생활하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더 귀합니다. 그리고 지상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보는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믿음을 더 고마워하십니다. 매일 천국생활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귀합니다.
4. 영광스런 교회는 말씀과 축복의 전당입니다.
7절 "여호수아가 그들을 그들의 장막으로 돌려보낼 때에 그들에게 축복하고" 2-7절은 여호수아가 두 지파 반을 축복한 말입니다. 여호수아는 두 지파 반을 기쁜 심정으로 칭찬하고 격려하고 권면하며 축복하고 있습니다. 더 자세히 세분하면 2-3절은 칭찬입니다. 4-5절은 권면입니다. 6-7절은 축복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또 교회는 어머니라고도 했습니다(갈4:26). 아버지가 계시고 어머니가 계시는 행복한 우리의 집이 교회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말씀하시고 축복해 주시고 어머니는 감싸주시고 양육해 주시듯 교회가 그런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단한 광야의 여정에서 엘림이라는 오아시스에 왔습니다. 그곳에는 물샘 열둘과 70주의 종려가 있었습니다. 물샘 열둘과 70주의 종려가 바로 교회입니다. 물은 말씀이요 열둘은 주의 종들이요 종려 70은 풍성한 주님의 은혜와 은사를 상징합니다. 이처럼 교회는 이 힘든 세상의 여정을 살아가는 인생들의 쉴 곳입니다.
두 지파 반 그들이 7년간 가족과 생이별하며 전쟁할 때 얼마나 고단하고 외로왔겠습니까?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고 험악한 산을 오르내리기를 얼마나 했으며 적군의 뒤를 쫓기를 얼마나 했으며 죽을 고비를 얼마나 넘겼으며 싸우다 베이고 찔리고 멍들고 다친 흔적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어디서 몇 년간 직영으로 예배당 건축을 하다 보니 몸은 성한 곳이 없이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망치로 손가락을 때리기를 몇 번이며, 쇠붙이에 팔과 다리를 긁히기가 몇 번이며, 불에 데이고, 설치물에 머리를 찧고, 기계에 손가락이 끊어지고, 무거운 짐 때문에 어께가 빠지고, 교인이 다치면 병원에 가고 놀라 가슴을 쓸어내리고, 돈이 없어 동분서주하며 울며 기도하기를 얼마나 했겠습니까?
시험도 많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철야하고, 새벽부터 일어나 일할 준비하는 것 보통 일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빚도 졌습니다. 가장 얄미운 사람은 일도 하지 않으면서 일하는 사람들 뒤에서 힘 빼는 사람입니다.
두지파반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칭찬과 격려와 권면과 축복을 받고는 그들의 마음은 눈이 녹는 듯했습니다. 주르르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상한 심령을 치료하고 위로하는 곳입니다. 거친 세상을 살아갈 용기와 힘을 주기도 합니다. 말씀으로 천국 길을 안내하고,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냥 교회 나와 예배만 드려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셔서 눈물이 나옵니다.
5. 영광스런 교회는 나눔의 공동체입니다.
8절 "너희는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과 금과 구리와 쇠와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서 너희의 원수들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의 형제와 나눌지니라" 이 말대로 아홉 지파 반은 그들에게 많은 전리품을 주어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빈손으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무언가 한 아름씩 안고 돌아가는 곳입니다. 먼저는 예배를 통해서 풍성한 은혜를 한 아름씩 안고 가셔야 합니다. 초대 교회는 물질도 나누었습니다. 혹은 은사가 있어 예수님께 그러셨듯 세상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교회가 해결하기도 합니다.
두 지파 반에게 준 재산 가축 보물 의복 등은 이런 모든 복과 은혜와 은사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걸 나누는 것을 교제라고 부릅니다. 헬라어로는 '코이노니아'입니다. 코이노니아는 교회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지식도 지혜도 혼자만 갖지 말고 나누십시오. 저는 무릎이 아플 때마다 벨트마사지를 오금에 걸어 가볍게 마사지를 합니다. 아파서 절뚝거릴 때가 여러 번 있었는데 그렇게 낫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하시라고 몇 번 주보에도 내고 기계를 구해서 교육관에다 갖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주보도 읽지 않고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교회를 부끄러워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규모가 크냐 적냐로 영광스럽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고 또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교회냐가 중요합니다. 말씀대로 하는 교회라면 영광스러운 교회이지만 규모가 커도 말씀대로 하지 않는 교회는 부끄러운 교회입니다. 나눔이 있는 교회라면 영광스러운 교회입니다.
