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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9-21
너는 나를 따르라 / 이성희 목사
요한복음 21:18~23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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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습니다. 그 후 1948년에 퇴역한 다음 콜롬비아대학교의 학장을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학생들은 건물에서 건물로 옮겨 다닐 때에 잔디밭을 밟고 다닙니다. 학생들이 길이 아닌 곳으로 다닌 것입니다. 길을 만들어 놓았지만 길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란 팻말을 붙여놔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학교의 직원이 학장인 아이젠하워에게 와서 이 사실을 보고하였습니다.
그 때 아이젠하워는 아주 간단한 해결방안을 내 놓았습니다.
학생들이 다녀 누렇게 잔디가 죽고 자연적으로 길이 난 잔디밭에 진짜 길을 내고 학생들이 다니지 않는 길에는 꽃을 심고 길을 없이했습니다. 자연스런 다른 길을 내준 것입니다.
그랬더니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억지가 아닌 자연스런 다른 길을 만들어 주었을 때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길이 잘못된 것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아주 자연스럽게 베드로가 가야 할 다른 길을 제시하십니다. 이제 그 자연스런 길은 베드로가 죽어야 하는 길이지만 억지가 아닌 자연스런 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극진하게 따랐습니다. 갈릴리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배와 그물과 모든 것을 버
려두고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과감하게 물로 뛰어들어 걸어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다 버릴지라도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확신에 찬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실 때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 곁의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너희도 가겠으냐?”고 물으셨을 때에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대단히 확신에 찬 모습입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열심히 따랐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졸다가 깨어나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를 때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적극적이고 확실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실수로 끝날 위기에 놓였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다시 그를 만나시고 “사랑하느냐?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베드로를 향해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전에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의 가정이었습니다. 이제는 가정이 아
니라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한 치의 양보나 타협이 없이 따라야 합니다. 이제는 이 명령을 수행하는 것만이 남아 있습니다.
로버트 슐러목사님은 우리에게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No No People”입니다.
이런 사람은 뭐든지 안 된다고 하며 머리를 흔드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Yo Yo People”입니다.
이런 사람은 줏대가 없고, 흔들리고, 변덕스러운 사람입니다.
셋째는 “Blow Blow People”입니다.
이런 사람은 생각이 크고, 큰소리치지만 실제로 일해야 할 때에는 움츠러들고 뒤로 물러서는 사람입니다.
넷째는 “Go Go People”입니다.
이런 사람은 생각도 말도 크고 소신껏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가는 사람입니다.
따지고 보면 “No No”, “Yo Yo”, “Blow Blow” 다 부정적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 “Go Go People”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변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이전에 “Blow Blow People" 이었던 것 같습니다. 큰 소리는 쳤지만 막상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에 움츠러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Go Go People“로 만드시려고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이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오늘 이 본문의 저자인 요한은 베드로를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자신이 소개해서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가게 해주었습니다. 거기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따르라고 하니까 자기를 향해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물어볼 때에 기분이 영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다음에 성령강림을 체험하더니 엄청나게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자기와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단짝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너무 생생하게 예수님의 베드로에 대한 질문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따르라고 하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첫째, 자신의 불확실을 극복하라는 뜻입니다.
베드로의 예수님께 대한 의심은 끊임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도 다시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간 사람입니다.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맙니다.
성경은 베드로의 이름을 시몬, 베드로, 게바라고 합니다.
베드로와 게바는 같은 의미의 이름입니다.
시몬이란 이름은 인간적 모습을 강조할 때 썼습니다.
베드로란 이름은 변화된 모습을 이야기할 때에 썼습니다.
누가복음 5:3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날 때에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고 합니다.