6. 영광스런 교회는 한 몸인 교회입니다.
10절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제단을 쌓았는데 보기에 큰 제단이었더라" 10-20절까지 보면 동편으로 돌아 간 두 지파 반이 요단 언덕가에 볼만한 큰 단을 쌓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이스라엘을 동서로 갈라놓는 요단강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서편의 백성들과 동일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이라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여호와의 단의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교육용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오해가 발생하여 전쟁의 위기로까지 갈 뻔했습니다만 그들이 그 일을 상의 없이 감행한 것은 아마도 여호수아가 허락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단은 오직 중앙 성소 한 곳에만 있어야 하는데 여호와의 단의 모형을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는 하나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단을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하나입니다.
그래서 엡2:14-16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교회는 예수 안에서 둘도 아닌 하나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교회관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개교회주의는 잘못된 것입니다. 소속한 교회에 충성하는 것은 좋지만, 우리 교회만 잘되면 된다는 식의 생각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교인들은 그렇다 치고 목회 윤리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교회주의도 경계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무형교회만 인정하고 유형교회를 부정하는 반교회적 운동으로 각자 개인적으로 성경 보고 하나님 섬기면 된다면서 교회의 예배와 훈련과 교육과 전도와 양육 등등을 부정하는 주의입니다. 이게 지속 가능한 일일까요? 예수님도 하지 않은 일을 그렇게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목자 없는 양이요, 우리 없는 양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목자가 없고 우리가 없으면 이리가 와서 물고 갑니다. 소속교회에도 충성하지만 모든 교회에도 유익이 되게 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모든 교회의 전도문이 막히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7. 영광스런 교회는 평화로운 교회입니다.
12절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그들의 인간적인 부족한 면을 엿보게 됩니다. 먼저 동편 사람들은 후손에 대한 교육용 제단이었지만 상의 없이 성급하게 수축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아무리 여호수아가 이해해 주지 않을 것 같아도 요청하면 여호수아가 자신이 결정치 못하면 여호와 앞에 여쭈어서라도 결정할 것이기 때문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서편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 여기 "곧"이라 했습니다. 즉 그 진위를 파악하기도 전에 수십만의 대군을 일으켜 치러 가려 한 일도 너무나 성급한 판단입니다. 무엇이든지 성급하면 실수가 있게 마련입니다.
다행히 지혜로운 사람이 있어 비느하스를 조사단장으로 각 지파별로 10인씩 조사위원을 선정하여 진위를 파악토록 했으니까 다행이었지 처음 감정대로 했다가는 큰 전쟁이 일어날 뻔했습니다. 정확한 사항을 알기도 전에 소문으로만 듣고 감정을 발하여 전쟁하려고 나선다면 동편 사람들도 불쾌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인격적으로 합리적으로 그리고 언제나 말씀과 은혜와 지혜 안에서 해야 합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진리는 교회는 평화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정을 앞세우면 안 됩니다. 교회는 성령의 감동이 지배하는 곳이지 인간의 감정들이 지배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감정으로 했으나 이내 냉정을 되찾고 조사단을 만들어 일을 순리로 풀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지혜로운 교인들이 많은 교회는 영광스런 교회입니다. 문제가 되지 않을 것도 문제를 크게 하는 교회도 있지만 문제가 커도 줄이는 교회도 있습니다. 교회 일의 모범과 원칙을 보여주는 귀한 사례입니다. 너도나도 감정 표현하면 교회는 인간의 집단과 사탄의 소굴이 되고 맙니다. 비생산적인 일로 잡담하면 안 됩니다. 평화를 깨는 일은 막아야 합니다.
교회는 구성원들을 보면 하나 될 수가 없고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태생 성별 나이 지역 빈부 학력 성격 생각 등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을 뿐 아니라 신앙적인 차이도 있습니다. 사탄의 시험도 있습니다. 맘에 맞는 사람도 오래 가기 어려운데 인간의 생각으로 교회가 하나 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평화로운 교회라면 지혜의 사람들이 많든지,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를 많이 하든지, 누군가 평화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8. 영광스런 교회는 진리를 수호하는 교회입니다.