아직 인간적인 모습를 벗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6:16의 가이샤라 빌립보의 신앙고백을 할 때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라고 하여 시몬과 베드로가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 모른다고 한 다음 다시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요한복음 21:15에는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세번이나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마 이 말만 들어도 베드로가 가슴이 아팠을 것입니다. 나약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끊임없이 보이는 베드로입니다. 큰 소리는 치지만 확실성 보다 불확실성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부활을 목격하였지만 아직도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요한을 가리키며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했을 때에 주님은 그 사람은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불확실한 것을 꺼리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처음 예수님을 따를 때에 과감하게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랐던 것처럼 다시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불확실한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라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1894년은 역사적 해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우리 교회가 창립된 해입니다.
그런데 이 해에는 또 획기적인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헨리 포드라는 자동차 왕이 ‘T모델’이라는 가솔린 엔진 자동차를 처음 만든 것입니다.
그는 미시간에서 태어나 17세에 기계를 배우고 싶어서 디트로이트의 어느 기계공장에 들어갔습니다.
그 공장은 토마스 에디슨의 공장이었습니다. 그는 에디슨에게 “가솔린이 기계를 돌릴 수 있는 힘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에디슨은 “그렇네”라고 한 마디로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 한 마디 말에 그는 가솔린 엔진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30년 만에 ‘T모델’을 만든 것입니다. 가솔린으로 기계를 돌린다는 것은 모두에게 불확실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포드에게는 확실한 일이었습니다.
확실한 자만이 몰두합니다. 확실한 자만이 따라갑니다. 확신만 있으면 목숨도 버릴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러 가라고 했을 때에 “입이 뻣뻣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하십니다. 확실성을 주십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가서 메시야를 만났으니 “와 보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할 것이 나오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나사렛에서 메시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은 그에게 불확실한 일이었지만 그 의심을 제쳐두고 와서 따르라는 것입니다.
도마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 손을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는 불확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본 다음에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입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많은 사람이 경배하지만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의심을 제쳐두고 대 명령을 주십니다. 불확실하지만 이런 자에게 따르라고 하십니다.
메릴랜드 대학의 정신의학자 아더 워윅은 “사람은 확실한 것, 안전한 것, 그리고 영적인 것을 갈망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어떤 이는 확실한 것은 두 가지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죽음과 세금입니다. 그런데 영혼의 창을 열고 보면 확실한 것은 많습니다.
미국의 흑인 지도자 부커 워싱턴은 노예 출신이었지만 후에 훌륭한 과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 백인의 집에서 하인 노릇한 적이 있었습니다. 주인집에서 청소를 했습니다. 아무리 해도 주인은 “다시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물어 보았습니다. “왜 창문을 닦지 않느냐?”고 하였습니다.
워싱턴은 자기 집에 창문이 없었기 때문에 창문을 닦아야 하는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 후에 그는 시를 썼습니다. “창문을 닦자, 미래도 현재도 밝혀주는 창문을 닦자”. 창문을 닦으면 확실해집니다. 불확실한 마음의 창을 닦아야 합니다. 의심과 불확실을 극복하면 확실한 현재와 미래가 있습니다.
둘째, 다른 사람을 상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남겨두어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당시에 요한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 돌고 있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요한의 장래는 내 관심 밖의 일입니다. 타인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자신에 대한 소홀입니다. 남의 얘기가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졸다가도 남의 얘기가 나오면 눈이 반짝 떠진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주님과 나만이 아는 길입니다.
타인이 내 길을 모르듯이 내가 남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사무엘상서 3장에는 사무엘이 여호와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그는 일어나 제사장 엘리에게 갔습니다. 엘리는 “부르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부르심에 사무엘은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엘리 집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이 말씀을 다 이루리라고 하십니다. 아침에 엘리는 사무엘상서 3:17의 말씀처럼 사무엘에게 말합니다. “가로되 네게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엘리에게 전합니다. 사무엘과 하나님 사이의 이야기를 엘리가 알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사무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는 사울이 다메섹에 가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사도행전 9:7에는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고 합니다. 사울과 예수님의 길입니다. 사울과 예수님만이 나누신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사람에겐 자기 몫이 있습니다.
자기 몫의 일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가지를 하더라도 확실하게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누구나 자기의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남의 일에 신경 쓰고 관심 가질 일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나만의 길입니다. 타인이 간섭할 수도 알 수도 없는 길입니다.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자기의 일을 태만히 하는 사람이 남의 일에 흥미를 가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따르는 자의 관심은 나의 길, 나의 소명, 나에게 대한 소리이어야 합니다. 남의 일, 남의 길, 남의 소명에 대해서는 조금은 둔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길을 내가 열어줄 수 없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의 길을 인정하고 자기의 길에 자긍심을 가지고 이 길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정하지 않은 길은 없습니다. 새나 물고기나 미물이 다 자기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지키시고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그 길을 방황케 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에서의 40년 동안 함께하셨고, 부족함이 없게 하셨고, 길을 인도하셨고, 함께 하셨고, 싸우셨습니다. 그 길을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나만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그 길에 함께 하십니다. 그 길을 갈 때에 부족함이 없게 풍족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예수님을 위해 일하는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아는 자가 아니라 따르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머리 속에 기억하는 자가 아니라 위해서 일하는 자를 기대하십니다. 따르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따르는 것은 모험입니다. 따르는 것은 신비입니다. 이 모든 이유가 일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아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일하는 자입니다.
마태복음 26:69에는 예수님이 심문을 받으실 때에 대제사장의 뜰에서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는 위협을 베드로가 받습니다. 베드로는 함께 있었다는 말만 들어도 겁에 질려 모른다고 했습니다. 함께 있는 것만 해도 모험이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데 일하는 자는 더 큰 위험이 따릅니다. 이제는 목숨도 버릴 생사의 각오로 따르라는 뜻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르기로 결심합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처음 만났을 때에 소를 버리고, 부모와 입 맞추고 엘리야를 따라갑니다. 이런 엘리사는 엘리야를 끝까지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당신을 떠나지 아니 하겠나이다”라는 그의 결심은 결국 스승의 겉옷을 받았고, 영감을 갑절이나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말을 듣고 따르는 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감동은 모든 사도들에게 전달되었고 사도들은 따르는 자가 되었습니다. 따르지 않으면 일하지 못합니다. 일하는 것은 죽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요한의 형제인 제자 야고보는 헤롯에 의해서 칼로 베임을 당하여 제자 중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마태는 이디오피아에서 칼로 베임을 당했습니다.
☛마가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길바닥에 끌려 다니다가 순교 당했습니다.
☛누가는 그리스에서 올리브 나무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안드레는 X자 십자가에 달려 숨이 끊어질 때까지 전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네로에 의하여 참수를 당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죽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일하는 자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교회에서는 물론 예수님을 위해 죽을 각오로 일해야 합니다. 죽을 각오로 일하면 삽니다. 그리고 각자가 하는 일에 성공할 것입니다.
결론
원래 나비는 몸무게와 날개의 비중이 맞지 않아 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비는 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힘껏 날개 짓을 하고 난다고 합니다. 이런 실화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남편이 대형 패밀리 카에 깔렸습니다. 그의 아내는 순간적으로 차를 들어올려 남편을 구하였습니다. 정말 불가사의입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부인이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순간적으로 잠재의식이 발동하여 필요한 힘을 제공받아 들어올렸다고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것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그것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따를 수 없어”, “이미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어”라고 자책만 한다면 베드로는 영영 예수님을 따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따를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따를 수 있었습니다. 따르기 위해서는 과거를 잊게 하십니다. 뒤에 것을 덮어두고 앞을 향해 따라야 합니다. 우리도 이것저것 다 따지면 따를 수 없습니다. 부족하고, 배반하고, 모자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따를 수 없다는 것을 모르면 따를 수 있습니다.
용납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이제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고 따르고 섬기기로 결단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