12절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 이 말씀의 다른 면입니다. 평화도 좋지만 진리 문제에 있어서 다르다면 허용할 수 없습니다. 만약 동쪽 지파들이 여호와의 단 외의 다른 단을 쌓았다면 그들은 진멸 당해야 마땅합니다. 율법이 그것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레17:3-4에 “이스라엘 집의 모든 사람이 소나 어린 양이나 염소를 진영 안에서 잡든지 진영 밖에서 잡든지 먼저 회막 문으로 끌고 가서 여호와의 성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 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했고, 신12:13-14에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 하셨습니다.
비느하스가 조사단장인데 그의 임무는 진상을 조사하는 일로 이단성 여부를 파악함이었습니다. 그는 아론의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의 아들로서 20년간 대제사장을 역임한 사람이고 모세를 도와 미디안 정벌에 참여했고 바알브올 사건 때 우상숭배를 한 시므리와 고스비를 창으로 찔러 처단한 진리에 선 사람으로 이 공로로 영원한 대제사장직의 언약을 받기도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그가 이 사건의 단장이 된 것은 진리수호를 위한 상징적인 의미도 큽니다.
만약 진리가 변질되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한 예로 여성신학이라 해서 신학이 변질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를 못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여성신학이란 여성 해방과 함께 인간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정치신학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가부장적인 문화의 산물이므로 하나님을 그렇게 불러서는 하나님에 대한 공격이며 하나님을 인간의 영역에 묶는 통제행위로서 이는 종교적 이데올로기화(사상이나 신념화)시킨 것이라 비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 가장 많이 말씀하셨듯 성경이 친히 아버지라 해서 아버지인 것이지 사람이 만들어낸 호칭이 아닙니다.
여성주의, 여권주의, 여성해방운동을 영어로 feminism(페미니즘)이라고 하는데 모든 젠더(gender, 사회적성)은 평등하다는 이념으로 여성해방을 부르짖는 주의입니다. 페미니즘은 생물학적인 성으로 인한 모든 차별을 부정하며 성평등을 지지하는 믿음에 근거를 두고, 불평등하게 부여된 여성의 지위나 역할에 변화를 일으키려는 운동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문제는 지나쳐서 정상적인 것도 억압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페미니즘의 문제는 자유주의 · 마르크스주의 · 급진주의 · 사회주의 등 여러 사상이나 이론에 의해 뒷받침되거나 더불어 발전했다는 점입니다. 제 말이 아니라 정의에 나오고 있어요. 페미니즘의 배후에는 공산주의가 있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 WCC 역시 뒤에는 공산주의가 있습니다. 기독교를 변질시키려는 것입니다. 아편전쟁이 그랬듯이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사회를 혼란시키고 국가를 약체로 만들고 저항세력을 없애는 것이 적국의 전략입니다.
지금 한국은 세계에서 제일가는 저출산으로 경제활동 및 군대 갈 사람도 없고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 망한다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페미니즘이나 동성애 막지 못하면 교회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국회에서도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며 동성애를 합법화하며 교회를 폐쇄하는 법안이 올라와 있습니다. 이걸 입법화하려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여러분이 알아서 좀 막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영광스런 교회는 진리를 수호하는 교회입니다. 고전4:6에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지 말라" 이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때 아닌 성경관 논쟁의 시대입니다. 약 4세기까지 기독론 논쟁 이미 끝났습니다. 그 후에 삼위일체 논쟁도 끝났습니다. 중세기에 교회론 논쟁도 끝났습니다. 이제는 성경관에 대한 논쟁의 시대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 문화의 산물이냐 후기에 편집한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의 영감이냐 하는 논쟁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교만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그냥은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지 문화의 산물이 아닙니다. 성경을 의심하면 신앙은 다 무너집니다. 비느하스처럼 목숨을 걸고 진리수호를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이런 소리 저런 소리하는 것은 양들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사람이 많은 교회가 영광스런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되 자기 안의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답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영광스런 교회는 하나님의 부름 받은 구원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머리시요, 형제애가 있고, 위로와 말씀과 축복이 있으며, 나눔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진리와 성령 안에서 한 몸이요, 평화로워야 하며, 진리를 수호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스러운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함께 수고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